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1. 큐티
마태복음 18:21 ~ 35
용서할 줄 모르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
관찰 :
1) 용서에 대해서
- 21절.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 길 잃은 양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과 실족한 자와 실족하게 하는 이에 대한 예수님의 엄위하신 가르침을 듣고 베드로가 그렇다면 형제가 자신에게 죄를 범할 때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질문을 했습니다. 베드로의 인내의 한계는 일곱 번이었습니다.
- 2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 주님의 가르침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해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똑같은 잘못을 똑같은 사람에게 범하더라도 490번을 하라는 말씀이고, 완전수 일곱을 일흔 번씩 하라는 말씀은 숫자에 상관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이 가능한 것이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용서가 더 크기 때문임을 이어지는 비유를 통해서 설명해 주십니다.
2) 일만 달란트 빚진 것을 탕감 받은 종에 대한 비유
- 23절.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 이 비유를 주님은 천국에 대해서 연관하여 비유해 주고 계십니다.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렇듯이 임금으로부터 용서를 받아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 24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 25절.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류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 26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 27절.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 28절.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이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 29절.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 30절.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 31절.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 32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 33절.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 34절.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 35절.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 달란트는 헬라어 '탈란톤'(talanton)의 번역입니다. 화폐의 단위로 사용될 때의 달란트는 금 1 달란트의 가치를 의미했습니다. 한 달란트는 현재의 도량형으로 약 33kg정도입니다. 2024년 10월 1일의 금의 국제 가격은 1 그램당 약 123,178원으로서, 이 가격을 적용하면 1 달란트 (33kg 적용)는 약 사십억 육천4백팔십칠만원(4,064,870,000₩)이라는 엄청난 금액으로 환산됩니다. 즉 일만 달란트는 4,064,870,000 x 10,000 = ₩ 40,648,700,000(사십조 육억 사천 팔백 칠십 만원)이 됩니다. 약 40조원입니다.
- 페르시아 제국 다리우스 황제가 알렉산더 대왕에게 3만달란트의 전쟁배상금을 지불한 과거의 기록을 통해서 볼 때 일만 달란트라는 것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 거래되는 정도의 크기이지 개인 차원의 용도를 넘어서는 빚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됩니다. 즉 예수님이 비유하신 것은 개인이 땅겨 쓸 수 있는 빚의 한계를 완전히 초과한 금액이었습니다. 개인이 결코 질 수 없는 수준의 빚, 웬만한 한 제국의 일 년 재정과 맞먹는 정도의 비용이 되는 빚을 탕감해 주는 것, 이것이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용서해 주신 용서의 크기라는 것입니다.
- 일백 데나리온,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즉 노동자 백일치의 품삯에 해당합니다. 일당을 15만원으로 계산하면, 1500만원 정도의 빚입니다.
- 40조원의 빚을 탕감받은 자비를 얻은 사람이 천오백만원 정도의 빚을 진 사람에 대해 용서하지 못하고 멱살을 잡고 소송을 걸어서 감옥에 집어넣는 자비를 베풀지 못하는 모습을 주님은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은 안 될 말이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아니라 누가 보더라도 그것은 잘못입니다. 주님은 극단적인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죄 용서의 크기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고 받는 죄의 크기를 비교해 주신 것입니다.
- 우리가 각각 형제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하늘 아버지께서도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종이 일백 데나리온의 빚을 용서해 주지 못함으로 고소하고 감옥에 넣는, 자신의 행위 자체는 정당하지만 자신이 이미 얻은 용서를 생각하면 부당한 자에 대하여 임금이 분노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일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가르침 :
1) 일흔 번씩 일곱 번. 490번. 완전수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액면 그대로 같은 죄에 대해서 490번이라도 용서해 줄 수 있는 관용이 누구에게 있을 수 있을까요? 주님의 요구는 크십니다. 모르는 사람이 아닌 아는 형제의 죄에 대해서 베드로가 말한 것에 대해서 명심해야 합니다. 이 시대에도 교회의 동역자들 사이에서 용서와 용납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디까지가 용서가 되는 부분이고, 어디까지를 발전을 위해 지적해 주는 영역이어야 하는가 입니다. 진정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관계가 깨질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치리를 하는 것은 주님이 앞서서 하신 말씀의 방법을 통하여 가능합니다. 그러나 개인의 손해를 끼치는 정도의 죄에 대해서는 용서하고, 용서하고 x 490을 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를 일곱 번으로 완전수를 인용하며 제시했지만 주님의 스케일은 그보다 훨씬 컸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런 관계가 아닌 사랑의 관계로 맺어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서로 용서하며 용납하는 관계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는 손해보고 누구는 유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서로 발전하고 서로 유익을 끼치는 관계가 되길 원하시고,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갈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2) 먼저 내가 하나님께 나의 죄, 일만 달란트짜리 빚을 탕감받았다는 것을 언제나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는 갚을 수 있는 비용이 아닙니다. 이재용씨나 일론 머스크라 할지라도 갚을 수 없는 비용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일만 달란트는 우리 인생의 죄의 무게를 그렇게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죄의 빚을 탕감 받아놓고 작은 일백 데나리온, 일만 달란트의 0.00000055% 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지독하게도 용서를 모르는 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시기에, 십자가에 달려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일만 달란트의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의 핏값을 치루시는 분의 말씀이시기에 우리는 귀담아 들어야만 할 것입니다.
적용 :
1) 용서는 용서를 낳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할 때, 하나님의 나에 대한 용서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나는 용서가 용서를 낳는 도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 내가 용서를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주님의 마음으로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찾도록 하자. 그럴 때, 주님의 용서를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주님의 용서의 크기는 일만 달란트짜리입니다. 시시하지 않습니다. 내가 일백 데나리온의 손해를 보고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는 것보다 더 남는 장사가 어디있겠습니까? 내 밸을 뽑아서라도 용서를 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3) 극심한 스트레스로 심각하게 오르게 된 당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제 군포지샘병원에 입원했습니다. 토요일 퇴원할 예정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인슐린 주사를 맞지 않고 경구 약으로 당뇨를 잡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4) 새로운 달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달도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게 될 것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