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빵
김 난 석
유월이 간다.
자욱한 안갯속에 유월이 사라진다.
옥상에 올라 한강물 따라 시선은 남산을 찾아보지만
몽롱한 안개 속에 상념만 떠오른다.
공직(公職)의 일로 전방 어느 군부대를 찾았을 때였다.
지휘관들만 이용한다는 식당에 들러보니 화려할 건 없고
몇 가지 산나물에 산더덕 무침이 싱싱해 보였을 뿐이었다.
특이한 건 식탁 가운데 날콩 그릇이 놓여있었는데,
그게 무어냐고 물었더니 자기들은 매일 콩밥만 먹고사는 신세라 했다.
일 년 내내 외출도 못하는 일선 지휘관의 병영생활은
감옥이나 마찬가지니 실감 난다고 응수하고 한참 웃었지만
밥상머리에서 날콩 몇 개 먹으면 변비가 생기지 않는다니
긴장된 생활 속에서 그럴듯한 식단이란 생각도 해봤다.
사실 콩은 신이 내려 준 최고의 식품으로 꼽힌다.
양질의 단백질과 지방질, 그리고 각종 무기질이 풍부하니 그런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콩밥을 주었다는데
수인(囚人)들이 난방도 안 되는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그나마 견딜 수 있었던 건 잘 알려진 콩의 비밀이었던 것이다.
세월은 흘러 집단생활을 해야 하는 감옥이나 병영 모두 식생활도 많이 향상되었다.
질뿐만 아니라 양의 측면에서도 넘치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작전상 간단명료함을 요하는 군에서는 남은 밥과 반찬을 잔반(殘飯)이라 하고,
군은 또 기동성을 필요로 하므로 잔반 정도에 그리 큰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유월전쟁 당시만 해도
군부대에서 밥과 반찬이 남는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오죽하면 수채구멍까지 뒤져 콩나물 대가리도 건져먹었다 했겠는가.
북한군에 밀려 제주도 모슬포에 구축된 임시 훈련소에선
병사들이 먹을 게 부족해 하도 고생한 터라
지금도 그쪽에 대고 오줌도 누지 않는다고도 한다.
언제부턴가 군 생활도 여유를 찾으면서 잔반이 많이 생기게 되고,
이 잔반은 발음이 짬빵으로 변하더니
이젠 군생활의 경력 즉 밥그릇 숫자를 짬빵이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군은 속성상 일사불란한 지휘체계를 필요로 한다.
전시에 의견을 모은다고 우왕좌왕할 수 없으니
부대장의 호령에 이유 없이 따라야 하고
같은 계급 안에서도 군번이 누가 빠른가에 따라 지휘체계가 이뤄진다.
따라서 하루라도 군 생활을 더 해 밥그릇 숫자가 많은 사람이
언필칭 선임이 되는 것이요, 지휘관이 없을 땐 이 사람이 통솔하게 되어있다.
유월전쟁을 통해 계급과 군번의 빠르고 늦음에 따른 차별이 생기면서
그 외의 많은 차별은 없어지게 된다.
종래의 양반과 서민도, 지방색도, 학력의 차이도, 유무식도
모두 계급과 군번이라는 질서 안에 통합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밥그릇 숫자가 서열을 정했던 셈이다.
그러나 이건 군대 안의 일로 그쳐야 한다.
군대 밖에서 밥그릇 숫자만 따지다 보면 사회는 역동성을 잃게 된다.
왜냐하면 다양한 능력을 도외시한 단세포의 유기체로 퇴화하기 때문이다.
유월전쟁 이후 비대해진 군 조직이 과다하게 사회에 관여하게 됨에 따라
그 경위야 어떠하든 이에 대해 많은 비난이 쏟아졌었다.
획일화된 군대문화를 청산하자는 목소리도 높아진 지 오래다.
그래서 그런지 외형적으론 군대조직이 사회에 별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현상을 보면
군대를 흉내 내는 모습이 도처에 나타나고 있다.
사회의 다양성을 살려 계급이나 밥그릇 숫자가 아닌
각각의 직능과 재주가 사회를 골고루 이끌게 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공공기관이나 사기업은 물론, 학원의 학생들까지도
획일화된 군대조직을 흉내 내
계급이나 밥그릇 숫자가 모든 것을 눌러 이끌려 든다면
창의성이 발휘될 턱이 없다.
사회의 각 부문이 잠재력을 한껏 발휘하지 못하는 건 이런 때문은 아닐까?
그 연유가 유월전쟁에 가 닿는 것 같아 나는 유월이 오면 아직도 슬프다.
유월이여, 침묵하려거든 짬빵도 함께 거두어 가라!
연전에 어느 개그맨이 다른 개그맨을 몽둥이로 때려 말썽 난 적이 있었다.
밥그릇 수도 적은 후배가 신고도 제대로 하지 않고 건방져 군기를 잡으려고 그랬다니
요즘 군대도 그렇지 않다는데 기가 찰 일이었다.
내겐 들 왜 그런 일이 없었을까.
어렵사리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학교에 부임하니
여기저기 신고를 하라 했다.
교육청의 장학사, 장학관..., 이제 다 된 줄 알았더니
도청에 올라가 또 거기 장학관들에게 신고를 하라 했다.
맨손으로 꾸벅 절만 하고 돌아왔으니 그들이 좋아했을 리 없었을 것이다.
교직을 그만두고 대학에 들어가던 해,
신기한 오리엔테이션을 마치니 선배들에게 신고를 해야 한다며 집합하라 했다.
학문과 자유의 전당이라는 상아탑 안에서 신고는 무어며 집합은 무엇이었던지~.
대학을 마치고 어느 국가기관에 임용되어 첫 출근을 하니
다단계의 신고 스케줄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어디든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초등학교 때의 여 제자가 찾아왔다.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중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는데
선배 교사들의 말에 의하면 교장선생님에게 신고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찌하느냐고 물으나 낸들 알 리가 있으랴.
뒤에 알고 보니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한정식 집에 초대해
만찬을 대접하면서 금반지를 포장해 전해주었다고 했다.
요즈음은 대학에 들어가면 엠티(MT)에 불려 가
선배들의 지휘에 따라 갖은 기합에 제압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한다.
그래야 선후배 사이에 정이 두터워진다니
선배라는 것 말고는 본 보여줄 게 없는 모양이던가.
보통사람들은 스튜어디스라면 천사 같은 이미지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용모에 잘 다듬어진 몸짓으로 승객에 응대하니 그럴 것이다.
하나 그들의 뒤를 들여다보면 기강을 빌미로 가해지는
선배들의 횡포에 직장생활이 지겹다는 말도 들리니
구구한 이야기야 더 해 무엇하랴.
이렇게 우리는 군대문화를 싫어하면서도
도처에서 병정놀이를 하고 있으니 한심스럽다.
정작 군대문화가 굳건해야 할 병영 안에서는
민주화 바람 탓인지 군기가 약해지고 있다니 이를 어찌할 것인가.
유월이여! 가려거든 짬빵도 거두어가라.
얼마 전 공개되어 회자되었던 지나간 진보정부의 남북 정상 대화록을 보면
두 정상 모두 양측의 군대조직을 마치
융통성 없는 보수층으로 매도하는 듯한 대목도 보였다.
우리야 민주화 과정을 거쳐 일관되게 반공을 기치로
국방에 전념할 뿐이니 그렇다 하더라도
북한은 반세기가 넘도록 유월전쟁당시의 김일성에서 김정일 김정은으로
지도자가 두 번 바뀌었을 뿐
권력의 핵심은 여전히 군 지휘관 집단이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 중엔 유월전쟁의 참전자 즉 고고참 짬빵들이 포진해 있다니
이들이 시대의 변화를 어찌 알랴.
그럼에도 선군(先軍) 정치만 부르짖는다면
변화는 요원할 수밖에 없으리라.
짬빵은 이렇게 앞서갈 수 있는 자를 밥그릇으로 가로막는 것이니
유월이여! 지나가려거든 한 점 바람이라도 불러일으켜다오.
첫댓글 그 당시에도 먹을 것이 귀해 남는 음식이 없을뿐더러
수채구멍에서 콩나물 대가리를 줏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일 것입니다.
전 글을 읽으며 모르는 것 투성으로 군대문화가 귀에 설고
우리나라 군대도 아무리 민주화가 되었다 하더라도 보수적이지 않나뇨?
많이 들어본 짬빵이라는 단어는 무엇인가 이해가 됩니다.
6월의 마지막날을 보내면서 난석님의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실겁니다.
낭만님은 저와 연배가 같지만
여성이시고,저와 길이 달라서 그러시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저는 여자의 고달팠던 일상들을 잘 모릅니다.
다만 어머니를 통해서만 느끼지요.
요즘은 케익 까지 먹을수 있다지요 면회온가족들이
잔뚝뜩 사가지고오니
그옛날 빈 총알통에 몰래잡은 물고기 끓여 먹다
통이 터져서 실명된병사 영창간병사도 있었다 하네요 본인 이야기 직접 들었지요
그래도 질서는 있어야되지요 너무풀어주면
또 어떤일이 생길지..
안단테님은 균형감각이 참 뛰어나세요.
그런데 총알통도 그렇고
군대에서는 각종 안전사고가 자주 나요.
그래서도 긴장을 늦추면 안되지요.
난석님~
예전의 군대 문화는 일본 군대의 찌꺼기가 남아 있는 것이지요
전 장교라도 소위때 중위들에게 참 많이 맞았답니다
이유 불문이죠
요즘 그랬다간 바로 영창입니다
그 당시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니 사회도 군대식 따라 그렇게 되었나 봅니다
비 많이 오네요
유월의 끝날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그런가요?
저는 사병이라서 장교들 내부사정은 처음 듣네요.
착한 시인님은 그러질 못했을겁니다.
아닌가요? ~~~ㅎ
글제목을 보고 중국음식얘기인 줄 알았습니다
저희 때는 짭밥이라고 했습니다
짬밥 숫자가 매우 중요했지요
군번은 군번대로, 전입일자는 일자대로
기갑학교 깃수는 깃수대로
가는 곳마다에서 짭밥숫자를 따졌지요
사회에 나와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경력이 오래된 사람이 힘이 많았습니다
난석선배님 말씀대로 역기능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순기능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군대는 어차피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으니
그런 상하복종관계가 필요했을겁니다
소위 상명하복의 문화지요
이 곳 카페에도 은근 그런 문화가 있습니다
도만 지나치지 않는다면 필요하겠지요
선배를 존중하고 후배를 사랑하는 문화
필요악이라고 생각합니다
난석선배님 덕분에 짬밥문화를
다시한번 되돌아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옳은 이야깁니다.
공감해주셔서 고마워요.
그런데 카페는 친목모임이지요.
모든게 친목에 모아져야 할겁니다.
@난석 저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
@청솔 ㅎㅎ
저도 쨤밥이라고 알았더랬습니다~^^
단세포적인 획일 군대 문화가
우리를 지배하던 시기도 있었지요~
그 때는 그게 넘 싫어서 저항하기도 했지요
그런 과정을 거쳤기에
지금 누리는 자유가 소중한 거 같아요~
남석 님 글의 행간에 숨겨져 있는
더 깊은 의미~
찾아 보아야겠습니다~^^
짬빵이 조금 순화되어 짬밥으로 불리게 된 것 같아요.
그거나 그거나 좋은 말이 아니지요.
그런데 남정네들이 쓰는 말을 귀부인 두용님이 어찌...?
간혹 티브이를보면 요즘 군생활 할만한 것 같습니다.
저희때만해도 식당앞 드럼통에있는 잔반(짬빵)을 건져먹던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랬군요.
저는 후방에서 근무해서 그렇진 않았는데요..
저도 짬밥이라 불렀습니다. 저희땐 소고기국에 소고기는 없어 황우도강탕이라 불렀습니다
한번은 연대에 공무갔다가 오는길에 2.4종(부식) 트럭을 타고 왔는데 선탑한 군수과 선임하사가
일동시내 식당마다 들러 고기를 한판씩 내리는 걸 봤습니다
나중에 수금해서 상납도 하고 자기도 먹고 그런것 같았습니다
그걸 목격했군요...
군대라는 게 원래 그래요.
임오군란이 왜 일어났게요.
사병 식자재 다 털어먹고 주식도 안 주니 난리가 났었지요.
콩의 비밀
날콩을 먹는다는 건
처음 듣는 짬밥이야기입니다.
전 오늘도 울타리콩을 한 자루 사면서 부자가 된 느낌...
그런데 각종 신고식은
또 뭔지요.
전교조는 그런 점에서 잘 했다고 봅니다만
그 맛있다는 울타리콩을 그렇게 자루로 사들이면 값이 오르지 않나요?
물론 웃자고 해본 소리지만 자루도 자루 나름인 거지요..ㅎ
유월이 간다
선배님은 유월이 떠나는게
아쉬운가보다
짬빵얘기로
유월에게 화풀이 하는 듯합니다
7월이 방긋 찿아왔어요
행운 선물 드립니다.
슬프거나 노하지 마세요.ㅎ
웃어야지요.
그러나 잊지는 말아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