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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동유고(石洞遺稿)
| 석동선생유고(石洞先生遺稿) |
| 석동유고(石洞遺稿) |
| 활자본(木活字) |
| 1937년 간행 |
| 8권 4책 |
| 10행 20자 |
| 21.1×17.2(cm) |
| 上二葉花紋魚尾 |
|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
| D1-A1635 |
| 한국문집총간 속 33 |
저자
성명생년몰년자호본관특기사항
| 이문재(李文載) |
| 1615년(광해군 7) |
| 1689년(숙종 15) |
| 자원(子遠) |
| 석동(石洞) |
| 전주(全州) |
| 김집(金集)의 문인. 황신귀(黃信龜), 김지백(金之白), 유동연(柳東淵) 등과 교유 |
가계도
기사전거 :
行錄(房斗天 撰), 行狀(鄭琦 撰), 墓碣銘(宋奎濂 撰), 李尙馨行狀(房斗天 撰, 天默遺稿 卷5), 全州李氏孝寧大君靖孝公派世譜 등에 의함
행력
왕력서기간지연호연령기사
| 광해군 | 7 | 1615 | 을묘 | 萬曆 | 43 | 1 | 9월 5일, 南原 屯德里에서 태어나다. |
| 인조 | 9 | 1631 | 신미 | 崇禎 | 4 | 17 | 모친상을 당하다. |
| 인조 | 14 | 1636 | 병자 | 崇禎 | 9 | 22 | 부친 天默齋 李尙馨이 御駕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자 급히 그곳으로 가던 도중에 화친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다. |
| 인조 | 22 | 1644 | 갑신 | 順治 | 1 | 30 | 북경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皇城失守感賦〉를 짓다. |
| 인조 | 23 | 1645 | 을유 | 順治 | 2 | 31 | 4월, 부친상을 당하다. |
| 인조 | 25 | 1647 | 정해 | 順治 | 4 | 33 | 상을 마치고 부친의 家狀을 짓다. ○ 愼獨齋 金集의 문하에서 배우다. |
| 인조 | 26 | 1648 | 무자 | 順治 | 5 | 34 | 사마시에 합격하다. |
| 인조 | 27 | 1649 | 기축 | 順治 | 6 | 35 | 천거되어 社稷署 參奉이 되었으나 뜻에 맞지 않은 일이 있자 그만두고 돌아오다. ○ 이후 科業을 그만두고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다. |
| 효종 | 6 | 1655 | 을미 | 順治 | 12 | 41 | 頭流山을 유람하다. |
| 효종 | 7 | 1656 | 병신 | 順治 | 13 | 42 | 김집을 곡하다. |
| 효종 | 9 | 1658 | 무술 | 順治 | 15 | 44 | 思齊 安處順과 游軒 丁熿을 제향한 寧川書院의 부원장이 되다. |
| 현종 | 3 | 1662 | 임인 | 康熙 | 1 | 48 | 호남에 흉년이 들어 白軒 李景奭이 구황책을 묻자 그 근본은 仁政이므로 宋 朱子와 富弼이 浙東과 河北을 다스리던 것처럼 해야 한다고 답하다. |
| 숙종 | 15 | 1689 | 기사 | 康熙 | 28 | 75 | 1월 27일, 졸하다. ○ 3월, 任實 馬巖村에 장사 지내다. |
| 숙종 | 26 | 1700 | 경진 | 康熙 | 39 | - | 霽月堂 宋奎濂이 묘갈명을 짓다. |
| - | - | 1937 | 정축 | - | - | - | 8대손 李南儀 등이 활자로 문집을 인행하다. |
기사전거 :
行錄(房斗天 撰), 行狀(鄭琦 撰), 墓碣銘(宋奎濂 撰), 本集內容 등에 의함
편찬및간행
저자는 성리학 외에 수학, 천문학 등에도 뜻을 두고 깊이 탐구하여 약관에 선기옥형을 직접 만들었고 저술한 〈璿璣玉衡註解〉, 〈朞三百註解〉 등은 사우들 간에 傳誦되기까지 하였다. 또한 經世書에 대해서도 정밀히 연구하여 관련 저작들을 남겼다.
저자의 유문은 사후 오랫동안 가장되어 오다 저자의 8대손 李南儀가 편차하여 간행을 위해 8대손 李敬儀를 통해 1922년에 金福漢의 序와 宋敎淳의 跋을 받아 놓았다. 그런데 집안에 여러 일들이 발생하는 바람에 일을 마치지 못하고 있다가 世道가 날로 바뀌는 상황에 직면해 서둘러 1932년에 鄭琦에게 교감을 부탁하고 서를 받은 후 1934년에 鄭琦와 鄭承鉉에게 저자의 행장과 묘지명을 받아 추가하고 문중의 협조를 얻어 활자로 인쇄하였다. 권말에 있는 8대손 이남의와 9대손 李起石의 발에 따르면 인출은 1935년 4월에는 완료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金敏洙가 쓴 묘표는 그 작성된 시점이 1935년 11월로, 인출이 완료된 후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정황은 묘표의 본문에서 “後孫南儀旣編刊其遺文”이라 한 구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인출 후 일제의 허가를 받기 위해 바로 발행하지 않았던 데서 연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저본과 동일본인 국립중앙도서관장본 冊尾의 板權紙를 보면 1935년에 허가를 받아 1937년에 任實의 履露齋에서 발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초간본》 이 본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古3648-文62-268, 한46-가1540),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811.98/이문재),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1-A1635)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저자의 8대손 이남의 등이 1937년에 활자로 인행한 초간본으로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이다. 본 영인저본 중 권2의 제14판과 권4의 제44판은 卷次가 누락되어 있다.
序(金福漢ㆍ鄭琦 撰), 跋(宋敎淳ㆍ李南儀ㆍ李起石 撰) 등에 의함
구성과내용
본집은 8권 4책으로 되어 있다. 卷首에 金福漢이 1922년에 지은 序와 鄭琦가 1932년에 지은 서가 있고 그 뒤에 목록이 실려 있다.
권1은 詩(143題)이다. 詩體 구분 없이 대체로 저작 연대순에 따라 편차되어 있다. 자연과 일상을 소재로 읊은 시가 많고 간혹 유람이나 기행 중 지은 작품들도 있으며 지인들에 대한 만시 29제가 수록되어 있다. 李自成에 의해 북경이 함락되자 明의 멸망을 비통해 하면서 再造之恩을 되새기며 죽음을 아끼지 않고 당장이라도 달려가 설욕하고 싶은 심정을 토로하는 〈皇城失守感賦〉, 부친 天默齋 李尙馨이 1637년 輔德으로 瀋陽에 가는 왕세자를 陪從하게 되었으나 白軒 李景奭이 病 중이어서 힘들다고 공론하여 교체되었는데 이를 회고하며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읊은 〈追感白軒李相公〉 등은 특기할 만하다.
권2는 書(23)로 인물별로 수록되어 있다. 그 대상은 스승 金集, 친우인 黃信龜와 柳東淵, 南原 府使 金益勳 등이다. 김집에게 올린 편지는 3통인데 敬에 대한 견해와 儀禮에 대한 문의, 喪服 제도에 대한 질문 등이 주요 내용이다. 황신구에게 보낸 편지는 5통인데 모두 답장으로 성리학, 의례, 독서 등을 주제로 논의하는 것들이다. 특히 眉巖 柳希春의 저술인 「獻芹錄」, 「大學釋疏」, 「論語釋疏」, 「眉巖日記」 등에 대한 언급은 주목할 만하다.
권3~7의 앞부분은 雜著(10)이다. 저자가 평생 연구했던 분야들에 대한 저술로 전체 저작 중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다. 권3의 〈律度量衡解〉는 「書經」, 「論語」, 「孟子」, 「漢書」, 「律呂新書」, 「說文」 등 다양한 서적을 근거로 하여 律, 度, 量, 衡 제도에 대한 풀이를 내리고 있고, 〈朞三百註解〉는 朞法, 歲法, 年法, 月法, 日法, 時法, 刻法, 氣盈, 朔虛 등으로 나누어 曆數를 해설하고 뒤에 歲餘法, 邵子藏閏顯閏說 등을 부기하였다. 권4는 〈璿璣玉衡註解〉로 渾天儀에 대해 먼저 개략적으로 설명하고 나서 각론으로 들어가 周天, 二十四氣, 七十二候, 黃道, 赤道, 中星, 歲差, 大明大統曆, 時憲曆, 潮汐水 등에 대하여 제가의 설을 바탕으로 정교하고 치밀한 설명을 전개하고 있다. 권5~6은 〈謾記〉 上ㆍ下로 성리설, 의례, 역대 治亂과 興亡, 인물의 장단점 등 다방면에 걸쳐 여러 주제에 대해 요점을 정리하고 자신의 견해를 붙여 설명하고 있고, 권7의 〈隨箚〉는 성리설과 태극설 등 경서의 여러 내용에 대해 역대 諸家의 다른 의견을 서로 참고하고 감정하여 논설하고 있다.
권7의 뒷부분은 記(1), 祭文(12), 墓碣銘(2), 行狀(1), 遺事(3)이다. 〈澹虛齋記〉는 절친했던 金之白이 任實 烏院의 三湖 가에 지은 담허재에 대한 기문으로 당호를 ‘담허재’라 지은 내력을 설명한 것이고, 祭文은 金集, 吳以井, 동생 李文啓의 장인 李海昌, 金之純, 장인 崔徽之, 柳東淵, 黃信龜, 金之鳴, 백형 李文獻, 누이동생 吳添喜의 처, 庶妹 崔壽海의 처 등에 대한 것이다. 墓碣銘은 동생 이문계와 유동연에 대한 것이고, 行狀은 아들 李聖眞의 장인 金之聲에 대한 것이며, 遺事는 부친 이상형, 김지백, 황신구에 대한 것이다.
권8은 附錄이다. 韓正吾 등 6인이 지은 祭文과 문인 房斗天이 1689년에 지은 행록, 鄭琦가 1934년에 지은 행장, 宋奎濂이 1700년에 지은 묘갈명, 鄭承鉉이 1934년에 지은 묘지명, 金敏洙가 1935년에 지은 묘표가 실려 있다.
卷末에 宋敎淳이 1922년에 지은 跋, 8대손 李南儀가 1935년에 지은 발, 9대손 李起石이 1935년에 지은 발이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재훈(金材勳) |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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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동유고(石洞遺稿) 이문재(李文載)생년1615년(광해군 7)몰년1689년(숙종 15)자자원(子遠)호석동(石洞)본관전주(全州)특기사항김집(金集)의 문인. 황신귀(黃信龜), 김지백(金之白), 유동연(柳東淵) 등과 교유
石洞先生遺稿跋 / 石洞先生遺稿跋[李南儀]
我先祖石洞先生。以天默齋先生之嗣。早服庭訓。旣又登金文敬先生之門。薰炙浸漬於性理經禮之學。退而杜門講習。著書自樂。一膺郞選。而旋復卷懷。沉淪以終身。今距其世。且三百年。宜已刊行其遺文矣。顧以後孫之零替不競也。至今未遑尙論者慨焉。夫先生之學。其著於書者。非後人所能窺測。而若其語不踰衷。義必援古。一生所孜孜而亹亹者。要皆精探天人。粗盡事物。而又可擧以措之實用。則君子許其必傳焉。祖先之爲書。未必可傳也。而猶欲傳之子孫之情然耳。况其必傳焉。而任其晦蝕。埋沒於塵蠧巾笥之間。此其於子孫之責何如也。不肖自幼閱家中舊籍。至先生稿。輒屢欷太息。以爲刊而行之。是不肖任也。遭家多故。迄玆未果。見今世道日遷。而不肖又將駸駸老衰。誠恐此事遂已。而先生之微言邃學。因以不章也。謹就士友之有識者。勘校一再。圖付于印。嗚呼。其已晩矣。然使先生之書。固宜永傳而不止。可行於一時而已。則雖自今日而刊之。亦或未始晩也。不肖可以是自慰也歟。役旣始。謹識所感如此云。乙亥四月下澣。八世孫南儀。謹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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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洞先生遺稿卷之八 / 附錄 / 墓誌銘 並序 [鄭承鉉]
| 鄭承鉉 | 1852 | ? | 河東 | 纘緖 | 春岡 |
任實治東馬巖枕巽之原。有崇睾如者。石洞先生李公之藏也。霽月堂宋文僖公銘其碣。公之偉行潛德。已奕然爛映于有目矣。惟其誌幽而示諸玄遠者。尙未遑也。後孫南儀。有孝思于永言。徵其辭于不佞。不佞拙耄何敢。惟旣知公之世矣。亦不敢終默。謹按公諱文載。字子遠。李氏璿系。孝寧大君諱補其八世祖也。高祖渾贈承旨。仍居南原。曾祖慶胤禦侮將軍。祖昱忠義衛。考尙馨弘文校理。贈兩館大提學。諡忠景公。師沙溪金先生。以經術名世。世稱天默齋先生。妣淑夫人善山林氏。副正克立其父也。公幼有異質。謙恭愼密。動止有常。服習庭訓。知古人爲己之學。不以記誦文辭爲務。潛心經傳。鑽硏其奧妙。一以格致誠正爲主本。一時名碩。咸謂天默齋有子矣。事親。先意承志。無或違越。病㞃也。嘗矢禱辰。遭艱也。哀毁踰禮。友兄弟尤篤。撫孤姪無間己子。旣喪先公。往學于愼獨齋金先生。先生亟稱其篤實。授以敬字訣。自是益奮勵。箚質經禮。多蒙奬詡。嘗丙子虜亂。慨然馳赴君父之急。路聞媾成而返。傷時噎鬱。多發於吟哦之際。戊子。中司馬。己丑。薦除社稷署參奉。未幾棄歸。無復有意於當世。婆娑林泉。嘐嘐然有古之人之意。宅心以誠。飭躬以敬。存養之篤。省察之密。不以耆耋而少衰。嘗曰。學者當眞實用功。終始如一。方有所得。又曰。談空守寂。異端之私其身也。涉獵纂組。俗儒之私其名也。權謀術數。欺世者之私其智也。此皆體諸身驗於人而發之。是故見於行事之間者。壹皆切實而無假飾。樂道人善。而過則隱之。然至有大義所係。則必正言以折之。一朝士假儒而請交。輒引身避之。當路之有世誼者。見其貪權而疎絶之。其介蓋如此。老益力學。與門徒講明聖賢旨訣。自夫天人性命。以至儀文度數。無不精硏而通貫。又窺象數之學。弱冠時。以己意刱造璣衡。低昂疾徐無少差。至是又著律度量衡及田制及朞三百璣衡註解一𢎥傳於世。嗚呼。以先生之德之才。見用於時。則其措諸事業。必不在古人之下。而蓬蒿落拓。蘊玉而不售。亦足爲世道慨也。以歲己巳卒。距生萬曆乙卯。壽七十五。配朔寧崔氏。翊衛徽之之女。柔順靜嘉。以婦德稱。先公沒。葬同原。男長聖麟早夭。次聖眞進參奉。次聖元。張宇奎,崔翕之,崔與泰壻也。側男聖儒,聖愚,聖夏。聖眞男頤根逸諮議。頤成,頤榦進參奉,頤實。女曺淑,愼日三,宋必觀,盧世極。聖元男頤期進士。女府使柳鵬章。聖儒男頤完。女鄭台相,金鴻慶。聖愚男頤億。女崔壽昌,丁堛。聖夏男頤一。崔翕之男㠉赫,㠉秀,㠉彥。崔與泰男允賢,鵬賢。曾孫不盡錄。銘曰。
以天默齋爲父。愼獨齋爲師兮。此爲石洞先生。彼一時之用舍兮。不關百世之立名。惟其實之在內兮。不可得以終覆。允矣霽月翁之知德兮。此足不朽於來後。
閼逢閹茂(갑술1934)九月上浣。應敎鄭承鉉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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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집(艮齋集) 전우(田愚)생년1841년(헌종 7)몰년1922년자자명(子明)호간재(艮齋), 외암(畏菴), 구산(臼山), 추담(秋潭), 수현(守玄), 고옹(蠱翁), 양하왕인(陽下尫人)본관담양(潭陽)초명경륜(慶倫)소자천추(千秋)특기사항임헌회(任憲晦)의 문인. 서응순(徐應淳), 이상수(李象秀), 김낙현(金洛鉉) 등과 교유
艮齋先生文集後編卷之二 / 書 / 答鄭纘緖 承鉉○乙卯
愚以故國遺民。不死苟活。與世相辭。忽拜下狀。命以先府君隧道之表。此在令公爲不及察。在愚爲不敢承。蓋愚素遲鈍。未嘗學作文。或爲知舊所煎迫。妄有一二篇。皆爲有眼者嗤點。且自變故以來。竄身海島。不復爲人握管。十年之閒。所瀝誠以辭遣者。百有餘家。今難復開此路。以取人怨。加以耄荒尩羸。再親筆硏。不啻畏斃。所以百拜乞免于下執事。賤違尊指。死罪難逭。如未蒙強恕。區區皇仄。如何可諭。令胤性質無疵。詩禮有聞。可與共學。顧愚衰秏。無精力可以講授。只將晦菴夫子絶今不爲。惟古是學。流俗何知。毋爲彼梗。及忍痛含冤迫不得已之義。款款語及之。庶幾理義志節。兩有所助焉。
令胤請愚爲師。顧愚病昏多忘。又念渠一時意氣。未可恃而不肯。則曰。此有親敎。非由專輒。故不免抗顔而進之以誠字之說焉。夫表裏如一。始終無貳之謂誠。中心旣懷學聖之志。外面亦當用聖人之規。且聞晦翁之敎曰。古聖論下學。莫不以正冠肅貌爲先。蓋必如此然後心得所存。而不流於邪僻。竊伏惟念。文獻先生遺法自在。何需愚言。特以後生或不免憚繩檢喜縱肆。而有時乎擺脫衣帶。放過容儀。則切望令公必加訶叱。使之勿去廣袖。此爲今日急先務。至於有初克終之道。尤不可以不愼。切幸留神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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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백헌집(老柏軒集) 정재규(鄭載圭)생년1843년(헌종 9)몰년1911년자영오(英五), 후윤(厚允)호애산(艾山), 노백헌(老柏軒), 회송(晦松)본관초계(草溪)특기사항기정진(奇正鎭)의 문인. 김석귀(金錫龜), 정의림(鄭義林), 기우만(奇宇萬), 허유(許愈), 곽종석(郭鍾錫) 등과 교유
老柏軒先生文集卷之十一 / 書 / 答鄭纘緖 承鉉○己亥
頃書違便未報。不審邇來。奉晨萬康。載衰病纏身。四大不收。精亡神離。去死不爭多柰何。胤君沉靜𥳑默。又能有思於道。其庶有望乎。留此二個月餘。而只大學一篇而止耳。思日深知日長。似此不懈。則不幾年將頓進。不惟爲尊門光。吾黨庶有賴也。須於過庭之際。時加策勵如何。但宿疾闖發。深可憫也。今將歸侍。而日寒路遠。不瑕有害。殊可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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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瑞山) 정기(鄭琦, 1879~1950)의 시문집.
율계집(栗溪集) / 卷之十七 / 墓碣銘(1)
丹霞李君墓誌銘【幷序】
丹霞子國賢。況病數載。卒于甲申(1944)九月。距生洪陵丁丑(1817,순17)爲六十八齡。把道里後麓先塋下某原。其藏也。其孤起亮粗述平生。乞銘于余。蓋以知公莫余若也。公諱南儀。國賢字也。李氏系璿璜。我太宗第二子孝寧大君補之後也。傳至天黙齋尙馨。官弘文校理諡忠景。師事沙溪先生爲高弟。俎豆于蓼溪院。子石洞文載逸參奉。從學愼獨齋先生。學問精博。遺集行于世。寔公八世。曾祖錫龜號灣湖。以經學屢登剡薦。而竟不調。晩歲自鎭岑移求禮。祖智永。考肯宇早世。慶州人金基龍外祖也。公娶文化柳氏濟陽女。生三男三女。起亮起俊起輅男也。鄭淳弘權學植鄭鎭植壻也。餘男二某某。內外孫蕃衍。不能盡名。公嘗曰富貴非可慕。威武非可怖。惟讀書修身。不失孝友之行者爲可畏。見席勢而驕者。必揚言以折之。見固窮謹行者。必屈己以下之。是以人無不畏憚而加恭。月朝家以遐鄕人物許之。嗚呼。自余寓公閈。朝徵暮逐。短長相補。殆十數年。胡乃一朝各天。好風範好談論。不復得以承聆。而乃督余以萬年役耶。悲夫悲夫。銘曰。天賦雋英氣自豪。明剛惻怛篤倫常。喪恬恨深事兄恭。事母孝推伯叔孃。裕後不殫丹心苦。光前不計赤手張。百年巾箱今始顯。石洞先生儘有後。本立如斯餘可推。百度從來由孝友。一髮能知闕甚大。驀地鶖風不敢威。憂人之憂樂人樂。落落風標款款辭。談屑如流驚四座。詞調成奇倚高樓。得到才情嫋娜處。山南才子汗且流。華泉秋月馬龍春。川光岳淥尙遺馨。第欲求公非在此。一心勿替舊家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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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일제강점기 전통지식인의 문집 간행 양상과 그 특성에 관한 연구 | 황위주(黃渭周, 1958) | 한국고전번역원 | 2013 | |||||||||||||||
| 66 P 1899 1 1 1997 433 李南儀 丹霞詩稿 187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