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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세운 금 신상
단 3:1-7
1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 높이는 육십 규빗이요 너비는 여섯 규빗이라 그것을 바벨론 지방의 두라 평지에 세웠더라
2 느부갓네살 왕이 사람을 보내어 총독과 수령과 행정관과 모사와 재무관과 재판관과 법률사와 각 지방 모든 관원을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의 낙성식에 참석하게 하매
3 이에 총독과 수령과 행정관과 모사와 재무관과 재판관과 법률사와 각 지방 모든 관원이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의 낙성식에 참석하여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 앞에 서니라
4 선포하는 자가 크게 외쳐 이르되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언어로 말하는 자들아 왕이 너희 무리에게 명하시나니
5 너희는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리어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라
6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라 하였더라
7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언어를 말하는 자들이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자 곧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엎드려 절하니라
단 3:1-7 / [금신상 숭배 명령] 느부갓네살왕은 금신상을 만들어 바벨론 지방에 있는 두라라고 하는 들녘에 세웠다. 그 신상의 높이는 27미터이고 그 너비는 2.7미터나 되었다. 2) 그러고서 그는 나라 안에 있는 모든 관리들에게 모이라고 명하였다. 총독, 대신, 지방장관, 재무관, 재판관, 치안 판사 등 각 지방의 관리들에게 명령을 내려 그 신상 제막식에 참석하라고 한 것이다. 3) 그래서 총독, 대신, 지방장관, 재무관, 재판관, 치안 판사 등 각 지방 관리들뿐만 아니라 온 나라 관리들이 모두 모여 금신상 제막식에 참석하였다. 4) 그때 의전관이 큰소리로 외쳤다. `온 나라 백성들은 들으시오. 인종이 다르고 말이 다르더라도 모두 내 말을 들으시오. 어명이오. 5) 나팔, 피리, 수금, 삼현금, 양금, 생황 등 갖가지 풍악이 울리거든 모두 땅에 엎드려 느부갓네살 임금님께서 세우신 금신상에 절을 하시오. 6) 그 누구든 엎드려 절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끌고 가 활활 타오르는 불가마에 집어 던질 것이오.' 7) 인종과 쓰는 말이 다른 온 나라 백성들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앙금과 생황 등 갖가지 악기들이 한데 어울려 풍악을 울리자 땅에 엎드려 느부갓네살왕이 세운 금신상 앞에 절을 하였다.
신상을 만든 때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다만 느부갓네살 왕의 꿈과 관련이 있다면 그때부터 오래지 않은 시기일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1) 느부갓네살 왕은 금으로 신상을 만들어 번쩍번쩍 빛나는 거대한 황금 신상이 되게 했습니다. 아마도 그 당시 고대의 전통 방식대로라면 주조된 신상에 금을 입혔을 것입니다. 지금의 계산 방식으로는 상당한 오차가 있을 것이나 고대 단위의 수치로 신상의 규모는 높이는 27m이고 너비는 2.7m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신상을 세운 곳은 두라 평지입니다. 그곳은 사람들의 접근이 쉬운 바벨론 인근 남동쪽에 있는 ‘두라’라고 불리는 작은 언덕으로 보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의 낙성식에 참석하게 하매(2-3) 그리고 그는 제국 안에 있는 모든 총독, 대신, 지방장관, 재무관, 재판관, 치안 판사 등 각 지방의 관리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모든 관리는 그 금 신상 제막식에 참석하라는 것입니다. 이 신상 제막식의 의도는 느부갓네살의 절대 권력을 과시하는 것이며 그가 만든 우상을 숭배하게 하여 스스로 신 위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금 신상에게 엎드려 절하라(4-7) 그때 왕의 전령이 백성들과 나라들과 언어가 다른 뭇 백성들에게 왕의 명령을 전했습니다. ‘각 언어로 말하는 자들’은 느부갓네살 왕이 타 민족을 정복하여 자기 제국의 속국으로 만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통역을 통해 명령이 하달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명령은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그 소리에 맞추어 일제히 신상 앞에 절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거절하면 누구든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라는 엄한 명령도 덧붙입니다. 거기에 모인 모두가 잠시 자기들이 섬기는 신을 접고 금 신상에 엎드려 절하도록 연출되었습니다.
적용: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믿고 신뢰하는 것과 세속의 미혹을 따르는 것은 없는지 되돌아봅시다.
작가 브라이언 트레이시는 '태도가 성공의 85%를 좌우한다.'라고 말했습니다. 태도란 내가 어떠한 모습으로 감정을 표출하는가, 그리고 나의 행동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의 승패가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중 긍정적인 태도는 성공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이러한 긍정적인 태도는 부정적인 감정에 치우치지 않을 때 나타납니다. 즉, 내 감정에 따라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주인으로서 바로 서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긍정적인 태도의 바탕입니다.
< 설 교 >
무적의 힘과 부동의 상대
단 3:1~7
‘무적의 힘’을 나타내던 이 땅의 권세 앞에, 그것에 굴복할 수 없어서 움직일 수 없는 부동의 믿음으로 맞서던 믿음의 승리자를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에 끊임없이 반복되어 기술된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이 기록된 유일한 이유를 찾으라고 한다면 이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죽음의 자리에 있는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또 하나의 놀라운 구원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한 무리들은 비록 소수일지라도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보살핌이 있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무적의 힘을 휘두르는 느부갓네살에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이 부동의 상대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살펴보며 2주간에 걸쳐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1. 무적의 힘.
느부갓네살은 신바벨론의 강력한 왕입니다. 애굽과의 갈그미스 전투 때 유다 왕 여호야김 왕이 배신하자 노한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의 왕족들이 포로로 잡혀가는데 이 때가 제1차 포로기입니다. 그 후 3차에 걸쳐 포로로 끌려가고 결국 남유다의 종국을 맞이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이 때는 바벨론이 세계를 제패한 시대였고,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시대였습니다. 느부갓네살은 그 권세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때였습니다. 느부갓네살의 교만은 극에 달하여 자신을 상징하는 금 신상을 세워 그 금신상에 예배하고 절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세운 금신상의 모습만으로도 기세등등한 무적의 힘, 느부갓네살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절을 보니 금신상의 높이는 60규빗, 한 규빗이 45cm이니 27m입니다.
2-3절에서는 낙성식은 주변의 각 나라 축하 사절단들까지 왔습니다.
4절에 한 ‘선포하는 자’가 수많은 백성들 앞에서 ‘크게 외쳐’ 왕의 칙령을 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인종과 언어가 상이한 각 나라 백성들이 모인 바벨론 제국의 이 초대형 의식에서 느부갓네살 왕의 절대적인 명령은 누구에게나 적용되었고 예외란 허용되지 않는 기세입니다.
5, 7, 10, 15절에서 나오는 악기들의 면면은 오늘날로 치면 4관 편성 오케스트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음악에 맞추어 금신상에게 절을 하는 것이 오늘 의식의 하이라이트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의 경고는 섬뜩하게도 매우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단3:6)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라 하였더라.
이럴 때 우리 입에서는 저절로 신음소리가 나옵니다.
도무지 어떤 다른 방법이 나오지 않습니다.
자신이 없어집니다. 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끝내 포기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본문의 앞장인 2장과 연결시켜서 3장을 생각할 때, 이 장면은 대단히 역설적인 장면입니다.
2장에서 바벨론 왕은 꿈을 꿉니다. 그의 꿈에는 장차 이루어질 역사의 방향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 꿈을 다니엘이 해석합니다. 해석을 들은 느부갓네살은 감동을 받아 기뻐하기까지 했습니다.
2장 45절에서 다니엘이 꿈에 대한 해석을 끝냈을 때 왕은 이렇게 말합니다.
(단2:46-47) 이에 느부갓네살 왕이 엎드려 다니엘에게 절하고 명하여 예물과 향품을 그에게 주게 하니라. 47 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오,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시로다.
그는 감격한 나머지 다니엘의 하나님이 진짜 신이라는 고백까지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다음에 예측할 수 있는 사건은 무엇이겠습니까? 감동을 받고 이런 고백까지 나왔으니까 이쯤 되어서는 느부갓네살 왕이 회심을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정석인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을 높여서 도지사로 임명하고 출세를 시켜 주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참 이상하게도 3장으로 넘어가서 곧장 느부갓네살 왕은 금으로 신상을 만들고 백성들에게 대뜸 거기에 절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이 다니엘이 해몽할 때에 순간적으로 “야, 내가 꾼 꿈의 내용 까지 알고 그것을 해석까지 하는 저 다니엘의 신, 참 신통하구나. 놀랍구나”라고 감동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에 인 감동에 불과했습니다. 학자에 따라서 그 꿈과 금신상을 세운 시기의 연차를 적게는 5년에서 길게는 20여년 까지 보기도 합니다. 그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서 감동은 옛 추억에 불과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감동이 신앙의 고백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고 인사할 때 “은혜받았습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 설교자는 기쁩니다. 저도 역시 그 기쁨이 큽니다.
그런데 우리 조금 심각하게 생각해 봅시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떻다구요. 그래서 어쩌자구요.
사람들은 열린 음악회를 통해서도 감동을 받습니다.
아침 설거지하다 보게 되는 아침 드라마, ‘하얀 거짓말’을 통해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드라마를 통해 감동받고 어떻게 되었나요?
수련회를 가서, 혹은 찬양을 하면서, 설교를 들으면서, 감동하고 은혜 받고 눈물까지 흘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의 척도일 수는 없습니다.
감동은 신앙이 아닙니다.
물론 신앙에 감동(눈물)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감동만으로는 사람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맞았어. 네 하나님이 진짜로구나. 귀신같이 맞히는 걸?”
이런 고백을 한 후 즉각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하는 느부갓네살 왕의 모습을 보십시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습니다. 설교를 듣고 “그럴 듯하다”는 반응을 보이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상태가 더 나빠지기가 일수 입니다.
나에게 던져진 말씀이 참으로 내 삶을 하나님 앞에서 바꿀 때까지, 주 앞에 순종할 때까지 감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를 다스리시는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시느냐가 핵심 포인트입니다.
그렇게 한 때 감동만 했었던 느부갓네살은 3장에 와서 자신의 형상을 닮은 우상을 세우고 자기의 권세가 미치는 모든 이들에게 그 우상을 향하여 절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명령을 어기면 불로 태우겠다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누가 항거할 수 있나요? 여기서는 그 명령의 합당함과 부당함을 논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입니다. 지금 그것을 논할 여유가 없습니다. 살고 싶으면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음악 소리에 맞추어 넙죽 엎드려야 할 때입니다.
그것이 바로 현실인 것입니다.
당시 이 말을 듣고 있던 일반 대중들이 이 신상 앞에 절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든지 쉽게 마음의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일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오히려 하지 않고 버티는 것이 이상스러울 지경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이라면 겪지 않아도 될 어려움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빈정거립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준비된 풀무불처럼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빈정거림과 무시와 따돌림의 풀무불을 준비해 놓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압력 때문에 타협을 하면서 적당히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양쪽을 모두 취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도 살면서 이런 무적의 힘을 만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포로로 잡혀 온 것처럼, 598년에 여호와긴 왕과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온 사람들 중의 제사장이었던 에스겔 선지자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동시대의 선지자였던 예레미야가 눈물로 유다의 멸망을 예언하였던 것에 반하여,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과 비전을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멸망당한 조국이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느냐며 낙담해 있을 때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골짜기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곳에는 뼈가 가득한 곳이었고, 뼈의 상태를 말랐다라고 까지 표현할 만큼, 어떤 소망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겔37:1-2)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 하더라. 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소망을 선포하지만, 패망한 아픔 때문에, 어떤 소망도 갖고 있지 못하고, 오히려 무엇으로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며 지레 포기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현재 모습이 뼈로, 그것도 마른 뼈로 묘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겔37: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시험문제를 받은 어떤 학생이 답을 몰라 헤메다가 이런 답을 남겼답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리고 그 시험지를 채점하시는 교수님은 이렇게 점수를 매겼답니다.
“하나님은 100점, 너는 빵점”
우리는 그 결과를 잘 알고 있습니다.
비록 마른 뼈였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니 이스라엘의 큰 군대가 된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능력이나 힘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결국 마른 뼈로 하여금 하나님의 큰 군대가 되게 하심처럼, 우리 삶의 메마름이나, 넉넉하지 않음, 연약함, 죄 많음은 결코 문제 거리가 될 수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무엘상 17장에 보면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에게 골리앗은 “무적의 힘”입니다.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모욕하지만, 이스라엘의 장수 어느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합니다.
상대방은 ‘무적의 힘’이었던 골리앗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아무리 상대할 사람을 불러내지만 어느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합니다.
두려워 떱니다.
상대해 보기 전에 이미 기가 질려 죽은 듯 숨어 있습니다.
도무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백성과 군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말 골리앗이 무적의 힘이었을까요?
다윗은 골리앗이 우습게 보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무적의 힘’의 원천은 그가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들고 나간 물맷돌, 이것은 설사 골리앗이 맨 몸으로 나올지라도 그를 대항할 무기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지금 골리앗은 칼과 창과 단창으로 무장하고 나오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 골리앗 앞에서 호령하고 있는 다윗을 보시기 바랍니다.
(삼상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지금 연약한 소년의 몸과 거대한 무적의 힘처럼 보이는 장수간의 싸움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공포스럽게 만든 자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와의 대결입니다.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자와의 대결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와 하나님께서 아시는 자와의 대결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다윗은 물매에 돌을 넣어 돌리고, 그것으로 골리앗을 무너뜨린 것을 우리가 잘 알고 믿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물맷돌을 던진 것이 아니라 믿음에 기초한 거룩한 분노로 골리앗을 상대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눈에는 골리앗이 무적의 힘 같지만,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는 다윗에게는 무적의 힘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힘으로 골리앗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모두 ‘무적의 힘’이라며 두려워 떨고 있을 때, ‘무적의 힘’은 따로 있다며 그 이름으로 나선 다윗.
오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바로 다윗이 믿고 섬기던 그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 앞에 오직 하나님만이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이 땅의 것이 ‘무적이 힘’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무적의 힘’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 순간의 감동으로 살아가는 자 되지 마시고, 무적의 힘이신 예수 그리스도 편에 서 있어 영육 간에 승리하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왕이십니다
다니엘 3:1-7
‘생각을 세우는 생각들’이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여자분들은 이 이야기 맞는 지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남녀의 차이는 본능뿐 아니라 학습으로도 조장된다. 남자가 자기 삶에 엄청 중요하다는 걸 어렸을 때부터 느낀 여자들은 남자에게 민감히 반응한다. 이성이 있을 때 남자들도 행동이 달라지지만, 여자들의 반응은 너무나 딴판이라 눈이 휘둥그레진다. 여자들은 남자들의 욕망이 자신에게 향하고 있음을 느낄 때, 자신이 남자의 욕망의 대상일 때 ‘여자’가 된다. 다시 말해 남자들의 욕망이 없는 곳에선 여자들은 ‘여자’로서 행동하지 않는다. 여자다움은 ‘연기’다. 여자다움은 실체처럼 고정되지 않고 허상처럼 흔들린다. 그래서 여자들은 애인에게는 보일 수 없던 속내와 행동을 여자 친구들에게는 꺼내 보이고 행동하게 된다. 죽이 잘 맞고 오래 알고 지낸 여자들끼리 있을 때 여자들은 여자 연기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자들만 있는 세계를 남자들은 영영 알 수 없다고 일본의 여성학자 우에노 치즈코는 얘기한다. 여자들의 집단에 남자가 한 명이라도 끼어드는 순간, 아무리 자기 줏대가 세워진 여자더라도 남자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자기 검열이 이뤄진다. 또 검열하도록 여자들은 어려서부터 길러진다. 자신도 모르게 말투와 행동이 변한다.”
여자 분들은 공감하십니까? 이글의 핵심은 여자는 남자가 한명이라도 있으면 그 남자를 의식해서 여자로서 연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서로 친한 여자친구들끼리 있으면 더 이상 여자로서 연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여성학자인 우에노 치즈코라는 분은 여자들만 있는 세계를 남자들은 영영 알 수 없다고까지 표현을 했습니다. 이것은 여자만 그렇겠습니까? 남자도 마찬가지이고 이 세상에 존재 하는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인식 하며 살아가는 것과 인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인식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말이나 행동이나 조심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나 행동을 다하면서 살지 않습니다. 그것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기분을 상하게 한다면 그것을 당연히 삼가 합니다. 하지만 전혀 다른 사람을 인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함부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다른 사람이 기분이 상하든 상처를 입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것과 하나님을 인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도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인지에 대한 인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나의 진정한 왕 되심을 인정하고 인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두라평지에다 금으로 어마어마한 신상을 세웁니다. 그 신상의 크기는 무려 높이가 60규빗 쉽게 계산하기 위해 1규빗을 50cm로 잡으면 높이가 30m이구요, 넓이가 6규빗이니까 3m정도 되는 거대한 입상입니다. 우리나라 동해안에 가면 낙산사가 있습니다. 거기에 해수관음상이라는 입상이 있는데 동양최대라고 합니다. 해수관음상의 높이는 16m, 둘레3.3m이구요 화강암이 700톤 이상이 들어갔구요 1972년부터 1977년까지 5년에 걸쳐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왕이 만든 신상은 낙산사 관음상 보다 2배 가까이 되는 아파트 9층높이의 입상이었습니다. 그것도 돌로 만든 것이 아니라 금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정말 금으로 만들었을까요?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실제로 금으로 만들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설사 금으로 안 만들고 청동으로 만들고 도금만 해도 엄청난 금이 들어가지 않았을 까요? 어째든 이 엄청난 금신상을 만드는 데 수많은 인력과 재원과 시간이 투자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느부갓네살 왕이 이렇게 어마 어마 한 금신상을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저는 느부갓네살왕이 두가지 이유에서 이 금신상을 세웠다고 생각을 합니다.
첫째는 바벨론제국이 망하지 않고 영원할 것이라는 것을 나타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니엘서 2장을 보면 느부갓네살왕이 꿈을 꾸고 그것에 대하 다니엘이 해몽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꾼 꿈은 큰 신상에 대한 꿈이었습니다. 머리는 순금이요 가슴과 두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쇠요 그 발은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이었습니다. 그런데 손대지 않는 돌이 산에서 나와서 이 신상을 부서뜨리는 꿈이었습니다. 꿈에 나타난 신상에 해서 다니엘은 정확하게 느부갓네살왕에게 해석해 주었습니다. 이 신상들은 앞으로 세워질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의 메시지였습니다. 또한 그 나라들은 결국 망하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였습니다. 다니엘의 해석을 듣고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시로다”(단2:47)
느부갓네살왕은 하나님에 대해 모든 신들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가장 으뜸이 되는 왕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불과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 금신상을 세우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왕은 그 신상의 꿈을 통해서 인간이 세운 나라의 허무함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하는데 오히려 금신상을 세우고 있습니다.
오히려 느부갓네살왕은 그 꿈에는 머리만 금으로 나오는데 온 신상을 금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금은 변함없는 것을 의미하고 여기서 금은 곧 바벨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금신상을 통해 바벨론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할 것을 알리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 금방 하나님을 찬양해 놓고선 뒤돌아서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든 모습은 어디엔가 다 사라져버리고 다시 자신을 위해 신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돈을 의지하고 권력을 의지하고 사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교회 와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주님께 다 맡겼다고 하는데 교회 밖을 나가면서 그 짐 다시 주님께 찾아서 나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두 번째로 이 금신상을 세운 이유는 결국 느부갓네살왕 자신을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오늘 본문을 가만히 살펴 보시면요 금신상이라고 그냥 그러지 않고 꼭 수식어가 붙습니다. ‘느부갓네살왕이 세운 금신상’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곧 이 금신상은 느부갓네살왕 자신을 의미합니다. 신상의 얼굴을 바벨론의 신 마르둑의 얼굴로 했든지 아니면 느부갓네살 자신의 얼굴로 했든지를 정확히 알수 없지만 느부갓네살왕에게 있어서 이 신상은 곧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이 금신상을 세워놓고 낙성식을 할 때 초대한 사람들을 보십시오. 2-3절 말씀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사람을 보내어 총독과 수령과 행정관과 모사와 재무관과 재판관과 법률사와 각 지방 모든 관원을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의 낙성식에 참석하게 하매 이에 총독과 수령과 행정관과 모사와 재무관과 재판관과 법률사와 각 지방 모든 관원이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의 낙성식에 참석하여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 앞에 서니라” 금신상의 낙성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본국을 비롯한 바벨론이 현재 지배하고 있는 모든 나라들의 정치적인 지도자들을 의미합니다.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엄청난 백성들이 그 자리에 모였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왔기 때문에 통역관들이 필요했습니다. 각 나라들에서 온 사람들 앞에 통역관을 세워 선포하는 자의 소리를 통역하게 했습니다. 선포하는 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너희는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리어 느부갓네살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라 누구든지 엎드리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라”(단3:5) 선포하는 자의 소리를 들은 통역관들은 그것을 각 나라의 언어로 통역합니다. 그러자 오케스라의 음악소리가 울려퍼집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금신상앞에 절을 합니다.
여러분 한 번 상상을 해보십시오. 그 넓은 두라평지에 오케스트라가 울려퍼지고 각나라의 정치적인 지도자들과 수많은 백성들이 일제히 금신상앞에 절을 한다. 이것을 바라보고 있는 느부갓네살왕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역시 나는 대단해. 그래 내가 바로 바벨론의 대제국의 왕이다. 나의 왕위는 영원할거야.”
그런데 여러분 느부갓네살이 꼭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 까요? 이렇게 하지 않아도 느부갓네살이 바벨론대제국의 왕으로 인정하지 아니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상앞에서 절하지 않으면 풀무불속에 던져서 죽게 하겠다는 명령을 내리면서 까지 이렇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두려움 때문입니다. 느부갓네살왕은 지금 바벨론의 대제국의 왕으로 있지만 그 자리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그는 금신상을 세웠습니다. 자신이 이 세상의 왕임을 선포하고 자신만 받들어 섬겨야 한다는 것을 만방에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연예들인 가운데 보면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우울증에 빠진다는 이야기를 가끔씩 듣게 됩니다. 왜 최고의 인기를 누리면서 우울증에 빠지는 것입니까? 그것은 인기가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주위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연예인들이 인기가 한 순간에 떨어져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자신도 그렇게 될 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느부갓네살왕에게 꿈을 통하여서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느부갓네살왕이 자신이 진정한 왕이 아니라 하나님을 진정한 왕으로 인정하며 살았다면 그는 결코 금신상을 만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가운데 휩싸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다윗의 왕위를 이어 통일이스라엘의 3대왕이 됩니다. 이미 다윗이 다져놓은 기반이 있었기에 나라는 부강하고 평화로웠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훌륭한 아버지 다윗을 이어 백성들을 다스려야 했으니 얼마나 부담스러웠겠습니까? 그래서 솔로몬은 나라가 잘되어 가고 아무런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정성을 다하여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번제를 드리게 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감동하셔서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때 솔로몬은 열왕기상 3:6-9절에서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솔로몬이 이르되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그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항상 주사 오늘과 같이 그의 자리에 앉을 아들을 그에게 주셨나이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은 하나님께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솔로몬이 내 백성이라고 하지 않고 주의 백성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진정한 왕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해 지혜를 달라고 요구하는 솔로몬에게 너무나 감동하셔서 솔로몬이 구하지 않는 부귀와 영화까지 더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우리의 왕이 되십니다. 이 세상이 우리의 왕이 될 수 없습니다. 돈이 우리의 왕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우리의 왕이 될 수 있습니다. 오직 진정한 우리의 왕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수아가 죽고 난 이후에 이스라엘은 사사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사사시대의 특징을 사사기 21:2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시대의 특징은 왕이 없으므로 자기의 소견대로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실제로 왕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인간 왕이 없었지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백성들의 왕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왕이 없으므로 자기의 소견대로 행하였다고 표현하는 것은 이들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식하지 않고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고 살아가니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정욕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절제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백성 뿐만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셨다고 하지만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밀어내고 내가 앉으면 내가 왕이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욕심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이 나의 왕좌에 앉아 있으면 그것이 나의 삶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 가운데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을 세우고자 하신 것은 하나님이 왕이 되어서 통치하고자 하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백성들은 결국 그것을 거부하고 인간왕을 원하게 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면서 궁금한 것이 하나가 있지 않습니까? 다니엘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2장에 보면 다니엘이 꿈을 해석한 이후에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에게 어떤 행동을 보였는 지 아십니까? 세계를 제패했던 대제국의 왕이 자신의 식민지 백성인 유다민족의 한 청년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하였습니다.(단2:46) 귀한 선물도 엄청 많이 주었습니다. 바벨론의 모든 지방을 다스리는 권력을 주고 식민지에서 온 젊은이를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의 어른으로 삼았습니다.(단2:48)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 다니엘이 지금 금신상의 낙성식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이 금신상을 세우는 것을 반대했던 것입니다. 곧 왕은 다니엘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고집대로 금신상을 세운 것입니다. 만일 다니엘이 왕이 금신상을 세우는 일에 동의했다면 금신상의 낙성식에 당연히 다니엘은 참여해야 했습니다. 왕은 다니엘이 어떤 인물인지를 알고 있었기에 그를 함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왕궁에 두고 온 것입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왕되신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낙성식에 유대인들을 참석하지 않았을 까요? 참석을 했을 것입니다. 유대민족 또한 바벨론의 식민지 였고 유대의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참석한 유대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다 그 신상앞에 절을 하였습니다. 단, 다니엘의 세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만 절하지 않았습니다. 신상앞에 절하지 않았다는 것은 풀무불에 들어가는 죽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쇠와 금을 녹이는 풀무불에 사람이 들어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끔직한 일입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금신상앞에 절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쉬운 일입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세상의 방식으로 따라오라고 합니다. 세상과 하나가 되라고 합니다. 그것은 쉽고 좋은 것이라고 합니다. 또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직장생활을 하시면서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이 정말 어려우실 것입니다. 술 마시는 문화에서 술을 안마시고 동료와 어울리는 것이 어려운 문제입니다. 뇌물을 바치는 문화, 거짓문서를 만드는 문화에, 뇌물을 뜯어내는 문화에, 모두가 하는데 혼자가 안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나 혼자 잘난 척하면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다고 같이 죄를 짓자고 합니다. 죄를 같이 짓지 않으면 왕따를 당하게 됩니다. 비난받고 비방받습니다. 참으로 호락호락한 직장생활이 아닙니다. 직장만 그렇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선택하는 것입니다.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의 통치를 받을 것인가? 하나님인가 세상인가? 누구를 예배할 것인가? 하나님인가, 세상인가? 누구를 드러낼 것인가? 나인가, 하나님인가?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때로는 나를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선택이 나에게 손해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선택은 바로 우리의 믿음의 표시입니다.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행함이 무엇입니까? 선택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자신의 생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바벨론 대제국의 왕 느부갓네살이 신상을 세우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그것이 다니엘의 믿음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신상에 절하기 보다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선택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아니라 우리의 진정한 왕되신 하나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왕이 되시면 우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신하요 백성입니다. 왕의 명령을 어명이라고 합니다. 어명은 무조건 복종하는 것입니다. 역사 가운데는 억울한 누명을 씌고 귀향을 간 신하들이 있습니다. 왕이 분별력이 없어 간신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충성스러운 신하들을 귀향 보내고 심지어 사약을 내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약을 내릴 때 왕이 직접가지 않습니다. 왕의 전령을 보냅니다. 비록 왕이 직접가지 않고 왕의 전령이 가서 신하앞에 어명이요. 하면 신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사약을 받으라고 하면서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왕이 계신 한양을 향하여 ‘성은이 만극하옵니다.’ 라고 말하며 사약을 받아서 먹습니다. 이것이 왕과 신하의 관계입니다. 인간왕은 분별력이 없어 때로는 잘못판단을 할 때도 있고 잘못 명령을 내릴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원한 왕되신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신하된 입장에서 정말 진정왕 되신 하나님을 왕으로 인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왕 되신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하시든지 순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성경이 하나님의 어명임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속에 왕좌 앉아 있는 진정한 왕은 누구십니까? 나입니까? 세상입니까? 하나님이십니까? 우리의 진정한 왕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이 진정한 왕이심을 인정하고 인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선택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왕 되신 하나님의 어명 앞에서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 진정한 왕 되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말씀앞에서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왕이 신상을 만들어 섬기다
다니엘 3장 1-7절 / 한양훈 목사
1절에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느닷없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어 세우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 높이는 육십 규빗이요 너비는 여섯 규빗이라’ 그 신상을 ‘바벨론 지방의 두라 평지에 세웠더라’고 합니다. 2장에 나타난 대로 느부갓네살 왕의 꿈에 나타난 신상에 대해 다니엘이 우상은 망가지고 언젠가는 파괴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느부갓네살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우상숭배자들은 우상을 만드는데 돈을 쏟아 부었습니다. 거기에 얼마나 많은 금이 들어가겠습니까. 정말 엄청난 양입니다. 이 우상의 크기는 사람 키의 열다섯 배 정도 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9층 높이이지요. 높이 30m, 넓이 3m입니다. 느부갓네살이 만든 우상을 섬긴 사람은 왕궁에 있는 사람만 모아도 수천, 수만 명이 될 겁니다.
2절과 3절에서는 그 우상의 낙성식에 대해 나옵니다. 참석대상자가 나오는데 총독과 수령과 행정가와 모사와 재무관과 재판관과 법률사와 각 지방 모든 관원을 낙성식에 참여하게 합니다. 전국민에게 숭배를 명령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상당한 자긍심이 있는 작품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영은 어리석고 미련하게 하는 영입니다. 우상숭배를 많이 하면 뇌에 공격을 많이 받습니다. 왕의 명령에 따라 모든 사람들이 신상 앞에 섰습니다. 그의 권세가 하늘을 찌릅니다.
왜 이 싱상을 만들었을까 추측해봅니다. 아마도 다신교인 바벨론에서 다니엘 중심의 유대교신앙으로 흘러가는 것 때문에 반발한 사람이 많아서일 것입니다. 이때는 약 BC586년 즉 다니엘이 잡혀 간지 약 20년 가까운 쯤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니엘은 여호야김 왕 3년(BC 605)년에 끌려갑니다. 둘째는 남유다를 완전 장악하고 ‘유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별것 아니네.’ 하면서 다시 우상숭배로 돌아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완전한 금으로 만든 것은 자기 바벨론이 금머리였었는데 다니엘이 부서지고 은 같은 나라가 된다고 했으므로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대항하는 의미라 하겠습니다.
4절에 보면 선포하는 자가 크게 외칩니다. “왕이 너희 무리에게 명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5절에 보면 왕의 명령은 악기소리가 날 때에 금신상에 절하라는 것입니다. 당시에 신들이 많았는데 어떤 신을 섬기든 왕이 악기소리가 울리는 지정한 시간만큼은 이 우상에게 절을 해야 합니다. 흥분의 도가니가 됩니다. 큰 신상이 있고 달콤한 연주가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절을 하니까 그 분위기에 휩쓸려서 절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만일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않으면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으리라고 하였습니다(6절). 용광로 같은 곳입니다. 즉결심판을 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때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악기소리와 함께 느부갓네살왕이 세운 금신상 앞에 절하였습니다(7절). 실로 불쌍한 모습입니다. 말세에 이러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어쩔 수 없이 나와서 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모국이 완전히 망하고 이제는 이방신을 하나님으로 섬겨야하는 치욕적인 상황에 놓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