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달리는 차안 이였다. 앞좌석에는 승우가 담배를 피우며 운전
을 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세열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뜻밖에도 자신의 옆에는 서장이 앉아
있었다. 서장은 진이가 정신을 차린 걸 눈치채고 빙긋 웃어 보였다. 하지만 진이의 눈이 보
이지 않는 다는 걸 눈치채고 잠시 놀라는 듯 했지만 금방 아무 일 아닌 듯이 진이의 작은
두 손을 꼭 잡았다.
"고맙다. 나를 위해 힘써줘서..."
"헤헷, 괜찮아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요."
진이는 서장을 향해 그 특유의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어 보였고 서장도 자신도 모르게 따
라 웃어버렸다. 운전을 하던 승우도 진이가 깨어난걸 알았는지 진이에게 안부를 물었다.
"깨어났냐? 그나저나 아까는 어떻게 한 거냐? 그런 기술이 있었으면 별장에서 썼을 것이
지."
"헤헤. 아까 그건 광명진언이라는 거예요. 성불(成佛)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영들의
업장(業障)과 무명(無明)을 걷어내어 성불하는 것을 돕는 진언이예요. 하지만 시간이 너무
걸려 그때 사용했다면 우린 꼼짝없이 죽은목숨 이였어요."
"그...그러냐."
머쓱해진 승우는 다시 운전에 열중하려 했지만 다시 옆에서 세열의 핀잔이 시작되는 바람
에 그럴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세열의 핀잔이 계속되면 승우가 어떤 반응을 불 보듯 뻔히
아는 진이였기에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 세열의 말을 잘랐다.
"그나저나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월드컵 기념공원으로 가는 길이다. 내 생각엔 아마도 거기에 김상인씨와 관련된 무언가
가 있을 것 같아. 네 몸이 좋지 않은 건 알지만 미안하다. 유나가 위험해서 어쩔 수가 없이
서둘렀다."
승우는 진이가 많이 지쳤는데도 쉴 시간도 없이 유나 생각에 곧바로 월드컵 기념공원으로
향한 것이 미안했는지 항상 당당하던 모습과는 다르게 미안하다는 말만 연신 되풀이했다.
그건 서장도 마찬가지였는지 아무말없이 옆에서 가만히 앉아있기만 했다.
"진짜 괜찮다니까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고맙다...어떤 좀스런 인간보다 훨씬 어른스럽구나."
"......그말 잘 들었습니다. 운전중이니 이번은 참기로 하지요..."
세열의 말에서 살기를 느낀 세열은 입을 다물고 운전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목적지에 가
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불안해졌다. 전에 몸 상태가 정상 이였을 때도 상대가 되지 않았었
는데 지금은 전부 지친 상태에다가 어제 당한 상처도 치료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아, 이번에 우리가 이길 수 있겠니? 너나 밥맛도 많이 지친 것 같은데."
"걱정 말아요. 이번엔 제 힘을 확실히 보여드릴 테니까요."
"승우씨만 방해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밥맛 너는 제발 조용히 있어주면 안되겠냐?"
승우도 이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는지 두 사람의 말싸움이 계속되었고 진이는 더 이상
말리기도 귀찮았는지 잠시 잠을 청했다. 그리고 서장은 세열과 말싸움하는 승우의 모습이
예전에 비해 많이 밝아진걸 느끼고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졌다.
공원에 도착했을 무렵엔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와 그리 늦지 않은 시간 이였는데도 제법
어두워져 있었다. 다행히 오늘은 별 행사가 없는지 공원에는 자원봉사자와 청소부, 그리고
몇 명의 연인들만이 한가로이 거닐고 있었다.
"이곳까지 오긴 왔는데...이젠 어떻게 한다."
막상 이곳까지 오긴 왔지만 앞으로 해야 될 일에 대해서는 막막했다. 예전 김상인씨의 집
도 이미 다 허물어져 어디였는지 알 수 없었고 아무리 둘러봐도 이 넓은 공원 김상인씨의
영과 유나가 있을 만한 장소는 찾을 수 없었다.
"진아 네가 한번 찾아보거라."
"알았어요. 잘 될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진이는 공원 주차장 한가운데 턱하니 앉아 결가부좌를 틀고 정신을 집중했다. 주차장 한
가운데서 한복을 입고 앉아 있는 모습이 신기했는지 주위 사람들이 쳐다보았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수면에 깃드는 물의 정령이여 진실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라! 영외경(永外鏡)!"
진이가 손가락을 깨물어 그 피를 허공에 뿌리며 주문을 외우자 핏방울이 얇은 막이 되어
동그란 거울 형상을 만들어 내었다. 그 장면을 보고 마치 마술쇼라도 본 듯 주위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피로 이루어진 거울은 한참동안이나 진이의 앞에서 머물렀고 시간이 흐를수록 이마에 땀
방울이 맺혀갔다. 주문을 외운지 10여분정도가 지났을 즘 진짜거울이 깨지는 소리를 내며
진이의 피로 만들어진 거울을 사라져버렸다.
방금의 술법이 무척이나 힘든 것 이였는지 진이의 얼굴이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있었다.
"헉헉...사방에 사기(邪氣)가 가득해서 김상인씨의 기를 찾기가 무척 힘드네요."
진이의 말에 승우와 서장이 실망하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았는지 진이는
능청스럽게 씩 웃어 보이더니 공원 뒤쪽의 산을 향해 발걸음을 향했다.
"힘들다고 했지 찾지 못했다고는 안 했어요. 뒤쪽의 산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니 어서
빨리 가봐요."
이런 상황에서도 장난을 치는 진이의 뒤를 따라 모두 산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공원
뒤쪽에 위치한 산은 산이라기보다는 조금 높은 언덕에 가까웠는데 이상하게도 산세가 험하
지도 않았는데 얼마 가지도 않아 승우와 서장의 숨이 가빠왔다. 서장은 나이가 좀 들기는
했지만 평소 검도와 유도로 단련되어 왠만한 젊은이의 체력을 능가했고 승우는 경찰서 내에
서도 강인한 체력의 터프함이 소문나 있어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별로 지치는 법이 없
었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숨이 차고 몸이 무겁지?"
세열은 물론 작은 진이 보다도 한참 떨어져 걷던 승우가 물었다. 서장도 승우와 마찬가지
였는지 세찬 숨을 계속 몰아쉬고 있었다.
"이곳은 사기로 가득해서 보통사람이 들어오면 평소보다 쉽게 지쳐요. 이제 거의 다 도착
한거 같으니 조금만 참으세요."
진이는 두 사람과는 다르게 힘차게 산을 올랐다. 세열도 마찬가지로 땀한방울 흘리지 않
고 무표정하게 오르다가 뒤돌아서 승우의 지친 모습을 보고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런 세열의 태도는 다시 승우를 열 받게 했고 세열에게 지지 안으려고 앞질러 뛰기 시작
했다.
"왜...이런 것이 여기 있지?"
일행의 가장 앞에서 걷던 승우 앞에 나타난 것은 다 쓰러져 가는 신당(神堂)이였다. 사람
의 발길이 끊어진지 꽤 오래되었는지 입구주위에 쳐놓은 금줄은 비바람에 썩거나 날아가 제
멋대로 걸쳐져 있었고 신당여기저기가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승우의 뒤를 따라 세열과 진이가 도착했는데 신당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영기와 살기
에 질렸는지 안색이 어두웠다. 그 뒤로 서장이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도착했는데 숨을 고르
느라 한참동안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 안에 김상인씨의 영이 있는 건가?"
"아마 그럴거예요......"
"......"
보통사람인 승우도 신당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기운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는데
마치 뜨거운 한증막에 들어온 것처럼 숨이 막히고 갑갑했다.
"세열형, 상상했던 것보다 이상인데요. 이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줄은 몰랐어요..."
"생전에 딸의 약을 구하러 전국 명산을 돌아다니다가 힘을 얻은 것 같구나. 그 자신도 상
당한 신력을 가진 무당으로 소문이 나있었고..."
세열은 붉은천을 풀며 무라마사를 꺼내들었고 진이도 품에서 이상한 모양의 종을 꺼내 들
었다.
"한승우씨, 이번에는 당신들을 보호하며 싸울 여력이 없을 것 같군요. 서장님과 함께 싸움
에 말려들지 않게 멀리 떨어져 있어 주시겠습니까?"
세열이 진지하게 부탁을 하자 사태가 예상외로 심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채고 지쳐
있는 서장과 함께 신당에서 멀리감치 떨어졌다. 다행히도 주위에 수 백년은 된 듯한 커다란
고목이 있어 숨기 알맞았다.
오전부터 잔뜩 찌푸려 있던 하늘이 앞으로 일어날 싸움을 알리기라도 하듯이 조금씩 비를
내리고 있었다. 비로 인해 세열과 진이의 옷이 다 젖어 갈 때쯤 신당에서 폭발하듯 살기가
뿜어져 나오면서 문이 폭발해 버렸다.
무수히 떨어져 내리는 문의 잔해 속에서 김상인씨의 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빛 같은 붉
은 색 신복(神僕)을 입고 눈에서는 붉은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해설편
영외경(永外鏡): 운외경(雲外鏡)이라는 미래를 보는 환상의 술법을 작가가 변형한 술법으로 오
염되지 않은 깨끗한 물의 힘을 빌어 사람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보거나 찾아내는 술법으
로 태극패와 비슷한 기능을 가진다.
신당(神堂): 당집 또는 당이라고도 한다. 각각의 특색에 따라 몇 종류로 구분되는데 서울의
할미당이나 국사당(國師堂)처럼 굿판을 벌이는 굿당, 약수터나 영천(靈泉)에 세워진 용신당
(龍神堂), 산신도를 모셔놓은 산신각(山神閣), 무당의 무구(巫具)나 무신도(巫神圖)를 모셔놓
은 장소, 촌락공동체의 수호신당이 있다.
이 가운데 전국에 산재해 있는 수호신당의 비중이 가장 커서 신당이라고 하면 흔히 이것을
가리킨다. 수호신당은 8·15광복 이후 동제당(洞祭堂)으로 통칭하였으나 지방마다 차이가 있
어 경기·충청지방에서는 산신당 또는 서낭당이라 하며 강원지방은 서낭당, 영호남지방에서
는 당산, 서울 한강변 마을에서는 부군당(府君堂)이라고 한다.
동제당은 대개 신목(神木)만 있는 자연 그대로의 상태이나 간혹 신목 옆에 작은 사당을 지
어놓은 경우도 있다. 주로 수령이 많은 거대한 소나무나 느티나무가 신목으로 모셔지는데
여기에는 신이 존재한다고 믿어 나무를 베거나 해치는 것을 금기시하였다. 신당에 모셔진
신 가운데에는 남신보다 여신이 월등히 많은데 이는 대지의 풍요로움을 빌던 오래 전 농경
사회의 풍요 여신에 대한 숭배사상이 남아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