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마태오 21,33-43.45-46
십일조를 전혀 힘들이지 않고 바치는 법
오늘 복음은 ‘못된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아담과 하와가 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는지 설명해줍니다.
바로 선악과를 바치지 않아서입니다.
바로 소출의 일부를 주인에게 바치지 않아서입니다.
그것을 바치게 되지 않은 이유는 자신들이 주님의 덕분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바로 자신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으신 주인님을 살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소작인들은 이렇게 결의합니다.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자신들이 주인님이 되려고 하니 주인님이 죽게 됩니다.
내가 옳다고 조금이라도 믿는다면 진리로 오시는 분을 죽이는 것이 됩니다.
내 안에 능력이 있었다고 믿는다면 전능하신 분을
죽이는 게 됩니다.
내 안에 생명력이 존재한다고 믿으면 성체로 오시는 참 생명이신 분을 죽게 만듭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스스로 존재할 수도 없고 스스로 살아갈 수도 없고 스스로 옳은 길을 선택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내가 무언가 할 수 있다고 말할 때 모든 것을 해 주시는 분을 죽여 버리는 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 앞에서 못된 소작인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겸손함을 키우고 감사함을 키워 모든 게 주님 덕분임을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정말 부모가 되어보기 전에는 절대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없다고 하듯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인님의 마음을 알려면 주인님이 되어보는 수밖에 없고 하느님의 마음을 알려면 하느님이 되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이 된다는 말이 교만처럼 여겨지지만,
이 길이 겸손해지는 유일한 길입니다.
김희아 씨는 모반을 가지고 태어나서 부모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자기를 버린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어떻게 보지도 못한, 그리고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녀가 자기 딸에게서 자신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딸을 키우며 그렇게 태어나서 키울 수 없는 어머니의 마음을 느낀 것입니다.
어머니가 되어보지 않고서는 어머니의 마음을 절대 알 수 없습니다.
요즘 사순이라 구역 판공을 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부족하여 두세 구역씩 묶어서 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한 구역에 두세 분씩이라도 냉담하시던 분들이 고해성사를 보러 오십니다.
냉담을 풀기에 성당까지는 너무 멀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소공동체 봉사자들, 특별히 반장님들의 역할이 큽니다.
그분들의 설득이 아니면 냉담하시던 분들은 사제에게 고해성사하고 면담까지 하는 용기를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소공 봉사자분들도 다 느끼시겠지만, 저는 특별히 ‘강생의 신비’를 느낍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재래식 화장실에 떨어진 채변봉투를 주워주시기 위해 그 냄새나고 더러운
곳까지 손을 뻗쳐 그것을 건져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죽음이었습니다.
그 덕분으로 저는 학교에서 혼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가지 않아도 되는 곳까지 굳이 가게 되는 것도 하나의 강생의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 속으로 내려오시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겠지만, 어쨌거나 신자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하나의 낮춤이고 아버지가 되어감입니다.
그러며 저를 위해 낮아지신 아버지와 하느님께 대한 감사가 더 크게 다가옵니다.
아버지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함으로써 그분들에게 고마움을 갖게 되는 게 교만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못된 소작인들이 정말 못된 것은 그들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것을 맡기며 살게 한 일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받았으면 베풀어야 합니다.
베풀다 보면 그렇게 베풀었는데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주인을 외면하는 잘못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선교합시다.
선교는 하느님이 되는 길입니다.
새로운 하느님 자녀를 탄생시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하며 고생을 할 때만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고통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앞에서 십일조를 바치는데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1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마태오 21,33-43.45-46
우리는 잠시 하느님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농입니다!
소작(小作)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지주로부터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수확의 일정량을 바치며 생계를 이어가는 형태의 농사입니다.
일년내내 죽을 고생만 하고 손에 쥐는 것은 쥐꼬리만큼인 소작농들의 애환은 오랜 역사 소설의 주된 테마였습니다.
돈보스코를 연구하다보니 그분의 부모님 역시 소작농이었습니다.
구호대상인 극빈자 계급은 아니었지만, 아버지 프란치스코 보스코와 맘마 마르가리타는 남의 땅을 빌려 하루 온종일 뙤약볕에서 죽기살기로 일만 하던 소작농이었습니다.
부양해야 할 식구는 많은데, 농업이 기계화가 되기 훨씬 전이지, 돈보스코의 부모님들은 그야말로 하루 온종일 뼈빠지게 일만 하셨습니다.
돈보스코께서 유명인사가 된 이후, 알베르 뒤 보이라는 전기 작가가 근사하게 돈보스코 전기를 집필했었는데, 최종적으로 돈보스코에게 검열을 부탁했습니다.
돈보스코가 제일 먼저 수정한 대목이 있습니다.
“돈보스코의 가족은 꽤 넉넉한 농부였다.”라는 구절을 확인한 돈보스코는 빨간 펜으로 찍찍 긋고,
이렇게 고쳤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농부였다.”
그만큼 소작농들의 삶은 고달팠고 힘겨웠습니다.
사실 소작인들 입장에서 지주들이 땅을 빌려준 것,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소작인들 가운데서 악한 소작인들이 있습니다.
대풍년, 다시 말해서 엄청난 소출을 거두었으면서도, 주인에게는 올해 농사가 흉년이라며 쥐꼬리만큼의 소출만을 보내는 악덕 소작인도 있습니다.
빨리 소출을 보내주라고 몇 번을 이야기해도, 알았다 해놓고는, 죽어도 안 보내는 진상 소작인도 있습니다.
더 지독한 소작인이 있습니다.
도저히 기다릴 수 없어서 지주는 자신의 종을 보내기도 하고, 나중에는 아들까지 소출을 받아오라고 보냈습니다.
그런데 악한 소작인들은 그 아들마저 매질하고 죽인 후 포도밭 밖으로 던져버린 것입니다.
그 악한 소작인들은 바로 유다인들이요, 동시에 우리들이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우리 모두 소작인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단 한번뿐인 인생을 잘 좀 가꾸어보라고, 풍성한 결실을 거두어 보라고 임대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임대 기간이 결코 영속적이지 않고, 길어야 90년 100년입니다.
악한 소작인들처럼 분수 넘치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주인 행세를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언제나 나는 잠시 하느님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라는 사실을 잊지 알아야겠습니다.
종이면서 주인인 양 큰 소리 뻥뻥 치고 행세하다가 큰코 다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악한 소작농처럼 처신하다가는 하느님의 강력한 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늘 겸손하게, 늘 신중하게, 늘 종이나 소작농의 마음으로 그렇게 하루 하루 살아갈 일입니다.
나를 내 삶의 주인이요 주인공으로 여기고, 가슴을 딱 펴고 당당하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태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주인은 하느님이심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2주간 금요일 강론>
(2024. 3. 1. 금)(마태 21,33-43.45-46)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2ㄴ-43).”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는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이다.” 라고 판단해서 마치 집 짓는 이들이 쓸모없는 돌을 내버리듯이 예수님을 처형했습니다.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인류를 구원하는 구세주이신 분입니다.
부활은 바로 그것을 증명하는 특별하고 최종적인 사건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순절 설교 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36).”
이 말은, “여러분은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생각해서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여러분은 하느님의 메시아이시며 주님이신 분을 못 박은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한 반역죄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사도 2,32).”
부활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자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베드로 사도의 증언은 예수님 부활에 대한 증언이기도 하고, 동시에 살인자들의 죄에 대한 증언이기도 합니다.
이 증언은,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라는 43절의 예수님 말씀에 연결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는 것’은 메시아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인 죄에 대한 처벌입니다.
그렇지만 확정된 일을 예언하신 말씀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으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믿으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여기서 ‘빼앗다.’ 라는 말은,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는다는 뜻이 아니라, 차지할 권한을 박탈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데, 그렇게 살지 않아서 ‘들어갈 수 있었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것, 그것은 그 나라를 빼앗기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실제로는 유대인들이 빼앗긴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잃은 것입니다.>
여기서 “그 소출을 내는 민족”은 그리스도교를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경고 말씀을 무시했고, 결국 그들이 누리고 있었던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특별한 은총은 그리스도교에게로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 속해 있다고 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하느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면, 아마 그대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함께 준엄하심도 생각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떨어져 나간 자들에게는 준엄하시지만 그대에게는 인자하십니다.
오직 그분의 인자하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잘릴 것입니다(로마 11,21-22).”
우리는 유대인들이 은총을 잃은 일을 교훈으로 삼아서, 자만심을 버리고 끝까지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 ‘소작인들’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의 신앙생활 태도를 꾸짖기 위해서 사용된 말입니다.
모든 신앙인은 하느님의 소작인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로마 8,14.16-17ㄷ).”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소작인처럼 사랑 없이,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살았습니다.
남의 밭에서 일하는 소작인처럼 사는 것은, 또는 자유가 없는 종처럼 사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것, 즉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일은 곧 나의 일이고, 아버지의 재산은 내가 물려받을 것이기 때문에 나의 것이기도 합니다.
<충실한 신앙인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상속자로서 상속 재산을 차지하는 일입니다.>
혹시라도 사랑과 기쁨 없이 억지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소작인처럼 사는 것입니다.
미사 참례도 사랑과 기쁨 없이 의무적으로 하고,
기도나 어떤 봉사도 마지못해서 억지로 하고......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강제노동을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강제노동을 하려고 동원된 사람이 아닙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 때문에, 그것을 얻기를 원하니까, ‘스스로 원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