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조의 변화와 경계
우은진
1 시(詩) 작품과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경계선은 중국의 국경선만큼 변하기 쉽다고 비유한 야콥슨의 말처럼, 로만 야콥슨, 「제1장 시란 무엇인가?」, 로뜨만·무까르조프스키 외, 조주관 편역, 『시의 이해와 분석』, 열린책들, 1994, 15쪽. 시의 개념과 경계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다. 시대적인 제약을 받으며 변화해오고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 서정적인 것/서사적인 것/극적인 것으로 이야기되는 보편적‧이론적 장르와는 달리, 향가, 시조, 현대소설 등과 같이 시대적 산물인 역사적 장르가 생성‧발전‧소멸이라는 변화의 과정을 겪는 김준오, 『문학사와 장르』, 문학과지성사, 2000, 11-12쪽. 것과도 그 맥락이 닿아 있다. 즉 역사적으로 실재하는 장르의 경우, 그 장르 자체가 변화하는 사회적 요소와의 영향관계 속에서 생성과 변화과정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그 개념과 경계 또한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은 매우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시조 역시 보편적 장르로서의 서정시, 곧 서정적인 것의 성격을 가지고 발생한 역사적 장르 위의 책, 11-20쪽; E. 슈타이거, 오현일‧이유영 공역, 『시학의 근본개념』, 삼중당, 1978, 11-16쪽. 로서, 고시조에서 출발하여 현재 창작되고 있는 현대시조까지, 그 장르 특유의 체계와 형식 장치를 오랜 시간 이어오고 있다. 현대시조는 근대사회의 담론에 대응하여 시조 장르를 재의미화하는 동시에 그 내부에서 현대적 변용을 만들어냄으로써 확립될 수 있었다. 이는 현대시조의 창출인 동시에 시조 장르의 큰 변화였다. 이때 시조의 변화는 현대시조의 창출로서 완료된 것이 아니다. 변화는 현대시조에서도 내부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시대를 수용‧의식하며 시조의 현대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실험과 문학적 대응을 하는 움직임이 존재해오고 있으며, 시조문단의 확장 속에서 비교적 양적으로 많은 창작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있다. 그에 따라 현대시조 안에서는 시어, 율격, 분행, 주제 등의 범주에서 허용 또는 확장이 나타나거나 이야기되고 있다. 그와 함께 시조 작품과 아닌 것, 그리고 시조의 현재적 진단과 방향 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결들이 현대시조의 흐름을 만들어오고 있다. 그런데 이때 시 개념은 확정적이지 않지만, 시라면 그 기본적 요소로서 시적 기능 또는 시적 성질이라 하는 시성(詩性, poeticity)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야콥슨의 말을 함께 떠올릴 필요가 있다. 야콥슨에 의하면, 시성을 통해 언어는 사물의 표상, 현실의 지시, 감정의 분출 등을 넘어 그 언어 자체로서의 무게와 가치를 획득하게 된다고 한다. 로만 야콥슨, 앞의 글, 27쪽. 즉 언어 구조에 시성이 부여되었을 때, 그것은 언어와 언어의 단순한 조합, 일상적 용법을 뛰어넘어 새로운 의미의 겹과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는 하나의 시어, 문학적 언어, 더 나아가 시 텍스트, 문학 텍스트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한 시성에 대한 인식은 시 창작 차원에서 특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넓은 의미에서의 서정시, 서정적인 것의 한 갈래인 현대시조 창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시조 장르에 대한 기본적 이해를 바탕으로 했을 때, 형식 차원에서 그 율격의 변체도 유연하게 일부 허용될 수 있으며, 여러 형태의 분행도 자유롭게 시도될 수 있다. 시어나 주제 등 의미 차원에서는 완전히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형식과 내용 양면에서 고정적이지 않은 면모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현대시조를 무턱대고 써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경계가 조금씩 확장되거나 변화될 수 있다고 해도, 시조 작품과 아닌 것의 경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시조의 경우, 율격의 제약을 근본요소로 하여 생성된 정형시 장르이므로, 기본적인 형식장치는 장르가 소멸하지 않는 한 유지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시조 창작에서 자유는 형식적 차원보다는 내용적 차원에서 보다 더 넓게 발현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시조 형식에 맞추어 언어를 나열해놓았다고 해서 그것을 시조 작품, 또는 좋은 시조 작품이라 할 수 없는 측면이 있는데, 여기에서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시성이다. 시성이 있어야 현대시조는 시로서 기능할 수 있다. 이 시성이란 바슐라르가 말한 순간화된 미학과 연관하여 설명할 수도 있다. 그에 따르면, 시는 삶을 그대로 옮겨놓거나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삶과 세계, 여러 대상의 진실과 비밀, 이면, 비전 등을 순간적으로 담아내는 문학이라 한다. 가스통 바슐라르, 이가림 역, 『순간의 미학』, 영언문화사, 2002, 147쪽. 즉 언어가 순간적으로 일상적 용법을 넘어 그러한 동시성을 가진 세계를 만들어낼 때 한 편의 시는 만들어진다. 우리가 짧은 시 한 편 속에서 어떠한 복합적인 순간을 엿보며 미학적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현대시조 역시 서정시(서정적인 것) 장르로서, 그러한 시성, 순간화된 미학을 품고 있을 때, 좋은 시조 작품으로 읽힐 수 있다고 본다. 2 《서정과 현실》 2017년 하반기호에 발표된 현대시조 작품들을 읽으면서, 시성(詩性)에 대해 생각한다. 시가 만들어지는 순간을 포착하여 드러내고 있는 작품들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까닭이다. 절 몇 채 품었다고 삿된 마음 삭을까 하늘 아래 내 사랑 이 골 저 골 울려놓고 봉우리 봉우리마다 배가 고파 달이 뜬다 ―오승철, <팔공산> 전문―
오승철 시인의 <팔공산>은 시적 대상인 산의 이미지를 떠나 현대시조 창작의 순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시조로도 읽을 수 있다. 이때 초장의 “절 몇 채”가 규약을 의미한다면, “삿된 마음”은 서정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절 몇 채 품었다고 삿된 마음이” 삭지 않듯이, 장르적 제약으로서 형식장치를 두고 있다고 해도, 그래서 그에 따른 율격 양식에 말을 담는다고 해도, 그 발화를 있게 한 서정은 변질되거나 생기를 잃지 않는다. 그러한 서정이 언어로 전달되면 다른 이의 마음에 감응을 일으킬 수 있다. 즉 어떠한 기운과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렇기에 중장에서 시조의 발화 주체인 ‘나’는 자신의 “사랑”으로 세계의 “이 골 저 골”을 “울려놓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랑”은 자아와 세계, 자아와 대상의 합일 또는 융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서정적 발화 E. 슈타이거, 오현일·이유영 공역, 『시학의 근본개념』, 삼중당, 1978, 17-127쪽 참조. 에 대한 은유적 언어가 된다. 그리고 그 서정적 언어는 현실에서 각각 또는 멀게 존재하는 듯 보이는 것들을 순간적으로 겹쳐지게 한다. 그렇게 하여 일상적이지 않은 이미지 또는 정조를 빚어낸다. “봉우리마다/ 배가 고파 달이 뜬다”라고 하는 종장의 발화에는 그와 같은 정조 속에서 성립될 수 있는 시적 논리가 담겨 있다. 허기로 인해 떠오르는 달, 이는 일상에서는 형성될 수 없는 관계성이다. 그러나 그 허기가 완전히 채워질 수 없는 욕망으로서의 “사랑”과 융화되고, 달이 그러한 “사랑”을 포함한 서정의 대리보충으로서 텍스트를 상징할 때, 시적 세계에서 그 관계성은 성립 가능한 것이 된다. 현대시조의 형식장치 속에도 서정 또는 서정적 언어는 그 속성을 잃지 않은 채 담길 수 있다. 그리고 그 서정적인 언어는 장르 양식을 통해 발화‧향유됨으로써 다른 대상과 존재에게 감응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여기에는 세계, 대상, 상대 등과 완전히 융화‧합일되고자 하는 서정시 발화주체의 욕망이 들어 있다. 그러나 그 욕망은 우리의 현실에서는 완전히 채워질 수 없는 것이다. 이때 그로 인한 허기는 대리보충으로서의 작은 세계인 달, 곧 시 텍스트를 빚어내게 하는 추동력으로서 작동한다. 그렇게 하여 정형적인 율격에 서정적인 정조를 담아내고 있는 현대시조는 창작되고 있는 것이다.
아주 오래 전에 죽은 수억 광년 전의 별빛
아주 오래 전에 잊은 눈망울로 맺혔다가
우주에
매달려 있던
아주 오래 전의 침묵 ―박권숙, <이슬> 전문―
박권숙 시인의 <이슬>에서는 현실 부재의 대상이 텍스트 속에서 표상되는 순간을 읽을 수 있다. “수억 광년 전의 별빛”은 “아주 오래 전에 죽”었다. 그러나 그것은 “별빛”으로서 존재하던 시간의 종결을 말하는 것일 뿐, 그 빛 또는 기운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별빛”은 “눈망울”로 전화(轉化)한다. 바라봄, 시선이라는 측면에서 빛과 눈이 가지는 연관성에 의해서이다. 그런데 그 “눈망울”도 “아주 오래 잊은” 채로 있는 것, 즉 이미 누군가의 혹은 기억에서 사라진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리고 그 “눈망울”은 잊어졌으므로, 존재하고 있으나 마치 부재하는 것처럼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유사성을 획득하며, “침묵”으로 전화한다. 그 “침묵”은 사라지기 쉬우나 완전히 소멸하지는 않는 것으로서 “우주에/ 매달려 있”다. 마치 작은 ‘이슬’처럼. ‘이슬’은 물의 전화 과정 속에 있는 존재로서 전화한다는 차원에서도 ‘별빛-눈망울-침묵’과 유사성을 가진다. “별빛”과 “눈망울”은 발화되는 순간에는 “오래 전에 죽은/잊은” 존재로서 부재하고 있다. 그런 동시에 그 발화를 통해 다른 형태로 전화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렇게 하여 결국 있지만 없는 듯한, 소멸의 과정인 듯한, 그러나 오랫동안 “우주에 매달려 있”는 “침묵”으로서 텍스트 속에 남는다. 그런 동시에 눈에 띄지 않고 사라지기 쉬우나, 전화하는 생명력 또는 전화를 바탕으로 한 긴 생명력을 가진 ‘이슬’과 동일시된다. <이슬>을 통해 우리는 “오래”된 것들이 보이지 않게 남아 있는 시간과 세계를 이해한다. 소멸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극복하는 전화의 방식에 대해 깨닫는다. 짧은 발화 속에서 순간적으로 다른 대상과 시간을 동일한 것으로 겹쳐놓는 시선은, 그렇게 부재와 현존을 관통하여 표상하고 언어에 무게를 부여함으로써 시성을 가진 텍스트로서의 시조 단수를 만들어낸다. 이때, 이 시조를 거듭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속성을 유지한 채 전화하는 방식으로 현대적 변용을 보임으로써, 오랜 생명을 이어오고 있는 시조 장르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해보게 된다고 한다면 지나친 확대일까. 소리조차 느리게 눈을 뜨는 비양도 물의 숨소리 만져 기억을 채울 동안 소리는 몇 번씩 뒹굴며 제 몸을 핥는다 ―우은숙, <비양도> 부분―
우은숙 시인의 <비양도>는 비양도라는 섬의 속성 위에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시간을 겹쳐놓는 발화를 첫 수로 삼고 있는 시조이다. 제주도 서쪽에 위치한 작은 부속섬인 비양도는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화산활동 중 마지막 폭발에 의해 솟아난 섬이라 한다. 그래서 가장 마지막에 생긴 섬으로 알려져 있다. 매우 작은 섬이라 차도 다닐 수 없고, 하루 세 번뿐인 배편 때문에 타지인의 왕래도 적은 편이라 한다. 가장 늦게 생겨났다는 점에서 느리게 가물가물 눈을 뜨는 어린 섬의 이미지가 그려진다. 차가 없고 사람이 적은 작은 섬이라는 점에서는 느리게 흐르는 시간의 이미지가 느껴진다. “소리조차 느리게 눈을 뜨는” 섬이라는 이미지는 그러한 이미지들의 융화 위에서 생성된다. “물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한 비양도에서 섬의 “소리”는 천천히 눈을 뜬다. 스스로 생명력을 지니고 나타난다. 시조 속에서 비양도는 섬도, 섬을 둘러싼 물도, 섬의 소리도 제 각각 생명을 가질 수 있는 곳으로 이미지화되어 있다. 그곳에서 태어난 “소리”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물의 숨소리”를 피부로 느끼며 스스로 “기억을 채”워간다. 이때 이 기억은 비양도의 기억이기도 하다. 섬과 “소리”는 각각의 생명이지만, 섬은 “소리”의 발생지이며 “소리”는 섬을 떠날 수 없다. 그렇기에 섬과 “소리”의 기억은 “소리”가 섬 위를 “몇 번씩 뒹굴며/ 제 몸을 핥”는 방식으로 융화된다. 그리고 섬의 기억을 자기 안에 채운 “소리”는 섬의 이야기가 된다. 비양도의 이야기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덧붙여 이러한 맥락에서 보았을 때, 이 시조의 셋째 수에서 서술되고 있는 “섬 속의 섬을 지키는 아낙”의 이야기는 비양도 부아석(애기 업은 돌) 설화를 회감(懷感)하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3 시조의 기본적 율격과 문학성, 작품성이라는 바탕 위에서 현대시조는 자유, 변화, 확장 등을 시도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러한 시도는 시각, 인식, 주제의 차원에서 많이 이루어진다. 《서정과 현실》 2017년 하반기호에서는 현대인의 일상성, 지금-여기 현실의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시조를 만나볼 수 있다.
조문을 끝내고 나니 내 구두가 사라졌다 닮은 듯 닮지 않은 수많은 신발들 억지로 신어보지만 맞지 않는 것들뿐
숨 막힐 듯 꽉 끼어도 맞춰 살던 지난날들 어쩌면 구두가 나를 버린 것은 아닐까 아릿한 첫날 추억에 발꿈치가 또 까진다 ―권갑하, <내 구두> 부분―
권갑하 시인의 <내 구두>는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서술로 첫째 수 초장을 열고 있다. 여러 사람이 오가는 장소에서 신발 또는 우산을 잃어버린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이 시조의 발화주체도 장례식장에서 자신의 “구두”를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곳에는 “닮은 듯 닮지 않은 수많은 신발들”이 놓여 있다. 이 “신발들”은 얼핏 보면 비슷비슷한 삶으로 착각하기 쉬운, 그러나 사람마다의 다른 삶들에 대한 은유이다. 이러한 은유는 삶의 이력(履歷)이란 말을 그대로 풀어보면 신발을 끌어온 내력이 되는 것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또한 둘째 수 초장의 “숨 막힐 듯 꽉 끼어도 맞춰 살던 지난날들”이라는 발화가 ‘신발(구두)=삶’이라는 그 은유를 뒷받침해주고 있기도 하다. 발화주체는 닮은 듯도 한 그 “신발”들을 “억지로 신어보지만 맞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확인한다. 자기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 구두”는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이때 “구두”를 상실한 자리에서 발화주체는 자신의 “구두” 역시 자기에게 꼭 맞는 삶의 형태는 아니었다는 점을 자각한다. 그렇기에 “구두”가 자신을 “버린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즉 지금까지의 삶에서 자신이 주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그리고 당연하게 신고 다닌 “내 구두”, 그 자기 일상의 주체로서 존재하고 있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에게는 비로소 “내 마음이 보”이게 된다. 일상의 상실과 균열을 통해 ‘나’를 찾은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걸어가는 길에는 마치 새 구두를 신을 때처럼 “발꿈치가 또 까”지는 “아릿한” 통증이 수반된다. 이전과는 변별되는 새로운 삶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읽은 뒤 첫째 수 초장으로 되돌아가 보면, 저 “조문”은 어쩌면 어떠한 틀에 꽉 끼듯 맞춰진 ‘나’의 일상, 그 일상성을 떠나보내는 의식에 대한 은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게 된다. 잃어버린 지난 삼 년 되찾을 길 없는 봄날
통곡도 쏟지 못한 채 마지막 숨 몰아쉬던
그날 그 아비규환을 뼈로 울고 있었구나 ―이정환, <뼈로 울고 있었구나> 부분― 이정환 시인의 <뼈로 울고 있었구나>의 첫째 수는 “한데 모여” 서럽게 “밤낮을” “울고 있”는 “뼈들”에 대한 서술로 채워져 있다. 여기에서는 그 “뼈들”이 무엇을,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전혀 알 수 없다. 그 “뼈들”의 상실감과 서러움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둘째 수로 가면, 그 “뼈들”이 가리키는 대상이 매우 명확하게 드러난다. “잃어버린 지난 삼 년/ 되찾을 길 없는 봄날”이라는 발화를 통해서이다. 발표 시기인 2017년에서 삼 년 전이라면 2014년이다. 그해 봄, 많은 목숨들이 “아비규환” 속에서 “통곡도 쏟지 못한 채” 생명의 “살과 피”를 잃게 된 사건이 있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이다. “살과 피”는 사라지고 “뼈”만 남았지만, “뼈”의 형태로 남아 있는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고통의 울음을 울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잊히지 않는 고통이라는 점에서, 그런 반면 누군가에게는 이미 망각되고 있는 기억이라는 점에서, 그 아픔은 개인적‧사회적으로 우리 현실에서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조는 그렇게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사회적 사건을 “울고 있”는 “뼈들”이라는 형태로 빚어낸 간명한 이미지 뒤에 숨겨서 알레고리의 전략으로 드러내고 것이다. 이외에 텍스트의 이야기 속 인물인 ‘버스기사 M씨’의 발화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이승은 시인의 <초록 귀―버스기사 M씨>도 인상에 남는 시조이다. 첫째 수부터 여섯째 수까지 표기상 초‧중‧종장 구별 없이 줄줄 이어지고 있는 ‘버스기사 M씨’의 이야기는 우리 이웃의 삶과 발화를 하나의 시적 목소리로 시조 텍스트 안에 담아보고자 한 시도로 보인다. 이는 이야기 내 인물의 목소리를 활용하여 복수의 발화주체를 세우기도 하는 서술시(narrative poem) 서술시란 시 텍스트 안에 이야기를 담고 있는 시를 가리킨다. 서정 장르인 시(서정시)가 이야기를 서술한다는 측면에서 서술적 서정시의 의미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때 서정 갈래로서의 서술시는 우리 문학사에서 낯선 장르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시가의 한 전통이기도 하다. 우리 문학사를 살펴보면 「처용가」, 「헌화가」, 「서동요」 등의 향가작품이나 「쌍화점」, 「만전춘」, 「정읍사」 등의 고려속요, 여러 사설시조 등 이야기적 요소를 가진 서정시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현대시사에서도 백석 시인이나 서정주 시인, 조오현 시인 등의 시에서 이야기적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고현철, 비평의 줏대와 잣대, 새미, 2001, 53쪽; 김준오, 현대시와 장르비평, 문학과지성사, 2009, 138-144쪽, 150쪽, 170쪽 적 특성을 평시조에 차용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때 일곱째 수에 가서야 목소리를 드러내는 시조의 시적 자아로서의 발화주체는 인물의 말을 수신하고 그대로 전달하는 역할만 한다.(실제로 그의 발화는 인물의 말을 잘 듣고 있다는 내용만 담고 있다.) 즉 복수적 발화의 수평, 대등, 공존을 시조 텍스트 속에 빚어내려 하고 있다. 한편 그러한 확장을 시도하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율격과 종장 첫 구의 제약은 잘 지켜지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현대시조의 변화와 경계에 대한 거친 글을 여기에서 일단락 지어본다.
<약력> 2005 《경남문학》 시조 등단 2008 《화중련》 신인작품상 2013 《서정과 현실》 평론 등단 2017 제 21회 경남시조문학상 현 부산대학교, 창원대학교 시간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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