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권의 복음서, 하나의 복음 이야기
프란시스 왓슨 지음 | 이형일 역
신약성경의 복음서는 왜 한 개가 아니라 네 개인가? 그리고 왜 네 개의 복음서는 각각 서로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일까? 이런 의문은 지난 200년 동안 수많은 신약학자들의 관심과 눈길을 사로잡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비평 방법들이 강구되었다. 하지만 복음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존의 많은 저작들이 주로 복음서의 기원과 순서에 초점을 맞췄다면, 프란시스 왓슨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복음서의 형태와 구조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등 네 개의 복음서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의 복음이 “~에 의한 복음”의 모습을 통해 네 개의 형태로 존재하는, 즉 사중복음서 이론을 제안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시작한다. 저자가 보기에 네 개의 복음서는 각 복음서 초두에 중심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즉 신약의 복음서들은 구약성경 에스겔서와 신약성경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유명한 ‘하나님 어좌 환상’에 나오는 네 생물의 모습처럼 ‘사람’, ‘사자’ ‘소’. 독수리‘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마태복음 1장은 ’족보‘를 통해서 사람으로 오신 예수를, 마가복음 1장은 광야에서 들짐승과 함께 있는 예수의 모습을 통해 사자의 얼굴을, 누가복음은 처음과 끝에서 성전의 제사 제물로 바쳐지는 소의 얼굴을 한 예수를, 요한복음은 태초부터 종말까지 높은 곳에서 하나님의 구속사 전체를 통찰하는 독수리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렇듯 신약성경 복음서는 하나의 복음을 다양한 모습을 띤 네 개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사중 복음 양식을 통해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으로 오신 모습을 풍성하게 증언한다.
그리고 한 분 예수에 대한 복음을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하고 풀어내는 네 개의 복음서 이야기들은, 네 개의 복음서가 각기 다른 삶의 정황에서 자신들의 신앙적-신학적 필요에 의해 촉발되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복음서 이야기들은 순전히 역사적인 시각뿐 아니라 신학적-문학적 관심사를 갖고 읽어야 한다.
더 나아가, 네 개의 서로 다른 강조점을 통해 하나의 복음을 증언하는 복음서의 기능은 복음서의 서론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결미 부분에 서술된 ‘수난 기사’(예수의 체포, 재판, 고문, 처형 이야기)를 통해 더욱 강력하게 메아리친다. 각각의 복음서는 서술 과정에 나타나는 차이점을 극복하고 결말 부분에 이르게 되면 놀라울 정도의 일치점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아라는 주제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따라서 복음서는 외면적 혼동과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에 있어 놀라울 정도의 질서와 조화를 잘 보여준다. 프란시스 왓슨은 이 점을 더욱 실감나게 서술할 목적으로, 초기 교회의 위대한 저술가인 에우세비오스가 개발한 복음서의 상호 시스템을 적극 활용하여 복음서가 얼마나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끝으로 저자는 단순히 학문적 관심사에 국한하여 복음서의 신학적 통일성을 주창하는 데 머물지 않고 이 사실이 함의하는 바가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성찰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는 역사적 예수의 초상에 대한 신약의 증언들, 특히 복음서의 증언들이 ‘진리’이기 때문에 그것을 접하는 사람들에게 신뢰와 충성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서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신학적 지식을 제공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직접 인격적 관계를 맺고 새로운 생명을 수여하실 뿐 아니라 그 결과로써 우리에게 전혀 다른 삶을 살도록 촉구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복음서 이야기는 우리의 삶의 총체적인 변혁을 요구한다.
1. 첫 번째 복음서: 유대인 예수
마태복음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이유는 이 복음서가 독자들에게 유대 배경에서 자라고 사역한 유대인 예수를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갑자기 불현듯 튀어나온 인물이 아니다. 그는 다윗의 자손이자 아브라함의 자손, 곧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는 성경 전체 이야기의 영향력 아래 있는 한 유대인이다. 마태복음은 이방인 독자와 유대인 독자를 모두 염두에 둔다. 이 복음서는 유대 계보로 시작하여 모든 민족으로 제자 삼으라는 명령으로 끝맺는다. 그럼에도 이방인 독자는 유대인 예수, 곧 유대 성경에 담긴 보화(율법과 예언서)를 온 세계에 드러내 보이는 예수의 세계로 안내를 받는다.
2. 두 번째 복음서: 길을 예비하다
이 본문 가운데 첫 번째 본문(출애굽기)은 세례자 요한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스라엘 백성은 천사의 인도와 보호를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는다. 여기서 “사자”는 그저 어떤 천사다. 두 번째 본문(말라기)은 직접 연관이 있다. 이 예언서 끝부분에서 약속된 사자는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지만, 머지않아 곧 돌아올 엘리야와 동일시된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누가복음에서는 이러한 복잡한 문제가 완전히 사라진다. 요셉은 베들레헴을 방문하고 예수가 탄생하기 전에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으며, 남자에게 맡겨진 역할은 이제 또 다른 수태 고지의 대상자인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에게로 넘어간다. 마리아는 여기서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확인하고 이를 받아들인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그 누구도 불륜에 대한 암시를 주지 않는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을 찾아간 마리아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지지해주는 공동체를 만난다. 마리아는 자신의 구주 하나님을 기뻐하고, 그 어떤 두려움이나 수치심 없이 자유로운 몸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한편 엘리사벳은 요한이란 이름의 아기를 낳고, 다시 한 번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찬다. 그녀의 이웃과 친족은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그녀와 함께 즐거워한다. 2장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가랴가 주님을 찬양하는 모습으로 끝난다.
3. 세 번째 복음서: 마리아 찬가
마태와 마찬가지로 요한은 자기 복음서를 창세기에서 빌려온 두 단어 어구로 시작한다. 마태가 사용한 어구는 원 문맥에서 인류의 기원에 관해 이야기하는 반면, 요한이 사용한 어구는 만물의 기원에 관해 이야기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이 어구가 창조 사건을 가리키기보다는 그 원시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에 이미 “있었던”(was) 사건을 가리킨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was)라는 이 동사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 첫 문장에서 두 번 더 반복된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다음 구절에서는 이 첫 문장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부분이 훨씬 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태초에 계신 이 말씀은 영원하다. 이 말씀은 존재하지 않은 적이 없다. 이 말씀은 영원하므로 또한 신적인 존재다. 영원성은 신성의 배타적인 속성이며, 따라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계신 존재 역시 하나님일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 안에서 “육신이 되신” 이 말씀은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 요한복음은 영원한 말씀(예수)으로 시작하고, 마태복음은 유대인 예수로 시작한다.
4. 네 번째 복음서: 하나님을 보다
마가복음서는 한결같이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의 부활에 관한 단편적인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일반적으로 복음서 이야기의 목적에 관해서는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반면, 어디서부터 그 이야기가 시작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복음서 저자들의 의견이 서로 다르다. 복음서 저자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차이점은 이념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마태는 마가복음을 보완하고자 했다기보다는 예수의 메시아 되심이 그가 세례를 받은 후 성령이 임한 사건보다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는 마가의 견해를 교정하고자 했을 것이다. 오직 이 사중 복음서 안에서만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상호 보완적일 수 있고, 또 상호 보완적일 수밖에 없으며, 상호간의 차이점은 이 메시지의 진리를 더욱더 공고히 하고 더욱더 풍요롭게 한다. 사중 복음서는 각 부분의 합보다 더 크다.
5. 네 권의 복음서, 한 권의 책
바로 여기서 그 당시에 그 사건을 인식한 내용과 그 동일한 사건을 회상하면서 깨달은 내용 사이에 간극이 발생한다. 그 당시 제자들은 그 사건이 전개되는 가운데 그 사건에 침몰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 장면이 전개되는 동안 당연히 호산나의 외침에 참여했고 무리와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건의 참된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 당시 그들의 생각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것은 진정 잘못되었거나, 잘못 인식되었거나, 또는 무의미했다.
그들은 나중에 그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핵심 성경 텍스트를 제대로 이해하면서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올바르게 깨닫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순수하게 성경 자료만을 토대로 이해할 수는 없다. 이 사건은 이보다 더 거대한 사건, 즉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통해 성취된 하늘의 영광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만 한다.
6. 도시와 정원
예수가 죽은 후에 그를 찌른 창은 그의 심장으로부터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오게 한다. 여기서 이 말씀의 배경은 이제 변화무쌍한 성경의 이미지가 회복된 성전에 대한 에스겔서의 환상에서 찾을 수 있는데, 거기서는 성전의 입구에서 생명을 주는 물이 흘러나온다. 예수가 만나와 유월절 어린양과 동일시된 것처럼 여기서는 그가 성전과 동일시된다. 그는 자기의 죽음이 임박해올 때 목이 말랐지만, 그의 옆구리에서는 생명을 주는 강물이 흘러나왔고, 이로 인해 이제는 그 누구도 더 이상 목마를 필요가 없게 되었다.
저자 프란시스 왓슨(Francis Watson)은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Ph.D.)를 받았으며, 현재는 더럼 대학교에서 성서 해석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더럼 대학교로 오기 전에는 런던 킹스칼리지에서 15년간 성서신학을 가르쳤으며, 아버딘 대학교에서 8년간 신약학 석좌교수로 재직한 바 있다. 그가 집필한 다수의 저서 중에는 Paul and the Hermeneutics of Faith; Paul, Judaism and the Gentiles Beyond the New Perspective; Gospel Writing: A Canonical Perspective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