閑中自慶(한중자경)
한가함을 즐기며
충지(冲止, 1226~1293)
날마다 산을 쳐다봐도 늘 더 보고 싶고
언제나 물소리 듣건마는 지겹지 않아
귀와 눈 모두 다 절로 맑고 시원하니
그 산과 물속에서 평온을 가꾸기 좋더라
日日看山看不足(일일간산간부족)
時時聽水聽無厭(시시청수청무염)
自然耳目皆淸快(자연이목개청쾌)
聲色中間好養恬(성색중간호양념)
깊은 산속에 들어가 휴가를 즐기면 나름 운치가 있겠지만, 그곳에서 단 며칠을
보내고 나면 심심하고 갑갑해지는 것이 도시인의 속성이다. 하지만 자연과 더
불어 평안하고 고요한 마음을 가꾸는 구도자(求道者)에게는 날마다 보는 산이
지만 더 보고 싶다. 쉼 없이 들리는 개울물 소리가 아무리 들어도 지겹지 않다.
자연이 그의 눈과 귀를 맑고 상쾌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 구도자가 마음을 고
요하고 편안하게 가꾸는 데 산과 물이 큰 역할을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구도자의 마음 자체다. 시꾸럽고 번잡한 도시에서도 마음먹기에 따라 염일(恬
逸)을 즐길 수 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모든 일은 마음먹기 나름이다.
[작가소개]
충지[冲止]
시대 : 고려
출생 – 사망 : 1226년(고종 13) ~ 1293년(충렬왕 19)
성격 : 승려
출신지 : 전라남도 장흥
성별 : 남
대표관직(경력) : 삼중대사, 대선사, 송광사 제6세 국사
<정의>
고려후기 삼중대사, 대선사, 수선사 제6세 국사 등을 역임한 승려.
<개설>
속명은 위원개(魏元凱). 자호는 복암노인(宓庵老人). 첫 법명은 법환(法桓), 뒤의 법명은 충지(冲止). 전라남도 장흥 출신. 아버지는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郎)소(紹)이며, 어머니는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郎)송자옥(宋子沃)의 딸이다. 원나라 세조의 흠모를 받았으며, 원오(圓悟)의 법을 이어 수선사(修禪社) 제6세 국사가 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9세에 경서(經書)와 자사(子史)를 외웠으며, 17세에 사원시(司院試)를 마쳤다. 19세에는 춘위(春闈)에 나아가 장원을 하고, 그 뒤 영가서기(永嘉書記)에 부임하여, 사신으로 일본에서 활약하였으며, 벼슬이 금직옥당(禁直玉堂)에 이르렀지만, 29세에 선원사(禪源社)의 원오국사 문하에서 승려가 되었다.
비구계를 받은 후, 남쪽의 여러 지방을 순력하면서 수행하다가, 1266년(원종 7)원오국사의 강권으로, 경상남도 김해의 감로사(甘露寺) 주지가 되었다. 1269년에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고, 다시 3년 후에는 감로사를 떠나 순천의 수선사로 옮겼다. 이때까지 그는 교(敎)에 더 치중하였다.
수선사에 온 다음 해인, 1274년 원나라 세조는 탐라에 총관부(總管府)를 두고 우리나라의 전지공안(田地公案)과 별고노비천적(別庫奴婢賤籍)을 관장하게 하며 수선사에서 군량미 명목의 전세(田稅)를 거두었다. 그는 세조에게 「상대원황제표(上大元皇帝表)」를 올려 어려운 사원경제를 알리고, 빼앗겼던 전답(田畓)을 되돌려 받았다.
세조가 그를 흠모하여 청하자, 1275년(충렬왕 1) 개경을 향하다가 충청도 웅천(熊川)에 이르러 병을 이유로 상경할 수 없다고 글을 올리고 청주(淸州)로 갔다. 청주의 화정사(華井寺)에 머무르던 중, 조정에서 다시 불러 원경(元京)에 도착하자, 세조는 빈주(賓主)와 스승의 예로 대하였으며, 귀국한 다음 해 충렬왕은 대선사의 승계를 내렸다.
그 후, 청주의 현암사(玄巖寺), 청주 진각사(眞覺寺), 천호산 개태사(開泰寺) 등지에 머물렀다. 1283년 11월에는 원오국사가 선원사에서 수선(修繕)하여 수선사로 옮기던 거란본대장경을 도중에서 맞이하여 나누어지고 왔고, 「단본대장경경찬소(丹本大藏經慶讚疏)」와 시를 지었다.
1284년 상무주암(上無住庵)으로 옮겼고, 1286년 2월에 원오국사가 왕에게 수선사의 사주(社主)로 그를 추천하고 입적하자, 그 해 6월에 수선사의 제6세가 되었다. 1271년 여름 합단적(哈丹賊)의 난을 피하여 고흥군 불대사(佛臺寺)에 잠깐 머문 것을 제외하고 수선사에서 교화 생활에만 몰두하며 수선사의 전통을 계승하는 데 힘썼다.
1293년 1월 10일 문인들에게 설법과 게송을 남긴 뒤 법랍 39세로 입적하였다.
<학문세계와 사상>
불교의 삼장(三藏)과 사림(詞林)에 이해가 깊었고, 문장과 시로 유림의 추앙을 받았다. 그는 수선사 제1세였던 지눌의 순수 선(禪) 시대와는 달리 유학사상과 상교(相交)하는 선풍(禪風)을 풍기고 있다. 그래서 충지는 유사(儒士)들처럼 천명을 믿고 운명에 안주하는 유·선(儒禪) 조화의 사상 조류를 보였고, 상제상천(上帝上天)의 신앙을 통하여 유교와 도교를 불교 속에 수용하기도 하였다.
그의 선풍은 무념무사(無念無事)를 으뜸으로 삼았고, 지관(止觀)의 수행문 중 지(止)를 중시하였으며,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주장하여 지눌의 종풍(宗風)을 계승하였다. 저서로는 문집인 『원감국사집(圓鑑國師集)』 1권이 남아 있으며, 『동문선(東文選)』에도 시와 글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충렬왕은 원감국사(圓鑑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보명(寶明)이라는 탑명(塔名)을 내렸다. 부도는 송광사남암(南庵)의 옛터 북쪽에 있으며, 입적 후 22년 만인 1314년(충숙왕 1)에 문인(門人) 정안(靜眼), 진적(眞寂), 신열(神悅) 등이 원감국사비를 세웠으나 그 뒤 병화(兵火)로 파괴되었고, 약 200년 전에 시안(時安), 찬현(贊玄) 등에 의하여 그 자리에 중건되었다.
<참고문헌>
『원감국사집(圓鑑國師集)』
『한국불교사상사』(숭산박길진박사화갑기념사업회, 원불교사상연구원, 1975)
『조선불교통사』(이능화, 신문관, 1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