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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이방원 제109편: 임금과 신하의 줄다리기
( 권좌는 마음대로 내려와서는 아니 되옵니다 )
신하들이 퇴궐한 심야를 이용하여 옥새를 세자궁으로 옮긴 사실이 밝혀지자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사간원과 사헌부가 전면에 나섰다. 다섯 가지 항목을 들어 왕의 전위(傳位)가 부당함을 조목조목 논박했다.
"신들의 직책이 간쟁(諫諍)을 맡았으므로 감히 함묵(緘默)할 수 없어 죽음을 무릅쓰고 상언합니다. 첫째, 전하가 젊고 건강합니다. 둘째, 세자가 아직 어립니다. 셋째, 세자가 국정의 부하(負荷)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여겨집니다. 넷째, 명나라와 문제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 한 몸의 편안보다도 천년사직이 더 중요합니다. 때문에 전위는 불가 합니다."
"전위는 천위(天位)이므로 주고받을 때 중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위를 경홀(輕忽)하게 여겨 가벼이 주고 받는다면 종묘사직의 안위와 인심의 거취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태종실록>
"예전에 태상왕께서 혁명하실 때 여러 신하가 공민왕대비 앞에 나아가 교서를 받들고 어보(御寶)를 받아서 태상왕에게 바쳐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분명히 이 일을 알게 하였습니다. 혁명하는 때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내선하는 때에 어찌 이와 같이 은밀하게 하시어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 용납되겠습니까?"
대간들의 각을 세운 주청에 이어 이조판서(吏曹判書) 남재가 간곡히 청했다. 촌각을 다투는 혁명 때도 절차를 밟았는데 평화 시에 이렇게 한다는 것은 경우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예전에 표(表) 전(箋)이 잘못되어 황제(皇帝)가 정도전을 불러 그 연고를 문책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마음대로 스스로 왕위를 내놓으시면 황제께서 반드시 집정대신을 불러 그 연고를 물을 것입니다. 이때를 당하여 누가 명나라 경사(京師)에 가서 전대(專對)할 수 있겠습니까?"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 이무가 이 문제는 분명히 명나라에서 문제 삼을 것이라며 걱정을 표했다. 표전문 사건이 터졌을 때 많은 신하가 억울하게 희생되었는데 누가 명나라에 가겠느냐는 것이다.
전대란 본국의 조회 없이 외교 문제를 풀어가는 사신을 말한다. 능력과 책임을 필요로 하는 외교 행위다. 표전문 사건 당시 명나라에 들어가 조선인의 필력을 과시한 권근의 응제시(應制詩)가 유명하다. 황제의 시제에 따라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를 시(詩) 24 수로 표현하여 황제의 치하를 받았고 실타래처럼 꼬였던 표전문 사건을 풀어냈다.
"상왕께서 전하에게 손위(遜位)하신 때에 명나라 조정에 알리니 명나라 조정에서는 이것을 의심하여 말하기를 ‘국왕의 나이 한창이고 왕위에 오른 지도 오래되지 아니한데 갑자기 전위한 것은 반드시 난신적자의 변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형제가 상잔하여 그러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또 갑자기 왕위를 내놓으시면 명나라에서 반드시 크게 의심할 것이니 전위하시는 일은 더욱 불가합니다."
하륜은 명나라 문제를 거론하며 태종 이방원의 심중을 압박했다. 하륜이 말을 마치자 지신사 황희가 편전으로 들어갔다.
"일이 이미 이와 같이 되었으니 어찌 되돌릴 수 있겠는가? 내 일찍이 경에게 동궁으로 돌아가라 명했는데 아직도 여기에 머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빨리 동궁으로 돌아가고 다시는 들어오지 말라."
나라에 임금도 하나뿐이고 지신사도 하나뿐이니 지신사는 옥새를 따라 세자궁으로 가라는 것이다. 성석린, 하륜, 이서 등이 다시 아뢰고자 하였으나 황희 노희봉은 모두 감히 들어가지 못했다. 하륜이 직접 들어
가 친히 아뢰고자 편전(便殿) 문밖에 이르렀으나 문이 굳게 닫혀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
세자 양녕대군이 내관 황도에게 국새를 받들게 하고 세자궁을 나섰다. 길례색을 두고 장가보내주겠다던 아버지가 갑자기 전위라니 황당했다. 아버지의 진의를 알 수 없을 뿐더러 아직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다는 것은 두려웠다. 국새를 받들어 정전에 놓고 노희봉을 시켜 아뢰었다. 세자 내시도 따라 들어갔다.
"신(臣)은 아직 나이가 어리고 아는 것이 없으므로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네가 세자를 부추겼구나?" 태종 이방원은 험악한 얼굴로 세자 시자내관(侍者內官) 황도를 꾸짖었다.
"어제 저녁 국새가 세자궁에 이르니 세자께서는 놀라서 울었습니다. 한밤중이 되어 서연관(書筵官)을 불러서 묻기를 ‘내가 봉환(奉還)하고
자 하는데 어떠한가?’하니 서연관이 말하기를 ‘세자의 뜻대로 행하실 뿐입니다.’ 하였습니다. 세자께서 이리하여 왔습니다. 종놈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국새를 세자에게 되돌려라." 임금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군신간의 일에 아들을 끌어 들였다는 분노였다. 대노한 태종 이방원이 화살을 메워 승전색 노희봉을 겨냥했다. 질겁한 노희봉이 사색이 다되어 편전을 뛰쳐나왔다. 분기탱천한 태종 이방원이 내전의 종 수십 명을 시켜 국새를 가지고 들어오게 했다. 성석린과 조영무가 막아섰다.
"대보(大寶)는 천자(天子)가 하사하신 것이므로 이보다 더 중한 것이 없는데 내전의 종을 보내어 가져가는 것은 심히 불가합니다. 상서사(尙瑞司)의 관원에게 명하여 받들어 들이심이 옳은 줄로 아옵니다."
편전에서 나온 내전의 종들이 겁에 질려 엎어지고 자빠지며 바로 정전으로 달려가 국새를 가지고 들어가려 했다. 조영무가 성난 목소리로 내전 종들을 꾸짖었다.
"종놈들이 감히 이럴 수가 있느냐?"
"성상께서 노배(奴輩)들에게 칙령(勅令)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약 국새를 가지고 들어오지 못하면 노배들을 죽이겠다고 하시니 이 일을 어찌하겠습니까?"
내전 종들은 임금의 노여움에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종들에게 호통을 친 조영무가 상서사(尙瑞司)의 관원과 정부(政府)의 지인(知印)을 시켜 함께 이를 지키게 했다.
"들어가 뵈옵고 면전에서 친히 사양하심이 옳겠습니다." "주상께서 노하심이 이와 같으시니 내가 감히 들어갈 수 없소. 어찌하면 좋겠소?"
하륜이 세자에게 친전을 권했으나 나이 어린 세자는 아버지 노여움에 겁을 먹고 있었다. "그렇다면, 환궁하심이 옳겠습니다." 조영무가 지통례문사(知通禮門事) 손윤조로 하여금 세자를 모시고 나가게 하였다.
"어찌하여 세자를 부추겨서 이와 같은 무례한 일을 행하게 하였는가?"
"전하께서 만약에 꼭 전위하고자 하신다면 위로는 마땅히 명나라 조정에 계품(啓稟)하시고 아래로는 마땅히 신민에게 포고하셔야 하며 명나라에 보내는 자문(咨文)과 신민에게 내리는 교서에는 반드시 인장을 찍어서 신표를 삼아야 합니다. 이제 만약 대보를 세자에게 전하시면 그 때를 당하여 무슨 인장을 찍어 신표를 삼겠습니까?"
하륜은 계속해서 명나라와의 관계를 거론하며 태종 이방원을 압박했다.
"국새를 세자에게 전하는 것을 허용하지 아니한다면 어찌하여 내전으로 들여보내지도 아니한가?"
태종 이방원은 국새를 들이지도 않고 보내지도 못하게 하는 신하들이 괘씸했다.
"지금 국새를 들이면 몰래 세자궁으로 보내시고자 하시므로 감히 명을 따르지 못합니다."
하륜이 상서사(尙瑞司)의 관원으로 하여금 국새를 받들어 모시게 하고 단단히 지키라 일렀다. 태종 이방원은 여러 신하들이 시끄럽게 말하는 것을 다시 듣고 싶지 않았다. 궁문을 닫으라고 명하자 여러 신하들은 대궐을 물러나왔다.
밤 3고(三鼓).
적막이 감도는 심야의 창덕궁. 파수 보는 갑사들이 졸고 있고 정료대(庭燎臺) 불꽃이 가물거린다. 태종 이방원은 중관을 조용히 불렀다.
"국새를 세자궁으로 옮겨라."
명을 받은 중관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대궐 동문을 통하여 국새를 옮겼다. 아무도 없는 캄캄한 밤이었지만 그래도 보는 사람은 있었다. 애꿎은 국새가 오고가는 공방전. 전위를 극력 반대하는 신하들과 줄다리기 하는 태종 이방원에게는 숨겨진 뜻이 있었다.
태종•이방원^다음 제110편~
첫댓글 감사합니다.
109편 올려주셨네요.
있다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