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884
■ 3부 일통 천하 (207)
제13권 천하는 하나 되고
제22장 여불위(呂不韋)의 몰락 (9)
그러나 진왕(秦王) 정(政)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사람에 대한 불신이 남아 있었다.
'태후와 여불위가 다시 비밀리에 간통할지 모르겠다.'얼마나 많은 고심을 했을까.
이듬해 진왕 정(政)의 입에서 느닷없는 명이 떨어졌다.
- 여불위(呂不韋)는 함양성을 떠나 봉읍인 낙양 땅으로 나가 살라.이를테면 추방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진왕 정(政)을 두려워하기 시작한 여불위(呂不韋)는 군말없이 낙양으로 내려갔다.
주왕실의 도읍이었던 낙양(洛陽)은 비록 망했지만 여전히 10만 호가 넘는 큰 고을이었다.
낙양에 내려가서도 승상 시절 못지 않게 여불위(呂不韋)는 부귀영화를 누렸다.
더욱이 조정에는 그의 일당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다.
연일 많은 사람들이 여불위(呂不韋)에게 잘 보이기 위해 낙양으로 몰려들었다.
심지어는 다른 나라의 왕들까지 사신을 보내어 여불위에게 문안 인사를 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진왕 정(政)은 버럭 의심이 일었다.'역모를 꾸밀지도 모른다.'
한 번 일어난 의심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마침내 결심하고 붓을 들어 여불위에게
편지를 썼다.그대가 진(秦)나라에 무슨 공로가 있기에 10만 호의 봉읍을 차지하고 있는가.
그대가 과인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중보(仲父)라 불리는 것인가.
그대는 가족을 데리고 촉(蜀) 땅으로 옮겨가 살아라!
여불위에 대하여 진왕 정(政)은 그간의 공로도, 자신과의 관계도 모두 부정해버렸다.
- 그대는 스스로 촉(蜀) 땅으로 향하라.이 무렵 촉 땅은 유배지였다.
촉행(蜀行)이 귀양살이를 의미한다는 것을 어찌 여불위(呂不韋)가 알지 못하겠는가.
그는 진왕 정(政)의 편지를 읽고 나서 불같이 노했다."나는 내 재산을 모두 털어 선왕을 구출하고
왕위에까지 올려놓았다. 우리 진(秦)나라에 나보다 더 큰 공을 세운 자가 어디 있는가."
"또 태후(太后)는 맨처음 나를 섬겨 잉태하였으니 지금의 왕은 바로 내 자식이다.
이보다 더 밀접한 관계가 어디 있는가. 그런데도 왕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까지 핍박하는가."
여불위(呂不韋)는 당장에 다른 나라의 군사를 끌어들여 함양성으로 쳐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그러나 그러기에는 이미 진(秦)나라는 너무 강성해져 있었다.
6국이 연합한다 해도 진(秦)나라를 이길 수 없음을 누구보다도 여불위(呂不韋)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아아!'그는 계산이 빠른 장사꾼이었다.이득과 손실을 정확히 계산할 줄 알았다.
'승산이 없다.'그는 자신의 비참한 종말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돌이켜보면 진왕 정(政)은 처음부터 자신보다 권세가 커진 여불위(呂不韋)를 겨냥하고 치밀한 계산하에
일부러 '노애의 난'을 유도한 것이 아닐까.진왕 정(政)의 영특함이나 음흉함으로 불 때
능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는 오래 전부터 이런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담이지만, 우리는 흔히 진시황(秦始皇)을 떠올리면 '포악한 독재자' 로만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의외로 기다림을 아는 속 깊은 인물일 수도 있다.
여불위(呂不韋)의 처단 과정이 그것을 말해준다.그는 여불위 하나를 제거하기 위해 실로 오랜 세월을 참고
기다려 왔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꼬투리를 잡아냈다.그러나 여기서도 그는 결코 서둘지 않았다.
여불위(呂不韋)의 숨통을 조이더니 마지막에 가서 모든 공로와 관계를 부정하는 결정타를 먹인 것이다.
어쨌든 여불위(呂不韋)는 별짓을 다해도 빠져나갈 수 없다고 판단했음에 틀림없다.
'그럴 바엔 차라리...............'깨끗한 죽음을 각오했다.시종에게 명했다."술과 짐조(鴆鳥)를 가져오라."
짐조는 술에 넣으면 무서운 독을 내는 새로서 뱀을 잡아먹는 독조다.
옛날의 독주(毒酒)는 대개 이 짐조를 이용해 제조했다.여불위(呂不韋)는 직접 술에 짐조(鴆鳥)를 넣어
독주를 만들었다. 그는 단숨에 그 술을 마시고 침상에 누웠다.
그렇게 그는 파란만장(波瀾萬丈)의 생을 마감했다.
노애의 난이 일어난 지 3년 후, BC 235년(진왕 정 12년)에 일어난 일이었다.
진시황(秦始皇)이 천하 통일을 이루기 불과 14년 전의 일이다.
여불위(呂不韋)는 누구보다도 진왕 정(政)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듯싶다.죽은 후에 자신에 대해
더 혹독한 형벌을 내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심복 부하에게 유언을 내렸다.
- 내가 죽거든 장사를 지내지 말고 북망산(北邙山) 아래에 몰래 암장(暗葬)하라.
심복 부하는 그 유언대로 했다.그의 짐작은 맞았다.진왕 정(政)은 여불위가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시체를 찾게 했다.그러나 아무리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여불위(呂不韋)는 죽은 자신의 몸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었다.
오늘날도 북망산(北邙山)으로 올라가는 도로 서쪽에 큰 무덤이 하나 있다.
사람들은 그 무덤을 여모총(呂母塚)이라고 부르고 있다. 여불위(呂不韋)의 시체를 암장한 곳이라고 한다.
생각해보면 여불위(呂不韋)는 전국시대 말기의 부산물이다.미천한 상인 신분으로 후세에까지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그 행적이라는 것이 참으로 기상천외(奇想天外)한 것들뿐이다.
실제로 진왕 정(政)이 여불위의 자식인지 아닌지는 밝혀지고 있지 않다.
아니 영원히 밝힐 수 없는 수수께끼일지도 모른다.중요한 것은 여불위 같은 사람이 출세할 정도로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말기는 혼란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사마천(司馬遷)은 여불위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을 내렸다.
공자(孔子)가 말한 바 있는 '명성은 있되 실속이 없는 자' 가 바로 여불위다.
짧지만 정곡을 찌른 혹평(酷評)이다.
885편에 계속
열국지 [列國誌] 885
■ 3부 일통 천하 (208)
제13권 천하는 하나 되고
제23장 멸망하는 나라들 (1)
- 여불위(呂不韋) 제거!
이제 진왕 정(政)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가슴이 다 시원했을 것이다.아니, 아직 한가지 더 남았다.
여불위(呂不韋)와 함께 했던 3천여 문객과 그의 일당들이었다.'이 자들 또한 모두 제거하리라.'
여불위(呂不韋)의 문객들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그럴 듯한 말로 권력층에 붙어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들!
이런 인식이 강했다.실제로 그와 비슷한 일이 진(秦)나라 내에서 발생했다.
여러 해 전, 한(韓)나라는 진나라의 국력을 소모시킬 목적으로 정국(鄭國)이라는 수공(水工)을 진나라로
파견한 바 있었다. 수공이란 수리(水利) 기술자를 말한다.정국(鄭國)은 언변술이 상당히 뛰어났던 모양이다.
그는 일단 여불위의 문하로 들어가 진나라를 위하는 척하며, 진왕 정(政)과 여불위를 설득하여
진나라 내에 방대한 수리 공사를 일으켰다.경수(逕水)를 위수 북쪽으로 끌어들여 인공적으로
저수(沮水) 등 여러 강과 합하게 하여 낙수(洛水)로 합류시키는 대공사를 벌인 것이다.
수백만 명의 인원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자금이 이 공사에 투입되었다.이리하여 완성된 것이
정국거(鄭國渠)다. 정국이 만든 수로라는 뜻.총길이 5백여 리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수로였다.
그런데 이 공사가 진(秦)나라의 재정과 국력을 약화시키려는 한(韓)나라의 치밀한 계략이었다는 사실이
그 무렵 발각되었다.진왕 정(政)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말을 잘하는 자는 믿을 수가 없다.
그런데 역사는 종종 이상한 결과를 초래한다.진나라를 피폐시키려던 이 정국거(鄭國渠)가 결과적으로
진나라의 천하 통일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될 줄이야.
정국(鄭國)이 만든 5백여 리의 긴 수로 주변은 모두 황무지였다.
그것이 이 관개 공사로 인해 하루아침에 옥토로 변해버리고 만 것이다.
<사기(史記)>의 <하거서(河渠書)>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이리하여 관중(關中) 땅은 옥토가 되어 가뭄이
들어도 많은 수확을 거두었고, 그 덕분에 진(秦)나라는 부강해져 마침내 열국(列國)을 통합했다.
이것을 두고 '하늘의 뜻' 이라고 하는가. 되는 집은 불이 나도 흥한다는 말이 있다.
이 무렵의 진(秦)나라가 바로 그런 추세였다.어쨌거나 정국거(鄭國渠)로 인해 진왕 정(政)은 유세가들을
몹시 불신했다.거기에 여불위의 사건까지 겹쳤다.이로 인해 유세객들에 대한 진왕 정의 미움은 극에 달했다.
그는 여불위(呂不韋)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지체없이 전국에 명을 내렸다.
"여불위의 문하로서 이미 벼슬을 하는 자든 아니든 모두 삭탈관직(削奪官職)하여 나라 밖으로 추방하라."
"아울러 이 나라 저 나라 돌아다니며 유세(遊說)하는 자들도 모두 내쫓아라. 만일 이와 관계되는 자를
숨겨두는 자는 같은 형벌에 처하리라."진(秦)나라 전역에 대소동이 벌어졌다.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지녔던 여불위(呂不韋)였다.그가 천거한 벼슬아치가 어디 한두 명이었던가.
모두 관직에서 쫓겨나 국경 밖으로 추방당했다.
진나라에 머물며 벼슬자리를 구하던 유세가(遊說家)들 또한 날벼락을 맞았다.
국경으로 나 있는 길은 연일 진(秦)나라를 떠나는 유세가들로 가득 메워졌다.
이때 여불위의 가신 중에 이사(李斯)라는 사람이 있었다.이사는 원래 초나라 상채(上蔡, 하남성 상채현)
태생으로, 여기저기 떠돌다가 진나라로 들어와 여불위(呂不韋)의 문하에 들게 되었다.
그가 초(楚)나라에 머물러 있을 때의 일이었다.이사(李斯)는 한때 초나라 말단 관리직을 지낸 적이 있는데,
어느 날 관청의 변소에 들어갔다가 오물을 먹던 쥐들이 황급히 놀라 달아나는 것을 보았다.
원래 쥐라는 것들은 사람을 무서워하는가 보다 여기고 이번에는 곡식창고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상했다.창고 안의 쥐들은 사람을 보고서도 전혀 달아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순간 이사(李斯)는 깨달았다.- 사람이 잘나고 못난 것이 다 이 쥐들과 같다. 비굴하고 비굴하지 않고는
스스로 처한 바에 달렸을 뿐이다.이사(李斯)는 그날로 관직을 때려치우고 당시 '제왕학' 의 대가인 순경(荀卿)을
찾아가 제자가 되기를 청했다.순경은 곧 '성악설(性惡說)'로 유명한 전국시대의 사상가 순자(荀子)를 말함이다.
수년간 순자에게서 제왕학을 배운 이사(李斯)는 초나라 왕이 섬길 만한 인물이 아님을 알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닌 끝에 진나라 함양으로 들어왔다.그 무렵은 막 진장양왕이 죽고 진왕 정(政)이 왕위에 올랐을 때였다.
물론 승상은 여불위였다.이사(李斯)는 여불위의 가신이 되어 그가 정책을 펴는 데 여러 모로 조언했다.
여불위(呂不韋)는 이사가 비범한 능력을 지녔음을 알고 진왕 정에게 천거하여 객경 벼슬을 내려주었다.
그런데 이번 추방령에 의해 이사(李斯) 역시 국경 밖으로 쫓겨나게 되었던 것이다.마땅히 갈 곳이 없었고,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이대로 나갈 수는 없다.'이렇게 결심한 그는 여관에 머물며 표장(表章)을 한 통 써서
진왕 정(政)에게 올렸다.그런데 그 내용이 비범했다.옛날 진목공(秦穆公)이 진나라 터전을 이룩한 것은
백리해(百里奚)와 건숙(騫叔) 덕분이며, 진효공(秦孝公)이 진나라 국법을 세운 것은 상앙(商鞅) 덕분이며,
진혜문왕(秦惠文王)이 연횡책을 써서 합종을 깨뜨린 것은 장의(張儀) 덕분입니다.
또한 진소양왕(秦昭襄王)이 원교근공으로써 6국의 우두머리가 된 것은 범수(范睢) 덕분입니다.
생각해보면 이들은 한결같이 모두 타국 사람들입니다.신이 듣건대,
태산(泰山)은 흙 한 줌도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능히 그 높이를 이루었고,
바다는 조그만 시냇물도 받아들였기에 능히 그 깊이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왕께서는 천하를 하나로 통합할 큰 뜻을 품으셨으면서 어찌하여 타국 사람들을 국경 밖으로
내모는 것입니까.대왕께서는 천하를 하나로 통합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 많은 타국 인재들이 다른 나라로 가
계책을 올리면 어쩌려고 하십니까.이들을 놓치면 대왕은 인재를 구하고 싶어도 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 태산(太山)은 흙 한줌도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능히 그 높이를 이루었다.
이글을 보는 순간 진왕 정(政)은 홀연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황급히 조정으로 나가 좌우 신하에게 명했다.
"추방령을 거두고 사람을 보내 이사(李斯)를 데려오라!"
이때부터 이사(李斯)는 여불위를 대신하여 진나라의 여러 중요정책을 관장하게 되었다.
관직은 정위(廷尉).사법(司法)을 주관하는 최고 장관이다.진(秦)나라에 또 한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886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