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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0.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묵상글 (8/19. 21:00, 06:10, 16:30. )
1) 저는 아래 몇 분의 글만 공유합니다.
1차 공유하는 묵상글: 고인현, 호명환 신부님.
2차 공유할 묵상글: 05-06시이후 06:10 현재 16:30 현재
< 김찬선 신부님: 06:10 추가. 호명환 신부님: 06:10 추가.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16:30 추가 >
# [슬로우 묵상] 넣어주겠다.(굿뉴스게시판. 260819, 서하 님) (01:30)
2) 정회원님 중 다른 묵상글을 공유하실 분은 오늘 묵상글을 이 뜨락에 게재하여 주시고
지난 묵상글은 “5-1. 소금(나눔) 뜨락 1”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3) 이 묵상글 뜨락은 8월 15일 이후에도 당분간 현재와 같이 운영하며
전체 공지 "H. 260707" 2-1의 가-1), 나)를 실행할 계획입니다.
가-1) 프란치스칸 공동체나 개인 또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존중하는 분으로서 이 카페를 인계받아 운영할 의사가 있으신 분과 협의를 시작하고, 이 공간의 인계, 인수는 합의가 되는 대로 즉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위 사항이 이루어지지 아니할 때는 11월 대림시기부터는 실질적으로 운영을 중단하고, 카페의 여러 자료를 활용하실 분을 감안 당분간 존속시키고, 적당한 때(2027년 상반기 또는 그 이후) 폐쇄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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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영을 넣어 주겠다.>(에제36,23-2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23 “나는 민족들 사이에서 더럽혀진, 곧 너희가 그들 사이에서 더럽힌 내 큰 이름의 거룩함을 드러내겠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너희에게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면, 그제야 그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24 나는 너희를 민족들에게서 데려오고 모든 나라에서 모아다가, 너희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겠다.
25 그리고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의 모든 부정과 모든 우상에게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26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27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지키게 하겠다.
28 그리하여 너희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복음<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마태22,1-14)
1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2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3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5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6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7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8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9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10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12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14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또는, 베르나르도기념일 독서(집회 15,1-6)와 복음(요한 17,20-26)을 봉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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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0.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22,1-14
이 비유의 중심에는 ‘잔치’가 있습니다.
임금은 아들의 혼인 잔치를 위해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차려 둡니다.
하느님의 초대는 이토록 풍성하고 기쁜 ‘잔치’입니다.
그런데 먼저 초대받은 이들은 오지 않습니다.
악해서가 아니라, ‘바빠서’입니다.
“어떤 자는 밭으로,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가 버렸다.”
분주한 일상이 ‘사랑의 잔치’를 밀어낸 것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바로 이 ‘무관심’이 가장 큰 비극이라 합니다.
잔치를 거부한 것은 ‘대단한 악행’이 아니라
‘아랑곳하지 않음’이었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종들을 ‘거리로’ 내보내
‘악한 사람 선한 사람 가리지 않고’ 모두를 불러들입니다.
여기에 복음의 놀라운 너그러움이 있습니다.
자격을 따지지 않고 ‘누구나’ 잔치로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혼인 예복’ 없이 들어왔습니다.
그 시대에 혼인 예복은 주인이 ‘내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예복이 없다는 것은
‘차려진 사랑을 받아 입기를 마다한 것’입니다.
크리소스토모는 이 예복을 ‘사랑(자비)의 삶’이라 풀이합니다.
잔치에 ‘들어오는 것(믿음)’만으로는 부족하고,
‘사랑의 예복(자비의 실천)’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르심은 ‘거저’ 주어지지만,
그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오늘 기리는 성 베르나르도가
바로 이 ‘사랑의 예복’을 평생 노래한 분입니다.
그에게 이 혼인 잔치는
영혼이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사랑의 혼인’이었고,
그 예복은 ‘한도 없이 사랑하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분주한 세상 한가운데에서도
‘사랑이신 그분’과의 잔치를 가장 앞자리에 두었습니다.
평화·인내의 관점에서 보면
평화는 ‘잔치에 앉는 자유’에서 옵니다.
분주함을 핑계로 잔치를 미루지 않고,
멈추어 그분 사랑 안에 ‘쉬는’ 것 ―
그것이 평화의 시작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분주함’을 핑계로 사랑의 잔치를 미루지 않는가?
나는 차려진 ‘사랑의 예복’을 받아 입었는가?
나의 믿음은 ‘자비의 실천’으로 옷 입고 있는가?
나는 좋은 이 나쁜 이 가리지 않고 부르시는 그 너그러움을 닮는가?
주님,
분주함을 멈추고 당신 사랑의 잔치에 앉게 하소서.
차려 주신 ‘사랑의 예복’을 받아 입게 하시고,
베르나르도처럼 ‘한도 없이’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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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0.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평화를 향한 예언자의 꿈!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예언자의 꿈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비록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꿈은 언제나 살아 있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히브리 예언자들
평화를 향한 예언자의 꿈
2026년 8월 19일 수요일
브라이언 맥라렌(Brian McLaren)은 히브리 예언자들이 전쟁과 억압 한가운데서도 평화를 꿈꾸었던 것을 성찰합니다:
성경 속 예언자들은 공동체의 가장 고귀한 희망과 갈망, 그리고 꿈을 지켜내는 수호자의 역할을 맡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해로운 길로 나아갈 때, 그들은 그 행동이 이끌어갈 미래를 보여주며 경고합니다.
가장 중요한 예언서 가운데 하나는 이사야서였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오랜 세월 동안 최소한 세 사람이 이 책을 집필했다고 보지만, 전통적으로는 한 사람의 저작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이사야서의 첫 서른아홉 장은 남유다 왕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백성들 가운데 깊은 영적 타락과 안일함을 목격하였고, 이러한 삶의 태도가 쇠퇴와 패망으로 이어질 것임을 경고하였습니다.
그 패망은 기원전 587년에 바빌로니아인들의 손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침략 이후 많은 생존자들이 바빌론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이사야서 40–55장은 흔히 "제2이사야"라 불리며, 유배된 유다인들에게 주님의 희망을 전하여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들의 왕국을 다시 세울 수 있다는 위로를 주었습니다. 실제로 그 일은 기원전 538년,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지도 아래 시작되었습니다. 그 재건의 시대가 바로 이사야서 56–66장의 "제3이사야"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후대의 독자들에게는 이 세 가지 서로 다른 시대적 배경이 하나로 어우러져, 희망의 풍성한 향연을 빚어냅니다. 그 안에는 오늘날 우리의 상상력까지도 여전히 일깨우는 성서적 이미지들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이사야가 묘사한 그 더 나은 날은 너무도 영감이 커서, 예수님과 초기 제자들은 다른 어떤 저자보다도 이사야서를 인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많은 예언자들도 이 아름다운 희망의 비전에 저마다의 색채를 더했습니다. 에제키엘은 돌 같은 마음이 살과 같은 마음으로 바뀔 것이라 보았고, 말라키는 부모의 마음이 자녀에게, 자녀의 마음이 부모에게 돌아갈 것이라 전했습니다. 요엘은 하느님의 성령께서 모든 인류 위에 부어질 것이라 묘사합니다—젊은이와 노인, 남자와 여자, 유다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말입니다. 아모스는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내려 모든 낮은 곳을 가득 채우는 생생한 광경을 그려냅니다.
예언자들의 시대와 예수님의 탄생 사이의 수세기 동안, 그 예언자의 꿈은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또한 온전히 성취된 적도 없었습니다. 그 희망은 엘리사벳과 즈카르야, 마리아와 요셉, 안나와 시메온 같은 이들 안에 살아 있었고, 심지어 사회의 가장 변두리에 살던 겸손한 목자들 가운데서도 이어졌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모험의 여정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미래를 향한 갈망과 꿈, 희망을 품는 것입니다. 그 희망을 단순히 마음속에 간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의 삶 속에서 행동으로 옮기며, 그 빛 안에서 계속 행위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제 이웃 한 사람에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는 응급실에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차량이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사실 저와 특별히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고, 그때 저는 하루 종일 바쁘고 지쳐 있었던 저녁 시간이었습니다. 병원은 차로 약 20분 거리였지만, 저는 "예"라고 응답하고 갔습니다. 이상하게도 다시 힘이 솟았고, 이웃은 해가 지기 전에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 주님께서 나를 편안한 자리에서 불러내셨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부르심은 물론이고, 제가 기꺼이 "예"라고 응답할 수 있었던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Connie V.
References
Brian D. McLaren, We Make the Road by Walking: A Year-long Quest for Spiritual Formation, Reorientation, and Activation (Jericho Books, 2014), 64–66.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Valentin Walter, untitled (detail), 2019,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흐르는 물이 바위를 끊임없이 깎아내듯, 아모스 예언자가 외친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는 부름이 메아리칩니다. 또한 이사야 예언자가 약속한, 어떤 장애물도 넘어서는 평화의 은총이 함께 울려 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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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0.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8.20 05:42
연중 20주 목요일-2016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계속되는 하늘나라 비유입니다.
이 하늘나라는 종말론적인 하느님 나라일 수도 있고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서 구현해야 할 우리 교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비유에서 <아무나> 불러오라는 말씀에 집중했습니다.
이 표현에 제 기분이 살짝 나쁘기 때문이고, 그리고
기분 나쁜 이유는 제가 그 <아무나>에 해당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같은 내용의 루카 복음에서는 <아무나>란 표현이 없고,
악인과 선인 얘기 대신 가난한 사람 병자 할 것 없이 초대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태오복음이 유대인을 대상으로 쓰였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귀하게 처음 초대받은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그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초대를 개떡같이 여기기에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아무나’에 해당되는 이방인들이 초대받는다는 거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나>의 의미를 올바로 정정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아니라 <모두>의 뜻으로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도 초대한다는 뜻이 아니라
선인 악인 가리지 말고 모두 초대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마태오복음은 아무나 데려오라고 주인이 말하자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데려왔다고 덧붙입니다.
그러므로 그 <아무나>는 선인은 물론 악인까지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마태오복음의 하느님 나라와 교회에 대한 생각입니다.
마태오복음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 말씀 부분에서도 루카복음과 달리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심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도 선인과 악인이 모두 초대된다고 얘기합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가 완전한 자, 선인들만의 공동체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기를 바라기 때문에 실망의 덫에 걸려 교회를 떠나거나
떠나지 않더라도 대단히 분노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교회와 수도공동체는
우리 편에서 보면 완전한 자, 선인들의 공동체가 아닌 죄인들의 공동체이고,
그러기에 하느님 편에서 보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총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당신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 나 죄인이기에 부르심 받았으니까 죄인인 채로 살 거야’
뭐 이런 식으로 얼굴에 철판 깔고 가면 되겠습니까?
이에 대해 루카복음은 이렇게 덧붙이지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그러므로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우리가 꼭 의인일 필요는 없지만
꼭 필요한 것은 회개의 정신과 회개의 의지와 회개의 마음이고,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혼인 잔치의 예복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늘 독서와 화답송이 얘기하듯
부서진 우리의 영,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주님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실 거라고 겸손한 믿음을 자기고,
우리의 돌 같은 마음을 살 같은 마음으로 바꿔주시길 바라며,
정결한 물을 뿌려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해주시길 바라며
우리는 주님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아 가야 할 것입니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새로운 강론을 올리지 못하고
전의 것을 올리게 됨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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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0.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2026.08.20. 05:46
우리는 이렇게 매일, 매 순간 하느님의 크나큰 자비를 입고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당시 잔치 거행은 매우 중대한 사안이었고, 초대를 거절하는 것은 더욱 심각한 일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유다교에서는 혼인 잔치에 참석하는 것이 사회적 의무였습니다. 로마 제국 전역에서도, 높은 사람이 연회를 열면 그 예하 사람들은 반드시 참석해야 했습니다. 초대를 거절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그의 존엄을 고의적으로 모욕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를 보면 아무도 임금의 초대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초대받은 이들이 임금이 보낸 들을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는 잔치를 연 임금의 체면히 완전히 손상되는 상황었습니다. 루카 복음(14:18-20)에서는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핑계를 대며 노골적인 모욕을 숨기지 않고 내뱉기까지 합니다. 체면을 지키기 위해 임금은 다른 손님들을 불러 자리를 채우게 합니다. 이 이야기는 우화나 요정들의 이야기처럼 듣기 좋게 꾸며진 이야기라기보다는 현실을 매우 직설적으로 그려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강렬한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임금이 억지로 참석시킨 손님들 가운데 어떤 사람을 내쫓는 부분에서는 이 이야기가 더욱 강렬해집니다.
물론 임금의 명예는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의 요점은 임금의 체면이 아닙니다. 요점은 앞 장(21장)의 포도원 주인과 소작인들의 비유에서와 같이 포도원을 맡아 잘 가꾸고 좋은 수확을 내도록 부탁을 받은 소작인들과 임금의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처음에 하느님의 초대를 받았던 이들이 그것을 거절하거나 무시했기에, 하느님께서는 이곳 저곳에서 손님들을 모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21:43).
예수님의 말씀에서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이들은 이스라엘 사람들, 유다인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정통 교회의 사람들이라고 하는 우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초대받은 사람들도 우리일 수 있습니다.
이 "우리"에는 세상의 외부인들, 버림받은 이들, 이름 없는 이들, 비유에 따르면 "좋은 이와 나쁜 이" 모두가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존중해 주고자 하는 품위를 지니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순수하게 선한 사람들만 모인 집단이 아닐 뿐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도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성 그레고리오 대교황(540–604)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세의 교회 안에는 선한 이들 없이 악한 이들이 있을 수 없고, 악한 이들 없이 선한 이들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악한 이들을 견디려 하지 않는 이들은 선한 이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 예수님의 혼인 잔치의 비유를 통해 깊이 묵상하며 새겨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많은 허물과 부족함, 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당신 사랑 안으로 초대해 주신다는 것이고, 또 이런 초대를 감사의 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들어온 사람은 이런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초대가 우리의 자격과는 상관없이 주어지는 하느님 사랑의 초대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우리가 잃었던 아들의 비유에서처럼 아버지의 한없는 사랑으로 용서받고 다시, 또다시 계속해서 아버지의 사랑 안에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을 정말 황공해하며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다른 이들의 인격을 존중해 주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임금의 혼인 잔치의 비유를 들려주시는 이유입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의 모든 부정과 모든 우상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에제 36,25).
또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 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 같이 붉어도 양털 같이 되리라.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면 이 땅의 좋은 소출을 먹게 되리라."(이사 1,18-19).
그리고 시편 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해 뜨는 데가 해 지는 데서 먼 것처럼 우리의 허물들을 우리에게서 멀리하신다."(시편 103,12).
사실 우리는 이렇게 매일, 매 순간 이런 하느님의 자비를 입고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어떤 공로나 선업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사랑의 어머니요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라는 점을 우리는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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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0.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3862
260820. 15:12
포르치운쿨라 다시 세상 속을 네 번째 이야기
프란치스코의 삶도 그가 모든 결과를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형제회가 미래에 어떻게 자랄지 알지 못했고, 자신의 작은 선택이 수백 년 뒤에도 사람들에게 복음의 길을 보여 줄 것이라고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오늘 자신에게 주어진 말씀을 살았습니다. 다시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우리는 미래의 모든 것을 보장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해야 할 선을 행하고, 결과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깁니다. 이것이 내적 가난이며 선교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결과를 소유하려 할 때 사람을 조급하게 만들고, 그의 변화 속도를 통제하며, 원하는 열매가 보이지 않으면 관계를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간은 우리의 계획보다 길고, 한 사람의 영혼은 우리의 일정표에 맞추어 자라지 않습니다. 사랑은 기다립니다. 변화가 더디더라도 기다리고, 내가 기대한 응답이 오지 않아도 기다리며, 어둠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성이 아니라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충실함입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길은 우리를 피곤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고통을 오래 듣고, 갈등과 불의의 현장에 머물며, 변화가 보이지 않는 일을 지속하다 보면 마음이 메마르고 지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파견은 언제나 포르치운쿨라로 돌아오는 길을 포함합니다. 세상으로 나가는 것과 기도로 돌아오는 것은 서로 반대가 아닙니다. 기도는 파견의 샘이며, 파견은 기도가 몸을 얻는 자리입니다.
형제들은 길을 떠났다가 다시 작은 성당으로 돌아와 함께 기도하고 빵을 나누며 자신의 실패와 기쁨을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받은 상처를 형제들의 품 안에 내려놓고, 다시 말씀을 들으며 자신이 구원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일하다 지치는 까닭 가운데 하나는 모든 것을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멈추면 모든 일이 무너질 것 같고, 내가 해결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지 못할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그것은 책임감처럼 보이는 교만일 수 있습니다.
세상은 하느님의 것이며, 우리는 그분의 일에 잠시 참여하는 작은 도구입니다. 우리가 쉬어도 하느님께서는 일하시고, 우리의 한계 너머에서도 성령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안식은 사명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주인이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멈추고 기도하며, 형제들과 함께 머물고,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시간은 다시 사랑할 힘을 얻는 은총입니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계속 내어주는 삶은 결국 타인을 향한 분노와 메마름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칸적 자기 비움은 자신을 파괴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사랑받는 존재임을 믿기에 자유롭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받을 줄 아는 가난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형제의 위로를 받고,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힘을 얻으며, 하느님의 침묵 안에 자신을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받지 못하는 사람은 오래 줄 수 없습니다.
기도와 형제성과 사명은 하나의 흐름입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형제성 안에서 그 사랑을 나누며, 세상 속에서 그 사랑이 더 넓게 흘러가게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만난 사람과 피조물의 이야기를 다시 기도 안으로 가져와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이 흐름이 멈추면 영성은 메마릅니다. 기도만 있고 세상으로 나가지 않으면 사랑은 자기만족이 되고, 활동만 있고 기도가 없으면 사명은 자기 의지와 소진으로 변합니다. 형제성 없이 혼자 세상을 구하려 하면 우리는 자신을 중심에 세우고, 공동체를 잃은 영웅주의에 빠집니다.
포르치운쿨라는 이 세 흐름이 하나로 만나는 자리입니다. 말씀을 듣고, 형제와 빵을 나누며, 다시 세상으로 파견되고, 세상에서 돌아와 모든 것을 감사와 찬미로 봉헌하는 집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선종 800주년을 기억하며 다시 세상 속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그의 이름을 내세워 세상에 더 큰 영향력을 갖는 일이 아닙니다. 그가 사랑했던 방식으로 오늘의 상처에 다가가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나병 환자는 누구입니까? 사람들이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고, 사회의 중심에서 밀려나며, 존재 자체로 불편함을 주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가난과 질병, 장애, 나이, 출신, 중독, 실패와 낙인 때문에 공동체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의 무너진 성당은 어디입니까? 신뢰를 잃은 교회, 상처로 갈라진 공동체, 대화가 끊긴 가정, 경쟁과 효율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 탐욕으로 파괴된 땅과 물이 무너져 가는 하느님의 집이 아닙니까? 오늘의 술탄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적으로 규정하고 만나기를 거부하는 사람,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인간의 얼굴을 지워 버린 사람, 서로의 언어가 달라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포기한 사람이 오늘 우리가 넘어가야 할 경계 너머에 있지 않습니까?
프란치스코를 기념한다는 것은 오늘의 나병 환자에게 다가가고, 오늘의 무너진 성당에 돌 하나를 얹으며, 오늘의 적대의 경계를 넘어 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그가 살았던 가난을 찬양하면서 우리의 안전과 소유를 움켜쥐고, 그의 평화를 노래하면서 관계 안에서는 날카로운 말을 사용하며, 그의 피조물 찬가를 암송하면서 자연을 함부로 소비한다면 우리는 프란치스코의 이름은 기억하지만 그의 길은 잃어버린 것입니다.
선종 800주년의 참된 기념은 행사의 크기에 있지 않고 회심의 깊이에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닫힌 문이 열렸는지, 얼마나 화려하게 프란치스코를 말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구체적으로 가난한 이와 피조물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다시 세상 속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프란치스칸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작음과 가난과 평화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잊혀도 관계 안에 선이 흐르고, 우리가 주목받지 않아도 한 사람이 살아난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화려한 성공을 요구하지만 포르치운쿨라는 작은 몫에 충실하라고 말합니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작은 몫, 아픈 형제를 병원에 데려가는 작은 몫, 홀로 식사하는 이의 곁에 앉는 작은 몫,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는 작은 몫, 오래된 갈등 속에서 먼저 사과하는 작은 몫, 누구도 맡으려 하지 않는 일을 조용히 하는 작은 몫입니다. 이 작은 몫들은 세상의 눈에 보잘것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바쳐질 때 하느님 나라의 씨앗이 됩니다. 작은 포르치운쿨라에서 시작된 복음의 불길이 세상으로 번져 갔듯, 한 사람의 진실한 회심은 수많은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큰일을 해야만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나에게 맡겨진 작은 사랑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늦게 피는 꽃이 오래가듯, 눈에 띄지 않는 충실함이 시간이 지나 더 깊은 열매를 맺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변화시켰는지보다 얼마나 충실히 사랑했는지를 물으실 것입니다. 얼마나 큰 업적을 세웠는지보다 한 사람의 존엄을 지키기 위하여 얼마나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었는지를 바라보실 것입니다.
세상 속으로 파견되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나는 사람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그들을 통하여 나의 선함을 증명하려 하는가. 나는 정의를 위하여 일하는가, 아니면 나와 다른 사람을 정죄함으로써 우월감을 얻는가. 나는 가난한 이의 목소리를 듣는가, 아니면 그들의 이름을 빌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가. 선한 일 안에도 거짓 자아가 숨어들 수 있습니다. 봉사하면서 인정받고 싶고, 정의를 말하면서 상대방을 굴복시키고 싶으며, 평화를 이야기하면서 내 방식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명에는 끊임없는 자기 인식과 회심이 필요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는가만큼 어떤 마음으로 하는가를 살펴야 하고, 일이 잘되었는가만큼 관계 안에서 누가 상처받았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의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랑과 자유와 자비를 통하여 이루어져야 하며, 사람을 수단으로 사용하거나 두려움과 압박으로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목적이 선하다는 이유로 복음적이지 않은 방법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과정 안에서도 복음이어야 합니다. 정의를 이루는 과정에서 사람의 존엄이 지켜져야 하고, 공동체의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약한 이가 희생되지 않아야 하며, 선교의 열매를 위하여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과정의 선이 결과의 선으로 흘러갈 때, 우리의 사명은 하느님의 나라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선한 결과를 위하여 사람을 조종하고, 형제를 소진시키며, 피조물을 파괴한다면 그 결과는 복음의 열매일 수 없습니다.
다시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길은 우리에게 느림을 가르칩니다. 세상의 문제는 빠른 해결을 요구하지만 사람의 마음과 관계의 회복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상처받은 이에게 빨리 회복하라고 재촉하고, 가난한 공동체에 우리가 정한 속도로 변화하라고 요구하면 우리는 다시 그들을 통제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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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치운쿨라 1. 다시 처음으로 ( 2026.08.02 )
http://www.ofmkorea.org/ofmkfb/583130
포르치운 쿨라 2. 다시 복음으로 ( 2026.08.03 )
http://www.ofmkorea.org/ofmkfb/583181
포르치운쿨라 3. 관계 속에 흐르는 선의 강물처럼 ( 2026.08.04 )
http://www.ofmkorea.org/ofmkfb/583256
포르치운쿨라 4. 다시 형제성으로 첫 번째 이야기 ( 2026.08.07 )
http://www.ofmkorea.org/ofmkfb/583330
포르치운쿨라 다시 형제성으로 두 번째 이야기 ( 2026.08.09 )
http://www.ofmkorea.org/ofmkfb/583443
포르치운쿨라 다시 형제성으로 세 번째 이야기 ( 2026.08.10 )
http://www.ofmkorea.org/ofmkfb/583479
포르치운쿨라 다시 형제성으로 네 번째 이야기 ( 2026.08.12 )
http://www.ofmkorea.org/ofmkfb/583545
포르치운쿨라 다시 형제성으로 다섯 번째 이야기 ( 2026.08.12 )
http://www.ofmkorea.org/ofmkfb/583568
포르치운쿨라 다시 형제성으로 여섯 번째 이야기 마지막 ( 2026.08.15 )
http://www.ofmkorea.org/ofmkfb/583669
포르치운쿨라 다시 세상 속으로 첫 번째 이야기 ( 2026. 08. 16 )
http://www.ofmkorea.org/ofmkfb/583688
포르치운쿨라 다시 세상 속으로 두 번째 이야기 ( 2026. 08. 17 )
http://www.ofmkorea.org/ofmkfb/583751
포르치운쿨라 다시 세상 속으로 세 번째 이야기 ( 2026. 08. 19 )
http://www.ofmkorea.org/ofmkfb/583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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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 묵상] 넣어주겠다_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1&id=2136172&menu=4770
서하. 2026-08-19. No. 191305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독서 에제키엘 36,23-28 / 복음 마태오.22,1-14
넣어주겠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에제키엘 36,26
하느님은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고쳐라"가 아니라 "내가 주겠다"입니다. 돌 같은 마음을 살 같은 마음으로 바꾸는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복음과 독서 말씀이 나에게 건네는 메시지는 이러했습니다.
첫째, 불의는 마음을 돌처럼 만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우리는 흔히 "불의한 시대"를 바깥의 문제로만 생각합니다. 저 사람들의 탐욕, 저 구조의 부패, 저 시스템의 잘못. 그런데 에제키엘의 메시지는 먼저 우리 자신을 향합니다. 불의한 시대를 오래 견디다 보면, 분노하고 냉소하고 무감각해지면서 우리 마음도 함께 굳어갑니다. 정의를 외치던 사람이 어느새 자신도 돌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게 되는 일은 드물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그 사실을 먼저 직시하게 합니다.
둘째, 그럼에도 절망이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것.
가장 절망적인 시대에 주어진 약속이었다는 사실이 오늘도 유효합니다. 지금 이 시대가 아무리 불의해 보여도, 그것이 하느님의 개입을 막는 조건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시대일수록 이 말씀은 더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이 시대는 가망이 없다"는 체념이야말로 돌 같은 마음의 다른 얼굴일지 모릅니다.
셋째, 변화는 언제나 안에서 시작된다는 것.
지금 우리는 구조를 바꾸고 제도를 개혁하는 일에 익숙합니다. 그것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과 베르나르도의 삶이 함께 가르치는 것은, 바깥을 바꾸려는 이의 마음이 먼저 바뀌지 않으면 그 개혁조차 또 다른 형태의 완고함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적 인간이 먼저 채워지지 않으면 밖으로 흘러나갈 것이 없다"는 그의 말은, 사회 참여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그 참여의 뿌리가 어디서 와야 하는지를 가리킵니다.
넷째, 그것은 청하는 기도로만 시작된다는 것.
결국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실천적인 메시지는, 불의한 시대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첫 번째 일이 분석이나 비판이 아니라 "넣어 주십시오"라는 청원이라는 것입니다. 이 청원은 무력한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스스로 마음을 고칠 수 없다는 정직한 인정에서 나오는, 가장 근본적인 저항의 시작입니다.
오늘 복음의 혼인 잔치에서 초대는 모두에게 열려 있었지만, 예복을 입지 않은 이는 쫓겨났습니다. 초대에 응한 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이 예복이 곧 새 마음입니다. 은총은 값없이 주어지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입는 일은 우리의 몫으로 남습니다.
그래서 청합니다. 넣어 주십시오.
이 시대에 굳어 가는 제 마음에도,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십시오.
성 베르나르도 역시 자신의 시대의 불의 앞에서, 세상을 향한 비판이 아니라 먼저 자기 마음을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데서 삶을 시작했습니다.
이 청원은 체념이 아닙니다. 스스로는 이 마음을 고칠 수 없다는 정직한 인정에서 시작되는, 가장 근본적인 저항입니다.
주님, 이 시대의 불의 앞에서 제 마음도 함께 굳어 갑니다.
스스로 고치려 애쓰지 않고 다만 청합니다.
살로 된 마음을,
당신의 영을,
이 자리에 넣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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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맨 밑의 “서하”님처럼 복음과 독서 말씀이 나에게 건네는 메시지는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이 곳 댓글에 부담없이 가볍게 몇 줄이라도 적어봅시다.
- ~신앙인은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받아 여기에 참석하고자 예복을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유청 안셀모 신부) 중 에서>
< 01:51 작성 댓글>
혼인 예복은?
~~~그런데 한 사람이 ‘혼인 예복’ 없이 들어왔습니다. 그 시대에 혼인 예복은 주인이 ‘내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예복이 없다는 것은 ‘차려진 사랑을 받아 입기를 마다한 것’입니다.
크리소스토모는 이 예복을 ‘사랑(자비)의 삶’이라 풀이합니다. 잔치에 ‘들어오는 것(믿음)’만으로는 부족하고,
‘사랑의 예복(자비의 실천)’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르심은 ‘거저’ 주어지지만, 그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고인현 신부님 글 중)
~~~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우리가 꼭 의인일 필요는 없지만 꼭 필요한 것은 회개의 정신과 회개의 의지와 회개의 마음이고,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혼인 잔치의 예복일 것입니다.~~~ (김찬선 신부님 글 중)
< 07:45, 작성>
어제 묵상글(260819)맨 밑의 어부베드로님의 글 중 베드로님과 마르코님의 글 다시 읽었습니다.
- 신앙이 항구하려면 자기의 신앙에 대해 확실히 잘 알아야 합니다,
( 신앙 지식을 통해서 그 지식을 근간으로 해서 자기에게 맞는 지식으로 변형을 해서 자기만의 신앙 지식이 있어야, 더하여 신앙의 신조와 신념을 잘 유지해야 , )
- 믿음과 신심이 비례 관계이지만 정비례는 아니라고 한다면, 그 사이에는 지식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무엇인가가 더 있는 것 같습니다. 신앙을 ‘아는 것’과 실제 삶에서 ‘살아가는 것’ 사이의 차이일 수도,
- 신심은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겉으로 드러나는 외적인 행위나 모습을 통해서 판단을 하는 부분이 많지만 믿음도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믿음은 내적인 요소가 더 강한 면이 있습니다.
- 신앙이라는 틀 안에서 믿음과 신심이라는 것은 별개인 것도 아니지만 또 그렇다고 동일한 개념이 아닌 것입니다. 동전의 앞뒤와 같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 # 시간이 쫓겨 깊이 있는 묵상후 나의 견해를 적지 못하고 옮기기만 합니다.
전문을 천천히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