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된, 그러나 기억되지 않은 세계사 속의 이야기들
기이한 역사
저자: 존 리처드 스티븐스
* 저자: 존 리처드 스티븐스
뉴욕출신의 작가. 문화평론가.
문학, 인류학, 예술, 역사, 정치, 경제 전반에 걸친 폭넓은 지식과 교양을 바탕으로 하여
'문명의 이기심' '중세 문학에 나타난 여성과 멜랑콜리' '현대 정치의 교묘한 아이러니' 등
모두 여섯 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또한 자유기고가로서 수십 편의 기사와 시, 단편소설들을 발표했으며
특히 최근 '펜트하우스'지에 발표한 글 '우표에 나타난 반미국적 선전'은
그 논지와 전개 방식의 독특함과 실랄함으로 강한 주목을 받았다.
현재 캘리포니아에 거주하고 있다.
1. 무지와 지혜의 변주로서의 역사
대체연료로서의 미라: 미라 재활용법
기원전 3,000 년부터 기원후 500 년경까지 이집트인들은 글자 그대로
수백만 명의 시신들을 미라로 만들었다.
무덤과 동굴에 미라가 넘쳐 흘러서 많은 시신들이
사막으로 운반되어 모래에 매장되었다.
하지만 건조한 기후 때문에 거의 모든 시신이
방부처리 여부에 관계없이 보존될 수 있었다.
이집트학자였던 지오반니 벨조니 박사는
1821 년 이집트의 무덤에 들어가 본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 했다.
무덤 안에 들어서자 먼저 질식할 듯한 공기를 견디기 힘들었다.
이따금씩 정신이 아찔할 정도였다. 사방에 널려 있는 미라와 시신들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이런 광경에 이미 익숙해져 있던 나도 공포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컴컴한 벽들, 공기 부족으로 희미하게 타오르는 촛불과 횃불,
자기들 끼리 서로 얘기를 주고받는 것 같은 주변의 음산한 물체들,
그리고 주변의 미라들과 닮은 벌거벗은 먼지투성이의 아랍 안내인들,
이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형용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연출해 냈다....
휴식 장소를 찾던 나는 가까스로 한군데를 발견하고 앉았다.
그러나 하필 앉은 자리가 바로 미라의 몸 위였다.
내 몸무게에 눌린 미라는 판지로 만든 상자처럼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양손으로 몸을 지탱하려 했지만 별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내 몸은 무너진 미라와 함께 나동그라졌으며
이 때문에 주변 미라들의 유골 넝마 같은 옷가지, 나무관 등이 한꺼번에 무너져버려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15분 동안이나 꼼짝없이 가만히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곳을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자 여지없이 발 앞의 미라들이 계속 부서졌다....
이런 식으로 나는 무덤 방 하나하나를 탐사해 나갔다. 모든 방에는 서 있거나, 누워 있거나,
혹은 거꾸로 뒤집힌 다양한 형상의 미라들이 천장까지 가득 쌓여 있었다.
아스완 댐 건설로 수십만 구의 미라들이 소실되었다.
한때는 미라의 숫자가 너무 많아 톤 단위로 매매되거나 묘지가 통째로 매매되기도 했다.
이집트인들은 인간뿐만 아니라 소, 악어, 전갈, 곤충 등
온갖 종류의 동물들까지 미라로 만들었다.
도시마다 특정한 동물이 정해져 있기도 했다. 따라서 고양이가 죽으면
고양이 전담 도시로 운반되어 그곳에서 사후세계를 준비시켰다.
1888 년 베니 하산이란 곳에서는 약 30 만 마리의 고양이 미라들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트랙터로 발굴된 직후 톤당 18.43 달러의 가격으로 판매되었다.
이들은 영국으로 운송된 뒤 가루로 만들어져 비료로 이용되었다.
고양이 미라들만 이런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사실 방부처리되거나 미라로 처리된 수많은 인간 미라들 중에서
박물관에 보관된 미라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19세기 말에는 수백만 구의 인간 미라들이 이집트의 기관차 연료로 이용되었다.
목재나 석탄이 귀한 이집트에서는 미라가 훌륭한 대체연료였다.
미국작가 마크 트웨인은 열차를 타고 이집트 여행을 하던 도중 기관사가
"아니 이 평민 녀석들은 왜 이렇게 잘 안 타는 거야, 야, 왕 한번 태워봐!"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집트인들은 인간 미라를 비료로 사용하기도 하고 심지어 지붕 덮개로 이용하기도 했다.
관에서 나온 목재는 간난한 이집트인들의 취사용 땔감으로 사용되었다.
이탈리아의 어떤 집들은 그런 목재로 벽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르네상스 시대에의 화가들은 보다 밝은 색상을 내기 위해 미라 가루를 물감에 섞어 썼다.
미국과 캐나다 회사들은 배에 가득 실린 미라들을 수입해서,
그들을 싼 천들을 이용하여 포장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포장지가 콜레라 전염병의 원인으로 밝혀지면서 생산이 중단 되었다.
미라의 놀라운 이용법에는 위와 같은 것들만 있었던 게 아니다.
1100 년경부터 유럽이나 중동 지역에서는 의약품으로서의 미라에 대한 수요가 늘어갔다.
처음에는 미라를 밀봉하는 송진만 이용했다.
한 아랍 의사는 "처음에는 값이 싸서, 송진이 가득 채워진 머리 세 개를 저렴하게 살 수 있었다."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나중에는 미라 자체를 가루로 빻아 의약품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카이로의 한 의사는 "송진 확보가 힘들면 미라로 대체했다."고 말했다.
15세기의 카이로 시민들은 물에 미라를 넣고 끓인 후 위에 떠오른 기름기를 제거한 뒤
프랑스인들에게 팔기도 했다고 한다.
판매되는 미라 가루 중엔 송진과 약초를 섞어서 만든 가짜도 있었다.
아마 이런 가짜 가루는 미라 근처에도 안 갔던 것이므로 가장 안전했을 것이다.
최악의 불량품은 질병으로 죽은 거지나 죄수들의 시신을 말려서 미라라고 속여 판
비양심적인 공급업자들의 제품이었다.
이런 시신들 중엔 죽은 지 몇년 되지도 않아서 건조된 뒤 가루로 만들어진 것도 있었다.
17세기 유럽의 의학계는 이집트 미라의 가루가 광범위한 질병 치료에 특효라고 주장했다.
의사들은 미라 크림이 지혈작용을 한다고 생각해서 상처에 바르기도 했고,
여러 가지 내과질환에도 좋다고 생각해서 환자들이 먹는 음식이나 차에 섞어 먹게 하기도 했다.
그밖에도 미라 가루는 타박상이나 골절, 마비증, 편두통, 간질, 기침, 구토증,
간이나 비장의 질환, 독극물 중독 등의 치료제로 쓰이기도 했다.
마치 우리가 아스피린을 먹듯 당시 유럽 전역의 유럽인들이 미라 가루를 가까이 두고 먹었다고 한다.
17세기 스코틀렌드에서는 8실랑만 주면 1 파운드의 미라를 살 수 있었다.
1970 년대의 뉴욕 골동품 판매점에서는 미라 1온스가 40 달러에 팔렸다.
결국 의사들은 미라 가루가 생각만큼 의학적 효능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 시작했다.
17세기 프랑스 외과의사 앙브로즈 파레는 이렇게 썼다.
"이 끔찍한 약은 환자에게 효과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복통만 유발시킨다.
하도 냄새가 고약해서 심한 구토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또 이 때문에 혈액을 자극해서 출혈을 막기는커녕
더 악화시킨다." 그는 미라의 유일한 효능은 낚시 미끼로 쓸 때뿐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