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에 읽는 오늘의 詩 〈1225〉
■ 만종 晩鐘 (고창환, 1960~)
호박엿 파는 젊은 부부
외진 길가에 손수레 세워놓고
열심히 호박엿 자른다
사는 사람 아무도 없는데
어쩌자구 자꾸 잘라내는 것일까
그을린 사내 얼굴
타다 만 저 들판 닮았다
한 솥 가득 끓어올랐을 엿빛으로
어린 아내의 볼 달아오른다
잘려나간 엿처럼 지나간 세월
끈적거리며 달라붙는다
그들이 꿈꿔왔을
호박엿보다 단단한 삶의 조각들
삐걱이는 손수레 위 수북이 쌓인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는데
그들이 잘라내는 적막한 꿈들
챙강대는 가위 소리
저녁 공기 틈새로 둥글게 퍼진다.
- 2000년 시집 <발자국들이 남긴 길> (문학과 지성사)
*프랑스의 자연파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cois Millet, 1814~1875) - 그가 그린 대표작 <만종 晩鐘>이라는 그림은 초등학교 미술책에 실려 있을 만큼 대중들에게 널리 사랑을 받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그는 살아생전 인정받지 못하고 가난 속에 불우했던 삶으로 일생을 마친 화가였습니다.
명화 <만종> 속에서, 교회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저녁 무렵에 하루 일과를 마친 가난한 부부가 감자를 수확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신에게 경건하게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모습은, 예전 가정집에서도 흔히 보이던 그림이었지요.
그런데 제목이 ‘만종’으로 표기된 이 詩를 읽어봐도 내용 면에서 이 작품과 별 관련성이 없어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자세히 읽다 보면, 힘든 삶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젊은 엿장수 부부의 정직하고 성실한 삶의 모습을 노래한 데서 분위기가 밀레의 만종을 연상시키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저녁 무렵 외진 길가에서 가위 소리를 내며 호박엿을 파는 젊은 부부를, 황혼이 지는 전원을 배경으로 종소리에 기도를 드리는 농부 부부와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시인은 그들 부부가 ‘만종’의 농부 부부가 기도하는 것처럼, 고단한 삶 속에서도 소박한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의지와 희망을 가질 수 있기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우리에게 공감을 전해주고 있군요.
그나저나 오늘이 벌써 2022년 11월의 마지막 날이네요. Ch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