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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중용 제34강 자성명 自誠明
이제 20장 말미를 남겨 좋고 잇습니다.
21장부터는 중용의 가장 중요한 성론이 어떻게 전개되는가 그거를 여러분들께서 보시겠습니다.
* 博學之 ,審問之,愼思之,明辯之,篤行之.
有弗學,學之弗能弗措也; 有不問,問之弗知弗措也;
有弗思,思之弗得弗措也; 有弗辨,辨之弗明弗措也;
有弗行,行之弗篤弗措也.
人一能之, 己百之; 十人能之,己千之.
果能此道矣,雖遇必明,雖柔必强.
제20장은 노나라의 그 어린 군주가 주유천하를하고 노나라로 돌아오신 대석학이고 국부이신 공자님에게 정치를 묻는 것으로서 대화가 쭉 이어져 갔죠.그래서 그 정치를 묻는 가운데 중용의 핵심적인 이야기가 전부 나왓습니다.그래서 마지막 부분에 그 유명한 誠者, 天之道也; 誠之者,人之道也 라는 핵심적인 성론의 최초의 단서가 나왓죠.
* 誠者, 天之道也; 誠之者,人之道也.
성 그자체는 하느님의 도이고, 성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도입니다.
그러면서 나오시는 말씀이 애공을 놓고 충고를 하는거죠.
* 誠之者, 擇善而固執之者也. 성해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길은,선을 택하여 굳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 博學之 ,審問之,愼思之,明辯之,篤行之.
제발 널리 배우십시오. 이렇게 훈계를 하는거야.근데 그 훈계가 다섯가지로 되어 있어요.
널리 배우십시오, 아주 제세히 물으십시오, 아주 신중히 생각하십시오.명료하게 사리를 분별하십시오.아주 독실하게 실천하십시오.
이 다섯가지가 마지막 성지를 말씀하시고 이 성지를 실천하는 인간이 해야할 다섯가지 말씀은 하신거야. 근데 이걸 보면 우리 삶에 일상 언어가 나오고 있어요. 그게 뭐냐면 여기서 학문이라는 말이 나왔죠.그 다음에 사변이라는 말이 나온 거예요.그러니가 우리가 현대말에서 쓰고 있는 중요한 말들이 공자님게서 애공한테 간곡히 타이르신 말이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학문을 한다 그러면 글자를 배우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묻는다는 거예요. 사실은 딴데서는 문학으로 나오거든요.항상 우리가 배운다는 것은 묻는 거예요.물음으로써만 배울수 있는 겁니다.
* 학문 學問; 박학심문 博學審問의 준말
사변 思辨; 신사명변 愼思明辨의 준말
* 학문의 출발은 물음이다. 물음이 없는 인간은 배울 수 없다.
학문이라고 하는 것은 물음이라는 거예요.물음이 없는 사람은 학문을 못하는거야. 배우면 좁게 배우면 안된다는 거죠. 젊은이들이 한종교에 빠지면 안된다는 것이 뭐냐면 종교를 이해 할려면 인간의 종교현상 전체를 이해해야지 그리고 거기서 어떤 신념을 자기가 택한다면 모르되 어던 종교 교리 하나만을 공부한다 이거는 젊은이들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 그말이야.그러니까 배운다고 하는 것은 널리 배워야돼.
최소한 나 김용옥은 여러분들에게 이 한마디는 자신있게 얘기 할수 있을 것 같애.나는 이 세계에서 어느 누구 보다도 널리 공부한 사람이예요.서양사람들은 봐.공부를 많이 한사람은 많지만 우리가 근세를 통해서 서양에게 짓눌려 왔기 때문에 우리는 서양을 죽어라고 배웠다고.1세기동안 오로지 서양만을 배워야겠다 이런 일념에서 살았어.근데 서양사람들이 우리 모든 것 버리고 동양을 배우자 이런적 있냐?
그렇게 1세기 동안 우리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오로지 동양을 배우자 이런적이 있냐 일말이야.그런데 우리는 1세기를 우리를 다 버리고 그저 서양적인 가치가 최상이라 생각해서 그걸 위해서 열심히 달려왔어.그 덕분에 나는 서양사람들보다 서양사람을 더 잘알 수 있는 환경이 나에게 있어.모든게 서양이엇으니까.
영어를 배웠지 희랍어를 배웠지 모든 서양의 고전부터 여태까지 독일어 불어 하옇튼 서양에 관한 모든 거, 음식도 서양음식 먹을려고 애썻지 종교도 서양종교 배울라고 애썻지. 예술도 겸재는 몰라도 피카소는 알아야돼 여러분들이.그렇게 살았어. 그러기 때문에 재미난건 내가 서양가서 재미난 사실이 어떻한 경우도 서양의 박학한 사람이 나하고 게임이 안돼. 왜 그 사람들은 도저히 내가 서양을 공부한 만큼 그들이 동양을 배운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그러니가 그들과 나의 지식의 차이에서 게임이 안돼.
왜 그들은 나만큼 동양을 모르거든.어떻게 한문 고전을 나만큼 알아요.몰라요. 그런데 나는 희람어 고전부터 싸그리 다 알거든.서양책 내가 거의 안본게 없거든.서양철학사 중요한 고전들 다봤단 말이야.그런데 당신들은 동양고전 다봤냐. 아무도 내 앞에서 입뻥긋 할수 잇는 사람이 없지는 않으나 한 두명 있을까 말까하는 정도는 있겠지. 그러나 게임이 안돼. 그러니깐 우리 민족이야말로 지금 박학이라고 한다면 진짜 이건 대단한 찬스다 이거야.세계문명에 여려분들은 박학할수 있는 좋은 호기에 있는거야.
* 동아시아의 학인들은 동,서문명의 회통이라는 측면에서 서양인들이 따라 올수 었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다. 이제는 동아사아의 지적 탐구가 세계문명을 선도해야만 하는 시점에 이른 것이다.
그런대 단지 여러분들이 노력을 안하고 있을 뿐이야. 그러니까 평생을 죽어라고 공부해야돼.박학하고 심문, 자세히 정확하게 물어라 이거야.우리나라 사람들은 묻지를 않아.정치인들도 자기 주장만을 펼라고 그러지 타인에게 물을려는 자세가 없어.여기 오산에 내려온 정조는 그저 부로들을 모아 놓고도 물었다드라. 계속.
우리 아버지 사도세자가 여기와서 어떻게 뭘 너희들한테 해줬느냐 그래서 묻고 묻고 그러면서 자기 아버지 생각하면서 그대로 다 베풀었다는 거야. 그래서 정도가 화성 행차를 한것도 화성행차도 거저 행차를 한게 아니야. 백성들을 직접 만나고 싶은 거야. 길거리에서 종을 치면 서야 되거든. 그렇게 해서 직접 백성들하고 대화하고 묻고 그런게 3355회가 넘어.그렇게 직접 묻고 하는 정치를 하고 싶어서 정조는 몸부림 친거야.
* 정조는 아버지 장헌세자의 묘역을 화산 기슭으로 이장한 이후 13회에 걸쳐 수원부에 행차하였다. 정조는 1790년 2월10일 한신대학교가 위치한 독산성에 올라 부로 父老들에게 묻는다. 행차시에도 3355번의 격쟁상언 擊錚上言에 기꺼이 응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너무 묻지를 않는다 이거야. 묻자 이거야.심문.
그러니가 학문이라는 말은 박학심문의 줄임말 이라는걸 여러분들이 알아야 한다 이말이야. 우리가 나는 학문을 한다 그러는데 거저 학문하는게 아니라 전부 중용에서 나온 말이예요.
그 다음에는 신중히 사고해야죠. 항상 우리가 사색하는 인간이 돼야된단 말이죠.
그래서 신중히 사색하고 모든 것을 사색한다는 것은 사리를 분변한다는거 아냐. 사리를 정확하게 분류해서 이봐 니들 방에 쓰레기들처럼 방에 쫙 널려 있어봐. 그런데 우리가 책장을 왜 맨드냐. 책장을 세워가지고 넣으면 굉장히 많이 들어가. 책장에 있는걸 땅에 쏫아봐. 방바닥에 쏱아 놓으면 어쩔줄을 몰라 그러나 책장에 딱딱 구분해서 넣어봐.책이 얼마 안돼.잘 넣어 놓으면 . 그러니깐 책장에다 착착 구분해서 정리해 놓으면 항상 빼볼수 있잖아.그와 같이 우리도 머릿속에다 지식을 착착 분변해서 분류해서 머리에 쌓아야돼. 이거 어지럽게 쌓은 사람들은 얘기하다 보면 그냥 헛소리 하는거야.
* 사변 思辨 thinking 이라는 것은 지식의 분류된 축적 the accumulation of classified knowledge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래서 항상 신사명변하라. 그러니깐 이거는 박학에서부터 명변까지는 이 네가지는 知의 문제예요. 그러니까 마지막에는 행을 말했죠. 사실은 이 독행의 위 네가지와 구분 되는거죠.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지의 세계를 학문사변으로 말씀하시고 그리고 이 학문사변에서 얻어진 것을 인간은 반드시 돈독히 실천해야만 한다는 거죠.하고 애공한테 말씀하신 거죠.
* 사람은 모름지기 학문과 사변에서 얻은 것을 독행 篤行해야만 한다. 知는 行에서 완성되고 行은 知에서 그 근거를 발견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씀이
* 有弗學,學之弗能弗措也; 有不問,問之弗知弗措也;
아예 배우지 않는 일은 있을수 있어도 배움에 접하지 못한 상황은 있을수 잇으나 일단 배움을 시작 했으면 그것에 능하기 전에는 그 배움을 중도에 포기하지 놓지 마십시오.
묻지 아니하는 일이 잇을수는 있으나 그거를 알지 못하고서 도중에 놓는 일이라는건 있을수가 없는 것입니다.
*有弗思,思之弗得弗措也; 有弗辨,辨之弗明弗措也;
생각하지 않을수는 잇으나 일단 생각하면 결말을 얻지 못하면 도중에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분변하지 않음이 잇을수는 있을 지언정 일단 분변하면 분명하지 않으면 도중에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 有弗行,行之弗篤弗措也.
행하지 않음이 있을 지언정 행한진대 독실하지 못하면 도중에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고 근원적인 문제를 우리가 뭐든지 여러분들이 내 강의를 안들을 수는 있으나 내 강의를 일단 신청 해놓고 도웆에 포기를 한다. 이거는 인간으로서는 정말 공자는 이거는 인간 말자의 행위라고 본거예요.
박학 심문 신사 명변 독행에 뜻을 세워서 그러니깐 이걸 입지라고 하는거 야냐. 일단 뜻을 세워서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중도에 포기한다 이것은 잇을수가 없는 일이라는 얘기야.
* 人一能之, 己百之; 十人能之,己千之.
그러면서 하시는 말슴이 이 말씀 한마디가 내가 이 중용 전체에서 어렷을때 너무도 너무도 감명을 받은거야.
타인들이 한번에 능하다고 하면은 백번을 하십시오.타인이 열 번에 그것이 능하다고 하면은 그대 자신은 천번을 행하십시오. 얼마나 절절한 말씀입니까.중용이라는 고전에서 인간을 독려하는 그러한 메시지가 나는 여기서 타인이 한번에 능하다고 하면 나는 백번을 하리라. 저사람이 그것을 열 번에 능하다고 하면은 나는 그것을 천번을 하리라. 나는 평생 이 중용의 말씀이 내 인생의 무한한 격려가 됐어요. 공자님은 이렇게 노력하신 분이구나.
* 果能此道矣,雖遇必明,雖柔必强.
이렇게 호학력행의 도에 능하게 되면 어리석은 자라도 반드시 밝게 된다. 우리가 어리석다는 것을 어둡다고 표현하거든요.그래서 이 몽 蒙이라고 하는것도 항상 어둡다는 의미거든요.그래서 우리가 曚昧라고 그러잖아. 어둡다.
그래서 계몽이라는 건 뭐죠? 계몽이라는건 어둠을 연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머리가 어두운 것을 밝게 만든다는게 계몽이예요.그러니깐 어리석다 할지라도 반드시 밝게 되고 수유필강이라 유약한 자라도 반드시 강하게 될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明强하게 되는 것은 오로지 노력이다 그거죠.
* 계몽 啓蒙; 어두운 머리를 밝게 만든다. enlightenment
그래서 순자가 한 유명한 말이 천리마는 없다 그랫잖아요.
* 騏驥(기기)一躍,不能十步; 駑馬十駕,功在不舍
천리마의 일보가 조랑말의 십보를 커버할 수는 없다, 천리마가 하루에 천리를 간다 해도 조랑말이라도 열흘이면 간다. 공은 오직 쉬지 않음에 있을 뿐이다.( 순자 권학편)
21장에 이런 말씀이 나오고 있죠.
庸-2100 自誠明謂之性 自明誠謂之敎 誠則明矣 明則誠矣
21. 자성명을 위지성이오 자명성을 위지교니 성즉명의요 명즉성의니라
21. 정성됨으로 말미암아 밝아지는 것을 성이라 말하고, 밝음으로써 말미암아 성해짐 을 교라 한다. 정성되면 곧 밝아지고 밝으면 곧 정성되어 진다.
성으로부터 밝아지면 여기서 성은 성자 즉 성 그자체라고.그러기 때문에 성 그자체로부터 밝아져 온다라는 것은
이 명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civilization을 뭐라 그러죠? 문명이라고 그러죠. 왜 文明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몸매한 상태로부터 밝은 상태라는 거야. 자 봐. 우리가 어떤 동네를 꾸리고 산다고 봐. 초가집도 있고 동네를 꾸리고 산다고 봐.
그런데 이 동네를 꾸리고 살면 안전한게 뭐야. 환히 알잖아.여기는 밝다고.그러면 이 동네 밖에는 밀림이 있고 우거져 있다고 봐.그럼 이 산속은 컴컴하죠.컴컴하고 호랭이도 살고 뱀도 있고 그러니깐 여기 가면 모든게 불확실해져. 그런데 여기다 집을 개척하고 마을을 꾸미면 이 마을은 우리에게 밝은 것으로 나타나.
이 동네밖은 밀림이고 그래서 여기는 예측가능하질 않아 프래딕터블하질 않아.그래서 우리가 동네를 만들고 사는 것은 여기서 사는 삶이라는 것은 예측 가능하잖아.그래서 이 동네는 밝다고 하는거야 우리가.그렇게 인간들이 만든 사회를 문명이라고 그래.왜 이런 사회를 만드는 조건이 뭐냐면 반드시 말을 하는 동물이 되면서 생겨난 현상이야 이게.우리가 언어를 말하기 전에는 이런 세계를 안 만들었어.우리만의 인간만의 세계가 없었다고. 항상 동물이랑 이런 어둠 속에서 살았지.
그런데 인간들은 언어를 만들고 문자를 만들고 글자를 만들면서 밝은 세계를 만들었다 이말이야. 이게 문명이라고. 알겠냐? 그리고 이밖의 세계가 카오스야. 그래서 밀림을 카오스라고 그러고 동네를 코스모스라고 그러는거야.하나의 질서가 있는 세계잖아 여기는. 카오스는 질서가 없어.
* 코스모스 cosmos ; 카오스 chaos
질서 order ; 무질서 disorder
문명 civilization ; 자연 nature
그런데 자사선생은 이 카오스라는 거를 지금 나쁘게 보질 않는다는 거야.이것도 알고보면 대자연의 성의 세계 아냐.그러니까 서양사람들하고 아주 달라.
* 자사는 자연의 카오스를 어둠으로 파악하지 않고 誠으로 파악한다.
이 사유방식이.그래서 이 성한 세계로부터 항상 밝음을 지향해서 나아가는 것을 우리 삶에 잇어서 자사가 천명지위성이라고 할 때 제1장의 주제가 다시 나오고 있는거야.제1장에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 그랬잖아. 그래서 20장의 피크가 공자 말씀으로 애공문정에 나오고 21장에 와서 자사의 본론이 나오는 거야. 그러니까 21장은 어떤 의미에서 제1장의 샤로운 출현이라고 볼수 있어요. 그러니깐 1장과 21장은 같은 사람에 의해서 같은 의도로서 지어진 문장이라는걸 우리가 알수 있어요.
그러니깐 여기서 자성명위지성 이라는게 한마다로 말하면 천명지위성의 다른 표현으로 본단 말이야.그런데 요번에는 성론을 가지고 나왔다는 거야.그러기 때문에 우주의 성 그자체로부터 밝음의 세계로 지향하는 것, 그냥 말하면 성으로부터 밝아진다 이렇게 말할수 있지만 성 그자체의 세계로부터 밝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다. 우리가 말하는 소위 본성이라 하는 것은 서양사람들이 말하듯이 여기 성악, 성선 이런 규정성이 없다고 그랬잖아요.우리의 본성이라는게 선하냐 악하냐 이런게 없다는 거야.
* 제1장 제21장
천명지위성 天命之謂性 자성명위지성 自誠明謂之性
修道之謂敎 수도지위교 자명성위지교 自明誠謂之敎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맨날 청소를 해.내 방이고 내가 사는 집은 내가 다 청소를 해. 쓸어 담으면 거기 먼지가 많거든. 얼마나 방에 지저분하고 더럽냐.그런데 쓰레받기에 담은걸 밖에 나가서 마당에다 버리면 아무것도 아냐.내 방에 있을때는 그게 악이지만 마당에다 놓으면 그냥 선한거야.동시에 거꾸로 명한세계로부터 명이라는건 문명세계로 들어와 있는 인간의 모습이지. 이 明한 인간의 이 문명의 세계로부터 誠한데로 끊임없이 나아간다 이거야 또.이것은 뭐야. 아주 자연 나의 본원적인 성자 그 나를 구성하는 나를 하나의 우주적 존재라고 한다면 나라는 존재가 이미 천지인 삼재사상을 본다면 전 우주의 가능성을 집약하고 있는 존재라고 한다면 내 속에 있는 성으로써 나는 끊임없이 이 문명의 밝음으로부터 그리로 나아간단 말이에요.
* 性은 善과 惡의 규정성을 거부한다. 성실한 자연에서 문명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지배하는 우리 존재의 느낌의 바탕이 性일 뿐이다.
성 性
* 성 誠 -----------------> 명 明
교 敎
성 誠<----------------- 명 明
그것이 뭐냐면은 교다 그거야. 너희들이 교육을 받는다. 수도지위교라고 하는 중간에 솔성지위도라고 하는 것은 바졌어 지금 일장에서. 그러나 성, 도, 교에 있어서 성과교가 여기 다시 나온거야.
그런데 이 誠이라는 것은 誠으로부터 밝음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이것은 성으로부터 밝음으로 되돌아 간다 그거야.
그러니가는 어디까지나 인간 존재라는 것은 문명을 극대화시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문명을 건설하는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문명의 논리에 의해서만 인간을 밀어 부치면 안된다는거야.오히려 꺼꾸로 우리 문명에 사는 인간들은 항상 誠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그러한 것이 잇어야만 도덕적일수 있다는 거야. 그것이 교다 이거야.
* 인간에게 있어서 성 誠 nature의 과정과 교 敎 education의 과정은 동시적이다. 교육은 문명의 극대화가 아니라 자연의 성 誠의 회복이다.
너희들을 도덕적으로 가르키는 것은 뭐냐면 너희들이 맨날 인터넷만 두드리고 나는 스티브잡스도 좋아하지 않는게
그 사람이 만들어 놓은 세계라는게 굉장히 새로운 에포크(신기원)를 만들었어.그러나 그 스티브잡스가 만든 세계라는 것이 결코 인간 그자체를 위대하게 만드는 세계는 아니예요.우리가 위대하게 봐야할 것은 그러한 여러분들이 모니터에 나타나는 세계가 아니라 저 나무야.저 푸른 숲이고. 거기에서 돌아가고 있는 이 대자연의 이치에 항상 여러분들이 되돌아 가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도덕성을 회복할 길이 없다는 거야.
誠으로부터 明으로 구현되어 나가는 것을 性이라 일컸고 明으로부터 誠으로 구현되어 나아가는 것을 敎라고 일컷는다. 그래서 성하면 명해지고 명하면 성해진다. 그러니깐 이 성에 세계에서 밝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동시에 인간은 우리가 저 자연의 세계에서 문명을 건설하면서 우리는 이러한 문명의 코스모스속에서 우리의 삶의 세계를 만들어 간단 말이지.그런데 여기서 거꾸로 뭐냐면 동시에 그 명에서무터 성으로 끊임없이 되돌아간다는 거야.
그니깐 인간 존재라는 것은 성에서 명으로 가고 명에서 성으로 가는 이것이 항상 동시적으로 인간 존재의 과정에서 항상 동시적으로 있다 그거야.그래서 성과 교는 항상 동시적인 거야.항상 우리의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배움을 통해서 가르침을 통해서 그 제자리를 찿는거야.
그러기 때매 서양은 이렇게 성에서 명으로 명에서 성으로 가는 이 동시적인 프로세스가 없이 항상 앞으로만 갔다 그말이죠. 역사는 진보한다.인간은 문명을 만들어서 뭘 만들어야 된다. 이 문명이 아무리 진보해봐야 인간은 구원받지 않아. 의학이 진보된다고 병이 없어지는게 아냐.의학이 인간의 병을 구제할려면 치료의학이 아니라 예방의학이 돼야 되고 예방의학이라는 것은 항상 자연으로 돌아가는 삶이 있어야만 질병이 없어져.문명속에서 계속 의학만 발전시켜봐.병자만 더 만들어지는거야.환자만 더 만들어지고 병원의 사업만 더 번창하는 거고.그렇게 하면은 이 문명은 망가진다는거야. 이 자사선생의 말씀은.
* 서양의 근대적 인간을 특징 지우는 것은 진보의 가치이다. 그러나 동방에서는 인간도 역사도 결코 진보하지 않는다. 오직 그 誠의 본원을 문명에 구현시킴으로써 誠으로 되돌아갈 뿐이다.
그러니깐 성에서 명으로 가고 명에서 성으로 가는 이것이 동시적으로 왜. 성하면 명하고 명하면 곧 성해지기 때문에(誠則明矣, 明則誠矣). 이거는 굉장히 심오한 철학이예요.내가 이거를 깨달으면서 나는 서양철학을 극복했다고 내가 말햇어요.그리고 서양의 모든 진보사관은 이거 허구다.인류의 역사는 진보하지 않는다.그러면서 내가 대학교 3학년때 유명한 논문을 썻어.
* 동양적이란 의미(1971); 이 논문은 현재 동양학 어떻게 할것인가에 수록되어 있다.
요한복음의 사상으로 말하면은 이 코스모스라는 것은 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밝음이었죠? 밝음이었는데 이거를 어둠이라고 그런단 말이야.그래서 스코티아 라고 그러잖아.스코티아라는게 어둠이란 뜻이거든. 그러니까는 여기에 대해서 요한복음은 뭘 제시해요? 코스모스 이 세계에 대해서 뭐를 제시해.로고스를 제시하죠.그래서 이 로고스의 세계가 이게 말씀이고 이게 예수님이고 이것이 비로소 밝음이죠. 포스라고 그러잖아.
* 요한복음의 구조
코스모스 kosmos - 어둠 skotia
말씀 logos - 빛 phos
* 중용의 구조
코스모스 kosmos - 밝음 明
카오스chaos, 자연nature - 성 誠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죄악에 빠져있는 어둠의 자식들이고 이 어둠의 자식들이 구원을 받을려면 로고스의 이 말씀에 의해서 구원을 받아 빛의 세계로 나가야만 니들은 구원받을수 있다.
그런데 자사는 뭐라고 말하냐면 이 코스모스자체가 하나의 밝음이고 이 코스모스 이전에 이런 말씀이라든가 이런게 따로 있어서 인간이 구원되는게 아니라 이 밝음 이전에 인간의 誠이라고 하는 우주의 본래적인 모습은 이 誠이다 그거야.그러기 때문에 이 성에서부터 명으로 가고 명에서부터 성으로 가는 그니깐 여기서는 로고스의 세계는 하나의 픽션으로서 이건 없는 거죠.자사의 세계에서는.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달라요. 서양하고는. 그러기 때문에 인간을 바라볼 때 반드시 구원론을 전제로 해서 바라보는 거죠.말씀을 통해서 너희들이 구원을 얻어야 된다는 거고 이 자사의 사상은 뭐야 인간 너 자신을 봐라 너 자신의 근원에는 성이 있다.너의 그 성실한 성의 근원을 항상 회복해라.그것이야말로 너의 밝음의 근원이다.
* 나의 존재의 근원인 誠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나의 神性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爲聖의 구원론이다.
그렇게 하시면서 항상 인간을 자연의 성의 어떤 본래적인 모습으로 돌릴려는 거거든요.
칸트같은 사람은 이 세계를 하나의 오성이 파악하는 이 세계를 하나의 인과가 지배하는 현상세계로 보고 현상은 어디까지나 나타난 현상이기 때문에 이 현상 배후에 물자체가 있다.그렇게 봤단 말이야.
* 칸트철학의 최대 난제는 현상과 물자체가 이원론적으로 분리되고 물자체가 불가지론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자사는 물자체를 현상에서 분리하지 않고 성 誠으로 본다.
그니가 우리가 아는거는 예를들면 이 지우개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건 뭐야? 눈으로 보면 퍼렇고 모양이 어떻고 이런걸 여러분들이 오관을 통해서 보고 있는건 뭐죠? 어디가지나 여러분들의 오관에 나타난것만 보는 거예요 지금.
그런데 이것 자체가 뭐냐는 거야. 물자체.이 자체가 뭐냐 이거야. 여러분들에게는 이말이 이상하게 들리지만 철학자에게는 이 지우개 이 나타난 지우개는 여러분에게 나타난 모습이고 이 자체가 있다 이거야.그걸 물자체라고 불렀거든.그래서 항상 본체와 형상이 나뉘는거야 서양철학에서는.항상 나타난 것이 나타난것으로서 우리에게 그것으로 다가 아니라 물자체가 그 존재의 배후에 잇다 물자체가.
그런데 자사는 물자체가 있는게 아니라 물자체가 그게 답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그게 誠입니다 그거야.
물자체가 이 대자연을 지배하고 있는 성실함 그게 우리의 바라보고 있는 모든 사물의 배후의 근원적으로 깔려 있는 것이 誠이다 그거야.성.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그 대자연에게서 왔고 그러기 때문에 그 대자연의 성을 구현해야 되기 때문에 우리는 성실한 인간이 되어야만 합니다.이러한 도덕적인 명제를 이 대자연이 성으로부터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 자사 사상의 특질이라고 말할수 있는거예요.
* 자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도덕성의 근원이 자연의 성 誠에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