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전 아파트에서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왔다.
조그마한 마당이 있고 소나무도 몇 그루 있는 전형적인 도심의 단독주택이다.
비록 손바닥 만한 마당이지만 아내가 장미를 워낙 좋아해 스무 개가 넘는 장미들을 빼곡이 심고 가꾼다.
그리고 주말이면 잔디에 섞여있는 잡초를 뽑고 물을 주고 새로운 꽃들을 사다가 심기도 한다.
그래서 정문이 있는 앞 마당은 언제나 아름다우며 생명의 힘이 넘친다.
그러나 마당을 지나 집 뒤쪽으로 이동을 하면 풍경이 달라진다.
처마 밑에 있는 플라스틱 궤짝에는 먼지긴 빈 술병들이 한 가득 담겨 있고, 장미를 비롯해 나무와 꽃들을 주다가 남은 여러 개의 비료와, 호미와 도끼 낫, 삽과 톱 등의 작업 연장과 청소도구들이 있고, 쓰레기를 모아두는 쓰레기봉투와 재활용을 보관하는 마대자루와 음식물 쓰레기통, 쓰다가 남은 목재와 합판을 비롯해 시멘트, 벽돌 등 작업 자재와 버릴 수 없어 모아 둔 철근 쪼가리, 깨진 유리 등 폐자제와, 타지 않는 녹슨 자전거, 1년에 한번 사용하는 예초기 등등이 있는 칙칙하고 어두운 풍경이다.
집 앞과 집 뒤의 본질적인 차이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보여주고 싶은 것"과 "숨기고 싶은 것"이다.
처음 생각과 나의 동일화가 깨진 이후 상당한 기간 동안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움을 경험했는데 그것은 정제되지 않는 무의식의 엄청난 분출이었다.
적어도 깨어남이 곧 평화이며 천사라는 애기는 나에겐 맞지 않았다.
특히 성적욕망에 대한 강박적인 분출이 가장 고통스러웠는데 나는 이러한 야비하고 파렴치한 생각이 솟아나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이 파렴치한 생각의 연속(강박)에서 나를 지키려 댐을 쌓고 만리장성을 쌓아도 이 강박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영적인 깨어남에 대해 무지했던 나로서는 수 개월 동안 이 지독한 강박과 맞서 싸웠지만 결국 이 파렴치하고 야비한 것이 ‘나’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죽을 것 같이 고통스러웠던 강박과의 전쟁은 끝이 났다.
심리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나 나중에야 이 시기가 칼 융의 ‘폐르소나’와 ‘그림자’ 의 갈등이자 전쟁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폐르소나로서의 나는 항상 선하고, 밝고 정의롭고, 옳은 것을 추구하는 것으로서의 ‘나’ 였으며, 추하고 야비하고 어둡고 파렴치한 그림자로서의 ‘나’는 언제나 내가 아니었다.
우리 집 앞 마당과 뒤편이 같은 집이고 공간이지만 집 앞 마당은 언제나 밝고 생명력이 넘치는 곳으로 누구에게나 보여주고 싶은 반면, 집 뒤편은 고장 나고 파괴되고 썩어가는 것들로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과 동일한 원리다.
우리는 모두 옮음, 선, 진리 등등 무수히 많은 사회적 가면(폐르소나)을 쓰고 살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가면 저편에 있는 어두움(그림자)에 대해서는 보려하지 않을뿐더러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 안에 언제나 감춰둔다.
그래서 자신의 어두운 면을 보려면 그것을 직시할 수 있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가장 깊은 어두운 곳에 들어가 자신의 야비성을 비롯한 모든 것의 형편없음과 부정성을 경험하고 받아들일 때 역설적이게도 옳음이라는 허구의 자의식에 갇힌 나를 비로소 초월한다.
지구의 인구가 80억명이라면 80억명 모두 자신만의 옳음에 기반해 살아간다.
나 역시 그렇다.
그러나, 더 이상 내 옳음의 잣대로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내 안에 있는 어두운 ‘그림자’가 곧 ‘나’임을 알게 된 후 무엇보다 내가 누구를 비난하거나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이 하나도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바울이 고백한 “죄인중의 괴수” 인 것이다
근래 명문대를 졸업한 어느 촉망받는 젊은 스님이 과거의 결혼생활과 스님이 된 이후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이 있었고 결국 그 스님은 사회활동을 중단했다.
이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 동안 얼마나 많이 힘들었을까? ”하는 안타까운 감정이 드는가? 아니면 “파렴치한 스님”이라며 정죄하고 싶은가?
안타까운 감정이 든다면 자신의 어두운 곳을 통과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선한 것, 옳은 것만이 ‘나’라고 규정할 때 나는 더욱 협소해지고 완고해 진다.
지끔 까지 이어져 온 개인간의 싸움이나, 수많은 종교전쟁을 비롯해 민족간의 전쟁역시 이러한 반쪽짜리 신념에 기반한다.
내 안에 있는 어둡고 두려운 감정을 타인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영성, 깨어남의 과정은 선과 악, 이것과 저것이 나뉘어 있지 않음을 경험하는 신비의 과정이다.
그래서 더 이상 자신을 ‘옳음’이나 무엇으로 규정짓지 않는다.
나는 옳음과 그름, 선과 악의 모은 것을 포함하고 있으며, 초월해 있는 존재다.
그 시작 점은 내 안의 모든 어둡고 부정적인 것들을 직면하고 화해하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나는 작은 나를 벗어나, 아무런 막힘없는 대 자유를 경험한다.
“네 형제의 티끌은 보면서 네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 한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한 예수의 가르침은 내(네) 안에 있는 ‘그림자’를 직시 하라는 것이다.
이 내 안에 있는 들보를 보게되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그 가르침의 깊은 의미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첫댓글 자기 안의 동물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사람일수록 동물스럽지 않게 살 확률이 높고, 그 반대일수록 동물스럽게 살 확률이 높습니다. 그리고, 기혼자 모두는, 서로의 성심리에 관해 죽을 때까지 허심탄회한 대화 나누고, 공부하고, 노력해야 되는 것 같습니다.
"회칠한 무덤", 예수꼐서 자신안의 부정성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옮음만 주장하는 당시 종교인들에게 한 말입니다.
무덤의 겉은 회칠을 해 번지르하지만 속은 시체가 썩어간다는 직설적인 표현입니다.
결국 예수는 이 종교인들에 의해 처형당합니다.
저 역시 항상 악함과 추함은 보이지 않는 무의식에 감춰놓았고, 의식 스스로 규정한 선함과 정의를 저 자신과 동일시 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옳음에 맞지 않는 대상에 대해 늘 공격했습니다.
회칠한 무덤이었습니다.
자신의 또다른 모습을 만나고 화해할때 선과악, 이것과 저것이라는 이원성의 셰계는 자신 스스로 만든 허구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불가에서는 '불이', '중도'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새벽부터 장마가 시작되었습니다.
좋은 날만 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