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888
■ 3부 일통 천하 (211)
제13권 천하는 하나 되고
제23장 멸망하는 나라들 (4)
비록 한비자(韓非子)를 죽이고 한(韓)나라를 멸망시키기는 했으나 진왕 정(政)은
마음 한구석에 한비자의 죽음에 대해 아쉬움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자주 탄식했다.
"한비자(韓非子)를 죽인 일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오."
이사(李斯)는 진왕 정(政)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옆에서 속삭였다.
"신이 한비자보다 더 뛰어난 인재를 천거하겠습니다.""그가 누구요?"
"위나라 대량 사람으로 이름은 요(繚)라고 합니다. 요는 병학에 달통한 병법가로
한비자(韓非子)보다 열 배 이상 뛰어납니다.""그는 지금 어디 있소?"
"함양성에 와 있습니다. 당장 데리고 올 수도 있습니다만, 왕께서는 그를 빈례(賓禮)로써
초빙하십시오. 능히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사람입니다."
한비자보다 뛰어난 인재라는 말에 진왕 정(政)은 빈객의 예로써 요(繚)를 궁으로 초빙했다.
이사(李斯)의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몇 마디 얘기를 나누는 사이, 진왕 정(政)은 요에게 매료되었다.
요(繚)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현실적이었으며 구체적이었다.
진왕 정(政)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시종 그를 국빈의 예에 따라 대접했다.
그런데 이 요(繚)라는 사람이 다소 이채롭다.단순한 병법가가 아니라 관상학에도 뛰어났음인가.
그는 진왕 정(政)에게서 후한 대접을 받고 궁에서 물러난 후 혼자 중얼거렸다.
그 내용이 <사기(史記)>에 기록되어 있다.진왕 정(政)에 대한 인물평이므로 그대로 인용해보자.
진왕(秦王)은 높은 콧등, 긴 눈, 맹금 같은 가슴, 승냥이 같은 목소리를 지녔다.
이 같은 사람은 인덕이 부족하고 잔인한 마음을 가져서 곤궁(困窮)할 때는 쉽게 남에게 굽실거리지만,
뜻을 얻고 나면 또한 남을 쉽게 업신여긴다.
지금 나는 평민 신분이거늘 진왕(秦王)은 전혀 부끄러움없이 나에게 몸을 낮추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천하를 얻는 뜻을 이루게 되면, 그 순간부터 천하 사람들은 모두 그의 노예가
될 것이다.내 어찌 그런 사람과 더불어 오래 사귈 수 있으리오.그러고는 함양에서 도망치려 했다,
라고 <사기(史記)>는 적고 있다.하지만 진왕 정(政) 또한 요의 이러한 마음을 눈치챘다.
요(繚)가 함양 성문을 채 빠져나가기도 전에 측근 내관을 시켜 그를 붙잡아 다시 궁으로 데려왔다.
"선생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려 하십니까? 나는 앞으로 선생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겠습니다."
진왕 정은 그 날로 요에게 국위(國尉) 벼슬을 내렸다.
국위는 진나라 군사를 담당하는 최고 책임자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위요(尉繚)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 위요(尉繚)의 출현 또한 이사(李斯)의 등장과 더불어 진왕 정(政)에게 있어서 커다란 행운이었다.
이 두 명의 인재가 그 동안의 기나긴 난세(難世)를 종식시키는 마지막 배우 역할을 수행하게
되기 때문이다.모든 여건이 갖추어졌다라고는 했지만, 역시 천하를 통합하는 일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보통 사람의 능력으로서는 해낼 수 없는 일이다.
상식을 뛰어넘은 열정과 광기(狂氣)가 없고서는 '천하 통일' 이라는 대업을 성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열정과 광기를 진순신(陳舜臣: 일본 역사소설가)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마성(魔性).
수긍이 가는 표현이다.진왕 정(政)은 이런 열정과 광기를 지니고 태어난 인물이다.
여기에 추진력 강한 이사(李斯)라는 사나이가 등장했고, 그것으로도 부족했음인지 하늘은
또 위요(尉繚)라는 사내를 진왕 정에게 보내준 것이었다.생각해보면 이 세 사나이의 어쩔 수 없는
'끼' 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천하를 하나로 통합하는 대위업을 달성했다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 이제 조(趙)나라 차례다.이사와 위요 또한 진왕 정과 흡사한 광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손발이 잘 맞았다.이사(李斯)는 큰 틀을 짰고, 위요(尉繚)는 세부적인 계책을 마련했다.
- 조(趙)나라를 멸망시킨 후 위(魏)나라를 멸하고, 초(楚)나라, 연(燕)나라, 제(齊)나라 순으로
쳐들어가면 천하를 하나로 통합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따르겠는가?
이사(李斯)와 위요(尉繚)는 자신들의 계책을 진왕 정에게 아뢰었다.
그런데 뜻밖으로 진왕 정(政)이 엉뚱한 문제를 제기했다."조(趙)나라는 요사이 우리 나라와
친하려고 매우 애쓰고 있소. 그런 나라를 친다는 것이 어쩐지 마음에 걸리는구려."
한마디로 군사를 일으킬 명분이 없다는 것이었다.진왕 정(政)답지 않은 말이었다.
하지만 꼭 그렇게 생각할 것만도 아니다.통합 후의 민심을 염려한 것이었다.
이사(李斯)는 진왕 정의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위요(尉繚)는 진왕 정의 마음을 짐작했다.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점이라면 염려하지 마십시오. 신에게 이미 조(趙)나라가 먼저 우리 나라를 공격하게 할
계책이 마련되어 있습니다."이어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자신이 생각해둔 바를 말하기 시작했다.
"왕께서는 먼저 위(魏)나라를 치십시오. 그 사이 신은 믿을 만한 사람을 위나라로 파견하여
위왕으로 하여금 조(趙)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하도록 설득하겠습니다."
"동시에 조(趙)나라에 첩자를 보내어 조나라의 유력 대신 곽개(郭開)를 뇌물로써 매수하겠습니다.
그러면 곽개는 반드시 위(魏)나라를 돕기 위해 군사를 일으킬 것이요, 그렇게 되면 어찌 조나라를
칠 명분이 서질 않겠습니까?"진왕 정(政)은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묘책이오!"
마침내 함양 성문이 활짝 열리고 진나라 장수 환의(桓齮)가 군사 10만 명을 거느리고
위(魏)나라를 향해 쳐들어갔다.하지만 이번 출병의 목적이 조(趙)나라 정벌에 있음을 아는 사람은
진(秦)나라 내에서도 몇 명 되지 않았다.
889편에 계속
열국지 [列國誌] 889
■ 3부 일통 천하 (212)
제13권 천하는 하나 되고
제23장 멸망하는 나라들 (5)
환의(桓齮)의 군대가 함곡관을 나설 무렵, 빠른 수레 하나가 먼저 위나라 땅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위요의 제자 왕오(王敖)였다.왕오는 위(魏)나라 수도 대량에 도착하자마자 위경민왕(魏景湣王)을 찾아가
스승 위요가 시키는 대로 말했다. 물론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였다.
"지금 진(秦)나라 군대가 대량을 향해 쳐들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 위(魏)나라는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신이 알기로, 위나라와 조나라는 순치지국(脣齒之國)입니다.
왕께서는 어찌하여 조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지 않으십니까?"위경민왕(魏景湣王)이 한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지금 조(趙)나라는 진나라에 잘 보이려고 애쓰는 중인데, 그들이 어찌 우리를 도와주겠소?"
"그 점은 염려마십시오. 신은 오늘날 조(趙)나라 실권을 잡고 있는 대신 곽개(郭開)와 친한 사이입니다.
왕께서 업(鄴) 땅의 지도를 내주시기만 하면 신이 조나라로 가 곽개를 설득하여 구원군을 보내도록
유세하겠습니다."
위경민왕(魏景湣王)은 생각도 할 것이 없다는 듯 왕오에게 업(鄴) 땅의 지도를 내주며 간절히 부탁했다.
"과인은 선생만 믿소. 부디 구원군을 데리고 와주시오."
왕오(王敖)는 그날로 대량을 떠나 조나라 한단성으로 갔다.
이때 조나라는 조도양왕이 죽고 조유무왕(趙幽繆王)이 막 즉위한 때였다.재상은 곽개.
그런데 곽개(郭開)는 겉으로는 충신인 척하면서 속으로는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교활한 처세가였다.
왕오(王敖)는 한단성에 당도하자마자 황금 3천 근과 업 땅의 지도를 곽개(郭開)에게 바치며 부탁했다.
"저는 위(魏)나라 밀사입니다. 지금 위나라는 진(秦)나라의 공격을 받아 위태롭기 짝이 없습니다."
"이에 우리 위왕(魏王)께서는 조나라의 도움을 받고자 저를 보내셨습니다. 재상께서는 부디 위나라를
도와주십시오."곽개(郭開)는 돈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사람이었다.
그는 황금 3천 근은 자신이 챙기고 업(鄴) 땅 지도만 들고 궁으로 들어가 그럴듯한말로 조유무왕을 설득했다.
"위(魏)나라가 망하면 그 다음은 우리 조(趙)나라 차례입니다. 더욱이 위나라는 업(鄴) 땅을 바치고
원조를 청해 왔습니다. 왕께서는 군사를 일으켜 위나라를 돕도록 하십시오."
조유무왕(趙幽繆王)은 이제 막 왕위에 오른 터이라 모든 국정을 곽개에게 맡기고 있었다.
업(鄴) 땅이 자신의 소유가 된 것만을 기뻐하며 장수 호첩(扈輒)을 불러 명했다.
"군사 5만을 거느리고 나가 업 땅을 접수하고 위(魏)나라를 도와주시오."- 조군(趙軍) 출병!
이 소식은 즉각 함양성으로 날아들었다.기다렸다는 듯이 국위 요(繚)의 입에서 다음과 같은 명이 떨어졌다.
"이제 조나라는 우리의 동맹국이 아니다. 장수 환의는 군사를 돌려 업 땅을 공격하고 나아가 조(趙)나라
한단성까지 진격하라!"대량으로 향하던 환의(桓齮)는 재빠르게 움직였다.방향을 틀어 업으로 진격했다.
때마침 당도한 조나라 장수 호첩(扈輒)과 격돌했다.이 싸움에서 환의(桓齮)는 대승을 거두었다.
반대로 조나라 장수 호첩은 크게 패한 끝에 끝내 전사하고 말았다.
당황한 것은 조유무왕(趙幽繆王)이었다.그는 신하들을 불러놓고 대책을 강구했다.
"위(魏)나라를 도와주려다가 공연히 우리만 진왕의 미움을 샀소. 대체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위나라를 도와주라고 권했던 곽개(郭開)는 할 말이 없었다.다른 신하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대(代) 땅을 지키고 있는 이목(李牧) 이라면 능히 진나라 군대를 막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조유무왕(趙幽繆王)도 이목이 염파의 뒤를 이을 명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즉시 상장군의 인수를 내리고 그를 한단성으로 소환했다.조나라로서는 마지막 수단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목(李牧)이 한단으로 돌아오자 조유무왕(趙幽繆王)은 기대감에 찬 표정으로 물었다.
"진(秦)나라 군대가 육박해오는 중인데, 어떻게 하면 그들을 물리칠 수 있겠소?"
이목(李牧)은 주저함없이 대답했다."진나라 군대는 지금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세입니다.
그들을 꺾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왕께서는 아무 것도 묻지 마시고 신에게 군사에 관한
모든 권한을 내려주십시오. 그래야 신이 마음놓고 싸울 수 있습니다."
"알겠소. 오늘 이후의 모든 군사권을 그대에게 맡기는 바이오."
그 이듬해.조나라의 신임 상장군 이목(李牧)은 한단성을 떠나 비성(肥城)으로 내려갔다. 비성은 지금의
하북성 진현 일대다.이때 이목이 거느리고 간 군사는 총 15만 명.
비성에 당도한 이목(李牧)은 우선 성루를 높이 쌓고 도랑을 깊이 판 채 나가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날마다 소를 잡아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기만 했다.
군사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나가 싸우게 해달라고 졸랐으나, 이목(李牧)은 일절 허락하지 않았다.
890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