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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고린도전서 번역 비교 - 고린도전서 1 : 10 ~ 17
[ 목차 ]
I 성경속에 나타난 분열 / 고린토 교회
II 아리우스파 / 니케아 공의회
III 네스토리우스파 / 에페소 공의회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IV 단성론파 / 칼케돈 공의회
( I 성경 속에 나타난 분열 )
먼저 교부시대의 분파들을 살펴보기 앞서 성경 속에도 나오는 분열을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 바로 고린토 교회에서 일어났던 것으로. 특별히 사도 바울이 직접 개입해 훈계했던 분열을 말이다.
성서상에서 나타난 초대 고린토 교회 내부에서의 분열은 바울이 고린토 교회에 보낸 첫번째 서신, 고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번째 편지 1장에 나타난다.
11 내 형제 여러분, 나는 클로에의 집안 사람들한테 들어서 여러분이 서로 다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2 말하자면 여러분은 저마다 "나는 바울파다." "나는 아폴로파다." "나는 베드로파다." "나는 그리스도파다." 하며 떠들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위 구절에서 볼수 있듯 고린도 교회는 크게 ' 바울파 ' ' 아폴로파 ' ' 베드로파 ' ' 그리스도파 ' 네개의 분파로 나뉘어 크게 싸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분열의 원인이 직접적으로 밝혀지진 않았으나, 신학적인 견해 차이 때문에 생긴것이 아닌 몇몇 지도자들에 대한 지나친 충성심 또는 편파심 때문에 조성된 것이었다. (호크마 주석) 윗 구절에서는 그 분파를 넷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그 외에도 더 많은 분파가 있었는지 알수 없다. 본문에 소개되는 네가지 분파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자.
• 분파들
바울파 - 바울을 따르는 당파는 주로 바울에 의해 기독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 중심이었을것으로
추정된다. 바울이 이방인들의 사도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울을 너무나 따른 나머지 다른 지도자들을 배격하면서까지 바울의 권위를 변호했다.
아폴로파 - 아폴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계 학자로 유식하며 웅변적인 사람이었다. 고린도전서의 여러 구절들을 살펴보면 그는 고린도 교회에서 상당한 역할을 한것으로 보인다.
그의 풍부한 학식으로 인해 주로 지식층 사람들이
그를 추종했을것이다. 그러나 바울과 아폴로가
대립했다는 증거는 없다.
베드로파 - 그가 당시 고린도에 있었는지의 여부는 알수 없다. 바울에 대항하는 율법주의 당파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리스도파 - 이 당파는 예수에게 직접 교훈을 들은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당파로 추정된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이야말로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는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을것이다.
이러한 추측 역시 불확실하나 분명한것은 이
당파가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후에 일어난 고린도 교회의 분열-
고린도 교회의 분열은 이후 어찌되었는지는
모르나 후대에도 비슷한 분열이 발생한것으로 보인다. 이는 초대교회의 교부문헌 클레멘스 1서에서 확인할수 있다. 클레멘스 1서에서는 로마의 주교인 클레멘스가 고린토 교회에 발생한 내분에 대해 당파들의 지도자를 질타하며 다시 화합할것을 촉구하고 있다. 원인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고린토 교회에선 내분이 잦았던것으로 보인다.
이로서 첫째로 고린토 교회의 분열을 살펴보았다. 고린토 교회의 분열은 뒤에서 다룰 분열들과는 많이 다르다. 어떠한 신학적인 견해차이가 아닌 그저 교회의 지도자들에 대한 과한 충성심으로 인해 조성된것이었다. 또한 뒤에서 다룰 분열들만큼 완전히 갈라선것도 아니었다. 뒤에서 다룰 분열들은 대부분 신학적인 문제이다.
( II 아리우스파의 분열,
삼위일체론의 형성 )
기독교 공인 이후 교회에는 많은 분파들이
생겨났다. 에비온파와 영지주의, 마르시온파, 몬타누스파 등 수많은 분파들이 생겨나 약 200년간
존속했지만 이 글에선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을것이다. 우선적으로 훨씬 중요한 보편공의회가 소집될만큼 크게 분열된 사건들만 간략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그의 첫째는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가 소집된 원인, 아리우스파이다. 다만 설명하기에 앞서, 뒤에 소개될 네스토리우스파와 단성론파, 합성론파는 몰라도 지금 소개할 아리우스파는 명백한 이단으로 결의된 분파로 그들의 사상에 대해선 경계하며 읽길 바란다.
• 아리우스의 등장과 논쟁의 시작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 이후, 기독교는 로마제국에서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으며, 수도인 로마와 문화적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를 필두로 교회가 성장하여 신학적인 문제들이 대두되기 시작한다. 이는 앞으로 교회에 어마어마한 논쟁과 분열들이 일어날것임을 의미한다. 그의 시작은 알렉산드리아의 한 사제로부터였다. 그의 이름은 ‘아리우스’로 뛰어난 언변과 잘생긴 외모로 교회에서 꽤나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는 318년, 기존 교회의 교리와는 사뭇 다른 내용의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것으로, 예수가 곧 하나님이라는 기존 교회의 주장과는 반대되게 예수는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진것이 아닌, 완전히 다른 존재로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던 알렉산데르는 성부와 성자가 동일한 본질을 가졌고 한분이시라는 삼위일체론을 주장했다. 당연히 하나의 교회에 속해있던 두명은 맞붙기 시작한다. 먼저 사제 아리우스는 알렉산데르의 주장에 대해 반대하며 예수는 참된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알렉산데르가 유일신론을 부정하고, 기독교를 다신교로 만들려 한다고 보았다. 즉, 예수도 신이라면 결과적으론 신이 성부와 성자, 둘이 됨으로 결국 한명이 아닌 두명의 신이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둘은 맞붙게 되었다.
• 정치적 싸움
둘이 신학적인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에 이 싸움은 단순 학문적인 부분에서 점점 정치적인 싸움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교회의 역사 내에서 신학적인 논쟁은 대부분 정치적 싸움으로 번지게 되는데, 이 경우도 그렇다. 알렉산데르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지도자인 주교였고 일개 사제에 불과하였던 아리우스는 교회 내에서는 정치적으로 그의 상대가 되진 못했다. 특히나 알렉산드리아는 그 당시 교회들 가운데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큰 교회였기에 이 교회의 주교였던 알렉산데르에겐 큰 권력이 있었다. 한편 주교 알렉산데르는 아리우스를 자신의 앞으로 소환하고선 북아프리카 각지에서 온 백여명의 주교들 앞에서 심문을 받게 했다. 그는 그들 앞에서 그의 지지자들과 함께 이단으로 단죄되었다. 알렉산데르에 의해 아리우스가 파문되자 이 논쟁은 알렉산드리아 교회 내에서 상당히 공론화되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한편 아리우스는 알렉산데르의 조치에 가만히 있지 않고 적극적으로 동방의 주교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펼쳐 나갔다. 그는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니코메디아로 가서 그곳의 주교들에게 큰 지지를 얻었고, 카이사레아의 주교 에우세비오가 소집한 시리아 교회회의에서도 아리우스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한편 알렉산드리아의 부제인 아타나시우스가 알렉산데르를 도와 이 싸움에 참가했다. 이 사람은 알렉산데르 사후에 삼위일체파의 주축이 되는 만큼 중요한 인물이다.
• 황제의 대책
시리아와 니코메디아에서 강력한 지지자들을 얻은 아리우스는 다시 알렉산드리아 교회로
복귀해 자신의 지지자들을 내세우며 알렉산데르에게 자신이 성직자로서 복직할수 있도록 허가할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알렉산데르는 이를 받아드릴수 없었고 그의 부탁을 거절했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아리우스의 지지자가 어마어마하게 많아졌을 시기였다. 아리우스의 요구에 대한 알렉산데르의 거절로 인해 아리우스의 지지자들이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다. 이 폭동은 324년 이집트 지역에서 확산되어 레반트 지역까지 이어졌다. 막 제국을 통합한 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이 소식을 듣고 기겁을 하며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아리우스파와 삼위일체파에게 중재 서한을 보냈다. 결국 알렉산드리아의 지역적 논쟁은 점점 커져 동방 교회 전체를 분열시킬 위험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밀라노 칙령 이래 로마에선 기독교가 거의 공식적인 종교나 다름없었고 따라서 교회의 분열은 곧 제국의 분열이었다.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이미 제국의 큰 분열을 겪으며 고생을 상당히 많이 했다. 그는 분열은 기필코 막아야 했으며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제국 전역에서 뛰어난 주교들을 소집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최초의 보편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이다.
• 니케아 공의회, 아리우스파의 패배
325년, 지금의 터키 이즈니크인 니케아에서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주도로 아리우스파와 주교 알렉산데르와 아타나시오스를 주축으로 한 삼위일체파 간의 거대한 분열을 해결하기 위한 공의회가 열렸다. 약 320명의 주교들이 참석했다. 공의회는 굉장히 열띤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어찌나 격렬했던지 산타클로스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니콜라오스라는 주교는 아리우스의 뺨까지 갈겼던 것으로 전해진다. 공의회의 참석자들은 세 부류로 나뉘어 앉았다. 첫번째 부류는 삼위일체파 진영이며 두번째 부류는 아리우스파 진영, 세번째 부류는 중도 진영이었다. 공의회의 의장을 맡게된 오시우스라는 사람은 우선 각 진영의 의견을 듣기로 했다. 그러나 너무 격렬한 논쟁이 오가자
각자 세례신조를 작성하여 공개토론을 할것을 제안했고 이에 따라 각 진영은 각각 신조를 작성해 공개토론을 하는 방식으로 공의회가 진행되었다. 아리우스파는 이따금씩 눈짓으로 의견을 교환하며 성경 본문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조절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사실 황제는 공의회 소집 이전부터 교회 내에서 힘이 강했던 아타나시우스파를 지지하기로 마음먹었다. 공의회가 그렇게 공정하게 진행된것은 아니었던 셈. 결과적으론 주교 313명이 삼위일체론에 대한 찬성표를 던졌고, 성부와 성자가 동일한 본질을 가졌다는 니케아 신경이 정립되었다. 아리우스를 지지했던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오도 결국은 이 신경에 서명했다. 서명을 거부한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공식적으로 파문되어 전부 게르마니아 지역으로 추방되었다. 이후 아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의 딸 콘스탄티아의 도움으로 타협신조에 동의하고 다시 교회에 입교할수 있었으나 화해하기 직전 콘스탄티노플의 공중목욕탕에서 급성 내장출혈로 죽었다. ( 거리를 걷다가 쓰러져 죽었다는 말도 있다. )
• 끝나지 않은 싸움
한편 328년, 삼위일체의 대표주자인 알렉산데르는 사망하고 아타나시우스가 주교로 서품된다. 그는 새로운 삼위일체파의 주도자가 되어 남은 아리우스파와 싸움을 지속했으며 삼위일체에 대한 내용을 담은 아타나시우스 신경을 제정했다. 이 신경은 현대까지도 전해져 내려오며 중요히 여겨지고 있다. 한편, 니케아 공의회가 끝난 이후에도 분열은 멈추지 않았다. 공의회에서 패한 아리우스파 주교들은 결코 굴복하지 않았고 그들은 343년 필리포폴리스에서 대립 공의회를 열고, 니케아 공의회를 단죄했다. 교회는 이번엔 니케아 신조를 따르는 니케아파와 아리우스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한편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도 사망했다. 그를 이어 콘스탄티우스 2세라는 황제가 즉위했는데, 그는 즉위한 직후 이 거대한 분열을 멈추고자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한곳만의 편을 들기보다는 두 파인 니케아파와 아리우스파 간의 합의점을 찾아 화해시키고자 하였다. 다만 문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굳건히 버티는 아타나시우스였다. 니케아파의 주도자급이었던 그는 아리우스파와의 어떠한 대화도 거부했고 삼위일체라는 진리만을 완강히 내세웠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이 거슬리는 아타나시우스를 축출하고자 그를 반역혐의로
체포하려 하였다. 356년 콘스탄티우스는 군대를 보내 아타나시우스가 성찬예배를 진행중이던 테오나스 교회를 급습했다. 교회에 화살이 날아들자 보좌신부들은 겨우 아타나시우스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다. 아타나시우스는 콘스탄티우스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로 떠나 사막에 은신했다. 그는 콘스탄티우스의 군대를 피해 이곳저곳으로 숨어다니는 생활을 반복하게 되었다. 완전히 축출하진 못했으나 임시로나마 아타나시우스를 알렉산드리아 교회로부터 쫓아낸 콘스탄티우스 2세는 357년 시르미움에서 공의회를 소집해 선친인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소집한 니케아 공의회의 니케아 신조를 배격하고 아리우스파의 주장이 반영된 새로운 신조를 제정했다. 니케아파 주교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많은 주교들이 이 신조에 서명했다. 온건 아리우스파와 콘스탄티우스 2세가 승리한것이다. 이후에도 아리우스파들은 로마제국에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니케아파와 싸웠다.
•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강경책, 로마에서의 아리우스파의 몰락
하지만 이럼에도 아리우스파와 니케아파의 논쟁은 끊이질 않았다. 그들은 이후 약 20년간 계속해서 논쟁을 벌이며 격렬히 싸웠다. 그러나 이후 아리우스파에게 큰 불행이 찾아오니, 동방에서 강력한 니케아파의 지지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즉위한것이다. 그는 380년, 아리우스파를 제국에서 완전히 금지해버렸다. 테오도시우스 황제 아래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비롯한 모든 동방의 교회들이 니케아파로 돌아섰다. 아리우스파들은 제국 내에선 전부 쫓겨나게 도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이 일이 일어난 직후,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서 공의회를 소집하고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했으며, 아리우스파를 배척하기로 결의했다. 그렇게 로마제국 내에서의 아리우스파는 몰락했다. 하지만 아리우스파가 망한건 아니다. 애초 아리우스파는 게르마니아에서 뛰어난 선교사 울필라스에 의해 선교가 진행되며 대부분의 게르만족이 아리우스파를 믿게 되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나서는 아리우스파를 신봉하는 게르만계 왕국들이 대거 건설되며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496년부터 게르만계 왕국들이 멸망하거나 정통파 기독교로 개종하며 아리우스파는 완전히 절멸해버렸다.
( III 네스토리우스파의 분열 )
앞서 설명한 아리우스파는 꽤 오랜기간 존속했으나 결국 정통파의 탄압 아래 살아남지 못하고 5세기 말에, 완전히 절멸하게 되었다. 하지만 네스토리우스파는 달랐다. 이들은 정통파에 의해 추방되었지만 엄청난 생명력으로 오랜 기간을 버텨내 현재까지도 존속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 네스토리우스파는 어떻게 분열되었고 어떻게 현재까지 살아남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교회는 아리우스파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 더욱 더 확실히 해야할것이 하나 남았으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에 대해 정확히 정의하는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교회에 다시금 논쟁을 불러 이르켰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진 두 본질인 인성과 신성에 대해서 말이다.
이 논쟁을 시작한것은 바로 안티오키아 출신의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네스토리우스이다.
• 네스토리우스와 성모론 논쟁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인 네스토리우스는 니케아파로서 강력한 아리우스파의 반대자였다. 그는 아리우스파 교회에 불을 지르고 교인들을 추방시키려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정통 니케아파와는 사뭇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비롯한 기존 정통 니케아파 교회에선 3세기경부터 계속해서 마리아에게 테오토코스(하나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부여하며 성모론 교리를 정통신앙으로 받아들여 굳건히 믿고 있었다. 예수가 곧 하나님이라는 본질을 가지니 따라서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도 하나님의 어머니로서 공경을 받아야 한다는 셈이다. 하지만 네스토리우스는 이에 반대하며 성모론을 논박했다. 네스토리우스는 안티오키아 출신으로 안티오키아 학파의 사고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그는 안티오키아 학파의 전통적인 주장인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엄격히 구분되며 두 본질은 느슨히 연합한다는 이성론을 따랐다. 또한 그는 예수의 신성보다는 인성을 더욱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마리아 또한 ‘인간’ 예수를 낳았으니 테오토코스(하나님의 어머니)가 아닌 크리스토토코스(그리스도의 어머니)라 불려야한다고 설파했다. 이에 성모론을 정통 신앙으로 믿고있던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신자들은 강하게 반대하며 저항했다. 어떤 이들은 네스토리우스가 설교할때 <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 > 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고 전해진다. 또 대성당 벽에는 교회에서 이전에 내쫓긴 이단자 사모사타의 바울로와 네스토리우스가 같다는 현수막이 걸리기도 했다. 마리아를 깊이 공경하던 콘스탄티노플의 수도사들도 네스토리우스에게 저항했다. 이에 네스토리우스도 이들을 곧장 투옥하고 곤장을 맞도록 하였다.
처음엔 성모론에 대한 반박으로 시작된 논쟁이 그리스도론에 대한 논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네스토리우스가 가진 그리스도에 대한 사고에 반대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말이다.
• 반대자 키릴로스
콘스탄티노플에서 계속해서 저항이 생기자 네스토리우스는 자신의 주장을 많은 사람에게 알릴 생각으로 자기가 한 설교를 책자로 출간하여 사방에 뿌렸다. 그는 동시에 교황에게까지 책자를 보냈다. 그로 인해 네스토리우스는 얼마가지 않아 더 강력한 반대자를 마주치게 되었는데 바로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인 키릴로스이다. 그는 네스토리우스와는 달리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은 하나로 결합한다는 양성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으로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지도자며 또한 부유하고 유능한 신학자였다. 그는 네스토리우스의 소식을 전해듣고 부활절에 이집트에 있는 모든 수도자들에게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에 반대하는 내용의 서신을 뿌렸다. 이 서신은 또한 네스토리우스에게 전해졌고, 이 둘은 서로를 맹렬히 비난하며 싸웠다. 이들의 싸움은 교리적 문제를 넘어서 교회의 권력에 대한 싸움으로까지 번졌다.
이 둘은 각각 초기기독교의 5대 교회중 하나인 콘스탄티노플과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지도자들로, 이 둘이 맞붙기 시작하면서 논쟁은 이제 로마 제국 전역으로 확대되어 공론화된다.
• 그리스도의 본질에 대한 논쟁
먼저, 네스토리우스는 예수의 두 본질, 신성과 인성은 엄격히 구분되며 이 두 본질이 느슨하게 "연합"된 상태로 각각 두 위격을 형성한다는 이성론을 주장했다. 반면 키릴로스는 양성론을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이러하다. 예수는 하나에 존재 속에 인성과 신성이라는 두 본질이 서로 "결합" 하며 하나의 위격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를 정리해보면
네스토리우스 :: 하나의 존재 / 두 본질(신성과 인성) / 두 위격 / 두 본질이 서로 ‘연합’
키릴로스 :: 하나의 존재 / 두 본질 (신성과 인성) / 한 위격 / 두 본질이 서로 ‘결합’
이렇게 나타난다. 차이가 나타나는 부분은 ‘연합’이냐, ‘결합’이냐의 차이이다.
얼핏 보면 차이가 별로 없어보이나, 둘은 분명하게 다르다. 네스토리우스는 신성과 인성은 엄격히 구분했고, 키릴로스는 그러지 않았다. 우리가 믿고있는 정통신앙은 키릴로스의 양성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키릴로스의 주장을 더 쉽게 정리하면, 예수께선 완전한 하나님이자,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시라는 것이다.
• 에페소스 공의회
우리는 앞서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의 분열을 살펴보았고,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이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니케아 공의회를 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네스토리우스파의 분열도 마찬가지다. 당시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테오도시우스 2세는 431년, 에페소스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평생 수도자의 삶을 살아왔던 네스토리우스에 반해
키릴로스는 대단한 정치가였고, 공의회의 주도권은 키릴로스가 잡는다. 사실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딱히 네스토르우스를 지지할 마음이 없었다. 그가 공의회를 소집한 목적은 제국의 통합이었고, 콘스탄티노플 내에서도 반발이 많은 네스토리우스파를 받아드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공의회는 처음부터 키릴로스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더군다나 네스토리우스의 동지들인 안티오키아와 에데사의 주교들은 악천후로 인해 에페소스에 도착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들과 키릴로스는 이런것들을 싸그리 무시하고 공의회를 진행시켰다. 키릴로스는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몰아갔고, 네스토리우스를 배격하는것으로 공의회는 끝났다.
• 공의회 이후, 멈추지 않은 분열
한편 키릴로스에 의해 공의회가 의도적으로 빨리 시작되며 공의회에 참석하지 못한 네스토리우스의 지지자들인 오리엔트의 주교들과 안티오키아의 요한이 에페소에 뒤늦게 도착했다. 요한은 그동안의 정황을 전해듣고 크게 분노하여 자신이 묵고 있던 숙소에서 대립 공의회를 열었다.이 공의회에는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는 주교 46명이 참석하였다. 그들은 에페소 공의회의 결의를 단죄하고 키릴로스를 논박했다. 더 나아가 키릴로스를 비롯한 에페소 공의회에 동조한 자들을 전부 파문했다. 한편 뒤늦게 에페소에 도착한 로마교회의 주교들은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하고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임을 재확인했으며 네스토리우스의 이성론이 이단임을 선포했다.
• 네스토리우스파, 동로마 제국에서의 절멸
공의회를 통해 쉽게 분쟁을 해결하리라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생각과는 달리, 공의회는 오히려 더 격한 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황제는 계속되는 분란의 책임을 네스토리우스와 키릴로스 둘 모두에게 물기로 결정했다.
그는 네스토리우스와 키릴로스 둘 모두 파면시키고 체포했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이 키릴로스는 경험이 많은 정치가였다. 그는 자기가 가진 권력과 막대한 뇌물을 통해 풀려났다. 하지만 네스토리우스는 그런 힘이 없었고, 결과적으로는 키릴로스가 승리한 셈이 되었다. 그리하여 네스토리우스는 2년 뒤
키릴로스에게 굴복했고 네스토리우스는 아라비아의 파트라로 강제유배를 가세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이집트에서 죽었다. 네스토리우스뿐 아니라 오리엔트 주교들도 마찬가지로 파면되었다. 그렇게 네스토리우스파는 동로마 제국에서 절멸하게 되었다.
• 동방으로의 이동, 생존의 역사
네스토리우스파는 결국 동로마 제국에서 배척 당했지만 아리우스파가 로마제국에서 쫓겨난 이후 게르만족들에 의해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이했듯 네스토리우스파도 마찬가지로 다른곳에 정착했다. 그들은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쫓겨난 이후 바로 옆에 있던 페르시아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꽤나 평화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페르시아인들에게 활발히 선교를 진행했다. 이후 그곳에서 전성기를 맞아 페르시아의 인구 절반이 네스토리우스파 교도가 될만큼 번영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이후 그들은 중앙아시아로까지 뻗어나갔고, 당나라로까지 전파되었으며 신라에까지 도달했다는 말도 있다. 그들은 동양에서 “경교”라고 불렸다. 그 옛날 중국지역에 기독교가 들어왔다는건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수 없다.
이후에는 놀랍게도 몽골제국에도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전파되어 교회가 세워졌다. 몽골제국은 동쪽의 한반도부터 서쪽의 유럽까지 정복하여 거대한 영토를 지배했으며 그로 인해 서방 유럽국가들과 동양의 국가들의 교류가 진행되기도 했다. 이는 기독교에도 큰 영향이 있었으니 몽골의 네스토리우스파 교도들은 몽골제국에 방문한 가톨릭 교회의 신부들과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함께 토론을 즐기기도 했으며, 그들과 함께 연합하여 다른 이교도 성직자와 논쟁을 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수가 없다. 8백년 전 분열된 이들의 후손들이 다시 모여 토론을 한다는게 정말 신기하다. 이후 네스토리우스파 교도들의 본거지였던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 지역에서 이슬람 교도들이 득세하며 그들에 의하여 많은 탄압을 받아 급격히 쇠퇴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강한 생존력으로 살아남았다. 그들은 분열 이후 약 천년 가까이 생존하게 되었는데, 하지만 그들도 세력이 점점 줄어들던 터이기에 앞으로 존속할수 있을지에 대해선 많은 염려가 있었다. 그렇기세 그들은 해결책을 찾고자 했는데, 이것 때문에 16세기에는 네스토리우스파 내에서 신파와 구파로 나뉘게 되었다. 신파는 가톨릭에 융화되어 살아남고자 하였다. 그래서 기존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들중 일부는 독립하여 가톨릭으로 일치했고 그들은 지금의 칼데아 가톨릭이 되었다. 한편 구파는 나름대로 잘 생존하였고 그 안에서도 둘로 갈라지며 지금의 아시리아 동방교회와 동방고대교회로 존속하게 되었다.
( IV 단성론파와 합성론파의 분열 )
네스토리우스파가 등장하여 동로마 제국에서 날뛰는 동안, 키릴로스와 함꺼 네스토리우스에 대항하는 또다른 세력이 생겨났다. 그들은 신성과 인성과 같은 본성이 나뉘어지지 않고 그저 하나의 본성으로 합쳐져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도 둘로 나뉘는데, 첫번째는 에우티케스의 단성론이며, 두번째는 합성론이다. 간단한 차이를 설명하자면 에우티케스의 단성론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자연스레 신성에 융화되어 사라져 신성만이 남게되었다는 것이며, 합성론은 신성과 인성, 두 본성이 하나로 완전히 어우러져 새로운 하나의 본성을 형성한다는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단성론파와 합성론파들에 대해 살펴보자.
• 에우티케스, 극단적인 단성론자
네스토리우스가 마리아론과 그리스도론을 가지고 콘스탄티노플에서 거대한 분열과 논쟁을 불러일으키던 무렵,
콘스탄티노플에선 또 한명의 반대자가 나왔으니, 바로 대수도사제 에우티케스였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권력자로
수도자 300명을 거느리고 있던 자였다. 그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에 대해 단성론을 내세우며 반박했다. 그리스도에겐 단 하나의 본성인 신성만이 존재한다는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마치 포도주를 바다에 부으면 서서히 사라지듯이 그리스도의 인성도 신성에 흡수되어 사라지고 단 하나의 본성, 신성만이 남는다고 한다.
이 주장의 문제는 예수의 인성이 굉장히 의문시 된다는 점이었다. 이 에우티케스의 주장은 448년, 콘스탄티노플 지방회의에서 드류라이온의 주교 에우세비오에 의해 이단으로 고발당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인
플라비아노스는 이들을 이단으로 단죄하고 파문했다. 에우티케스는 그 즉시 콘스탄티노플의 대수도원장직을 잃게 되었다. 한편 총대주교 플라비아노스는 이들을 파문한 직후
로마의 교황인 레오 1세에게 이 일에 대한 편지를 보내게 된다.
• 디오스코로스의 도적교회회의
에우티케스는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테오도시우스는 에우티케스의 호소를 받아들여 에페소스에서 공의회를 소집하겠다 하였다. 449년, 공의회가 열렸다. 공의회의 의장은 네스토리우스에 맞선 키릴로스의 후임인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디오스코로스였다.. 그의 목표는 에우티케스의 복직과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플라비아노스를 파면하는것이었다. 교황 레오 1세는 직접 참가하지 않고 서신과 특사를 파견했다. 에우티케스와 디오스코로스는 플라비아노스를 비롯하여 그의 지지자들을 네스토리우스파로 몰아세우며 단죄했다. 교황의 특사들이 이에 대해 항의하려 하였으나 의도적인 방해로 이들의 발언은 전부 묻혀버렸다. 한편 플라비아노스는 항의하기 위해 제단에 나아가려 했으나, 디오스코로스의 군대들에 의해 붙잡혀서는 모욕을 당하며 끌려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군인들에게 폭행을 당하고서는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후 플라비아노스는 유배를 가던 도중 리디아의 히피다라는 곳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소식을 전해들은 로마의 교황 레오 1세는 그 즉시 격노하였고, 이 로마에서 지방회의를 열어 이 공의회를 단죄하고 ’’도적교회회의’’라고 명명했다.
• 합성론자 디오스코로스에 대한 오해
디오스코로스라는 인물은 꽤나 중요하다. 그는 둘째 에페소스 공의회, 곧 '도적교회회의'를 주도했고 에우티케스를 다시 복직시킨 인물이다.
그래서 디오스코로스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은 사실 콥트교회와 정통교회 둘 다 다르다. 보통 기존 정통교회의 역사가들은 대부분 디오스코로스라는 인물을 설명할때 에우티케스의 주장을 따랐고 에우티케스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이었던 인물로 묘사한다. 하지만 실제 콥트교회의 역사가들은 다른 주장을 펼친다. 그들이 말하는 역사란 이러하다. 디오스코로스는 우리가 도적교회회의라고 부르는 그 공의회 이후, 자체적으로 콥트공의회를 개최하여 에우티케스의 주장을 단죄하였고, 그는 에우티케스의 단성론 대신 합성론을 내세웠다.
강생(降生, Incarnation)하신 우리 구세주의 인성(人性, Humanity)과 신성(神性, Divinity)은 마치 쇠붙이와 백열이 결합한 것처럼 절대 한순간도 서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신성과 인성이 서로 떨어질 수 없다 하더라도 그 두 본성의 결합이 쇠붙이와 백열의 결합처럼 혼합이나 융합, 변화는 아닙니다. 이 결합은 사도 요한이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고 하신 것과 같은 의미로 ‘강생하신 로고스이신 하나님의 하나의 본성’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나는 다만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인 정통 교회의 신앙을 변함없이 고수할 뿐입니다. 에우티케스나 다른 그 누구도 나로 하여금 이 거룩한 신앙을 저버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디오스코로스
윗 글에서 볼수 있듯 인성 자체가 신성에 녹아들어 사라졌다고 주장한 에우티케스와 달리 디오스코로스와 합성론파들은 정통교회와 별 다를바 없는 그리스도론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개인적인 의문은 자신과 주장이 달랐던 단성론자 에우티케스의 복직을 어째서 도왔냐는 점이다.
• 칼케돈 공의회, 단성론파들에 대한 단죄
한편 단성론파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450년, 급사했다. 전세는 완벽히 뒤바뀌었다. 한편 그에 이어서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는 마르키아누스가 즉위했고 교황 레오 1세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마르키아누스에게 단성론자들을 전부 단죄할것을 강력히 요구했다.빨리 제국의 분열을 봉합하고자 했던 황제 마르키아누스는 교황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고, 451년, 공의회를 소집했다. 공의회는 바로 칼케돈에서 열렸다. 칼케돈은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서 보스포루스 해협을 두고 바로 건너편에 있는 도시였다. 이 공의회는 사실 지금까지 다루었던 여러 공의회중에 가장 중요한것이다. 우린 지금까지 니케아 공의회와 에페소스 공의회를 다뤄왔다. 이 두번의 공의회를 통해 교회는 두번 분열되었다.
이 칼케돈 공의회는 지금까지 논의된 모든 사안들을 다시 한번 정립하는 공의회기도 했는데, 동시에 이 공의회로 합성론파, 즉 오리엔트 교회들은 분열되었다. 그래서 아리우스파, 네스토리우스파, 단성론파, 합성론파를 전부 ‘’ 비칼케돈파’’로 통칭하며 주류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를 ‘’칼케돈파’’라 통칭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공의회의 대표적인 결정들을 살펴보자. 공의회의 목적 자체부터가 단성론자들을 단죄하는것이기에 에우티케스는 다시 한번 이단으로 결의되었다. 또한 네스토리우스파에 대한 단죄도 다시금 이루어졌다. 디오스코로스에 대해서는 이단 에우티케스를 사면한 도적교회회의의 의장을 맡았기에 자연스럽게 ‘단성론자’라는 딱지가 붙어 비난을 받게 되었다. 한편 칼케돈 공의회에는 아직 알렉산드리아의 대표가 참석하지 않았는데 공의회는 알렉산드리아의 동의 없이 결의를 내버렸다. 또한 디오스코로스 역시 파면되었다. 합성론을 따르던 콥트교회인들은 이 공의회을 사기라 생각했다.
또한 동로마 제국의 정부에서 칼케돈파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를 서임하자, 콥트교회의 평신도들은 자기들이 직접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를 뽑으며 칼케돈파와 분열했다. 그래서 이때를 기점으로 알렉산드리아에는 칼케돈파
총대주교와 콥트교회의 총대주교, 이렇게 두 총대주교좌가 공존하게 되었다.
• 오리엔트 정교회, 지금까지의 합성론파들
한편 공의회의 결과를 받아드리지 못하는건 이집트의 콥트교회뿐이 아니었으니, 아르메니아 교회도 마찬가지로 공의회의 결의를 거부하고 합성론파로 오게 되었으며, 시리아와 에티오피아의 교회들도 공의회의 결의를 부정하고
합성론파 교회로 오게 되었다. 이 합성론파 교회들을 전부 통틀어 ‘’ 오리엔트 정교회 ‘’ 라 부르고 있다. 그래서 초기교회의 가장 큰 분열은 칼케돈 공의회로 인하여 일어나게 되었다. 그럼 이제부터 칼케돈 공의회의 결의를 부정하고 떨어져 나간 오리엔트 교회들이 이후 어떻게 살아남아 현대까지 명맥을 이어왔는지 조금이나마 알아보자.
일단. 오리엔트 교회들은 네스토리우스파나 아리우스파, 단성론파와 같은 이단도 아니라는 점을 꼭 명심해주길 바란다. 사실 오리엔트 교회는 대부분 많이 박해를 겪어왔다. 특별히 오리엔트 정교회의 주축이 되었던 콥트교회는 정말 어렵게 살아남아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다들 알다시피 이집트 지역은 얼마 안되어 이슬람 제국에 의해 정복 당했다. 초반에는 아바스 왕조와 우마이야 왕조를 거치며 종교의 자유를 누릴수 있게 되었으나, 12세기 말까지 이집트엔 점점 이슬람 교인들의 비율이 증가하기 시작했고 콥트교인들은 극단적인 이슬람교인들로부터 박해와 각종 폭력에 시달려야했다. 특히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턴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들에 의해 박해가 급증하여 is에게 21명이 참수되기도 했으며 계속해서 콥트교인들에 대한 집단학살이 자행되기도 했다.
지금은 많은 콥트교인들이 모카탐이라는 쓰레기 마을에서 쓰레기를 치우며 살아가고 있다. 사실 콥트교회뿐만 아니라 중동지역에선 이슬람이 크게 득세하면서 대부분의 오리엔트 정교회들이 박해에 시달리고 있는 실상이다. 시리아 교회도 마찬가지로 is에게 테러 위협을 계속해서 받고 있는 실상이다. 세계 정세가 계속 불안해지고 특별히 중동지역에서 종교문제로 계속해서 분쟁이 터져나오고 있는 만큼 이들의 상황도 점점 어려워지지 않을까 싶다.
결론
• 교파들의 분열과 갈등에 대해.
지금까지 나는 이 글에서 313년부터 451년까지 초기 기독교에서 일어난 여러 분열과 사건들을
다루어 보았다. 글에서 반복적으로 말하지만 나는 교회의 역사가 분열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아리우스를 단죄하는 것에선 의견이 일치했던 네스토리우스와 니케아파는 그리스도론을 두고 네스토리우스파와 키릴로스파로 분열되었고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하는것에선 의견이 일치했던 오리엔트 교회는 이후 또다시 그리스도론에 대한 의견차이로 인해 정통파와 갈라졌다. 사실 이 이후에도 중세를 거치며 교회는 더 크게 분열했다. 본디 그리스도께서 하나로 세우신 교회가 이리 분열된것은 꽤나 안타깝게 생각한다. 다만 꼭 이 분열이 나쁜거라고 말하기는 어렵긴 하다. 우리가 믿고 있는 개혁교회 신앙도 결과적으로는 종교개혁이라는 일종의 분열로 탄생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교회는 분열됨으로서 개혁되었고, 각 교파들만의 특색을 가지게 되었으며, 발전해왔다. 하지만 분열로 인한 싸움은 여전히 현대에도 끊이질 않고있다. 성직자부터 평신도들까지 인터넷에서도 현실에서도 교파간의 교리적인 논쟁으로 시작된 감정싸움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각 교파들은 서로 자기들의 교회가 진정하고 참된 정통 교회라고 주장한다. 사실 나는
어떤 교파가 옳고 어떤 교파가 틀렸다고 말할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로 잘 알려진 영국 성공회 출신의 영성가 CS.루이스는 ‘’기독교 세계 내부에 아무리 극심한 분열이 있다 해도 비 기독교적 신념들 사이에 있는 간극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바 있다. 이처럼 나도 교파들은 교리와 예배형식 같은 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곤 하지만 비기독교적 신념에 비하면 교파들간의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교파들간의 갈등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들어오고자 했던 불신자를 혼란스럽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물론 어떤 교파의 교리가 성경적으로 말이 안된다고 생각할수는 있겠다. 그래도 그들의 견해를 논박하는것과 그들의 신앙을 정죄하는건 큰 차이가 있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면에선 좀 조심하면 좋겠다. 천국에서 하나님에게 ‘어떤 교회가 참된 교회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하나님께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시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쓰고 싶은 내용은 사실 이것의 3배 정도는 됐고 또 이것보다 더 많이 적었지만 분량의 문제로 아쉽게도 ‘’ 초기기독교’’ 부분을 제외하곤 전부 잘라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시작부터 끝까지의 교회역사를 전부 다뤄보고 싶다.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끝까지 읽어준 사람이 있다면 감사의 말씀 전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