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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3: 11 아는 것과 본 것 - 요 3: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요 3: 11 아는 것과 본 것 -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 도다. (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 도다.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계시 전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가 아는 것 우리가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가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 나라의 영생에 참여함을 체험하고 우리가 그것을 증언하는데 니고데모로 대표되는 너희들 유대인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왜 유대인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있느냐? 그들은 이 세상에 속한 자 땅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1) 우리
이들이 누구를 뜻하는가에 대해서 여러 학자들의 견해가 있다.
Ⓐ 메이어 (Meyer)는,
주님께서 단순히 자기 자신만을 가리켜 `권위의 복수'(pluralis majestaticus) 즉 `경어적 복수'를 사용한 것이라고 하였다.
Ⓑ 바이스(Weiss)와 루타르트(Luthardt)는,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이라고 했다.
Ⓒ 벴겔(Bengel)과 스티어(Stier)는
`삼위 일체로서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했다.
Ⓓ 루터(Luther)는
`그리스도와 선지자들 전체'를 말한다고 했다.
Ⓔ 고데(Godet)와 웨스트콧(Westcott)과 행스텐베르그(Hengstenberg) 등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주장한다.
이중 두번째와 다섯번째 주장이 가장 설득력 있는 것 같다.
(2) 아는 것과 본 것
니고데모를 비롯한 영으로 거듭나지 못한 자들이 알지 못하는 성령의 역사와 그 활동을 가리킨다.
2]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 도다.
(1) 너희
니고데모를 위시해서 예수가 행한 표적에 의해 영향을 받았으나, 예수를 믿는 참 신앙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무지한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2)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 도다.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와 구약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예수 당시의 유대 사람들 역시 예수의 교훈을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어두움은 빛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1: 5).
여기서 예수는 영생에 관한 자신의 가르침이 단순한 추상적 지식이나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엄연한 진리임을 분명히 하고서 이를 선포적 차원에서 증거하고 있다.
기실 이러한 신령한 지식은 성령의 조명을 통한 믿음의 눈으로만 감지할 수 있는 비밀에 속한 것이라 하겠다.
예수께서는 거듭남에 대한 자신의 말이 진리임을 강조하셨다. 그는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라는 표현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세 구별된 인격을 암시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비이다. 한 분 하나님께서 세 구별된 인격으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은 성경에 계시 된 명확한 진리이지만 동시에 매우 신비한 사실이다.
주께서는 또 ‘하늘의 일’에 대한 말씀도 암시하시는 것 같다. 그것은 요한계시록 같은 책에 기록된 천국에 대한 말씀들을 가리켰다고 본다.
요 3: 12 땅의 일과 하늘의 일 -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
내가 땅에 속한 일을 말해도 너희가 믿지 않는다. 그런데 하늘에 속한 일을 말하면 너희가 믿겠느냐?
바레트(T. K. Barret)의 설명이 옳은 것 같다. “땅에 속한 일”은 이 물리적인 세상, 육신적인 세상의 사건들로서 예컨데 태어남. 바람이 분다 등의 사건들로서 그리스도와 그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비유 역활을 하는 것들을 말한다.
그러므로 니고데모에게 예수는 태어난다, 바람이 분다는 땅의 현상을 비유로 들어 하늘의 현상을 설명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못 알아듣고 예수를 믿지를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하늘의 것은 하늘의 질서는 이 땅의 비유와 연결하지 않고 그냥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들이다.
이것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무슨 소용이 있느냐? 즉 땅의 것인 태어남이나 바람 부는 현상으로 땅 위에 속하는 물리적 현상으로 하늘에 속한 진리의 비유로 쓰이는 것들을 비유하지 않고 하늘의 진리를 직접 말하고 선포하면 어떻게 믿겠느냐?는 말이다.
1]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이에 관한 해석은 다양하다.
(1) 헌터(A. M. Hunter)에 의하면
`땅의 일'이란 물, 바람, 탄생 등과 같은 지상적인 현상이나 사건들인 반면 `하늘의 일'이란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는 것과 같은 초월적 사건들이라고 하였다.
(2) `땅의 일'이란
니고데모가 결국 이해하지 못했던 영적 거듭남을 포함한 하나님 나라의 사업이며,
Ⓐ `하늘 일'이란 14절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은 것 즉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 등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 전자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 안에 거하게 되신 것으로 그리고 후자를 그리스도가 그의 사역을 모두 마치고 하늘로 올라가시고 장차 모든 성도에게 영원한 처소를 제공하실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 마지막 견해로서, `땅의 일'을 예수께서 실례로 드신 바람 부는 현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2]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즉, 예수께서 자연 현상인 땅의 일을 예로 들어 설명해 주어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하늘 일' 곧 영적 실재를 직접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 자명하다는 말씀이다.
요 3: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
유대교에서는 지금까지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선지자들이 있었다. 그 선지자들의 계시를 유대인들이 성경으로 묶어서 연구하고 하나님을 터득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그 선지자들의 계시를 가장 잘 터득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바로 니고데모이다. 이스라엘의 선생이고 유대관원이고 바리새인이다. 제일 열심 있는 연구가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한계가 있다. 하늘의 진리를 알아 듣지 못했다. 심지어 비유해서 설명을 해도 못 알아 듣는다. 이것이 유대교의 한계이다. 왜 유대교에 이 한계가 있느냐? 선지자 자신들이 이 세상에 속한 자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이 세상에 그 말씀 하나님을 계시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제한적이었다.
1] 하늘에서 내려온 자
반면에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으로서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다. 곧 위와 아래 세상에 속해서 다리를 놓은 사람이다.
하늘의 진리를 몸체로 이 세상에 나타내 주는 분이다. 예수 인자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로서 다시 올라가는 자로서 계시의 새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유대교의 계시 방법은 간접적인 방법이다. 반면에 성육신하신 로고스가 하나님의 진리를 직접적으로 계시한 것이다. 이렇게 계시의 역사에 있어서 전혀 새로운 국면이 열리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선지자 시대에 속하는 대표적인 존재로서 연구해서 하나님의 계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한 계시를 받아야 한다.
그것은 위에서부터 새로 태어남의 방식이다. 여기서 암시하는 것은 인자가 하늘 세상과 땅 세상을 다리 놓는 분이고 아래 세상에 속하는 우리가 인자인 예수를 통해 윗 세상의 영생에 참여하게 하는 분이다.
2]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하늘에 올라간 자(*, 아나베베켄 에이스톤 우라논)를 직역하면 이 말은 `하늘에 계신 자'란 뜻이다. 그리고 여기 사용된 동사는 현재 완료형으로 미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따라서 이 구절은 상반절의 의미를 이어받아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人者) 외에는' 그 누구도 하늘에 있는 자가 없기에 하늘 일을 말할 수 있는 분은 인자 자신 뿐이라고 하는 자기 증거가 된다.
물론 구약의 두 인물 에녹(창 5: 24)과 엘리야(왕하 2: 9-11)가 승천(昇天)했다는 기사가 나오지만, 그들은 땅에 살던 자로 하늘에 올라갔으나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던 자로 땅으로 내려와 하늘의 일을 말씀하셨다는 점에서 확연히 구분된다.
* 창 5: 24 -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 왕하 2: 9-11 – 9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 10 이르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고 11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여기서 우리는 성육신하신 예수의 인성과 신성에 관한 신학적 의미를 상고해 볼 수 있다. 본 절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와 `인자' 그리고 `하늘에 올가간 자'는 모두 동격이다. 다시 말해서 인자(人者)로 계신 예수는 원래 하늘에 계셨던 성자(聖子) 하나님으로서 인간 구원과 새 창조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일체의 모든 인간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된 분이다. 바울의 말대로 사람들은 모두 땅에서 났고 흙에 속한 자이다.
* 고전 15: 47 -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그러나 예수는 영원 전부터 하늘에 계신 분이다. 이러한 성육신의 신비 또한 인간의 유한한 이성(理性)으로서는 도무지 설명할 길 없는 비밀이다.
3] 성령으로 난 사람
주님은 성령께서 우리를 중생시키는 영적인 역사의 모습과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변화의 역사를 바람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성령의 역사는 바람처럼 보이지 않는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가 거듭나도 그같은 사실을 눈으로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신 것이다.
성령이란 말은 헬라어로 ‘프뉴마’로 불린다. 이 말은 바람, 기운, 생기의 뜻을 지니고 있다. 주님이 중생의 과정에서 성령과 같은 뜻을 가진 바람이란 비유로 설명하신 것은 그 뜻이 깊은 것이다.
(1) 성령으로 난 사람
사람이 성령으로 중생한 사실을 알 수 있는가?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같은 문제에 흥미를 가지고 어떤 육감적인 증거를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증거를 발견하거나 찾는 데 실패하고는 낙심하거나 자기는 아직도 중생치 못한 줄로 속단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중생한 장소와 시기까지 정확하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런 판단은 성령의 역사를 모르는 데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일도,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그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역사하시는 것도, 우리의 육적인 눈으로 볼 수도 없으려니와 육적인 감각으로 감지할 수는 더군다나 없다. 지금 우리는 성령으로 우리의 생명이 살리심을 받았지만 육신적으로는 잘 모르고 있다. 성령이 우리의 거듭남을 증거하시는 증거는 영적인 증거인데 그 영적인 증거란 곧 우리의 믿음이다.
(2) 바람같이 역사하시는 성령
성령의 역사는 마치 바람과 같이 활동한다. 바람같다는 말의 뜻은 성령이 하시는 사역을 나타내는 하나의 비유적인 표현이다.
첫째로 바람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존재는 분명히 있는 것 같이 성령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한다. 바람은 그 행방에 대하여 잘 알 수가 없듯 성령도 역시 그 움직이는 사실은 분명하나 그 움직이는 행방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3)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주님은 바람의 움직이는 사실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하셨다.
① 바람같은 성령
이 말씀은 사람이 거듭나는 일이 마치 바람과 같은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 없고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일어난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신 것이다.
이 같은 성령의 역사는 다만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바라보며 깨닫게 된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신다.
② 새로운 변화
성령으로 난 사람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변화를 받게 된다. 성령은 우리 속에서 두 가지 일을 하신다. 하나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다른 한 가지는 성령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그리스도인은 이 성령의 변화시키시는 영향을 받기에 육의 사람의 자리에서 영의 사람으로의 변화가 일어난다.
마음이 강퍅하여 성령의 감화를 거역할 때는 그 변화의 속도가 느려지고 이 마음의 변화에 따라 우리 육신은 영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도록 부단히 우리의 생애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간섭하시나 우리가 성령의 감화하심을 거역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죄악으로 강퍅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며, 이런 마음을 깨시기 위하여 죄를 버리도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징계의 손을 쓰신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성령의 감화하심을 거역하고 육신의 뜻대로 세상 풍습을 따른다고 해도 평생을 통하여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뜻을 포기하지 아니하신다.
③ 육신대로 사는 사람은 죽는다고 하셨다.
죽는다는 말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계속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역하고 끝까지 육신을 따르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죽는다는 또 다른 해석은 성령의 인도하심과 감화하심을 거역하는 사람들은 그의 생활이 하나님의 계속적인 징계와 간섭하심으로 마치 죽은 자와 같이 비참한 상태에 놓여져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의 중생은 눈에 보이지 않게 진행되지만 바람과 같은 성령의 역사 하심으로 틀림없이 이루어지는 일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거듭나면 우리 속에 계시는 성령의 지속적인 역사 하심으로 우리의 마음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고 우리의 행실을 새롭게 만든다.
그리하여 그의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새로워져 육의 일을 버리고 영의 일을 생각한다. 성령은 바람처럼 역사 하시기 때문에 성령을 충만히 받는 생활은 강한 영적 바람이 우리 생활 가운데 나타나 우리로 영적인 열매를 맺게 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가 되기를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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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삶에도 여백의 공간이 있어야 아름답습니다.
내 삶에 여백이 클수록 사랑과 행복을
넉넉히 채울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건강과 행복이 늘 함께 하시길 소원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