나는 아직도 그렇다 2 / 라에
사방은 조용했다 산중 토담집 따뜻한 방바닥에 등 대고 누워 흰 새가 된다
무겁게 눈거풀 내리자 어두운 활공은 힘 다해 내 귀를 걷는다
문풍지의 얕은 숨소리가 한밤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부터 토담 둘레를 지키고 섰다
가난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혹한의 바깥을 모두 열어놓았다
발자국을 가질 수 없는 겨울바람은 숲속 소리들 몰고 와 문풍지 가까이 볼을 대어본다
이제 곧 활공의 차가운 곤혹을 감수해야 한다는 듯 빠르게 문풍지를 두드리며 내쪽으로 보낸 기척
그래서 혼자 좀더 동화되었다
잠을 잃어버린 밤이라고 한다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한적은 없지만
젖동냥 물린 아기 울음같이 하도 훌쩍거려 벽쪽으로 등 돌리자 흰새의 겨울이 보인다
코끝에 매달린 한기만큼이나 서로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사이다
새가 숨쉴 수 있는 토담집 안에서 우리는
그러니까 나는 지금 돌 쌓고 있는 낙동강변 저 너머에 대해서 몇 개의 활공을 꺼내놓고
어릴 적 어느 문풍지로부터 새어 나오고 있는 시골 소문을 감당 하고 있다
겨울바람 불 때마다 새 떠난 소문 들리고 나는 눈물이 나 수시로 흰새가 되어 집을 나간다
이렇게 벽에 귀를 갖다댄 채 낙동강변 끼고 도는 그 겨울을 떠올리고
기진한 바람의 한기에 젖어가며 잠들기도 한다
돌려 보내야 해 시골로 돌려 보내야 해 문풍지 벌린 바람이듯 금방 여기를 지나갈 활공이야
새의 날개짓처럼 중얼거리면 이윽고 입 안 가득 겨울새가 찾아온다
문 안 흰새와 닮아 있다 한 입술이 토담집 뒤로 뻗어 있는 길 터주면 짧게 잠도 든다
잠을 표류하는 동안 서서히 동이 트고 문밖에는 그새 많은 눈이 내려 쌓인다
며칠 살기에는 좋은 토담방이다 추운 날 혼자 누운 자의 눈동자를 달래주는 강보이며
자주 흰새를 맞이하는 자의 겨울은 입 속에서 튀어나온다
포항시 용흥동에 있는 전몰학도충혼탑 공원에 한 학도병의 편지비와 편지
사연의 시작은 1950년 8월 북한군 제12사단이 포항 흥해읍을 점령하면서다.
적의 총탄에 낙엽처럼 쓰러지던 전투로 이제 포항과 영남을 사수하던 국군 제3사단 마저 위태롭게 된다
이를 알게 된 그 지역의 학생들 71명이 국군 제3사단 본부로 찾아와 자진 입대하였다.
그리고 포항여중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피복이나 개인 장비없이 오직 소총 한 자루와 실탄 250발씩 지급
하고 이들 중심으로 학도병 소대를 편성했다. 겨우 총 쏘는 방법만 익혀 전투에 투입된 학도병들이다.
그런데도 불고하고 수없이 밀려오는 인민군과 11시간 동안 총격전과 육박전으로 치열하게 싸우며 버텼다.
그리하여 끝내 인민군들이 포항시내로 진입하는 것을 저지하였다.
이는 학도병들의 필사적인 사투와 숭고한 희생으로 말미암아 민간인과 주요기관이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고
국군 제3사단은 무사히 보급품을 이송, 미군은 반격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학도병 71명중 47명이 전사했고 17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이들 가운데서 전사한 ‘이우근’ 학도병의 편지가 발견되었고 아직도 우리들 가슴에 아픈 상처로
기억되어지고 있다.
어느 학도병의 편지 /
1950년 8월 10일 목요일 쾌청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명은 될 것입니다
나는 4명의 특공대원들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푹발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나의 고막을 찢어버렸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귓속에는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머니, 적은 다리가 떨어져나가고 팔이 떨어져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니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빛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니,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손수 빨아 입었습니다. 물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님이 빨아주시던 백옥 같은 내복과 내가 빨아 입은 내복을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청결한 내복을 갈아입으며 왜 수의를 생각해냈는지 모릅니다.
죽은 사람에게 갈아입히는 수의 말입니다.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갈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니,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머님도 형제들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이 되는 군요.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님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거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켜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 이우근
이 편지는 1950년 8월 포항 전투에서 의롭게 전사한
국군 제3사단 소속 학도병 이우근(서울 동성중 16세)의 시신 주머니에서 나온 편지다.
이우근 학도병은 안타깝게도 이 편지를 품에 안은 채 참호 속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처음에는 수첩의 핏자국으로 인해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었다고 한다.
이 글은 어느 여군 정훈장교에 의해 기록되어졌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자원 입대한 어린 학도병들
빗발처럼 쏟아지는 포화속에서 얼마나 두렵고 불안했을까...또 얼마나 어머니가 보고싶고 그리웠을까
이우근 학도병은 이 글을 끝으로 꼭 살아서 돌아가겠다던 약속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한다 이분들의 거룩하고 숭고한 희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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