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위한 사상 강좌> 네번째로 우리 나라에 사티쉬 쿠마르가 다녀갔습니다.
읽어볼 만한 글이기에 옮겨놓습니다.
'세상의 두려움은 내면의 두려움보다 크지 않다'는 말이 가슴에 와서 콱 박힙니다.
"한 아름다운 사람이 '여기 이곳'을 다녀갔습니다"
최성각(풀꽃평화연구소장)
사티쉬 쿠마르Satish Kumar가 한국을 다녀갔습니다. <21세기를 위한 사상강좌> 네번째 손님으로 내한했던 사티쉬 쿠마르는 원불교 교당에서 가졌던 4월 29일 대중강연과 그 다음날 오후 에너지대안센터에서 가졌던 토론회를 마치고, 5월 1일 오늘 출국합니다.
세계적인 여행가이기도 한 그는 이번에 캐나다를 경유해 미국으로 간다고 들었습니다.
그동안 '사상강좌'에서 모셨던 네 분(도타 기요시, 볼프강 작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사티쉬 쿠마르)의 연사들 중에 특히 사티쉬 쿠마르는 제게 깊은 감동을 남겼습니다.
앞서 모셨던 분들이 '지식의 사람들'이었다면, 사티쉬 쿠마르는 아마 '행동의 사람'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앞의 사람들이 '머리의 사람들'이었다면, 사티쉬 쿠마르는 '몸의 사람'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지식의 끝자락은 새로운 지식에 의해 끝내는 허방을 짚은 것처럼 허망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몸을 투신한 행동의 삶은 거기에 인간의 냄새와 체온과 펄떡이는 심장이 스며 있기 때문에 깊은 감동으로 오래오래 남는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사티쉬 쿠마르는 1936년, 인도 라자스탄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 나이로 예순아홉 노인네입니다. 태어날 때 어머니는 느리게 걷는 코끼리를 올라타고 길을 걷는 꿈을 꿉니다. 코끼리의 걸음이 워낙 느려 어머니의 마음은 조급해졌습니다. 그 꿈을 들은 이웃이 "뱃속의 아기가 너무 빨리 걷는 것을 원치 않는 모양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해몽자가 덧붙이기를 "이 아기는 끝없이 걸을 것이다. 그렇지만 목적지에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 예언대로 사티쉬 쿠마르는 평생 걷게 됩니다.
김종철선생님은 "걸어서 출세한 사람이 둘 있는데, 그 한 사람이 비노바 바베이고, 또 한 사람이 여기 오신 사티쉬 쿠마르선생이 아니겠는가"라고 재미나게 그를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비노바 바베가 아니라 간디라 말했는지 아리송합니다. 모두 잘 걸었던 사람들이니 상관없기는 합니다.
그는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 방랑하는 자이나교 승려가 됩니다. 자이나교에서는 살아있는 모든 물질이 영혼과 깨달음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생물체를 죽이지도 먹지도 않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심하게는 공기 속의 미생물을 먹게 될까봐 입에도 붕대를 잔뜩 감고 사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길을 걸을 때에도 허리를 구부려 벌레를 밟을까 발 앞을 솔로 쓸어내며 걷는 극단적인 사람들이지요. 그런 극단적 수행을 통해 자이나교는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깊은 지혜를 간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사티쉬 꾸마르는 자이나교 승려생활이 사람을 억압한다고 느낍니다. 마침 간디의 자서전을 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간디의 자서전을 만나기 전까지 세상은 그에게 매우 고약한 곳이고, 죄와 범죄로 가득한 감옥 같은 곳이고,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미워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간디를 만나자 세상은 아름답고 영적이고 진실한 곳이고, 비폭력적 가치로 둘러싸인 공동체였던 것입니다. 또한 세상은 분리될 수 없고, 통합된 아름다운 세계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다른 세상을 맛본 그는 자이나교에서 야밤에 도망쳐나온 뒤 마침 지주로부터 땅을 얻어 빈자들에게 나누는 토지개혁운동을 하던 비노베 바베를 따라 나섭니다. 간디는 비노바 바베에게 영향을 주었고, 비노베 바베는 사티쉬 꾸마르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성장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90세의 나이로 핵무기 철폐를 주장하다가 감옥에 갇힌 버틀렌드 러셀의 기사를 우연히 마주치고, "아아, 나는 뭐하고 있지?", 하는 부끄러움에 '나도 평화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좋은 생각이 들면 바로 행동에 옮기는 그는 무일푼으로 인도를 출발해 사막과 험한 산과 폭풍우와 눈 속을 걸어 유럽과 미국까지 8,000마일(1만킬로)에 달하는 평화순례를 감행합니다. 그런 혹독한 평화운동의 대가로 프랑스에서는 감옥에 갇히고, 미국에서는 총에 맞을 위기에 처하기도 하면서 핵무기를 보유한 4개국 지도자들에게 ‘평화의 차’를 전달합니다. 그것은 '핵무기를 떠뜨리기 직전에 차를 한 잔 마시면서 그 짓이 옳은지 그른지 곰곰 생각해보라'는 메시지였습니다.
그후 '소생Resurgence'이라는 잡지의 편집 일을 맡은 1973년부터 영국에 정착해 살면서 1991년에 설립된 슈마허 칼리지의 프로그램 기획자로 일하며, 농사 짓고, 갈증이 심한 사람들 만나 좋은 이야기를 나누며 살고 있는 이가 바로 사티쉬 꾸마르였습니다.
짦은 이틀간, 그가 남긴 메시지는 깊고 강렬했습니다. 굳이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사람이든 자연이든 공경의 마음을 지녀라. 평화를 위해 많이 걷고, 자신을 위해 많이 웃고 적게 먹고, 위대한 스승인 자연을 통해 끝없이 배워라"였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겸손한 소박성'을 지니고 살아가라였습니다. 그는 칠순을 앞둔 노구인데도 어떤 젊은이보다 더 활력에 차 있었습니다. 헬스클럽이나 골프장에서 단련된 '허약하고 느끼한 활력'이 아니라 그것은 생기였습니다. 두 눈은 반짝였고, 턱은 안정되어 있었으며, 누구에게나 친절했고, 모든 질문에 진지했으며, 온 영혼을 다해 사람들을 대했습니다. 가히, '오늘 한 사람을 만났구나', 하는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문정현신부님께서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다'고 하자, 그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낙관적이지 않으면며 안 된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위기의 순간에 우리는 더 많은 인내심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 행동의 한계를 이해해야 한다. 하룻밤에 모든 것을 다 얻을 수는 없다. 긴급한 상황에서는 긴급하게 최선의 행동을 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생명을 던질 준비를 해야 하며 이때 두려움은 금물이다. 하지만 우리의 행동과 희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운명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행동은 통제할 수 있다. 당장 행동해야 한다. 가장 단순한 행동은 수천명이 걷는 일이다"라고 답했습니다. 할 수 있는 한 그런 것 다 해보았고, 지금도 평화유랑단과 함께 길거리에서 평화운동을 하고 계시는 문신부님은 '새로울 게 없는 소리'라고 느끼시는 얼굴이셨습니다. 그것은 저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자, 자신의 말이 몸으로 살고 있는 한국사회의 일부 싸움꾼들에게 매우 공허하게 전달된 것을 느낀 사티쉬 꾸마르는 "행동 자체가 어려운 일은 아니다. 문제는 행동에 대해 생각하고, 행동에 앞서 늘 걱정하는 것이 문제다. (세계의 변화에 대한) 조급함은 더욱 문제다. 간디는 늘 평안한 얼굴이었다."라고 답했습니다. 30일 가졌던 토론회장에서 존경하는 문신부님과 사티쉬 꾸마르가 나눈 긴장된 대화는 아주 볼 만했습니다. 저는 "이 땅에서 감행된 삼보일배를 비롯한 수많은 세계적 수준의 순도높은 생명운동에 대해 자부심을 가진다"고 두 분의 대화에 덧붙였습니다. 우리 또한 우리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다름아니었습니다.
그가 걷기로 작정한 이후, 파키스탄으로 들어갈 때였습니다. 한 친구가 지금보다 더 날카롭게 대치중인 적국에 무일푼으로 걸어들어가는 그를 만류하면서 걱정했습니다. 그가 파키스탄에 들어가는 순간 목숨을 잃거나, 설사 살아서 들어갔다고 해도 굶어죽을까봐 친구는 먹을 것이 든 보따리를 선물합니다. 사티쉬 꾸마르는 음식보따리를 거절하면서 말합니다. "이 보따리는 파키스탄 사람들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의 보따리이다. 내가 그들을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들의 땅을 통과할 수 있겠는가?"...그리고 파키스탄으로 들어간 그는 입국하자 그를 알아보는 한 파키스탄인의 집의 초대되어 몇 시간 후 그집의 저녁식탁에 앉게 됩니다. 세상의 두려움은 내면의 두려움보다 크지 않다는 것을 그는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김종필'이라는 노정객은 대기업으로부터 10억원의 돈을 받아 감옥에 가기 직전이고, 다른 뇌물사건으로 수사를 받던 사람은 한강에 투신해 또 죽어버렸으며, 용천 폭발사고로 화상을 입은 어린이의 끔찍한 사진을 매일 만나고 있는 이 고통스러운 한반도에 진지하고 아름다운 '한 사람'이 다녀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