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黑暗(흑암)의 世界(세계)
글 金方西(김방서) 長老(장로) 1980년 씀
6.25 戰爭(전쟁)이 난지도 벌써 30여 년의 歲月(세월)이 흘렀고 요즘처럼 自由民主主義(자유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南北統一(남북통일)이 금방 눈앞에 이뤄지는 것처럼 戰後(전후)에 出生(출생)한 젊은 사람들의 외침이 크다 보니 쓰라린 6.25 戰爭(전쟁)을 經驗(경험)했던 사람들조차도 記憶(기억)이 희미해지고 特(특)히 우리 敎界(교계)에서 받은 傷處(상처)가 얼마나 컸는지 말로 形容(형용) 할 수 없는 處地(처지)였었는데 점점 妄覺(망각)의 늪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어 平和的(평화적)인 統一(통일)을 完遂(완수)하기 爲(위)해 對話(대화)는 하되 共産主義(공산주의)의 籠絡(농락)에는 빠져들지 말아야 하고 反共(반공)意識(의식)을 높이면서 그 옛날 기록해 놓은 日記(일기)를 重心(중심)으로 이 글을 쓰고자 한다. 全北(전북) 金堤老會(김제노회) 萬頃敎會(만경교회)는 1950년 6.25當時(당시)에 敎人(교인) 90名(명) 정도 모이는 아담한 敎會(교회)였고 敎役者(교역자)는 金鍾漢(김종한) 牧師(목사)님이었고 黃海道(황해도) 出身(출신)으로 朝鮮(조선)神學(신학)을 卒業(졸업)하시고 數年(수년)간 김제노회 내 교회에서 시무 하시다가 1948년부터 만경교회에서 시무 하시게 되었다. 6,25전쟁이 북한의 불법 남침에 의해 급속히 남으로남으로 공격해 오는 인민군을 막을 길 없어 국군의 작전상 일시적인 후퇴라고는 하지만 공산군에게 점령당한 지역은 그 때부터 공산 치하에서 살면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1950년 7월 19일
수요일 아침 이날은 만경 장날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아침 일찍부터 시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어제 이리가 인민군에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 아침에 왠 날벼락이냐? 시장에 장보러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갑자기 무질서하게 도망하기 시작하는데 국민학교 앞 능제 도로로 일시에 사람들과 우마차가 빠져 나와 김제 방향으로 도망가니 순식간에 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나는 여전히 종전과 같이 오전 8시에 출근하여 직원회가 시작하기 전 여러 직원들과 대한민국의 앞날과 정세가 험악하니 하기방학을 빨리 해야 할 것 아닌가 하고 의견들을 나누고 있던 시각에 이런 혼란이 나고 말았다. 이 때 운동장에서 뛰어 놀던 학생들은 놀라서 자기 집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새떼같이 1,300명의 학생들이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버렸고 학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을 찾기 위해서 학교에 몰려들었다. 강춘길집사(당시 양의사)님은 자전거로 학교에 달려와 아들 영식군과 딸 경현양을 찾아 싣고 어디론가 가 벼렸다. 갑자기 시장이 혼란하게 된 것은 새벽에 만경강을 건너온 인민군이 청하면 소재지에서 아침을 먹고 지금 만경을 향해 진격 중인데 벌써 그 선발대는 만경 입구에 들어 왔다는 유언비어에 속아 평화스럽던 만경은 갑자기 수라장화 되었던 것이다. 만경은 해방 이후 좌경 사상으로 물들었던 사람들이 많았었고 이들을 단속하기 위해서 타 지역에서 폭동이 나면 미리 예비 검열 단속을 하기도 하고 자수시켜 보도연맹에 가입시키기도 했으나 완전한 사상 전향은 되지 않았고 잠복 상태에 있었던 차에 북괴의 남침으로 이들은 어서 인민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때에 이날 아침 일찍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사실은 인민군은 아직 만경강을 넘지 않았던 것이다. 학생들이 전부 흩어져 버린 학교는 교장 선생님의 방학 선언도 들을 기회 없이 직원들도 각기 집으로 가는 사람 또는 좌경 사상을 가졌던 직원들은 저희들끼리 무엇을 의논했는지 모였다가 해어졌다. 그래도 그 피난 대열 직원 중에서 연령이 제일 낮았던 나는 5학년을 담임하고 있었으며 이날 텅 빈 교실 문단속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길거리는 개 한 마리 다니지 않는 죽은 거리같이 너무나도 조용하기에 공포심 마저 일어났었다. 학교와 우리 집 사이는 1Km정도 떨어져 있었기에 공포 속에 집에 돌아와 보니 식구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해 있었고 피난 갈 짐을 싸고 있었으며 늦게 왔다고 꾸지람을 들었다. 정확한 상황을 알기 위해서 다시 거리에 나가 알아본 결과 인민군이 만경에 들어왔다는 소리는 거짓말이었고 현재 만경강을 건너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집으로 돌아와 식구들을 모아 놓고 안심시킨 후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날 오후 2시쯤 김제에서 7대에 민간 화물 자동차에 경찰과 방위 대원이 칼빈 소총을 들고 만경을 지나 청하 방면으로 달리고 있었다. 만경교를 건넌 인민군은 청하를 거쳐 만경 쪽으로 행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 7대에 실어 온 경찰과 방위 대원은 동산에 배치되어 전진해 온 적을 막으려 했었다. 이 광경을 본 만경읍내 사람들은 이곳이 전쟁터가 된다고 집을 버리고 진봉면 정당리 쪽으로 피난을 가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 8명도 대문을 걸어 잠그고 정당리로 향하였다. 나는 곽병일 매형과 함께 2Km 떨어진 정당리로 가면서 별로 할 말도 없이 우울한 기분으로 찬송가와 성경만을 손에 든 체 걸어갔다. 이날은 수요일 삼일 예배 시간이었으므로 교회 종은 여전히 4시에 울렸다. (저녁 예배를 오후 4시에 드렸음) 시국이 어지러웠기에, 북한 공산당들은 종교의 자유도 없이 기독교인들을 몹시 미워하고 핍박을 한다는데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머리 속에 가득 차 실의에 빠진 사람들처럼 모여들고 있었다. 오후 5시쯤 되었을 때 만경 동산에 배치되었던 전투 요원들이 총 몇 발 쏘아보지 못하고 전부 철수하여 김제로 후퇴하고 있었다. 이곳 만경도 포기하고 적에게 내어 주는가 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만경읍내가 전쟁터가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공산주의가 되든 민주주의가 되든 나에게까지 무슨 큰 영향이 미치겠느냐 하는 될 대로 되라는 생각인 것 같았다. 그 날 저녁 밤하늘의 별빛은 유난히도 반짝거렸고 바람은 시원하게 불어왔지만 모기떼가 극성이었고 언덕 야산에 나와 있는 주민들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고 지냈을 것이다. 주민들 모두가 시선을 만경 쪽으로 바라보면서 옛날 구약 시대 요나가 언덕에 앉아 니느웨성이 망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습을 상상하면서 만경 시내 쪽은 물론이고 사방 어느 쪽이든 불빛하나 보이지 않고 어두움이 깔린 죽음의 도시와 같이 고요하며 가끔 먼 곳에서 개 짖는 소리만이 들렸다. 저녁 10시를 지나면서 몽산 방면에서 저 멀리 회중 전등으로 신호하는 것 같은 깜박임을 볼 수 있었다. 밤 12시가 지나자 완전 죽음의 도시와도 같은 시내 쪽이 일시에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람 소리에 따라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노래는 해방되던 1945년에서 1946년에 많이 듣던 "붉은 깃발을 높이 들어라"고 하는 공산당노래가 분명했다. 노랫소리가 끝나면 만세소리가 나고 몇 번 반복하더니 2시반쯤 되어서는 박수소리와 만세소리가 더 크게 울리었다. 아무저항도 받지 않고 인민군이 도로를 따라 읍내로 들어오고 있으며 지역공산당들이 크게 환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제까지는 대한민국이었던 이 땅이 오늘부터는 공산국가로 되었으니 장차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해방이후 오늘까지 많은 성도들이 북한 땅에서 살수 없어 부모 형제 처자식과 재산을 버리고 이남으로 내려와서 살고 있지 않는가 과연 앞으로 공산당들이 이곳에서도 그렇게 기독교를 박해할 것인가? 복잡한 문제들이 자꾸 머리에 스쳐간다. 박수소리와 만세소리가 계속되더니 수십 대의 우마차 끄는 소리가 덜그덕덜그덕 거리며 지나가는 것 같다. 이는 군량과 무기 및 탄환을 싣고 가는 것임을 차후에 알았다. 밤새 한잠도 못 자고 새벽 동트기 전 이곳에 피난 왔던 주민들은 전부 자기 집으로 귀가하였으며 우리도 8식구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께서 아침식사를 준비할 동안 도로로 나가 인민군의 모습을 살펴보고 싶었다. 한편 두려운 생각이 나서 주저해 지기도 했지만 용기를 내어 세수를 하고 거리로 나갔다. 지금도 인민군들은 한사람 혹은 두 사람씩 짝이 되어 김제로 향하고 있었고 몹시 피로에 지친 모습으로 장총을 거꾸로 메고 있었다. 주민들 더러는 박수를 쳐주는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묵묵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오늘부터 저들의 지배를 받아가며 살아가야 할 터인데 어떻게 적응을 할 것이며 특히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많은 염려가 되었다. 나이 어린 나로서 지금까지의 생활이 정치나 체제에 별다른 관심 없이 지내 왔었고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고 살아왔었는데 오늘부터는 무슨 큰 일이 나를 억압하고 자유를 구속당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앞섰다.
7월20일
거리에 나갔다가 돌아온 나는 아침을 먹고 책을 읽으려고 뒤적이고 있는데 마침 鄭熙德(정희덕) 친구가 찾아왔다. 이는 나와 이리공업학교 동창생이요 지금은 서울에서 성결교회 목사로 시무중이다. 이 친구와 함께 이번 전쟁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경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기 위한 일시적인 사탄의 장난이다. 또는 이남 땅이 너무나 타락하고 방종해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채찍의 징계이다 라고 우리들 나름대로 생각하며 분석했다. 당시 우리 집은 교회언덕 밑에 있었기에 정희덕 친구와 함께 오전 10시경 교회당 마당에 있는 쥐엄나무 아래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비행기 4대가 날아와 김제상공에서 폭격을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이 비행기는 제트기로서 근래의 최신기였으며 일명 호주기라고도 했다. 이승만대통령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본국이 오스트레일리아로 잘못 알고 공산당들이 붙인 機名(기명) 이었다. 20여개의 폭탄과 燒夷彈(소이탄)을 김제시내에 투하하고 있었다. 미국비행기가 인민군 전진을 저지시키기 위해서 주력부대 선봉을 공격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미 그때 주력부대는 김제시내를 빠져 남쪽으로 빠져나간 후였다. 그날도 하루를 두려움 속에서 지나다 어제 피난했던 곳으로 주민들과 우리가족들도 다시 가서 지내게 되었다. 만경에도 밤사이 비행기가 날아와 폭격할지 모른다는 유언비어가 나돌기 때문에 政局(정국)이 混亂(혼란)하고 어지러워질수록 유언비어와 惡宣戰(악선전)은 꼬리를 물고 계속되기 마련인 것을 그후에야 지역빨갱이들이 퍼트린 것으로 알게 되었다.
7월21일
새벽에 집으로 돌아와 아침을 먹고 학교에 나가보았더니 직원들의 動態(동태)는 一變(일변)하여 어제까지 조금도 눈치 못 챘던 左傾(좌경)先生(선생)들이 全部(전부) 露出(노출)되어 자기가 제일 熱熱(열렬)하게 빨갱이 운동을 한 것처럼 떠들어 대고 있었으며 金台坤 先生(김태곤 선생)은 나에게 공갈과 협박까지 하였다. "이제까지 敎會(교회)에서 새벽 祈禱會(기도회)를 드리고 主日禮拜(주일예배)를 드렸던 것은 누구를 위한 禮拜(예배)였느냐"하며 술에 醉(취)해 怒發大發(노발대발)하였다. 나는 그들과 討論(토론)하기도 싫었지만 더욱이 술 취 한자와 상대도 하기 싫어 그 자리를 避(피)하고 말았다. 그러나 듣지 않은 것만 못한지라 마음이 좋지 못했다. 그 當時(당시) 學校(학교)先生(선생)들의 意識構造(의식구조)는 左傾思想(좌경사상)에 全部(전부) 물들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승만 정권에 대해서 不平不滿(불평불만)을 하기 일수였고 約(약)1/3程度(정도)는 左傾思想(좌경사상)에 물들어 있었다. 우리 地域(지역)이 赤化(적화)가 된 後(후) 처음 맞이하는 주일이었다
7월23일 (주일)
이날 敎會堂(교회당)에 出席(출석)한 狀況(상황)을 보면 말할 수 없이 低調(저조)하여 縱前(종전)의 折半數(절반수) 밖에 禮拜(예배)에 參與(참여)하지 못했다. 1950년3월에 만경교회에서는 基督靑年勉勵會(기독청년면려회)로 趙奉夏(조봉하) 牧師(목사)님을 모시고 復興集會(부흥집회)를 가져 敎人(교인) 全體(전체)가 기쁨 가운데 熱心(열심)으로 敎會復興運動(교회부흥운동)을 展開(전개)했었다. 그 當時(당시) 만경읍내에는 만경교회와 大東(대동)교회 뿐이어서 만경교회 敎區(교구)가 진봉면 갈전리 대덕부락 까지었고 면내는 몽산 화포,소사,송상,장산리 부락까지여서 8Km되는 곳에서부터 교인들이 주일 예배에 참석했기에 부락단위로 호호 방문 전도도 실시했고 청년들의 모임을 자주 가짐으로 친교에 힘썼다. 또한 유년주일학교 학생들은 전통적으로 무용과 음악경연대회에 나가면 김제노회내에서 항상 우승을 차지했었다. 聖誕節(성탄절)에는 주일학교 학생들의 축하행사가 있을 때마다 교회당의 창문을 떼고 밖에서도 구경할 程度(정도)로 큰 성황을 이루는 예가 倭政時代(왜정시대)부터 계속되어 왔다. 1950년도도 초봄부터 교회부흥의 불길이 일고 있는데 뜻하지 않은 6.25로 인하여 교회가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7월23일 주일에 모인 성도들의 수는 45명이었고 표정들이 모두가 두려움에 쌓여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지난 주일까지 聖歌隊員(성가대원)들이 전부 예배에 참여했기에 讚揚(찬양)을 드렸는데 오늘은 대원이 몇 명 오지 않아서 찬양도 드리지 못했으며 또 오후의 주일학교도 휴교하게 되었다. 전 가족이 믿지 않는 가정의 청년이나 주일학생들은 이때부터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 믿음이 신실하고 겸손하셨던 老人(노인) 鄭化善(정화선) 執事(집사)님이 계셨다. 그분은 동생 집에서 함께 사셨는데 동생은 믿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동생이 교회에 못나가게 강권하므로 그때부터 교회에 나오지 않았고 수복되고 나서 교회에 나오셨으며 수년 후에 이분이 장로가 되셨다. 적화된 지 며칠이 되지 않았기에 그랬는지는 모르나 아직 교회에 대해서는 아무런 間攝(간섭)이 없었다. 이쯤 되니 교회청년들은 별로 어려움을 격지 않고 교회당으로 나와서 성가연습도하며 화목하게 즐거운 나날을 보내면서 지냈다. 이웃교회에서는 교회당을 민주선전실이라 하여 주일은 예배를 드리게 하고 기타 다른 요일은 공산당 노래도 가르치고 무용도 가르치며 부락의 젊은 남녀들을 모아놓고 사상교육을 시키기도 한다는 소문이 들려오기도 하였다. 또 어느 교회에서는 전혀 예배도 못 드리거나 완전히 빨갱이들의 기관단체의 사무실로 이용하기도 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어느 교회에서는 장로와 집사들까지도 구금을 당하였다는 말까지도 들린다. 이웃 면내에 있는 교회들이 저들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다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교회만은 여전히 교회 종을 울리며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고 며칠을 지내는 동안 빨갱이 내부적으로는 교회에 대한 처리문제를 놓고 말이 많았으나 쉽게 손을 못 댄 까닭이 있었다. 그 이유는 만경교회를 설립하신 초대장로님이셨던 郭永都(곽영도)長老(장로)님이 계셨는데 그해 84歲(세)의 高齡(고령)으로 健康(건강)이 좋지 않아 病席(병석)에 계셨지만 이분의 影響力(영향력)이 컸었다. 郭氏(곽씨) 門中(문중)에서 第一(제일) 어른이셨고 解放直後(해방직후) 만경면자치인민위원장직을 맡았던 분이기에 곽씨 종친 가운데 左傾思想(좌경사상)을 가졌던 사람이 많았어도 곽영도장로님으로 因(인)해 교회에 대하여 壓力(압력)을 加(가)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또 한 분의 장로님이 계셨는데 곽유근장로님으로 곽영도장로님의 조카 되시는 분이다. 이분에게는 4형제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세아들이 좌경 운동하다가 수복후 두아들 炳安(병안), 炳奎(병규)가 行方不明(행방불명)되어 이 아들들로 인하여 김제노회로부터 장로자격정지를 당하셨는데 만경이 적화된 후 초기에는 큰 문제없이 지내셨다. 한가지 염려스러웠던 것은 강춘길 집사께서
7월31일
치안대에 붙들려 가신 것이다. 강춘길집사는 당시 의사로 계셨고 아버지 되시는 姜聲振(강성진)장로님은 한의사로 지역주민에게 많은 공을 남기신 분들이었다. 그러나 강춘길 집사께서 6.25전에 大韓獨立促成會 萬頃大同靑年團長職(대한독립촉성회 만경대동청년단장직)을 맡아본 적이 있었기에 이들이 붙잡아 갔으나 별일 없이 3일만에 釋放(석방)되어 나오셨다. 그후
8월4일
교회 내 부인집사들 내분 尹淑炳(윤숙병) 崔南寅(최남인) 李和順(이화순) 李永秀(이영수) 집사가 치안대에 붙잡혀가 반동분자라는 구실로 매를 맞고 취조를 받다가
8월5일
풀려 나왔다. 이로 인하여 윤숙병집사(강춘길집사 부인)님은 정신 착란까지 일으킨 적이 있었으나 바로 회복되셨고 현재는 전주 서완산동 화산교회 밑에서 은성 새마을 유치원장으로 계시며 윤우병권사님으로 개명하셨다.
8월6일
주일도 역시 청명한 하늘에 미국비행기 20여대가 날아와 청하와 옥구를 이은 만경교를 폭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적은 수의 교인이지만 여전히 예배를 드렸고 김종한목사님은 "환난에 참으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셨다. 오후는 주일학교가 휴학했으므로 교회당 안에서 반사들과 청년들이 한곳에 모여 담화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만경사회 빨갱이들 사이에는 교회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썽이 있는 것 같았으나 교회청년들은 조금도 두려움을 갖지 않고 시간이 있으면 교회당 쥐엄나무 아래 모여서 얘기하며 지내는 것이 즐거운 일과였다. 나는 학교에 약1주일 동안 나가지 않았는데 전직원회의가 있다고 출근하라는 통지가 있어 가보았더니 교사2인1조가 되어 각부락으로 출장 나가 공산당 노래를 아이들을 모아놓고 가르치라는 것이다. 나는 조기문선생과 함께 몽산리 봉회부락으로 나가서 노래를 가르치도록 되어 있었다. 조기문선생은 나와 한부락내에 살고 있었으며 국민학교 다닐 때까지는 주일학교에도 열심히 다녔으며 머리가 좋았고 성격이 온순한 사람이었으나 집안 살림살이가 너무도 가난하여 교원양성소를 수료 후 만경국민학교로 부임케 되어 교사로 있으며 점차 좌경사상에 물들어 그 당시는 열렬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나는 방학중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성가대의 성가를 많이 프린트하게 되었다. 장차 정세가 평온해지고 안정이 되어 다시 성가대가 찬양을 하게 될 때 부를 수 있도록 준비를 하였다. 6.25사변이 일어남으로 교회 안은 더한층 단결하고 화평하여서 사랑으로 지내니 사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낙원이었다. 그러나 일부 불신자의 공산분자들은 이것이 불만스럽게 여겨졌으나 감히 어찌할 도리는 없었던 것 같았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이 곽영도장로님과 곽유근장로님이 계셨기에 이분들의 배경으로 인하여 감히 교회에 압력을 가하지는 못했다. 앞서 말씀드렸던 곽영도장로님은 만경교회의 설립자이시며 40여년을 몸된교회를 위하여 시무 하시다 1950년
8월 18일
오후8시 10분 경에 84세의 고령으로 소천 되셨다. 그리하여 영결예배를
8월21일
오전 8시에 만경교회당에서 드리고 10시에 발인하여 성덕면 대목리 산록에 안장되셨다. 교회당에서 김종한목사님의 주례로 영결예배를 드렸는데 관을 교회당으로 모셔놓고 교인들과 내빈들이 다수 모인 가운데 엄숙한 예배를 드렸으며 성가대의 "날 빛보다 더 밝은 천당 믿는 것으로 멀리 뵈네" 찬송을 불렀다. 영결예배를 마친 후 사진촬영을 하였으며 장지까지 운구하는 문제가 큰일이었다. 매일같이 미군비행기가 날아오는 때였으며 운구 도중 불행히도 비행기로부터 폭격이나 기총소사라도 받게되면 어쩌나 하는 염려로 상당한 논란이 있었으나 다행히도 그날은 비행기가 오지 않았다. 장지까지 교회청년들이 상여를 메고 갔으며 성도들 몇 분과 조문객 몇 분만이 산에까지 가서 조촐한 하관을 마쳤다. 전시가 아니고 평온한 시절이었다면 교회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크게 好喪(호상) 이었을지도 모르는데 난국에 돌아가심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이 행동에 자유를 누리지 못하였기에 간단한 예식으로 무사히 장례를 마쳤다. 곽영도 장로님에게는 3형제의 아드님이 계셨는데 둘째 아드님이 우리 교단 제29대 총회장을 역임하신 郭振根(곽진근) 목사님이시다. 장지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나와 최정렬,곽옥정,송은숙,유금식은 과수원에 들려 포도를 사먹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후 곽영도 장로님이 돌아가신 후 차츰 교회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교회당을 개방하여 민주선전실로 써야한다는 등 매주일 교회 종을 울리며 예배드리는 것이 누구를 위한 것이냐 교회는 반동분자의 집단이라는 등 與論(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아무 대항도 없고 또 곽유근장로님이 계시니 그분이 맡아서 무슨 문제가 있게되면 자녀들로 하여금 처리해 가도록 하였다. 또 곽영도장로님의 둘째 손자 되는 郭炳峻(곽병준) 선생이 있었는데 좌익에 물들어 그들에게 동조하고 있었으므로 교회문제는 곽병준선생에게 일임하여 해결토록 하였다. 그러나 곽병준선생도 한계가 있었는지 교회당을 개방하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은 했으나
8월29일
만경면 소재지내 주민들을 전부 모이게 하여 강연을 한다고 했고 그후 일주일 뒤 또다시 면민위안회를 한다고 노래와 춤을 학생들로 하여금 실시한 일이 있다. 姜聲振(강성진) 장로님과 姜春吉(강춘길)집사님은 주일날 교회에 출석하는 일 외에는 일절 문밖 출입을 않고 근신하고 있었고 鄭化善(정화선)집사님은 주일예배도 참석치 않으셨다. 교회에 큰 상처 입히는 일없이 8월도 넘어간다. 그동안 국민학교는 좌익계 선생들이 주동이 되어 교실마다 스타린, 김일성 사진을 부착하였고 학년별 학급별로 소집해서 나무그늘 밑에서 공산당노래를 가르치는 일만 하였다. 그리고 崔仁植(최인식)교장선생을 타학교로 전출시키고 趙烈焄(조열훈)이란 신임 교장으로 바꾸어 놓았다. 또 주민들은 부락단위로 회의를 한다고 하루에 몇 번씩 소집을 하여 공산당 찬양하는 강연을 하기도 하고 국제연맹에 보낸다고 공산주의 지지서명날인도 받아갔다. 매일 같이 젊은 미혼처녀들을 호호 방문시켜 가족들의 동태 파악과 선전을 하기도 하며 8월중순경부터는 젊은 청년 및 학생들을 지원병 모집이라는 명목으로 강요하다가 안되면 협박을 하며 데려가기도 했다. 나중에는 지원병도 없이 반동분자라는 누명을 씌워 의용군으로 끌어가고 아예 어떤 학생들은 그들이 성가시게 하기 전 의용군으로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집안의 그날 현재 식량이 얼마나 있나 또는 간장, 된장, 고추장의 재고까지 전부 조사하며 밭에 심겨 있는 고구마 고추까지도 수확량 조사를 하기도 했다. 후에 현물세를 내기 위한 것이며 심지어 조 알까지도 세었다는 말이 나오기까지 했다. 나는 당시 5학년1반을 담임하여 5개월이 되었을 때 공산군이 우리고장까지 침공하게 되어 방학을 맞이했기에 학생들의 생활상과 소식이 궁금하였다. 그렇다고 함부로 가정방문을 할 처지도 못되었다. 직원들의 행동을 공산당선생들이 일일이 감시하게 되었고 전에는 공산당이라 생각 치도 않은 직원들이 공산당 열성분자였던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볼 때면 마음으로 苦笑(고소)를 금치 못했다. 아마 살기 위해서 그랬으리라 이해는 되지만 정도가 지나친 직원들이 많았다. 8월에 접어들면서부터는 2인1조로 편성하여 부락에 나가 공산당 노래 지도하는 일뿐 별로 학교에 나와 할 일 없어도 8월10일 이후부터는 매일 같이 출근하라고 하기에 개인적인 행동은 일절 못하게 했다. 특히 나는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신임교장이나 공산주의자들의 많은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8월도 별로 큰일 없이 지나갔고 9월을 맞이하였다.
9월 초순
이 되었다. 곽병준선생이 눈에 보이지 않기에 어디 갔는가 하고 후에 알아보니 금산면에 있는 금산사에 인민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가서 경리사무를 보게 되었다고 그곳으로 떠나고 말았다. 그후 곽병준선생은 9월28일 수복되기 전 그곳을 빠져 나와 집으로 돌아와 숨어 있다가 수복을 맞이했고 자수하여 교회를 잘 받들고 섬기다가 지금 현재는 서울에서 목회생활을 잘하고 계신다.
9월6일 밤
유난히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교회마당에 자리를 깔고 청년들이 모여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놀고 있는데 宋恩淑(송은숙) 반사가 말하기를 우리교회 여자청년들은 민주청년동맹에 가입하지 않고 부녀동맹에도 가입치 않고 있으니 몹시 구실을 잡으려고 종종 괴롭게 한다는 말을 하면서 차라리 여자의용군 이라도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을 하였다. 그 당시 여자들도 의용군으로 간 사람들이 있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전적으로 만류했다. 고통을 당하더라도 이곳에서 당하자고.... 교회에 대한 間攝(간섭)은 크게 하지는 않았지만 은근히 이 사람 저 사람들을 사이에 넣어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날 저녁 다시는 의용군에 간다는 말이나 결심을 하지 않기로 했다.
9월7일
9시경에 최정렬 친구가 찾아왔다. 최정렬친구는 나보다 국민학교 2년 선배였고 당시 신학교에 1년재학중 이었으며 일찍 결혼했고 부인 이옥진씨는 교회 오르간 반주자였으며 당시 임신(7개월)이었다. 최정렬친구는 어디서들은 소식이었는지 모르나 인민군은 지금 후퇴하는 중이며 저 동산에 굴을 파는 것도 인민군 측에서 불리하니까 만들고 있으니 인민군이 후퇴하고 미군이 상륙하게 되면 인민군에게 협조했다는 보복으로 모조리 죽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反共(반공)鬪爭(투쟁) 했다는 사실과 우리끼리의 증표를 만들어 가지자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 사전에 알려주는 것이니 잘 생각해 보라고 하면서 1시간정도 이야기 나눈 후 갔다. 아마도 이때쯤 인민군은 낙동강에서 패전을 하고 있는 것 같았으나 라디오도 없고 戰勢(전세)를 알 수 있는 길은 전혀 없었다. 들려오는 풍문과 유언비어만 있었고 정확히 아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수복 후 낙동강에서 인민군이 패전했다는 시기를 보니 9월 초순인 것 같았다. 당시 만경동산에는 주민들을 동원하여 방공호를 파기도하고 복구공사라는 명목으로 부서진 교량, 철도를 보수하기에 이르렀다. 최정렬친구는 당시 가정에 귀한 것 중에 하나인 3구라디오를 듣고 나에게 소식을 알려주었는지는 모르나 우리 집에서 나와 얘기 나누고 갔다.
9월10일
오후에는 교회 여 반사 세 사람 즉 곽옥정, 송은숙, 류금식은 최정렬로부터 두 번째의 반공조직체에 가입권유를 받고 가입원서에 지장을 찍어 주었다. 주일 저녁에 나는 학교에 숙직하러 가는 도중 정렬이를 자기집 앞에서 또 만났다. 정렬이는 똑같은 말을 나에게 하였다. 나는 잠깐 주저하면서 모든 일을 愼重(신중)히 하자고 했다. 함부로 행동했다가 저들에게 누설된다든지 하면 큰일이므로 공산당원들이 몹시 설치고 있는데 조심하자고 했다. 나도 친구들과 비밀히 접촉하고 협조하겠다고 하고 학교로 갔었다. 그날저녁 학교에 가 숙직실에서 숙직을 못하고 어느 교실에서 밤을 지 세웠다. 공산주의자들이 패망하여 속히 물러가고 자유로운 생활과 신앙의 자유를 간절히 원하였고 공산화 된지 1개월여 밖에 되지 않았지만 주민들의 대부분은 공산주의 정치에 혐오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몹시 불안하고 초조했던 여 반사 세 사람이나를 만나기 위해서 숙직하는 학교에 찾아왔으나 만나지 못했다.
9월11일
최정렬과 나는 오후에 세 번째 우리 집에서 만나 구체적인 반공조직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야 비로소 반공혁명단이라는 명칭도 알았고 몇몇 단원들의 이름만 알았지 단장을 비롯한 임원들의 이름은 전혀 알려주지 않아서 알지 못했다. 최정렬은 나에게 반공혁명단원증을 주었으며 입단원서를 받아갔다. 9월11일 저녁을 먹고 교회당 앞뜰에서 몇몇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류금식 반사가 찾아와 함께 놀다가 헤어질 때 나에게 반공혁명단에 가입했는지 묻고 자기들 곽옥정, 송은숙, 류금식들도 어제 가입했으며 입단원서를 써주고 그날저녁 학교로 나를 만나기 위해 찾아갔었노라고 말했다. 류금식반사는 나에게 반공혁명단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서 자세한 것을 알려달라고 했으나 나 역시 잘 알지 못하고 있기에 말할 수 없었고 그때 헤어진 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9월12일
새벽5시쯤 되었을까 누가 "김선생님 김선생님"하고 급한 목소리로 찾기에 나가보니 류춘강이란 4학년 여학생이었다. 웬일이냐고 하니 새벽에 분주소에서 언니를 데려 갔다고 말하며 어머니가 빨리 김선생에게 알려 주라고 하시기에 쫓아 왔다고 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반공혁명단 조직이 탄로 났구나 생각하고 옷을 입고 뒤 숲 속으로 숨어들었다. 약 두 시간쯤 있다가 아무 일 없었기에 아침을 먹고 학교가는체 하면서 알아보았더니 최정렬을 비롯하여 교회 여 반사 세 사람과 몇몇 친구들을 데려 갔고 김종한목사님, 강성진장로님, 하창조집사님도 9월12일 아침에 분주소로 데리고 갔다. 교회에 청년들이 몇 명 끼어 있으니 혹 교회에서 배후 공작한 것이 아닌가하고 교회목사님 장로님 집사님을 데려간 것이다. 그때 만경주민들 사이에서는 각종 악성 유언비어로 들끓고 있었고 공산당원들은 기회는 이때다 하고 자꾸 헛소문을 퍼트려 교회입장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 반공혁명단이 탄로 난 것은 최정렬이 선전부장을 맡으면서 단원들을 규합하는중 체포되기 수일전 자기와 국교동창인 김두윤을 만나 반공혁명단에 입단하도록 권유를 했고 김두윤은 자기 친형(당시 공산주의자)에게 내용을 이야기함으로 김두윤형이 밀고했다는 것이다. 김두윤부친(김경준씨)은 하촌사람이라고 천대받고 살던 백정이었다. 고로 커 가는 젊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천대받던 생활에 큰 반발심을 갖고 있어 공산주의자가 된 것이다. 밀고를 받은 분주소원과 공산당원 수명은 그 즉시 단장인 곽호의 집을 급습하여 천장에서 반공혁명단의 명단을 찾아내고 단원들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전부 체포해 갔다. 지금도 내가 그 당시 체포되지 않았던 것은 알 수 없으며 9월 11일에야 가입했기에 미처 명단에 올리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입단 원서도 최정렬친구가 찢어 버리지 않았나 생각한다. 반공혁명단의 조직을 보면 단장에 곽호, 선전부장에 최정렬, 연락부장에 정해재, 조직부장에 배동업, 단원으로 이세호, 고율석, 김주현, 남궁태인, 곽옥정, 송은숙, 유금식, 이정순 등으로 9월 12일 오전 중으로 김종한 목사님, 강성진 장로님, 하창조 집사님들과 함께 성덕면 묘라리로 이송해 갔다. 성덕면 묘라리에는 인민군이 치안을 담당하기 위하여 수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조사신문을 하면서 교회와는 아무 연관이 없음을 확인하고 목사님, 장로님, 집사님은 2일 만에 되돌려 보냈고 반공혁명단원들은 4일쯤 있다가 어디론가 이송되고 말았다. 나에게는 아무런 제재가 가해지지 않았기에 안심하고 학교에 출근하기도 하고 붙들려간 친구들의 형편과 행방을 찾기에 이르렀다. 나는
9월 14일
목사님과 장로님, 집사님께서 무사히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찾아 뵙고 서로 손을 잡고 울었다. 목사님께서 그 당시 상세한 말씀은 나에게 하지 않으셨지만 각각 수용해 놓고 조직의 동기와 배후 인물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심문하고 미 체포 인물을 색출하더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불안해하면서 집으로 돌아와 근심 중에 지냈고
9월 15일은
학교에서 하루종일 있다가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와 보니 만경분주소에서 호출장이 보내어 왔었다. 나에게도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저녁상을 대하고 있었는데 "김선생"하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었다. 할 이야기가 있으니 분주소까지 가자는 것이었다. 어느 곳으로 피할 길도 없이 그와 함께 분주소에 가서 철야심문을 받았다. 나를 심문하는 사람은 김제 정치보위부 만경파견원 허용태라고 하며 금산면에 살고 있다고 자기 소개를 한 후 백지를 내어주며 나에 이력서를 쓰라고 했다. 이력서를 쓰고 나니 반공혁명단에 대해서 심문하기 시작했다. 나는 허용태라는 사람이 최정렬로부터 어느 정도의 내용을 알고 와서 조사를 하게되는 가를 판단하면서 답변에 임하였다. 오늘 성덕면 묘라리에서 심문과정을 지켜보았고 조서도 읽어보았으니 모든 것을 솔직히 대답하라는 허용태의 말을 듣고 내가 반공혁명단 명단에 기록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가입한 사실과 가맹증서를 받은 사실을 알았다고 하면 나도 곧바로 성덕면 묘라리로 압송해 갈 것이지 이곳에서 별도로 조사하지 않을 것이다. 생각하고 끝까지 부인하기로 하였다. 최정렬과 만난 일이 있었느냐, 만나서 무슨 말을 나누었느냐, 반공혁명단을 조직하는 것을 알았으면서 왜 고발하지 않았느냐, 지금도 미 체포된 단원들이 많이 있으니 숨김없이 이름을 대라는 등 똑같은 질문을 몇 번이고 거듭했다. 나는 최정렬과는 두 번 만났으며 나에게도 반공혁명단 가입권유를 받았으나 나는 교직에 있는 신분이기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부인했고 친구들을 함부로 고발할 수도 없었다고 했으며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다. 똑같은 질문을 몇 번이고 하였으나 나에 답변이 한결같으므로 백지를 주며 국민학교 졸업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자서전을 쓰라고 한다. 자서전을 쓰고 나니 나에게 집중적으로 가맹증서를 내놓으라고 하며 숨어있는 단원들의 명단을 말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가맹증서는 벌서 나로써도 찢어버렸고 또 단원들의 명단도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일이기에 말할 수도 없었다. 전혀 모른다고 부인할 때마다 단총으로 위협하며 미 체포된 단원들을 말하라는 것이었다. 그 날 저녁은 유난히 바람도 세차게 불고 비까지 내리는 날씨였다. 새벽 1시까지 심문을 받았지만 별로 혀용태로써는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알아내지 못하니 몹시 화가 난 것 같았다. 나의 호주머니 검사를 전부하고 내 파이롯트 만열필까지 뺏어갔다. 그리고는 만경동산으로 올라가자고 했다. 산으로 데려가서 총살하겠다고 하며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의자에 앉은 채로 기도를 드렸다. "나를 굳세게 해주시고 내 영혼을 붙들어 주소서"라고, 내가 붙들려 간 후 부모님들께서 몹시 걱정하며 잠 못 이루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집 생각이 간절하다. 밖은 비바람이 세차게 불고 나갔던 허용태가 다시 들어와서 사실대로 말하라고 타이른다. 나는 똑같은 답변으로 일관했고 나를 성덕면 묘라리 친구들 있는 곳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나를 그들과 대질시키면 내가 단원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것이 아닌가 하고 강경한 태도를 보여주었고, 이곳에서 빨갱이들로부터 심문과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것이 마음 편할 것 같아서였다. 끝까지 부인하고 강경하게 나오니 내일 다시 만나자고 하면서 오늘 저녁은 교화소(유치장)에서 자라고 하며 최정렬의 심문과 조서에서 김방서와 접촉을 했다는 것과 반공혁명단의 활동시기가 적절치 않으며 시기상조라고 당신이 말하지 않았느냐고 나에게 말한다. 최정렬친구가 나에 대한 것 즉 혁명단에 가입한 것과 가입증서를 주었다는 말은 하지 않은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일 아침 다시 조사 할 터이니 사실 그대로 말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앞길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하며 교화소로 들어가라고 했다. 이곳이 나로서는 처음 들어와 본 곳이기에 한쪽 구석에 쪼구려 앉아 밤을 지 세웠다. 비바람은 불고 빗방울은 천장에서 뚝뚝 떨어지고 냄새는 나는데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지만 이 정도의 고통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고 굳게 마음먹고 두 평 정도의 마루바닥 유치장에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밖에서 정병선이를 데려 왔다고 허용태에게 보고한다. 허용태는 정동선에게도 나에게 하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력서를 쓰라고 하는 것 같았다. 들려오는 소리가 확실치는 않으나 간간이 들려오는 소리가 나에게 심문하는 것과 같은 내용인 것 같다. 최정렬과 만난 일이 있느냐고 물으니 없다고 대답한다. 끝까지 만난 적이 없다고 대답하니 저 구석에 가서 꿇어앉으라고 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온다. 그후 30분 가량 있다가 집에 가서 자고 내일 아침 일찍 다시 들어오라고 하는 것 같다.
9월16일
아침 9시쯤 되니 정병선이 온 것 같다. 역시 어제 저녁에 묻던 말과 똑같이 묻는다. 여전히 정병선이 최정렬과 만난 일이 없다고 하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며 차후에 다시 조사하겠다고 하고 만일 최정렬이와 만난 일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에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협박한다. 정병선을 보낸 후 허용태는 내가 갇혀 있는 유치장 문을 열고 나를 다시 조사하기 위해서 취조실로 데려다가 어제 저녁내 심문했던 내용을 다시 되풀이한다. 나도 끝까지 가맹증서를 받은 사실이 없으며 숨어있는 단원들을 알 수 없다고 버티었다. 그러자 할 수 없다고 하며 다시 유치장으로 들어가라고 한다. 유치장안에 있으니 만경읍내에 거주하는 여러사람(공산주의자)들이 분주소에 출입하면서 유치장내를 살피고는 큰범죄자 취급하듯 떠들어 대고 욕을 한다. 저런자가 인민학교 선생이었다하며 곽남규라고 하는 자는 죽여버리라고 폭언을 하며 떠들어댔다. 집에서는 내가 돌아오지 않자 행방을 찾기에 급급했고, 오전10시쯤 어머니와 숙모님이 아침밥을 가지고 오셨지만 아침밥이 먹히지도 않고 어머니께 나의 손목시계를 풀어주며 가지고 가시라고 하니 몹시 눈물을 흘리셨고 나도 눈물을 흘리며 다시 유치장으로 들어갔다. 오후2시쯤 되어 집에서 점심을 가지고 왔기에 점심을 전부 먹고 마음을 굳게 하고 앞으로 닥쳐올 것에 대비했다. 허용태는 밖에 나갔다가 돌아와 나보고 밖으로 나가자고 한다. 양곡검사소(지금은 유정이란 음식점)자리로 사무실을 옮겼으니 그곳으로 가자고 한다. 그곳에 가서도 똑같은 취조를 받고 그 집 다락방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그때 밖에서 "반태순을 데리고 왔어요" 라고 한다. 옆방에서 대기하고 있어라하고 나의 조사서류를 작성하는 것 같았다. 서류작성을 마치고 반태순이를 나와 똑같은 방법으로 심문을 했으나 반태순 역시 최정렬이를 만난 사실이 없다고 완강하게 부인하니 서약서를 써라 하고 돌려보내 준다. 나는 오후 5시쯤 되어 김제로 가자고 하며 소사리에서 분주소 경비하러 왔던 장정2명과 함께 걸어서 김제로 향하였다. 다행히 포박은 하지 않고 4사람이 함께 걸어서 김제 정치보위부에 도착하니 어두움이 짓게 깔렸다. 국민학교 제방길을 따라 김제로 오던 중 류명수선생과 홍순필선생을 만났고 타학교로 전출되었던 최인식 교장선생님을 만났다.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작별하였다. 저녁도 먹지 못하고 캄캄한 밤에 김제정치보위부에 들어가니 이곳은 김제 역전에 있는 일본식 가옥이었고 현재도 그 집이 그대로 도로변에 남아있다. 보위부에 들어가니 학생들로 보이는 젊은 청년들이 15명 가량 각방에 나누어 들어 있었다. 각방에는 공산당원들이 한사람씩 감시를 하고 있었고 일체 말을 못하도록 하며 학생들은 머리가 깎여 있었고 전부 쪼구려 앉아 있었다. 이 학생들의 표정은 두려움에 쌓여 있었고 그들의 눈은 쑥 들어가 있었으며 마치 병자와 같은 모습이었다. 저녁10시쯤 되었을 때 허용태는 다시 나에게로 와서 또 한번 심문을 하며 반공혁명단 가맹증서를 보이면서 나에게 내놓으라고 다그친다. 나는 받지도 않았고 본적도 없다하니 그대로 나가버렸으며 그후로 허용태는 나타나지 않았다. 저녁 11시쯤 학생들을 유치장에서 불려나가 어디론가 데리고 가버렸다. 이들은 의용군에 끌려갔다가 도망하여 붙들려 온 사람들이었다. 학생들이 전부 빠져나가니 내가 있는 방에는 네 사람이 남게 되었는데 나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은 별로 지은 죄도 없이 3일간이나 이곳 유치장에 감금되어 있다고 한다. 나의 방을 감시하는 문식이는 다른 세 사람들이 화장실에 간다거나 물을 먹으러 간다고 하면 잘 보내주곤 하는데 나에게는 허락하지를 않는다. 자기들이 생각하기에는 큰 죄인으로 여겼던 모양이다. 이곳에서 이 빨갱이들에게 본을 보여주자 하고 방 청소 마루걸레질 등 내가 할만한 일은 솔선해서 했다. 그리고 웃음 띤 얼굴로 그들에게 의식적으로 접근하여 말을 붙이기도 하고 최대한의 겸손과 여유 있는 행동을 하니 이들의 마음이 풀리는 것 같아 화장실, 물먹는 것 등은 허락을 해주었다.
9월17일
주일이었다. 교회에 갈 수 없는 몸이기에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렸다. 이 어려운 환난과 고통을 끝까지 견디어 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 드렸다. 그리고 이 시간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순서들을 차례차례 머리에 떠올리면서 오전을 지냈다. 오후에는 나와 한방에서 지냈던 사람 중에 주무창이란 서울대 3학년에 재학중인 학생은 기독교인으로 서울에서 김제로 피난 왔으며 피난해온 집의 주인과 그 이웃집 사이가 좋지 않아 이들이 이사온 것이 어떤 연락이나 취하러 온 줄 알고 정치보위부에 밀고했다는 것이다. 이곳으로 온지 3일이 되었고 조사도 받고 아무협의가 없는데도 석방시키지 않고 있다가 오후에 자유로운 몸으로 석방되어 나가니 나는 더욱 허전했고 말벗을 잃어 버렸다. 오후 늦게 남아있는 두 사람과 함께 옆방으로 옮겨갔다. 이곳으로 옮겨오면서부터 화장실 가는 것 세수하는 것 물먹는 것 등은 자유롭게 할 수가 있어서 좋았다. 이곳으로 옮겨온 것만 해도 주님의 끊임없는 사랑의 손길을 펼쳐 주심에 감사를 드렸다. 주일이 지나고 9월18일 이날도 아무런 취조도 받지 않고 무사히 넘겼다.
9월19일
이날 아침은 너무나도 맑고 깨끗한 하늘이었고 솟아오르는 햇빛을 바라보니 집 생각 교회 여러 성도들의 모습 그리고 성덕면 묘라리에서 전주 어느 곳으로 이송되어 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교회의 최정렬 친구와 곽정옥,송은숙,류금식 세 여반사들의 생각이 간절하다. 한편 생각할 때 그들에게 부끄럽기도 하고 죄송스럽기도 하여 심문과정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나도 그들이 있는 곳으로 함께 보내달라고 주장하고픈 마음을 가졌었다. 이날 오후 5시쯤 되니 허용태가 나타나 나에게 "조금 있으면 당신을 불러 취조를 할 터이니 바른 대로 말하라"고 한다. 내 마음은 한편으로는 이 작은 유치장 방에 갇혀 있는 것이 지루하고 답답하여 이 고비를 빨리 벗어나고픈 생각이었고 한편으로는 가슴이 떨리고 몹시 두근거렸다. 처음에 불려 들어간 곳은 무시무시하게 생긴 이북사람으로 예심계장이라고 하였다. 군인인지 내무서원인지 알 수 없으나 누런 제복을 입고 훈장이 붙어 있었다. 나에게 첫 질문이 "반공혁명단의 조직동기를 말하라"고 한다. 나는 그 조직에 가입도 안 했고 확실한 내용은 나로서도 알 수가 없다고 했다. 다만 최정렬이와 두 번 만난 적이 있고 반공조직체에 가입권유를 받은 적은 있으나 나는 아직 그런 조직체를 만들 시기가 아니라고 하여 반공혁명단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약 20분쯤 심문을 받고 옆방 2호실로 들어가라고 한다.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마루에 꿇어앉으라고 한다. 얼굴이 험상궂게 생겼고 키는 작은데 이북사람이었다. 이 사람 역시 묻는 말이 "이러한 가맹증서를 가지고 미군이 오면 무엇을 자랑할 것이 있어 내놓으려고 반공혁명단을 조직하였느냐"고 하며 아직도 미 체포된 자들이 많이 있을 테니 이름을 대라고 한다. 나는 전혀 모른다고 부인했고 전주에 있는 최정렬이와 대질을 시키든지 나를 그곳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인민군이 가지고 있는 장총의 개머리판으로 치며 구타를 하였다. 무슨 수단을 부리려고 전주로 보내달라고 하느냐 하면서 수없이 뺨을 때리며 개머리판으로 치기 시작했다. 아픈 감각이 별로 없을 정도로 매를 맞고 분한 감정이 치솟아 무언의 반항으로 눈을 똑바로 뜨고 입을 꽉 다물었다. 솔직한 대답을 하지 않자 저녁에는 다시 물로 고문하면서 취조하겠다고 하며 나가라고 했다. 다시 나의 거처하는 방으로 돌아오니 허용태가 나를 부르며 그들이 식사하는 곳으로 같이 가서 식사하자고 한다. 저녁을 먹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물 고문을 당하면서 심문을 받을 것을 생각하니 몹시 불안하여 마음을 안정할 수가 없었다. 벽을 기대고 앉아서 "주님 이 어려운 고비를 잘 극복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 드렸다. 이제나저제나 부를 것인가 마음 초조하게 있었으나 저녁12시가 되어도 부르지 않는다. 사방은 고요하고 별로 인기척이 없어 부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누워 잠을 청했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고 이런저런 생각에 쌓여 있던 중 새벽3시쯤 되었을 때 갑자기 슬픈 마음에 쌓여 눈물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울고 있을 때 "하나님의 진리 등대 길이길이 빛나니" 당시 찬송가377장이 저절로 흥얼거려 졌다. 가사를 전부 암기치 못하였기에 곡으로만 두 세 번 부르고 엎드려 기도 드리면서 전주에 있는 친구들과 내 자신을 위해서 간절히 간구 했다. 무사히 하룻밤을 지내고 아침을 맞이했다. 함께 수감되어 있는 사람의 모친이 아침을 가지고 오셨기에 함께 나누어 먹었고, 점심때에 삶은 고구마를 사 가지고 오시라고 200원을 드렸다. 오전 10시쯤 되었을 때 나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우리 이웃에 살면서 우리 우물물을 나눠 먹고 지내며 평소에 내가 누님이라고 부르며 사이좋게 지내던 27세의 노처녀 박수남씨였다. 박수남씨는 곽유근 장로님 처남의 큰딸로 소학교시절 철봉 하면서 떨어져 오른손을 다쳐 부자연스러운 상태였으며 이로 인하여 결혼을 못했지만 머리가 영리했고 품행이 단정했으며 홀로 재봉틀로 바느질하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교회 다니면서 일찍 세례를 받았으나 자신을 비관하면서 고종 사촌들로부터 좌익사상에 물들기 시작하여 만경마을이 적화되자 여성동맹위원장직을 맡아보고 있었다. 아침 일찍 나를 면회하러 왔었기에 얼마나 반가웠는지 몇 일 동안 지내면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사람도 보지 못하던 차에 아는 분을 만나고 보니 참으로 반가워서 눈물이 났다. 나에게 위로의 말과 함께 염려 말고 참고 있어라 하고 나갔다가 과일과 떡을 사서 넣어주고 돌아갔다. 함께 수감되어 있는 사람과 나눠 먹고 약 1시간쯤 있다가 그 젊은 사람도 석방되어 나갔다.
9월20일
아무런 일없이 지내다가 해가 질 무렵 허용태가 나타나서 "오늘 김선생을 석방 시켜 만경으로 가니까 이후로는 이런 사건이 재발되지 않도록 책임을 지라"하며 당부한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니 어제 나를 심문했던 험상궂게 생긴 종교담당자 앞으로 데리고 가서 나를 석방시켜 달라고 사정을 한다. 처음에는 안 된다고 몇 번 거절하다가 "그럼 당신이 책임지시요"하고 승낙을 했다. 그리고 나서 나를 자기 책상 앞으로 가까이 오라고 하며 보여 주는 것이 만경교회 교인들의 명단이었으며 거기에는 유년주일학교 학생들의 명단까지도 등록되어있는 자세한 명단이었다. 그 명단에서 젊은 남녀 교인들을 지적하면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질문한다. 아는 대로 대답해 주니 9월23일 오전 10시에 다시 한번 오라고 하면서 몇일 동안 이곳에서 보고 들었던 일 심문 받았던 일들을 절대로 발설해서는 안된 다고 다짐을 받고 그곳을 빠져 나올 때는 해가 서산에 지려고 하였다. 답답하고 무서웠던 그곳을 속히 벗어나려고 빠른 걸음으로 김제시내까지 들어와 긴장이 풀리니 시장 끼가 한없이 느껴오고 힘이 없어 더 걸어갈 수가 없었다. 100원을 주고 감을 사서 먹으며 걸어서 집으로 오는 도중 학교에 들렸더니 김호순 선생과 강기돈 선생이 숙직을 하고 계셨고 임종민이 며칠 전부터 학교 고용원으로 와 있게 되었다고 한다. 학교를 벗어나 나는 최인식 교장댁에 들려 인사를 하고 집에 도착하니 부모님과 동생들이 놀라 한참동안 붙잡고 울음바다가 되었다. 이때의 감격스러웠던 마음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으며 무사히 석방되어 나오게 됨을 감사하면서 늦게 저녁식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잠자리에서 어머님과 숙모님으로 부터 그 동안 집에서 힘쓰고 애썼던 일들을 듣고서야 내가 무사히 석방되었음을 알 수가 있었다. 앞서 기록한 박수남씨를 통하여 허용태에게 여러 가지로 사정을 호소했고 부탁을 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박수남씨의 도움으로 석방되었고 무사할 수가 있었다. 물론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와 섭리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수복된후 박수남씨는 바로 자수하여 만경에서 생활하다가 이리로 이사한 후 지금은 소식이 끊겨 생사를 알 수 없다.) 나도 지난 6일 동안의 모든 일들을 어머니와 숙모님께 말씀드리고 잠자리에 들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새벽이 되어 어제 새벽의 일들이 생각나서 무릎을 꿇고 엎드려 무사히 풀려 나오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렸고 전주로 이송된 친구들을 생각하며 간절히 주님께 기도 드렸다. 그리고 찬송가 377장을 찾아서 "하나님의 진리등대"를 부르고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 내려 주심으로 하루 속히 이 악몽의 시절을 벗어날 수 있도록 기도 드렸다. 아침 일찍 숙모님이 오셨고 곽병일 매형께서 다녀가셨다. 곽병일 매형은 3일 후인
9월23일
공산당들에게 끌려가 어느 곳으로 갔는지 알 수 없으나 수복 후 전주형무소에서 사체로 발견되어 그곳 야산에 매장했다는 비보를 들었다. 아침을 먹고 학교로 출근을 했다. 먼저 신임 교장 조열훈에게 인사한 후 사직원을 내밀고 사의를 표했다. 그랬더니 조열훈교장선생은 좀 더 생각해 보고 나중에 만나서 얘기하자고 하면서 사표를 받지 않았다. (나는 이제 만경사회에서는 반동분자라는 낙인이 찍힌 사람인 고로 언행에 특별히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한 후 밖에 일체 나가지 않았고 동생들을 시켜 정세만 관망하였다.) 학교에서 나와 강춘길 집사님 댁을 방문하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서로 흘렸다. 그때 강성진 장로님께서 나오셨기에 인사드리고 목사님댁을 방문했더니 마침 목사님께서 밖으로 나오시는 길이었고 면인민위원회에서 회의를 한다고 오라고 하기에 가는 길이라 하셨다. 인사를 하고 서로 손을 붙들고 "우리가 주님을 알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당했으니 더욱 조심하고 교회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잠잠해 질 때까지 기다리자"고 격려 하셨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기 위함이라면 온갖 굴욕이라도 참자고 마음먹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일주일간 내가 없었던 기간에 사회의 분위기가 불안하고 사람들의 표정이 냉담해 진 것 같다. 계속해서 의용군은 강제성을 띠며 잡아갔고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가정에 가서는 식량을 내라. 비행기 헌납금을 내라 하면서 말을 잘 듣지 않으면 반동이라는 낙인을 찍기도 했다. 반공혁명단원으로 체포되어 갔던 사람 중에 남궁태인과 이정순이 풀려 나왔다고 한다. 그때는 라디오도 없어 전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좌익분자들이 행동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부산점령이 목전에 있다고 매일 같이 떠들어대던 그들이 기가 한풀 꺾인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9월23일 오전 10시까지 김제 정치보위부로 들어오라고 나를 석방 당시 다짐했던 일이 생각나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다가 박수용 누님에게 상의하기로 했다. 정세에 대한 별다른 얘기는 없었고 김제에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하기에 집에 있었다. 원래 정치보위부는 반동분자를 색출해 내며 그들을 감시 감독하는 부서로 석방시켜준 자를 첩자로 하여 계속적으로 사회 구석구석까지 감시케 하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음을 후에야 알았다.
9월24일
주일이 다가 왔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교회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많고 저들이 興奮(흥분) 되어 날뛰니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리지 말자고 당회의 결의가 있었다기에 마음은 대단히 섭섭했으나 별도리 없이 모두 헤어 졌고 기도만 드리고 나왔다. 강성진장로님은 목사님 댁에 가셔서 가정예배를 드리셨다고 한다.
9월25일
혹시나 23일에 김제정치보위부에 출두하지 않았다고 데리러 오지나 않을까 하고 초조하게 지내며 집에 있을 수 없어 교회당 강단 밑에 숨어서 하루해를 지냈다.
9월26일
이날은 추석날이다. 어쩐지 마음이 불안하고 사람을 대하기가 싫어서 학교에도 몇일 동안 나가지도 않았지만 동네 사람들조차 만나는 것이 두려운 생각이 났다. 오늘도 역시 교회강단 밑에 숨어 있었는데 이날 오전에 김종한 목사님과 강성진장로님을 분주소에서 불러 가셨다고 한다. 사모님 말씀에 의하면 가정에서 새벽기도를 드리는데 목사님께 피하라는 묵시가 있었다며 강장로님께 말씀드렸더니 도피할 것 없다고 하셨기에 집에 계셔서 붙들려 가셨다고 한다. 그때 목사님 가족으로는 사모님 큰딸 그리고 쌍둥이 형제 은동,혜동이와 은숙이 여섯 식구였다. 공산당들은 9월26일부터 그들이 소위 말하는 반동분자라고 하는 사람들을 한사람 한사람씩 데려다가 수감하였던 것이다.
9월27일
아침부터 만경 시내가 떠들썩했다. 청소년들로부터 50대 사람들까지 면에서 회의한다고 불러모으고 강제로 쌀1말씩 짊어지게 하고 의용군으로 보내느라 야단이었다. 밖에는 나갈 수 없고 어린동생들을 시켜서 면인민위원회 분주소에서 어떻게 하고 있는지 보고 오라고 했다. 하루 종일 누구든 보는 사람마다 붙잡아 끌어가고 있다고 하며, 김창곤 교감선생도 의용군으로 끌려가셨다고 한다. 강춘길집사님은 9월27일 오전에 그들이 데려다가 분주소에 수감시켰고, 하루종일 의용군으로 잡아 보내고 저녁에는 그들이 말하는 반동분자라고 하는 교인들과 우익인사들을 데려다가 어떻게 했는지 그 당시는 알 수가 없었다.
9월28일
아침에 골목길로 해서 학교에 출근하여 보니 이제까지 기세 당당했던 당원선생들은 한사람도 나오지 않았고 신임교장 조열훈만 출근했는데 愁心(수심)에 쌓여 있는 것 같았으며, 교무김호순선생을 비롯하여 5명정도 출근했으나 곧 모두 퇴근하고 말았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서 시내의 사정을 살펴보니 7월19일과 똑같은 현상을 볼 수가 있었다. 분주소로 끌려갔던 사람들은 한사람도 볼 수가 없고 유치장과 분주소 그리고 인민위원회민청사무실 각 기관마다 텅텅 비어 있다고 한다. 혹 어떤사람은 유치 당했던 사람들 전부 김제로 압송되어 갔다며 분명히 자동차에 실려 어디론가 떠났다는 사람도 있다. 별별 억측의 말이 많았으나 확실치는 않았다. 오전 11시쯤 되어 집에 돌아와 보니 죽산면 대창리에 사는 동수자형의 동생되는 박동순씨가 집에 와 있었다. 그분의 얘기를 들으니 죽산면도 역시 의용군을 어제 보내는데 타 부락 사람들은 많이 나와 있는데 대창리 부락에서만 한사람도 의용군으로 가는 사람이 없으니 평소에 대창리 부락을 미국촌이라고 주목하던 차 공산당원이 대창리로 나와서 강제 의용군으로 보낸다하기에 부락청년들이 전부 나서서 대창리에 출장 나온 공산당원들을 잡아 구타하고 묶어 놓고 인접부락과 연락하여 손에 棍棒(곤봉)과 竹槍(죽창)을 들고 죽산 분주소를 襲擊(습격) 하러 갔는데 그곳에서 소총으로 대항하니 습격도 실패하고 전원 논 속으로 피신하여 왔다고 한다. 미군이 군산으로 상륙한다는 소문도 있고 벌써 서울을 탈환했다는 소리도 있다. 3구 진공관식 라디오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흘러 나왔으리라 생각하고 오후에 거리로 나가 보았더니 각 기관이 모여 있는 거리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없고 어제 의용군으로 갔던 사람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이들은 이리까지 갔다온 사람들도 있고 도중에 도망하여 숲 속에 숨어 있다가 돌아왔다는 사람도 있다. 의용군이라는 명목을 붙여 이북으로 도망하면서 끌고 가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북으로 가는 길은 전부 차단되었고 의용군으로 끌려갔던 사람들은 전부 헤어졌고 좌익분자들만 산중으로 도망하여 그때부터 이들은 노령산맥을 타고 지리산으로 숨어들어 "빨지산" 노릇을 했다. 늦은 오후에는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이 돌아오고 있었고 1기, 2기 의용군으로 지원해서 갔던 사람들도 돌아오고 있었다. 혹시나 전주로 이송되어 갔던 반공혁명단원들이 돌아오지 않을까 하고 그들의 가정을 방문하여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오지 않았고 그 가족들조차 27일 저녁에 어디로 데려 갔는데 소식이 없다면서 애를 태우고 있었다. 9월28일 저녁은 집에서 지내기가 무서워 학교로 갔다. 담요 한 장을 덮고 교실 한구석에 가서 자고
9월29일
아침에 교무실에 나와보니 김창곤 교감선생이 지팡이를 짚고 나와 어제 저녁에 돌아 왔다고 하며 나의 손을 붙잡고 몹시 기뻐하셨다. 교감선생님도 의용군으로 쌀1말 짊어지고 공덕면까지 끌려갔다가 도망하여 돌아왔다. 만경의 적색분자들은 모두 도피해 버렸고 각 기관은 모두 비었고 유치 당했던 모든 분들의 행방을 몰라 이곳저곳을 알아보았으나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아침식사도 하지 않고 직원들 오기만 기다리다 교감선생과 조용건선생과 나는 각 교실에 부착되어 있는 인공기, 스타린과 김일성사진을 전부 떼어 불살라 버리고 학교를 지키기로 했다. 오전 11시쯤 되었을 때 무장한 군인 두사람이 M1소총을 가지고 다니며 꽝꽝 공포를 쏘고 다녔다. 그중 한 군인은 나와 국민학교 동창인 이보국 친구로서 국민학교 졸업과 동시에 경비대로 입대하여 군 생활 하다가 6.25사변으로 후퇴도중 낙오되어 부대로 찾아가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무기는 감추고 숨어 있다가 공산당들에게 발각되어 그 동안 많은 고통을 당하다가 수복이 되자 저일 먼저 총을 들고 나와 치안을 담당케 되었다고 한다. 지난 7월20일부터 9월28일 까지 72일간의 긴 악몽은 깨어났으나 9월26일과 27일에 붙잡아 간 사람들을 찾으려고 만경동산을 짝을 지어 골짜기마다 찾아보기도 하고 주변의 야산들을 둘러보았으나 알 수가 없었다. 9월29일 오후에야 공산당들이 물러간 것을 안 주민들은 거리로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만경에서는 임시치안위원회가 조직되어 치안을 하게 되었고 그 동안 억압에 눌려 마음대로 울릴 수 없었던 교회 종도 수복의 기쁨과 함께 30분간 계속 울렸다. 몇 주만에 들려오는 종소리인지라 나는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무라도 붙잡고 춤이라도 추고 싶은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오전에 학교 각 교실의 인공 잔해를 전부 정리하고 몇 분 선생들께 맡긴 후 오후에는 목사님 장로님 집사님들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 동산으로 주변 야산으로 몇몇 학생들을 데리고 돌아다니다 보니 해가 저물었다.
9월30일
이날도 살아 남은 사람은 의용군으로 갔던 혹은 형무소로 갔던 간에 고향집으로 찾아오는데 다른 수 십명의 끌려간 사람들의 행방을 알 수 없으니 그 가족들과 더불어 마음을 조리고 있었다. 오후에야 비로소 이들의 행방을 찾을 수 있었다. 만경지서(분주소) 내에는 우물이 두 곳이 있었는데 한곳은 위까지 흙으로 덮여 있었고 한곳은 우물 주변 세멘트 바닥이 흙으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지서 사무실 출입문 앞에는 큰 방공호가 있었는데 무너져 있었다. 이것을 이상히 여겼던 사람들이 우물 바닥 흙을 파 헤쳐 놓고 보니 핏자국이 있어 사람을 죽여 우물 속에 넣었구나 직감하고 긴 장대(대나무)로 우물 속을 저어보니 학생의 시체가 걸려 나오고 또 부인의 시체가 보인다. 수 십 여명의 사람을 죽여서 우물 속에 넣어 한쪽은 완전히 흙으로 메워 버렸고 한쪽은 속이 깊으니 메우지는 못하고 피 흘린 세멘트 바닥만 흙으로 덮어 버렸던 것이다. 날이 저물어 더 이상 작업을 할 수 없어 내일 우물 속의 시체를 꺼내기로 하였다.
10월1일
이날은 주일이었다. 아침을 먹고 치안위원회로 가보았더니 소화기(당시 물 펌프 소화기)를 대놓고 물을 품어 내고 있었다. 한쪽 우물은 흙을 퍼내고 있었다. 우물 속의 시체가 보이기 시작하여 교회에 와서 곽유근 장로님의 인도로 예배를 드린 후 다시 시체 발굴장으로 가보니 한쪽 우물에는 여자들만 들어 있고 또 다른 한쪽, 흙으로 완전히 덮인 우물에는 남자들만 들어 있었다. 그리고 방공호에서는 여자들 시체만 파내었는데 어린아이를 업은 부인들도 여러 명 있었다. 목사님, 장로님, 집사님 그리고 교인들의 시체도 2개소의 우물과 방공호에서 꺼내어 졌다. 특히 강성진 장로님은 두 손을 뒤로하고 굵은 철사 줄로 엄지손가락을 묶인 체 우물 속에 넣어져 있었다. 이곳에서 죽은 사람 모두가 쇠망치로 뒷머리를 세게 내리쳐 숨지게 했거나, 竹槍(죽창)으로 옆구리가 찔려 있었다. 김종한 목사님 강성진 장로님 강춘길 집사의 시신은 10월2일 출상하기로 하고 집으로 모셨고 다른 교인들은 그곳에서 바로 장지로 향하였다. 교회에서는 주일 오후 남녀 청년들과 여 집사들이 모여 영결예배 드릴 준비에 분주했다. 만경의 곳곳에서는 울음소리로 가득 찼고 공산당의 만행에 치를 떨고 있었다.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이처럼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하고 분노했다. 이런 참사는 이북에서 넘어온 인민군이나 공산당들이 한 짓이 아니고 만경지역내에 살고 있는 공산당들이 자기들과 이전부터 감정이 좋지 않았던 사람들 반공혁명단원들의 가족들, 그리고 교인들을 물불을 가리지 않고 죽였다. 여하튼 26일과 27일에 붙들려 간 사람은 전부 학살을 당했다. 수년 후에야 학살한 주모자를 체포하여 현장검증을 했고 사실을 밝혔다는데 그때 나는 군복무 중에 있었기에 확실한 내용은 알 수 없었고 휴가 차 집에 와 지서에 들렸더니 지서장으로부터 현장 검증 때 촬영한 사진을 보여 주었다. 주모자는 곽공훈, 곽남규, 노동당 위원장이었던 최모 라고 하는 사람들이고 수 십명의 하수인으로 하여금 그 큰 사건을 저질렀던 것이다.
10월2일
아침해는 더욱 맑고 좋은 날이었다. 아침을 먹고 강집사님댁 동해병원으로 가서 관에 덮을 십자가기와 태극기를 그렸다. 강장로님과 강집사님은 목관을 사용하여 입관을 하였고 김목사님은 원래 비대하셨던 몸집이었으나 몇 일 동안 우물 물 속에 잠겨 있다보니 더욱 부풀어 목관을 사용치 못하고 대나무 발을 엮어서 죽관으로 대체했다. 오후3시경 입관을 모두마치고 관을 지화로 裝飾(장식)하고 교회당으로 운구 했다. 교회에서 영결예배를 이병렬 목사님 집례로 드리고 교인들과 조문객들의 애탄 속에 장지로 운구 했다. 장지는 장산리 용지동 소나무가 우거진 국유림 남향으로 자리를 잡았다. 교인들은 목사님을 메고 갔고 다른 일반 조문객들이 강장로님과 강집사님을 메고 약 3Km 정도 되는 장지까지 찬송가 149장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을 부르며 향했다. 한걸음 한걸음 교회당에서 멀어질 때 교인들은 대성통곡을 하였다. 이 양떼들을 두고 영영 가시는지요. 이 양떼들은 어떻게 하라는 것 인지요. 믿는 성도들은 죽으면 천국에 갈 것을 믿고 있지만 막상 사랑하는 목사님과 장로님, 집사님을 한꺼번에 떠나 보내게 되니 어찌나 애통 스럽고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려 참을 수가 없었다. 인간육신의 최종도착지는 죽음인데 무엇 때문에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남과 싸우고 시기하고 미워하며 살아야 하는가 선히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이런 악행을 자꾸 왜 되풀이하는가.
21세의 젊은 나이의 나였지만 죽음이 두렵지는 않으나 비참하고 애처러움으로 마음이 아프게 느껴졌다. 장지에 도착하여 간단하게 하관예배를 드리고 매장했다. 이곳에 함께 누워 계시는 목사님,장로님, 집사님은 이 세상에서 달려갈 길을 다갔으니 하늘에서 상 받으심이 크리라 믿으며 "주님 이분들의 영혼을 위로해 주십시오"라고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목사님께서 평소에 애창하시던 찬송가 73장, 별곡으로 부르던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이 찬송을 부르며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로서 만경지서 내에서 사망한 수는 50여명에 달하였고 만경면 장흥리에서도 수 십 명에 달하여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을 전국에 전세계에 폭로키 위한 자료를 간직했어야 함에도 그 당시는 사진기도 없어서 남겨 놓지 못했음을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만경지서 내에서만 순교자가 10명이나 되었다. 이제 만경의 참상은 모두 장례를 마침으로 일단락 되었으나 전주로 이송된 친구들의 소식이 궁금했는데 그의 부모들이
10월3일에
전주 형무소로 찾아가 뒷산에서 시체들을 찾아 화장하여 유골을 안고 돌아 왔다. 곽병일 자형만 그곳에 매장했다고 하며 말없이 돌아온 반공혁명단원들의 유골은 만경면민장으로 영결식을 하고 교회청년 4사람 즉 최정렬군, 곽옥정양, 송은숙양, 류금식양은 교회당으로 다시 옮겨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목사님 안장된 산에 장사를 지냈다. 만경교회에서만 순교인이 15명으로 교회에 너무나도 큰상처가 되었기에 교인전체가 실의에 빠져 어떻게 재건해 가야할 지 앞길이 막연했다. 교회에서 예배인도는 곽유근장로님과 정화선집사님 하창조집사님 그리고 김방서집사 4사람이 맡아 인도하기로 했으나 곽유근 장로님은 자녀들이 공산당원 노릇하다가 수복과 동시에 두 아들 들은 행방불명이 되었기에 본인 스스로 근신하시겠다고 예배인도를 하지 않으셨으며 얼마 후에 김제노회로부터 장로자격정지 처분을 받으셨다. 하창조집사님은 나이 많고 학식이 부족해서 도저히 예배인도 할 수 없다고 끝내 사양하시어 결국 정화선 집사님과 내가 맡아 예배인도 하기로 했다. 김제노회 서구지역 시찰장이신 이병렬목사님께서 이번 순교하신 분의 합동 추모 예배를 드리자고 만경교회와 협의하시어 1950년 11월2일로 결정하고 인접교회에 전부 통지하였다. 국민학교는
10월4일부터
개학했는데 1,300여명의 학생들이 줄어서 1,000여명밖에 안되었고 교직원들도 8명이나 공산분자들이었기에 행방불명 또는 자퇴하고 말았다. 11월2일은 만경국교 운동장에서 평양시 점령 경축 축구대회가 있어 휴무 일로 정하였기에 나는 바로 교회로 가서 추모예배를 준비했으며 오전 10시에 추모예배가 시작되었다. 유족들을 비롯한 전 교인들은 눈물로 예배가 진행되었고 순서 중에는 유족들의 기념 싸인을 하기로 했는데 각 유족 대표들이 나와서 백지에 쓰고 싶은 말을 간단히 기록하도록 하였다. 나는 곽옥정 모친의 대필로 '오스카 와일드'가 말한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는 최후가 비극이라야 한다"라는 문구를 기록했고 송해섭 선생은 어머니를 비롯하여 3식구를 잃은 상처가 너무나도 크고 애처러워 "참 이럴 수가 있을까?"하는 뜻에서 "참"자 만을 기록했다. 유족대표들이 다 나와서 나름대로 당시의 쓰라린 고통을 짧지만 다 기록하였다. 끝으로 송해섭 선생의 추모 시 낭독이 있었는데 소개하면
" 순교자의 영에게 드리는 글 "
그대들은 이미 갈곳을 다 가셨는데
이 몸은 외로이 이 자리에 상복을 감고
그대들의 추모의 글을 읊으는고?
오호라 이것이 신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인생살이로다.
유구 만경강 물이 흐르고 싶어 흐르는가?
내 슬퍼하기 싫어도 그대들 추모하는 맘이
내 눈물 절로절로 짜내는 도다
그대들은 영원히 살아 있도다.
성스러운 이 당의 구석구석에
종을 울릴 때마다
계명을 알리는 별 빛 일 때마다
나뭇잎이 서픈서픈 떨어 질 때마다
내 마음에서 그대들이 살아질 때
나는 영원히 자유와 사랑을 흠뻑 쪼이는
그 나라에서 그대들과
기쁨과 반가움에 취하여 어쩔 줄 모르게
온 몸이 녹으리라
허무한 인생살이
이것인줄 알면서 나는 어찌하여
쉽사리 그대들을 못 따르는고
그래도 믿음이 있기에
더욱이 사후에 영생의 희망이 있기에
이 세상은 이 세상뿐이기에
사후의 희망조차 없는 인생의 적막함이여
만남이 있으면 떠남이 있으며
떠남이 있으면 만남이 있으니
낳으면 죽음이 있고
죽으면 천당에 새로 남이 있으리라 만남이 있으리라
영원한 마음의 벗들이여
내 이 세상에서 그대들의 발자취를
더듬더듬 찾아가려노니
눈물인가? 설움인가?
1950년11월2일 들샘 해섭 지음.
이와 같은 애통에 젖은 추모시를 낭독하고 추모예배가 끝나고 나니 교회당은 울음 판이 되었다. 이제부터는 비탄에 젖어 있을 수만 없을 것이며 새로운 각오와 결심을 가지고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고 가정을 일으키어 앞서 가신 분들의 뜻을 받들어 살다가 하늘에서 만날 것을 소망하면서 어두웠던 흑암의 세계를 벗어나 광명의 날을 맞이하는 만경교회와 만경사회에 자손만대까지 부흥과 발전이 있기를 기도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1950년도 공산치하 시 주일예배참석인원 및 설교제목*
*순교자 현황*
첫댓글 전에도 읽었고...다시 또 읽습니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그날의 기록, 특별히 우리들 가까이서 뵈었던 장로님의 글이라 더 와닿습니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편안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