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890
■ 3부 일통 천하 (213)
제13권 천하는 하나 되고
제23장 멸망하는 나라들 (6)
그 무렵, 진(秦)나라 장수 환의(桓齮)는 의안 땅 서쪽 일대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는 이목(李牧)의
행동을 전해듣고 대뜸 그 의도를 알아차렸다."지난날 염파(廉頗)가 성루를 높이 쌓고 지킴으로써
우리 나라 장수 왕흘(王齕)의 공격을 막아낸 일이 있는데, 이번에 이목(李牧)이 바로 그 흉내를 내는구나."
지키는 군사를 공격하는 것은 많은 힘을 소모하게 된다.
이를 모를 리 없는 환의(桓齮)는 곧 이목의 계책을 깰 방도를 강구해냈다.
"내 친히 저들을 유인해 내리라!"환의(桓齮)는 군사를 반으로 나누었다.
일대(一隊)는 의안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다른 일대를 거느리고 감천(甘泉)으로 향했다.
감천은 한단성에서 동북쪽으로 3백여 리 떨어진 작은 성이었다.
이때 감천을 지키고 있던 조나라 장수는 조총(趙葱)이었다.
조총은 난데없이 진군이 공격해오자 당황하여 이목에게 구원을 청했다.
그러나 이목(李牧)은 냉정하게 거절했다."적이 다른 곳을 친다하여 함부로 구원하러 떠나는 것은
적의 계책에 말려드는 행위다. 이번에 진나라 장수 환의(桓齮)가 감천을 공격하는 것은
나를 꼬여내기 위한 계책일 뿐이다.""내 어찌 그 수에 말려들 것인가.
나는 오히려 저들의 영채가 빈 틈을 이용해 진군 대채를 습격하리라!"
그동안 배불리 먹기만 하던 조(趙)나라 군사들은 진군 영채를 습격할 것이라는 이목(李牧)의 말을
듣고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이제야 우리가 나가 싸우겠구나."조나라 장군 이목(李牧)은
달이 없는 밤을 이용하여 군대를 삼대(三隊)로 나누어 일제히 진군 영채를 향해 돌격해갔다.
대장 환의(桓齮)가 떠나가고 난 진군(秦軍) 영채는 이러한 이목의 기습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하룻밤 사이에 반 이상의 군사가 죽었다.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진군 대장 환의(桓齮)는 대경실색했다.
"아아, 내가 우리 대왕의 대업에 손실을 가져왔구나."
그는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감천성을 치던 군사를 되돌려 비성(肥城)을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리오.조군 대장 이목(李牧)은 이미 이러한 환의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길 양쪽에 군사를 매복시킨 후 환의(桓齮)가 달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환의의 군사마저 대패했다.그는 더 이상 싸울 수 없음을 알고 겨우 도망쳐 함양으로 돌아갔다.
이로써 조(趙)나라는 멸망 직전에 다시 회생의 불씨를 보게 되었다.
- 조군 대장 이목(李牧), 진군(秦軍)에 크게 이기다!얼마만의 쾌거인가.
조나라 수도 한단성에는 환호의 물결이 일었다.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온 이목을 조유무왕(趙幽繆王)은 친히 영접했다.
"지난날 진나라에 백기(白起)가 있었듯이 우리 나라에는 이목(李牧)이 있도다. 진나라에서
백기를 무안군에 봉했듯이 과인 또한 그대를 무안군(武安君)에 봉하리라!"
한편, 진왕 정(政)은 이목에게 패하여 돌아온 환의를 보고 크게 분노했다.
"우리 나라에선 패장을 용납하지 않는다. 환의(桓齮)의 모든 관직을 삭탈하고 서민의 신분으로
만들어 추방하라."가차없는 명이었다.새로이 왕전(王翦)이 장군에 올랐다.
장안군 성교의 난 때 공을 세운 양단화(楊端和)를 부장에 임명했다.
- 조나라를 멸하지 못하면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라.
왕전(王翦)과 양단화(楊端和)는 각기 진양과 상산 땅을 경유하여 조나라를 향해 재차 쳐들어갔다.
BC 229년(진왕 정 18년, 조유무왕 7년)의 일이었다.
그 사이, 진나라 정위 이사(李斯)와 국위 요(繚)는 계속해서 이면 공작을 펼치고 있었다.
위요(尉繚)는 조나라 재상 곽개를 매수하고 돌아온 제자 왕오를 다시 조나라로 파견했다.
"한단으로 가는 길에 왕전(王翦) 장군에게 들러 이러이러하게 지시하도록."
왕오(王敖)는 위요가 시키는 대로 한단으로 가는 도중 회천산 서쪽 50리 밖에 주둔하고 있는
왕전을 찾아가 비밀리에 지시 사항을 전달했다.
- 장군께서는 이목(李牧)에게 사자를 보내어 화평을 청하되, 절대로 조약을 맺지는 마시오.
- 장군이 화친을 핑계로 시간을 끄는 사이 내가 한단으로 들어가 저들을 교란시키겠소.
신신당부를 하고 난 왕오(王敖)는 한단성으로 들어가 곽개를 찾아갔다.
891편에 계속
열국지 [列國誌] 891
■ 3부 일통 천하 (214)
제13권 천하는 하나 되고
제23장 멸망하는 나라들 (7)
조(趙)나라의 한단성으로 들어가 곽개(郭開)를 찾아간 왕오(王敖)는 은근히 물었다.
"재상께서는 조(趙)나라가 망할 것으로 보십니까, 아니면 흥할 것으로 보십니까?"
왕오로부터 여러 차례 뇌물을 받은 바 있는 곽개(郭開)는 별 의심없이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서 조(趙)나라의 앞날은 그다지 멀지 않았소. 지진이 일어나고 기근이 드는 것이 그 증거요."
"재상의 말씀대로 조(趙)나라가 망하면 재상께서는 계속 조나라에 머물 작정이십니까,
아니면 다른 나라로 떠날 요량이십니까?""망한 나라에 몸을 남겨둘 수는 없소. 나는 제(齊)나라나
초(楚)나라로 가 몸을 의탁할 생각이오."곽개의 사람됨을 재삼 확인한 왕오(王敖)는 다시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제(齊)나 초(楚)나라라......?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그 두 나라도 조(趙)나라의 처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제가 재상을 위해 한 말씀 드린다면, 재상께서는 진(秦)나라에 몸을 의탁하십시오.
진나라는 장차 여섯 나라를 모두 통합할 것입니다."
"재상께서 지금의 재산과 지위를 유지하려면 진왕(秦王)의 힘을 빌리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진나라가 나를 용납할 리 없잖소?"
"그거라면 염려마십시오. 재상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주선해 드리겠습니다."
"그대는 위(魏)나라 사람인데 어떻게 진나라에 주선할 수 있단 말이오?"
곽개의 의아해하는 표정에 왕오(王敖)는 비로소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실은 저의 스승이 진(秦)나라에서 국위 벼슬을 하고 계시며, 저 또한 진나라 대부입니다.
저의 스승인 위요는 일찍부터 재상이 명망이 높으신 것을 알고 서로 사귀고자 원해 왔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드린 황금도 모두 제 스승이 내준 것입니다. 만일 조(趙)나라가 망하여 가실 곳이 없거든
주저하지 말고 진(秦)나라로 가십시오. 우리 스승께서 재상을 상경(上卿)에 천거할 것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재상께서는 변함없이 지금의 부귀영화를 누리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고는 짐을 풀어 황금 7천 근을 곽개 앞에 내밀었다.곽개(郭開)는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황금도 황금이거니와 그동안 은근히 걱정해왔던 자신의 안위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근심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왕오의 두 손을 움켜잡으며 말햇다.
"진(秦)나라 국위(國尉)께서 나를 그토록 생각해주시는 줄은 미처 몰랐소. 이런 은혜를 받고도
보답하지 않는다면 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소. 나는 이제부터 진(秦)나라를 위해 일할 것이오."
곽개(郭開)를 완전히 진나라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왕오(王敖)는 이어 본론으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한단으로 오는 도중 이상한 소문을 들었습니다.""이상한 소문이라니요?"
"조나라 장수 이목(李牧)이 진나라 장수 왕전(王翦)과 화평 조약을 추진 중이라는데, 그 조약 내용이
여간 놀라운 것이 아니었습니다.""무슨 내용이오?"
"한단을 내주는 대신 이목(李牧)이 대(代) 땅에서 왕 노릇을 하기로 했다 합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재상의 신상에 변화가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둘러 알아보심이 좋을 것입니다."
"설사 그것이 헛소문으로 판명나더라도 이목(李牧)의 존재가 재상께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니,
이목을 조속히 한단으로 불러들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곽개(郭開)는 왕오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이번 기회에 진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면 훗날 자신의 입지가 더 나아질 거라는 생각에 두말 없이 승낙했다.
"그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오. 그대의 스승에게 내 활약상이나 잘 말해주시오."
"그점은 염려마십시오."다음날, 곽개(郭開)는 지체없이 궁으로 들어가 조유무왕에게 말했다.
"상장군 이목(李牧)이 진나라 군대와 내통하고 왕위에 오르기로 밀약을 나누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속히 진위 여부를 알아보시고 조처를 취하십시오."조유무왕(趙幽繆王)은 크게 놀랐다.
이내 심복 부하를 보내어 이목(李牧)의 동태를 살펴오게 했다.수일 후 심복 부하가 돌아와 보고했다.
"과연 이목(李牧)은 진나라 장수 왕전(王翦)과 연일 회담을 하고 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곽개(郭開)가 조유무왕에게 권했다.
"어쩐지 이목이 모든 권한을 일임해 달라고 청할 때부터 수상쩍었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왕께서는 이목(李牧)을 파면하고 조총을 새로이 상장군으로 임명하여
회천산으로 내보내십시오."그말이 아니더라도 조유무왕(趙幽繆王)은 이미 이목(李牧)에 대해
분노와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지체없이 명을 내렸다.
- 이목을 소환하라!
이목(李牧)은 기가 막혔다.그러나 어쩌랴.이미 왕명이 떨어진 것을.한단으로 가 자신의 결백을 밝히고
다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그가 막 한단으로 떠나려는데 또 하나의 이상한 소문을 들었다.
- 이번 이목(李牧) 장군의 소환은 재상 곽개(郭開)의 농간이다. 이목 장군은 한단으로 가면 목이 잘릴 것이다.
비로소 그는 이번 소환에 복잡한 내막이 깔려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목(李牧)은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 내가 이러한 나라에 태어난 것이 한(恨)스러울 뿐이다."
그 날 밤, 이목(李牧)은 상장군의 인수를 장막 안에 걸어놓고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89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