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 20
창세기 강해 서론
새벽 강해가 다시 시작되면서 저에게는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즐거움 하나가 더해졌습니다. 이 부분을 강해하면서 많은 부분에서 자라가게 될 것입니다.
1. 개혁 신앙을 수립하는데 필요한 공식적인 기초로서는 성경 가운데서 이 창세기보다 더 중요한 책은 없습니다.
1) 그리고 신학적인 문헌의 전체 분야에서 그 어느 저자를 막론하고, 개혁신앙을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하신 거룩한 교훈의 말씀으로 인정하는 면에서 칼빈보다 더 기초적인 것을 다루고 있는 저자는 없습니다.
2) 사상가이며 주석가로서 칼빈이 지니고 있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든다면 아마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자기 자신의 것인 양 기만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완전히 그의 정신을 그 진리의 특별한 의미에 의해 지배당하도록 내어 맡기는 방법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그의 특성, 즉 그의 마음이 완전히 성경에 도취되어 버리는 사실을 그의 저서 어느 곳에서나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조차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만물의 기원을 말해주는 이 창세기를 해석하는 가운데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2. 바로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관계가 영원히 확립된 것은 세상의 창조에서 되어갑니다.
1) 그렇기 때문에 그리고 그 관계의 표현이 곧 개혁신앙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칼빈의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을 유지시키며 통치하고 있는 능력에 대하여 언급해야 했던 그 내용이 곧 하나님의 말씀과 개혁신앙을 이해하는 데에 기초가 된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2) 오늘날 우리는 신학적으로 미묘한 문제들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많이 들어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풍부한 기독교인의 생활이지 기독교의 교리가 아니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한 경향은 알미니안 주의와 칼빈주의 사이에 있었던 고대의 논쟁이었는데도 오늘날에는 그다지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고 있는 사실에서 입증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 동적인 시대의 도전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교리보다는 많은 행동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대부분 설된 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은 교인들과 함께 “교리보다 삶이다” 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런 소홀한 관찰로는 문제들을 분석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런 무성의한 관찰들은 신학의 깊은 의미를 이해하고 반영하지 못하며 사상과 행동사이에 이어지는 관계를 올바르게 평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3) 신학은 과거에 일어났던 사실들에 대하여 언급하는 진술입니다.
그리고 교화란 지금까지 일어났으며, 장차 일어날 일들에 대해 인간이 아는데 까지 간추린 교훈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권적이든가 그렇지 않으시든가, 그리고 만약 그분이 주권적으로 모든 일을 처리해 나가신다면 과연 불순종하는 자에게 지옥의 형벌을 내리실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결론이 우리의 실제생활에 아주 지대한 차이를 야기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최근에는 한 대중잡지의 편집인까지도 부패한 설교 형태와 그 사실을 개탄하였습니다. 즉 현대의 설교는 사람들에게서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빼앗아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그 결과로 사람들은 그들의 상호관계에서 무절제한 생활을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4) 그 까닭은 ‘과학’에서부터 성장되어 나오는 신학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방신화에서 태동하여 자라나는 신학도 있습니다. 또한 모든 생명은 그 자체의 궁극적인 동기들로 얽매어 있다는 사상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라고 할 수 있는 본질적인 신학의 주장을 우리에게 제기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로 다른 결론들을 자리잡도록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그 자체가 계시하고 있는 것 외에 다른 관념도 전혀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다른 모든 사상들을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관념들을 하나 하나 매장시키며 결국에 가서는 성경의 말씀이 우리의 생활에서 궁극적인 목표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5) 그러나 만약 성경이 우리의 존재에 대하여 계시하고 있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면 적어도 그 목표가 어떤 것인지 반드시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느 한 면만을 맹목적으로 만져보고 그 전체를 평가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마치 전혀 보지 못하는 무식한 소경이 큰 동물의 한 곳만 만져보고 그것이 집고양이인지, 사자인지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3.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진리를 계시하는 데에 그토록 어려움이 있었다면 그분이 계시하신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대리자들을 시켜서 말씀하게 하신 방법이 적용되도록 친밀하게 우리의 마음으로 깨닫는 것은 우리가 진리를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데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1)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이 그분의 피조물과 갖는 관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두 가지 극단을 피해야 됩니다.
(1) 첫째는 범신론적인 극단입니다. 이 범신론적인 극단주의자는 세상과 그 안에 있는 피조물들이 하나님 밖에서는 실제로 모든 것이 존재해 있지 않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과 피조물은 주체이신 하나님의 객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거짓된 이해로 우리의 생활을 인도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일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의지를 비실재적(非實在的)인 허무로 만드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악한 신화로 만드는 것입니다.
(2) 하나님과 그분이 창조하신 세계와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빠지기 쉬운 또 하나의 잘못된 극단주의는 이 세상의 실재가 하나님에게서 독립되어 존재하고 있다고 고집을 부리는 극단론입니다. 이 극단론자들의 주장은 불가피하게도 하나님은 이 세상을 다스릴 만한 주권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벌하실 수도 없으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기도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라는 결론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습니다.
2)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말을 잠시동안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세상과의 참된 관계는 사실상 아무런 의미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은 이 점을 그들의 인격이나 행동에서 오는 의지적인 동기, 즉 정신의 결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론의 기초는 근본적으로 여러 가지 도덕적인 관심에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인간의 의지도 결국은 모두가 숙명적이고 모든 사람의 육체와 영혼도 꼭 그렇게 지배를 받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3) 그러나 기독교인은 성경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범신론의 유혹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만이 독단적인 인간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게 한다고 믿습니다.
4. 오직 믿는 자들만큼은 성경을 읽을 때마다 창조 하나님이신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절대적인 창조와 섭리의 주권하에 있는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 실제로 우리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주시는 선물을 통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영적 능력을 통해서 역사(役事)하시는 참된 하나님 자신의 동기 가운데서 그분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만을 통해서 진리를 깨닫게 되고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하나님을 선포하고 하나님을 승인하고 그리고 믿음으로 단순하고 명쾌하게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1) 존 칼빈은 성경을 믿음으로 바로 해석하는 사람입니다.그리고 칼빈께서는 위대한 성경을 올바르게 인식하려는 노력의 결과로 그 인식이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2) 이 칼빈의 위대한 책이 출간되는 가운데 어떤 면에서는 언어가 통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겸손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주옥같은 이 칼빈의 진리가 전해지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리낌을 받는 자들에 의하여 소유되었던 범신론적 극단주의의 승리가 하나님께로 되돌려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참으로 하찮은 과학의 승리에서 결국은 하나님께로 그 궁극의 승리가 되돌아 갈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