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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0. 2. 큐티
마태복음 19:1 ~ 12
결혼과 이혼과 독신에 대하여
관찰 :
1) 갈릴리를 떠나 요단 건너 유대 지경에서 치병 사역을 하시는 예수님
- 1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 예수님께서는 용서에 대한 가르침으로 갈릴리에서의 사역을 일단락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셔서 머무셨습니다.
- 2절. “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 => 큰 무리가 따르고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주님이 치병 사역을 하시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시기 위한 포석이셨습니다. 단순히 인생의 질병을 치료하시는 것이 목적이셨다면 주님은 의사로 오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질병을 고치심은 분명히 하나님 나라를 위한 전제 사역이 되었고, 질병을 낫고 이 세상에 속하는 삶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삶을 살도록 하시는 것이 주님의 의도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가르침도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의 삶의 양식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2) 이혼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질문
- 3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 이 질문의 내면에는 간교한 계략이 숨어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원수도 사랑하라고, 또 형제를 용서하라고 가르치시는 분이신데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함으로 이혼을 인정한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효가 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위해서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하시게 된다면 모세가 이혼 증서를 내주어서 아내를 버리도록 한 율법을 무시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이들의 내면에는 율법을 정말로 지키고자 하는 마음도 없고, 단지 예수님을 고소하기 위한 계략으로서 인생의 가장 중요한 혼인의 문제마저도 가지고 놀고자 하는 악한 의도가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미 자제력을 잃고 있었습니다.
3) 바리새인들의 간계로 인하여서 드러나는 혼인과 이혼과 독신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 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 5절.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 6절.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 7절.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 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 9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 10절. “제자들이 이르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
- 1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 12절.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a. 혼인
- 혼인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남자와 여자로 만드셔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기본이 되고 중요한 사회제도입니다. 결혼이 인간에게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 외에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 사람이 부모를 떠나는 것이 혼인의 시작입니다. 부모로부터 경제적, 정서적, 영적 독립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진정한 혼인이 되지 못합니다. 이 시대 너무나 많은 결혼이 무너지는 이유가 자신의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남자와 여자가 여전히 부모의 영향 밑에서 자신의 배우자를 조정하고자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남자도, 여자도 그 부모를 떠나서 독립을 해야 참된 혼인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모를 섬기는 자리로 서야 합니다.
- 혼인은 한 남자와 한 여자 그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은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한 팀이 되어서 무엇에건 신뢰하고, 한 마음을 갖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육체적인 연합은 순간일 뿐이고, 진정한 연합은 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부부는 그렇게 한 마음이 되어야 진정한 연합을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이 연합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기에 사람이 나누지 못하는 것입니다. 혼인에 대한 이런 경외심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눈이 맞아서, 내가 사랑해서 한 결혼이라 생각하기에 내가 감정이 식으면, 내가 결정하면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혼인에는 증인이 필요한 것이고, 증인이 존재하는 한 하나님도 증인도 그 혼인에 대하여 효력을 없애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b. 이혼
- 모세는 사람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한 것입니다. 아내를 괴롭히고 더 어렵게 만드는 인간의 죄악 때문에 허용한 것이지, 그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은 남성이 아내에게 생활비를 주지 않고, 폭력을 행사하고, 괴롭게 하는 것을 못하도록 하기 위해, 지참금을 돌려보내고, 경제적으로 보호하고자 그렇게 조치를 취하게 한 것이지, 이혼이 정당하기에 이혼 증서를 준 것이 아닌 것입니다. 또한 결혼 한 여인이 살 길이 다시 결혼 하는 것인데, 이혼 증서 없이는 그것이 불가능한 사회였기에 그런 형편의 여인을 구제하기 위한 긴급구호 조치의 성격이 이혼 증서에 대한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 바리새인들은 이혼에 대하여 매우 잘못되고 어그러진 해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감히 예수님을 걸고넘어지고자 활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하는 것입니다. 당시에 여러 여인을 아내로 두는 일부다처제의 상황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즉, 주님은 일부다처제를 반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화라는 상황속에서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영역에 있을 뿐이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델은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아내로 맞아서 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만일, 한 남자에게 여러 아내가 있는 것이 행복한 것이었다면, 하나님은 아담에게 하와와 제인과 순이와 마가렛과 윈프리를 같이 만들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에게 하와로 충분했고, 900년이 넘도록 함께 하게 하셨습니다. 다만 가인의 후예로 악인 라멕이 두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가정을 무너뜨리는 사탄의 공격이 시작된 것입니다.
c. 독신
- 오직 타고난 자라야 독신으로 살 수 있습니다. 즉, 독신의 은사가 있어야 성한 몸으로 독신으로 범죄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을 너무나 잘 이해하십니다. 남자로서 아내가 없이 사는 것이 불가능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욕적인 부분, 정서적인 부분, 영적인 부분에 대해 모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 이것이 하나님의 실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다 이해되지 않지만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즉, 동성애자들이 말하는 주장들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 내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악한 구조속에서 만들어진 불구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사람이 남성을 여성으로, 여성이 남성으로 바꾸는 트랜스젠더까지 나와버렸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 바울과 같은 이입니다. 그가 남성으로 건강한 자였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스스로 독신으로 살았고, 성적인 욕구를 스스로 잠재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받을 만한 자가 받는 말씀입니다. 은사가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을 억지로 제도적으로 카톨릭과 같이 신부와 수녀로 만들어버려 오히려 더 많은 악한 일들이 일어난 것을 역사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은사가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여야 가능한 일입니다. 헨리 나우엔은 자신에게 동성애적인 성향이 있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복종시키고 독신으로 자신을 지키고 온전히 살았습니다.
가르침 :
1) 주님은 혼인과 이혼, 그리고 홀로된 성에 대해서 분명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혼인도 바르게 하여야 하는 것이듯, 이혼에 대해서도 함부로 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독신에 대해서도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모두를 사랑하시기에 혼인과 이혼, 독신과 같이 한 인생을 결정짓는 인윤지대사(人倫之大事)를 순간의 쾌락이나 정욕에 의해서나 단순한 생각으로 결정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와 법칙에 따라야 하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계시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듯이 사람의 정욕에 따라서 결정하는 영역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임을 가르쳐주시고 있습니다.
2) 결혼은 분명히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모를 떠나 독립해서 한 가정으로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아무리 헛소리를 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주님의 기준이고, 주님의 판단이십니다. 시대와 문화가 바뀌다고 바뀌어지는 것이 아닌 영역입니다. 일부다처제나 다부일처제, 그리고 동성애 결혼 등은 모두 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기독인은 이 부분에 대해서 명확해야 합니다.
3) 이혼은 음행의 연고 외에는 모두다 용서와 사랑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주님의 용서에 대한 가르침이 형제에 관한 것이었다면 부부간에는 얼마나 더 그러해야 하겠습니까? 마태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용서에 대한 가르침 뒤에 바리새인들의 질문과 연결하여 혼인과 부부의 도리에 대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부부는 더더욱 용서하고 사랑하고 살아야 합니다. 어려워도 그래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이고, 그렇게 사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하나님 나라의 행복이 가정을 통해 미리 맛볼 수 있게 됩니다. 자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부부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는 온전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적용 :
1) 천국에 먼저 아내를 보낸 입장에서 아내와 함께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고자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없지는 않았지만 아내로 인해서 천국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부부 생활을 했음으로 인해서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천국에 간 아내에게도 감사합니다.
2) 이혼을 이미 했다면 다르게 접근하고 이야기를 해야 하겠지만, 이혼을 하지 않은 상황이라면 이혼은 없는 것이라 여겨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혼의 가능성이 있는 만남이라면 파혼이 이혼보다 나은 것이고, 사랑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되는 만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동성애도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이 부분에 대해서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권의 문제가 아니고, 말씀의 권위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성경에 대한 자세와 태도의 문제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성경이 진짜로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 믿는가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성경이 진짜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성령의 감동으로 씌여진 것이 맞다면, 그 안에 있는 말씀들을 권위있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내가 듣기에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싫은 것은 거부하거나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바꾸는 것은 가장 나쁜 자세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동성연애에 대해 금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동성연애자가 모두 지옥간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분명히 하나님이 금하신 것이라면 그것에 대해 묵인하고 그 모양 그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어지럽히는 꼴이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도적질 하지 말라는 십계명이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계명입니다. 그러나 물론 도적질 한 사람이 다 지옥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면 천국에 가게 될 것입니다. 만일 계속 도적질 하면서 회개를 한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고 진정한 회개가 될 수 없습니다. 도적질 해도 지옥가는 것은 아닐지라도 성경에서 금하고 있는 것이기에 도적질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거룩한 성령의 전인 몸을 가지고 동성애를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여전히 모신다고 하는 것은 명백한 이율배반입니다. 과연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는 가운데 동성끼리의 애정과 성행위를 기꺼워하실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이 아님을 알기에 이성이 아닌 동성이 끌릴지라도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의 권위로 순종하며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기대하는 것이 그리스도인,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성령님의 내주하심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요 바른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본질에 대한 영역이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대한 자세와 태도에 연관되어 있습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인권이나, 단순한 성적취향의 결정에 달린 문제가 결단코 아닌 것입니다.
4) 제 4차 로잔대회의 결과물로 서울선언문이 작성되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아직은 수정 중에 있습니다. 그 가운데 여러 가지 뜨거운 논란이 되고 있는 주제들이 있습니다. 이 시대의 믿음의 고백을 다음 세대에 남기면서 바른 믿음의 고백을 남기게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이 일에 많은 수고를 한 이재훈 목사님을 축복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도우심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