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17일 대림 제3주일>
‘빛’이신 그리스도
신학생 때, 어느 신부님께서 아이들 교육문제로 힘들어하는 자매들에게 말씀하시길, ‘아이들에게 하느님만 잘 알려주면 그 뒤로는 신경 쓸 일이 없다.’라고 하셨다. 그때는 ‘이게 무슨 소린가?’ 했는데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증언이 바로 이 말씀이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요한 1,6-7)
요한은 예언자로서 그의 가르침은 증언의 의미를 지닌다(1,15.19-34; 3,23-36; 5,33; 10,41). 그가 증언하고자 한 것은 ‘빛’이다. 빛은 ‘말씀’의 다른 표현이다. 출신과 상황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은 자기의 생명이 성취되도록 이끌어 주는 모든 지침을 이 빛으로부터 받을 수 있고 또 받아야 한다(요한복음서, 주석성경, 한국천주교주교회의, 356쪽). 빛의 인도하심이 없는 곳에서 세상은 혼란에 빠지고 길에서 벗어난다. 세상의 모든 생명은 그 빛의 인도를 받아 각자의 생명이 성취하고자 하는 바를 이룬다.
그러나 요한은 이 빛에 대하여 말하기를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1,26ㄴ)라고 한다. 그분에 대해서 아직 알려지지(계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분은 ‘내 뒤에 오시는 분’(1,27ㄱ)으로 그분의 때가 되면 그분을 통하여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말씀이신 하느님께서 세상에 오신 육화의 신비가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사람이 되신 말씀이시며 우리 가운데 오신 빛이시다. 이제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결정적으로 알려지고 구원의 신비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하느님에 대한 계시는 우리 인간에 대한 계시로서 우리를 가르치고 자각으로 이끄신다.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었던 우리의 자아가 밝은 빛을 받아 세상을 명료하게 바라보고 자신의 모습을 보기 시작한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의 계시 빛으로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게 되었다.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신비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를 이해하도록 이끌어 주신다. 그러니 그 신부님의 말씀대로 ‘하느님만 잘 알려주면 알아서 자란다.’라는 의미를 이제 알게 되었다. 우리에게 빛으로 오신 ‘임마누엘’이 우리 아이들의 마음속에서 아이들과 함께한다면 아이들은 참으로 행복하고 건강하게 성장할 것이다. 그 빛의 인도로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가고, 그 빛의 가르침으로 자기 정체성과 소명 의식을 깨우쳐간다면 참된 자유인으로서 자신의 인생, 자기 십자가를 지는 참된 신앙인으로서 살아갈 텐데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어찌 됐든 우리에겐 ‘세상의 부모님’이 계시고 우리의 양육은 그분들에게 맡겨졌다. 불행하게도 많은 이들이 어린시절 부모에 의해 그 빛을 접촉해보지도 못하고 모호하고 어두운 밤으로 빠져들고 만다. 적지 않은 사람들의 인생이 아직도 어두운 터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의문투성이와 모호함을 뒤집어쓰고도 어떻게든 자기가 가는 길에 확신하며 가고자 애쓴다. 그러나 그럴수록 모호함의 안개는 더욱 깊어만 가고, 알 수 없는 기억과 느낌들이 존재감이나 여타의 감정과 얽히고설키면서 늪에 빠져들 듯, 삶은 더욱 얽혀만 간다. 세상을 헤매며 길을 찾고 자신을 비춰줄 빛을 찾았지만, 세상의 어떤 빛도 그들을 밝혀주지 못했다.
그런데 세상에 참 빛이 오셨다. 아직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머지않아 그분께서 당신을 드러내 주실 것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그분에 대하여 이렇게 노래한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61,1) 그분의 오심은 은총의 선포(61,2)인 셈이다. ‘땅이 새순을 돋아나게 하고 정원이 싹을 솟아나게 하듯’(61,11ㄱ) 그분의 ‘의로움과 찬미가’(61,11ㄴ) 솟아나리라. 치유가 일어난다. 비틀어진 정의가 바로 세워지고 불의에 의해 억압받던 이들이 다시 허리를 세우고 일어난다. 상처 입은 마음은 다시금 힘을 얻고 희망과 미래를 노래하기 시작한다.
이에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1서에서 이렇게 권고한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5,16-18)라고 말하면서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5,19)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모든 것을 분별하여, 좋은 것은 간직하고 악한 것은 무엇이든 멀리하십시오.”(5,21-22) 그분만이 우리를 완전히 거룩하게 해주실 것이며,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을 온전하고 흠 없이 지켜주실 거(5,23)라고 말한다.
사람이 되신 말씀은 우리 모두의 인격을 비추는 빛이시다. 예수님의 인격(페르소나)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격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상처로 비뚤어지고 폭력으로 일그러진 우리의 인격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회복의 길을 찾게 되는 것이다. 세상을 헤매며 찾았지만 발견하지 못했던 그 빛이 우리 가운데 오신다. 비록 우리의 어린시절은 일그러진 자아에 그쳤다지만 그분이 오시면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이사야61,1ㄴ) 감싸주시며 치유해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어떤 경우에도 우리 안에 피워주신 성령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1데살 5,19) 애써야 한다. 불의와 타협하거나 적당히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으로 그분의 길을 갈 수 없다.
묵상하다 보면 이따금 빠져드는 생각 중 하나가, 열심히 잘 살다가도 한 번쯤 타협하고 합리화한 실수로 자신의 다른 모든 삶까지도 송두리째 부정해버리는 생각이다. 우리 삶은 명제가 아니다. 하나라도 거짓이면 그 명제는 거짓이다는 식으로 우리 삶을 보아서는 안 된다. 삶은 역동적이어서 어제 옳다가도 내일이면 잘못인 경우도 있고, 오늘 잘못된 것이 내일에 새로운 계기가 되기도 한다. 파도가 출렁이며 퍼져나갈 때 실제로 물은 위아래로만 움직일 뿐인 것처럼 어쩌면 우리의 삶도 위(옳음, 긍정, 참) 아래(그름, 부정, 거짓)로 움직이며 앞으로 나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새가 좌우 날개로 날 듯이, 시계추가 양 끝을 오가듯이 이것이 인간의 조건인지도 모른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 그분이 ‘계시-드러내심’을 하지 않으시면 누구도 알 수 없다. 우리는 그분의 ‘계시’를 배워야 한다. 그 빛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이 빛이셨다. 그 빛이 온 세상(모든 사람)을 비추신다. 그리스도인뿐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에게 이 빛이 주어졌다. 이 빛에 비추어 자신을 본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세상 만물이 그 빛 안에서 자기 생명을 성취해간다.
첫댓글 세상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시니
그 빛을 통해 삶의 방향을 알게 되었고
언제나 옆에 계심을 느끼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