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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가운데서 나온 젊은이들
단 3:19-27
19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얼굴빛을 바꾸고 명령하여 이르되 그 풀무불을 뜨겁게 하기를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 하고
20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에게 명령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지라 하니라
21 그러자 그 사람들을 겉옷과 속옷과 모자와 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졌더라
22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불이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23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 채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떨어졌더라
24 그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이르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에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하니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옳소이다 하더라
25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26 느부갓네살이 맹렬히 타는 풀무불 아귀 가까이 가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에서 나온지라
27 총독과 지사와 행정관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
단 3:19-27 / [불가마에 던져진 세 친구] 이 말을 듣고 느부갓네살은 안색이 변하더니 매우 화가 나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분통을 터뜨렸다. 느부갓네살은 곧 명을 내려 불가마에 불을 더 지펴 평상시보다 일곱 갑절이나 더 뜨겁게 하라고 하였다. 20) 그러고는 자기 군대 가운데에서 힘이 가장 센 군인들에게 명을 내려 그 세 사람을 꽁꽁 묶어 활활 타오르는 불가마에 집어 던지라고 하였다. 21) 그래서 그 군인들은 세 사람을 꽁꽁 묶었다. 물론 속옷과 바지와 도포를 입은 채로 묶었다. 그런 다음 그들을 활활 타오르는 불가마 속에 집어 던졌다. 22) 그런데 왕의 명령이 너무 엄하였고 불가마가 너무 뜨거웠기 때문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집어 던졌던 군인들마저 그 불에 타죽을 수밖에 없었다. 불이 그렇게 뜨거웠어도 감히 왕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던 것이다. 23) 이렇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꽁꽁 묶인 채 활활 타오르는 불가마 속에 집어 던져졌다. 24) 그때 갑자기 느부갓네살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신하들에게 소리 질렀다. `아니, 그래 우리가 세 녀석을 꽁꽁 묶어 활활 타오르는 불가마 속에 집어 던지지 않았더냐?' `예, 임금님, 하라는 대로 하였습니다.' 하고 신하들이 대답하자 25) 느부갓네살이 또 말하였다. `그런데 어째서 저 불속에 네 사람이 묶이지도 않은 채로 왔다갔다 한단 말이냐? 아무 데도 상한 데가 없어 보이는구나. 참! 이상한 일도 다 있구나. 저 네번째 사람은 꼭 천사같이 보이는구나.' 26) [승진한 세 친구] 느부갓네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활활 타오르는 불가마 앞으로 다가가 소리쳤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아, 이리로 나오너라.' 그러자 그 세 사람이 불 가운데서 곧 걸어 나왔다. 27) 지방장관과 대신과 총독과 다른 관료들이 불가마에서 나온 그 세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불에 상한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머리도 그을리지 않았고 옷도 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연기 냄새조차 나지 않았다.
본문은 풀무불이라는 뜨거움, 그 불 속에서의 걷고 있는 모습, 신의 아들 같은 분과의 동행, 털끝 하나 상하지 않고 걸어 나오는 광경은 마치 사이버 공간을 연상케 합니다.
그 풀무불을 뜨겁게 하기를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19-23)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이 어렵게 베푼 호의에도 체면이 구겨질 만큼 거절을 당하자 결국 불 같은 성격을 드러냅니다. 평소보다 풀무불의 온도를 일곱 배 더 높이라 합니다. 그리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옷 입은 채 그대로 결박되어 그 풀무불에 던져졌습니다. 그때 그 풀무불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이 세 사람을 집어 던졌던 힘센 용사들마저 그 순간의 불꽃에 스쳐 타죽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에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24-25) 느부갓네살 왕 조차 놀라는 광경이 벌어집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 측근들에게 “꽁꽁 묶어서 던진 자는 세 명 아니었더냐? 보아라,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다. 모두 결박이 풀린 채로 풀무불 안에서 걷고 있구나! 그들에게 아무런 상처도 없도다! 오!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하며 자기도 모르는 탄성을 지릅니다. 아마 그 “넷째 모양의 신들의 아들” 같은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고 하나님의 사자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28).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26-27) 그 순간에 느부갓네살 왕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종”이라는 존칭으로 부르며 걸어 나오라고 했습니다. 왕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이 목격하는 가운데서 걸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세 사람의 몸을 살펴보지만, 어느 부위도 불에 상하지 않았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않았으며, 심지어 바지 색깔도 변하지 않았으며, 탄 냄새조차 나지 않았다고 묘사합니다. 이 상황은 거기 모인 사람 모두가 증인이 되었고 세 젊은이들의 신앙 순결성과 하나님의 능력을 입증하는 데 충분했습니다.
적용: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2)라는 말씀도 함께 묵상하면서 지금 당신이 극복할 신앙의 순결성과 이겨내야 질병은 무엇입니까?
적과 치열한 전쟁 중 적에게 중요한 고지를 빼앗겼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이 소식을 듣자 사령관은 전쟁에서 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그의 얼굴은 급격히 굳어졌습니다. 그의 침울한 표정에 부인이 말했습니다. "저는 지금 중요한 고지를 빼앗긴 것보다 더 안 좋은 것을 보고 있어요. 그건 바로 당신의 표정이에요. 빼앗긴 고지는 다시 찾으면 되지만, 사령관인 당신이 용기를 잃고 의기소침해 있으면 부하들이 누굴 믿고 따르겠어요. 지도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는 자세를 보여 줘야 하잖아요.“
< 설 교 >
포로 중에서도 지켜 주신 하나님
단 3:19-27 /
본문 말씀은 유다 백성이 바벨론 포로중에서도 하지 않게 하신 하나님의 보호와 섭리가 기록된 말씀입니다. 단순히 풀무불 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세 청년을 흠모하고 그들을 찬양하기 위해서 기록된 본문은 아닙니다. 그 세 청년을 보호하셔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구약성경 가운데 어떻게 펼쳐 가고 있는가를 보여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1.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들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그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분의 백성입니다. 그분은 우리들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시며 하나님이 되신 여호와께서 창세기에서부터 변치 않는 약속들을 많이 해 주셨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지켜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이런 약속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여호와께서 우리들과 함께 해 주시고 지켜 주신다는 약속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런 약속과 우리들의 믿음과의 관계를 바르게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구약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약속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약속은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신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들에게 보내 주실 것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분이 오셔야만 하는 이유는 우리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의 구원과 위로와 평강이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부족합니다. 힘이 없습니다. 여러분, 인간의 한계 상황에서 절망하고 좌절해 본 경험은 없습니까? 가슴아파해 본적은 없습니까? 그럴 때마다 우리들은 전능하시고 은혜로우시며 자비와 긍휼히 풍성한 하나님을 기대하지 않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롬8: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늘 우리들과 동행해 주십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오늘 우리들이나 할 것 없이 늘 동행해 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호를 받습니까? 성령님으로 인하여 보호를 받습니다. 우리들이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성령께서는 우리들을 지켜 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포로 가운데 예언되어 있고 언약되어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2. 본문의 문맥과 배경입니다. 본문이 기록된 다니엘서는 다니엘이라는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니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입니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이름의 뜻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께서 나의 판단자가 되신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참과 거짓을 판단하고, 불의와 정의를 판단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자신들의, 이름의 뜻으로 간직하며 신앙을 고백했던 유대인들의 신앙관을 여기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으로 이상과 묵시를 받을 때 나라의 형편을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유다 왕 여호야김이 위에 있은 지 삼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것을 에워쌌더니"라고 했습니다. 남쪽 유다에 여호야김이 왕으로 있을 때 성경에 갈대아라고 표현하고 있는 바벨론 나라 왕인 느부갓네살이 남쪽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함락하기 위하여 포위망으로 압축해 들어오는 때를 기점으로부터 다니엘서는 출발하고 있습니다.
결국 유다 나라는 바벨론에 의해서 완전히 망해 버렸습니다.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런 포로 중에서 어린 소년 다니엘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를 선지자로 세우셔서 포로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을 포로기 선지자라고 합니다.
남쪽 유다의 포로는 이미 오래 전에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된 말씀이었습니다. 그 예언의 말씀을 예레미야서를 통하여 보시겠습니다. 다 같이 렘25:5-6절을 보시겠습니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기 악한 길과 너희 악행에서 돌이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열조에게 옛적에 주어 영원히 있게 한 그 땅에 거하리니,
너희는 다른 신을 좇아 섬기거나 숭배하지 말며 너희 손으로 만든 것을 인하여 나의 노를 격동치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해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나"라고 했습니다. 7절에 "(그러나)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너희 손으로 만든 것으로 나의 노를 격동하여 스스로 해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였습니다. 그들의 범죄 행위를 하나님께서 그들을 진노하시고 재앙을 내리시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죄를 싫어하십니다. 그 죄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차단하시고 준엄한 심판을 내리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의지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는 죄가 접근할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렘 25:8-1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은즉 보라 내가 보내어 북방 모든 족속과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이 땅과 그 거민과 사방 모든 나라를 쳐서 진멸하여 그들로 놀램과 치소거리가 되게 하며 땅으로 영영한, 황무지가 되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 중에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와 맷돌소리와 등불빛이 끊쳐지게 하리니,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의 범죄 때문에 이방 바벨론 왕을 들어서 유다를 황폐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그들을 포로로 잡아가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을 완전히 멸하기 위해서 그들을 포로로 잡혀가게 하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그의 자녀들을 바벨론이라는 악의 소굴에 집어넣으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이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고난 가운데 집어넣었다는 진리를 여기서 우리는 발견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악의 소굴과 고난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포로 중에서도 다니엘에게 주신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3. 금신상에게 절하라는 왕의 명령과 세 청년의 신앙고백입니다.
유다 자손을 포로로 잡아간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은 우상이라는 국가 종교를 만듭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고 지탱하기 위하여 우상 종교를 이용합니다. 언제나 독재자들은 그래 왔습니다.
과거 우리 나라 정권들도 대통령 선거에서 점쟁이들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누가 대통령이 될 것 같으냐"라고 누가 물어 오면 "아무개가 된다"고 하라고 조종한다고 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금신상을 만들어 놓고 "누구든지 엎드리어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으리라"(단3:6절)고 공포합니다.
언제나 사탄은 하나님을 믿지 말고 자신들이 세운 금신상에게 절하라고 합니다. 유다 자손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을 제거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유다 자손이 포로 중에서도 하나님의 보호를 입을 것을 약속했습니다. 왜냐하면 70년의 포로 기간이 끝나면, 그들은 다시 본토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유다 자손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를 보내 주실 것을 약속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유다 자손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느부갓네살 왕을 통하여 그 유다 자손을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려고 했습니다.
얼마나 무모한 짓입니까? 단3:7절에 보면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자 곧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금신상에게 엎드리어 절하니라"고 합니다.
모든 백성들이 그 신상 앞에 절을 합니다. 이 문제 때문에 유다 백성들이 지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 왕의 금신상에 절하라는 강요에 유다 세 청년을 거절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였습니다.
이 세 청년을 고발한 내용을 보십시오. 다니엘 3:12절입니다. "이제 몇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벨론 도를 다스리게 하신 자이어늘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입니다"고 합니다.
결국 세 청년을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단3:15절)라고 할 때에 세 청년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단 3:16-18절을 다같이 읽으시겠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단호한 입장을 보입니다.
죽을지라도 금신상에게 절대로 절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우리들을 풀무불 속에 집어 넣는다고 해도 하나님은 우리들을 건져 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혹 우리들을 그 불 속에서 건져 주시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들은 그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앞에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 역시 이런 믿음을 가지고 세상과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단 마귀와 타협하면 안됩니다. 믿음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믿음 없음을 기도해야 합니다.
4. 극렬히 타는 풀무불 속에서 구원받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세 청년들의 이런 당찬 이야기를 듣고“분이 가득했다”라고 합니다. 풀무를 칠 배나 뜨겁게 달아오르도록 명령한 후에 그곳에 이 세 청년을 결박하여 그 속에 던졌습니다.
왕의 명령이 얼마나 다급했던지 세 청년의 겉옷과 속옷을 그대로 입게 한 채로 묶어서 던졌습니다. 그 불꽃이 얼마나 극렬했으면 그때 세 청년을 묶어서 던진 군인들이 타 죽게 될 정도였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그렇게 극렬히 타는 화덕 속에 던졌는데 그들이 죽지를 않습니다.
세 사람을 던져 넣는데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다”라고 합니다.(25절). 그런데 세 사람만이 아니고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3:25)라고 합니다.
단3:27절에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아니하였고 고의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고 합니다. 그 결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단3:28절입니다.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가로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성가 가운데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불속에라도 들어가서 불 속에라도 들어가서 세상에 널리 전하리 주의 사랑을" 여러분, 이런 불 속에라도 들어갈 수 있는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불 속에 들어가는 일이 있더라도 내가 믿는 믿음을 고백할 수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주 안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 험한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은 믿음의 선진들의 믿음과 신앙을 종자로 받아 심지(心地)에 심고 싹이 돋고 잎이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성령 충만을 받아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증거의 삶을 살아가므로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의 아들
단 3:19-27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쉽게 하고 또 많이 하고 있는데 진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믿음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진심으로 이 세상보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더 관심이 있고, 세상에서 잘 사는 문제보다는 마지막 때 예수님께 부인당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소망이 있다면 여러분은 참된 믿음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것을 되돌려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것은 무엇이 있습니까? 물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지만 땅의 것은 우리가 일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땀흘려서 열심히 일해서 우리의 손으로 거둘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는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지 우리의 일한 대가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기도의 대가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은혜를 되돌려 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은혜를 하나님께 되돌려 드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결국 세상을 자기의 힘으로 자기를 주장하며 살지 않고 예수님을 주장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내가 누구의 다스림을 받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자꾸 세상의 지배 아래 들어가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계획과 힘을 가지고 개척해 보려는 의도 때문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인생을 개척해 가기 위해서는 세상의 것을 기초로 삼아야 합니다. 세상의 것이 없이는 자기가 원하는 인생을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타협이 등장하는 것이고 이것이 곧 세상으 지배를 받는 모습인 것입鎨. 그러나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는 앤생이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진행됨을 알 때는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앞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사는 신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에게 언제나 순종을 요구합니다. 순종하는 자가 하나님 앞에서 옳은 자이고, 순종하지 않느 자는 그 어떤 자라 할지라도 잘못된 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문제를 두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입장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기는 옳은데 모두 저 사람이 틀렸다는 생각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어떤 상황에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말씀 앞에서 옳은 것인가를 따져 물어야 합니다. 이럴 때 신자는 자기의 의를 주장하지 않게 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삶이며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문은 다니엘의 세친구가 느부갓네살이 세운 신상에 절을 하지 않음으로 느부갓네살의 명령대로 풀무불 속에 던짐 받는 내용입니다. 다니엘의 세친구는 결박을 당하여 던짐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이 풀무 안에 보니까 네 사람이 풀무 안을 자유롭게 다니는데 그들 모두가 결박되지 않은 채 있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이 세 사람을 풀무에 던진 것은 자기 힘의 과시입니다. 자기의 힘에 도전하는 자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경고입니다. 그런데 풀무에서 죽지 않고 오히려 결박이 풀린 채로 자유롭게 다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사람이 있는데 그 모양이 신들의 아들 같다고 말합니다. 결국 이 내용은 지금까지 이 세사람이 누구에게 다스림을 받고 있었느냐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풀무도 두려워하지 않고 신상에 절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살려주실 것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잘못된 것은 따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바벨론으로 오게 하셨고 그것이 지금도 하나님은 살아서 일하신다는 증거인데 우리가 세상의 힘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죽는 곳도 하나님의 일이고,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죽고 사는 것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이러한 세 사람의 믿음, 즉 이들이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풀무에 네 번째 사람이 등장해서 다니엘의 세친구와 함께 자유롭게 풀무를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을 풀무에서 살리기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목적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풀무에 던짐 받지 않도록 조처했어야 당연합니다. 또 이들의 믿음이 좋아서 불속에서도 안 죽고 살아났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네 번째 사람은 등장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사람을 통해서 이들이 누구의 다스림을 받고 있었기에 세상의 힘에도 굴복하지 않고 풀무의 위협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네 번째 사람, 신의 아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세상에 굴복하여 살아갑니다.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옳고 그름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면 용납해 버리는 세상의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를 잘되게 하는 조건들로 보이기 때문에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세상에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잠시 왔다가 가는 나그네로 살아갈 때 세상은 그를 감당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거부하겠다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런 믿음을 말하면 마음에 부담을 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지금 내 인생 속에서 나를 다스리는 말씀으로는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만 하나님의 말씀이지 세상에서 살 때는 현실적으로 따져서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나에게 좋은 쪽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현실에 말씀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말씀에 의해서 옳고 그름이 가려지고 언제나 옳은 쪽으로 가고자 힘쓰는 것이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평소에 나를 다스리시고 나와 함께 하셨던 네 번째 사람, 신의 아들이 나를 통해서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의 풀무불 속에서 경험한 은혜
다니엘 3장 13-27절
들어가는 말
인생 선배들의 말을 들어보아도 그렇고 우리가 경험한 바로도 그렇고, 인생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 오히려 우리 인생이 쉬워질 수가 있습니다. 인생이 힘들어지는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인생에 대한 잘못된 기대를 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는 온갖 어려움을 만나게 마련인데, 그럴 때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며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1978년에 처음 출간되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아직도 가야할 길> 책이 있습니다. 저자인 스캇 펙(M. Scott Peck)은 그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의 참된 의미는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전체적인 과정에 있다... 삶의 승패는 그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달려 있다.’
신경정신과 의사였던 스캇 펙은 자기가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올라가게 된 것이 사실은 자신의 고통 때문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겪었던 정서적 장애가 그로 하여금 신경정신과 의사가 되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고난을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했고 사명을 발견하는 축복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고난은 변장된 축복입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사람만이 고난을 변장된 축복으로 받아들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피할 수 없는 고난을 환영하며, 고난이 주는 고통을 기꺼이 견뎌냅니다. 그리고 고난을 자신이 더욱 성장하고 발전하는 기회로 만듭니다.
오늘 다니엘 3장에 나오는 다니엘의 세 친구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지혜는 고난이 닥쳤을 때 빛을 발했습니다. 상황은 다르지만, 우리에게도 고난이 찾아옵니다. 그것도 예상치 못할 때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리 고난에 대해 지혜롭게 반응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마치 고난이 찾아올 것을 미리 알았던 것처럼 지혜롭게 반응합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지, 또 고난에 어떻게 반응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지 배우기 원합니다.
1. 고난에 대해 담대한 믿음으로 반응하라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포로로 끌려와서 살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큰 금 신상을 세워놓고 모든 관리들로 하여금 낙성 예식에 참여하여 그 금 신상 앞에 절하게 합니다.
“너희는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리어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라.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라 하였더라” (5-6절)
당시 왕들은 자신을 신격화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왕은 신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한 왕의 명령을 거역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의 세 친구에게 닥칠 고난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에게 닥친 고난에 대해 지혜롭게 반응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금 신상에 절하지 않았다고 왕에게 고발하자(12), 느부갓네살 왕은 분노하며 그들을 끌고 오라고 명령합니다(13). 그들이 오자 느부갓네살은 그들에게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은 게 사실이냐고 물은 다음, 그들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다고 하면서 말합니다.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하니” (15절)
지금이라도 절을 하면 살려 주겠지만 계속 절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보통 사람은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당연히 절한다고 할 것입니다.
사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정말로 두려운 이 상황에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한 번만 눈 딱 감고 금 신상 앞에 절하면 죽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딱 한 번만 절한 다음에 나가서 자신들의 하나님을 계속 섬기면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면 바벨론에서 좋은 위치를 계속 지키며 신앙생활도 편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뭐라고 대답합니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6-17절)
이것이 고난 앞에서 하나님만 신뢰하며 하나님의 기적을 기대하는 믿음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자기들을 능히 건져내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그들의 신앙고백이며 담대한 믿음의 선언입니다. 그들은 느부갓네살 왕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이러한 용기는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도 이렇게 담대해질 수 있습니까?
1.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담대하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느부갓네살 왕 앞에서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진정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 때 강해집니다. 하나님을 알 때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았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왔을 때 다니엘과 함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로 뜻을 정하고 왕의 진미, 즉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과 포도주를 먹지 않기도 결단했습니다. 그리고 대신 채식을 하며 물만 마셨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열흘 후에 보니까 그들의 얼굴이 다른 소년들보다 더 나았던 것입니다(1:15).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을 따라 역사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의 믿음에 상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과 세 친구에게 지식을 주시고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셔서 왕을 모시게 됩니다(1:17). 또 그들의 지혜가 어떤 마술사나 주술가보다 10배나 나은 줄을 왕도 알게 됩니다(1:19-20).
그들의 용기는 하나님을 체험하여 아는 사람의 용기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한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에 어떻게 역사해주셨는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상황이 어려울수록 이전에 하나님을 체험한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어려움이 와도 용기 있게 대처할 수 있게 됩니다.
2. 기도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이 담대하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도의 능력을 알고 기도의 응답을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2장에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었는데 무슨 꿈인지 기억을 못합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모든 마술사, 주술가, 점쟁이, 점성가들을 불러 자기가 꾼 꿈을 알아내고 해석하라고 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이겠다고 합니다. 술사들은 꿈을 알려주면 해석하겠다고 하지만, 느부갓네살은 자기가 꿈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면서 그것을 그들의 탓으로 돌리며 꿈이 뭔지도 말하고 그 해석도 말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때 그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임금님께서 아시고자 하시는 그 일을 임금님께 알려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일찍이 그 어떤 위대한 왕이나 통치자도 마술사나 주술가나 점성가들에게, 이와 같은 일을 물어 본 적이 없습니다. 임금님께서 물으신 것은 너무 어려워서, 육체를 가진 사람과 함께 살지 않는 신들이라면 몰라도, 아무도 그 일을 임금님께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단 2:10-11, 새)
무슨 말입니까? 왕의 꿈이 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고백입니다. 그러자 느부갓네살은 분노하며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합니다(2:12). 그 소식을 들은 다니엘은 자기에게 기한을 주면 왕의 꿈을 해몽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 다음에 다니엘은 집으로 돌아가서, 자기의 친구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고, 그 친구들에게 말하였다. ‘너희와 나는 다른 바빌론의 지혜자들과 함께 죽지 않도록, 하늘의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이 비밀을 알게 해주시기를 간구하자.’” (단 2:17-18, 새)
다니엘의 요청을 받은 세 친구는 합심해서 기도했고, 그들이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밤에 은밀한 것을 다니엘에게 보여주셨습니다(2:19). 다니엘이 왕의 꿈을 알아내고 해석해주자,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의 하나님을 인정하고(2:47), 다니엘을 높여서 바벨론의 온 도를 다스리도록 하며(2:48), 다니엘의 세 친구도 다니엘의 요청에 따라 바벨론 지방의 일을 다스리게 합니다(2:49).
문제가 발생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기도입니다. 문제가 생겼는데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참 안타까운 사람입니다. 더 안타까운 사람은, 어려움이 올 때 자기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하면서도 정작 자기는 기도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사람 역시 참 안타까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가장 불행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를 위해 기도를 해달라고 부탁할 사람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려움이 생길 때 기도해야 합니다. 다른 분들에게도 기도를 부탁해야 합니다. 어려울 때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들을 보면, 바울이 교회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그들에게도 자기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합심해서 기도할 때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내가 진정으로 거듭 너희에게 말한다. 땅에서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슨 일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 (마 18:19, 새)
목장에서 기도제목을 내고 합심해서 기도할 때, 또 중보기도실에 기도카드를 내고 함께 기도할 때, 놀라운 기도 응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3.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담대하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이 두려워할 대상을 제대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느부갓네살 왕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 9:10)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이 정말로 강한 사람이고, 지혜 있는 사람이 참으로 담대할 수 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제대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지만, 주님을 의지하면 안전하다.” (잠 29:25, 새)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다른 모든 두려움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무서워서 벌벌 떠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고,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최우선순위에 둔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공경하고 존중하는 것을 말합니다(honor, respect).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담대해집니다.
4.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담대하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고난이 닥쳤을 때 믿음으로 반응했고, 또한 사랑으로 반응했습니다. 이것이 더욱 감동적입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18절)
그들은 하나님이 풀무불 속에서 구원해주지 않으시더라도, 다시 말해 놀라운 기적으로 자기들을 살려주지 않으시더라도, 바벨론의 신들을 섬기거나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겠다고 담대히 선포합니다. 그들은 왜 이렇게 말합니까? 하나님을 진짜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무한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징벌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요일 4:18, 새)
사랑은 부드러운 것 같지만, 사실 사랑만큼 강한 것이 없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그 사랑이 그들에게 닥친 고난을 통한 두려움을 내어 쫓았습니다.
우리도 힘든 순간이 닥치면 두려움을 이기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면 됩니다. 사랑이 강렬해지면 두려움은 쫓겨나고 사라집니다. 어려울수록 더 기도하고, 더 말씀을 묵상하고, 더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에 염려와 불안이 있을 자리는 없습니다. 사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만 온전히 사랑할 수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정말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바벨론에서 경험한 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하나님을 향해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의 사랑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했을 때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켜주지 않으심으로 풀무 불에 타서 죽임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겠다고 결단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자신들의 생명을 여기서 구해주시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라 그대로 죽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거기에도 분명히 선하신 주님의 뜻이 있을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자기들이 죽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기를 포기할 수 없다는 놀라운 고백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신뢰할 때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할 때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우리 인생을, 심지어 생명까지 맡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면 우리는 쉽게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고난 후에 예비하신 축복을 못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심합니다.
초대교회 교부인 성 이그나티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의 가장 깊은 행복을 원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정말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전 존재를, 생명까지도 맡길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어떠한 환경에서도 감사할 제목을 찾아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2. 고난에 대해 거룩으로 반응하라
고난의 신비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에게 고난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사랑하시기 때문에 고난을 안 주실 것 같은데, 하나님은 반대로 하십니다. 오히려 고난을 경험하게 하시는데, 그것도 극렬한 풀무불 속으로 던져 넣으십니다.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얼굴빛을 바꾸고 명령하여 이르되 그 풀무불을 뜨겁게 하기를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 하고,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에게 명령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지라 하니라. 그러자 그 사람들을 겉옷과 속옷과 모자와 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졌더라” (19-21절)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말을 들은 느부갓네살은 엄청나게 분노하여 화덕을 보통 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겁게 하여 세 사람을 거기 던져 넣으라고 명령합니다. 풀무 불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들고 불 속으로 던져 넣는 사람들까지 다 태워 죽일 정도였습니다(22).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사람, 더욱 귀하게 쓰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 고난을 주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고난의 풀무 불에 들어가게 하신 사람을 부르셔서 그 길을 형통하게 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먼저 고난의 풀무 불에 집어넣으십니다. 그 뜨거운 불 속에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부드럽게 하시고, 성숙하게 하십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하나님을 그토록 신뢰하며 사랑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풀무 불 속으로 던져졌습니다. 이제는 다 끝난 것 같았습니다. 여기서 살아난 사람은 없습니다. 어떻게 살아나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라, 바로 이 고난의 한 가운데 주님의 기적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이르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에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하니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옳소이다 하더라.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24-25절)
분명히 풀무 불 속에 들어간 것은 세 사람이었는데, 느부갓네살이 보니까 한 사람이 더 있는 겁니다. ‘신들의 아들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누구이든지 상관없이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이 친히 개입하셔서 세 사람을 보호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 갑자기 북극의 찬바람이 불게 하셔서 풀무 불을 끄신 게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세 사람을 풀무 불 속으로 집어넣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토네이도가 불어서 세 사람을 데리고 다른 데 떨어뜨려 피하게 하신 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극렬한 풀무 불 속에서 함께 하시며 보호해주셨습니다. 이것이 엄청난 은혜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극렬한 풀무 불을 통과하고 계십니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때문에 삶이 꼬이고 힘들어졌습니까? 쉽게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끝나기 전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고통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이 나의 이 고통 속에서 나와 함께 하시면서 나를 불로부터 보호하고 계십니다.
조금만 더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뭔가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도와주실 것입니다. 고난의 풀무를 통과하고 있는 분들에게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누가 진정한 신이냐 답하라?
다니엘 3:13-23 / [생명의 삶]
[묵상]
오늘 본문에는 두 가지 위험이 소개됩니다. 하나는 자신을 신으로 경배하게 하려는 어리석은 악이며, 다른 하나는 악인 줄 알면서도 생존을 위해 타협하는 것입니다.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인간의 어리석음이란 끝이 없는가 봅니다. 느부갓네살은 자신이 만든 금신상 앞에 모든 사람들을 불러 놓고 절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자신이 만든신, 자신의 명령에 굴복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듣고 기가막혔습니다. ‘감히 누가 나의 명령에 불복종한단 말인가?’ 그런데 그들은 다름 아닌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에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 하니 사실이냐?”
‘내 신’ 그리고 ‘내가 세운 금신상’을 동일하게 취급하게 있습니다. 그 금신상이 어떤 신상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바벨론의 주신 마르둑인지 아니면 느부갓네살 자신의 모습을 한 신상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들은 ‘신’ 즉 우상들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자비로운 척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었습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자비로운 내가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겠으니)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세상으로부터 질문을 받습니다.
“너희 신은 정말 지금의 이 위기로부터 너를 구할 수 있느냐? 그럼 나도 믿겠다”
믿음도 별로 없는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은 너무나 가혹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까요? 다니엘의 세 친구에게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우린 대답할 필요가 없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느부갓네살 왕에게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왕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반드시 지키실 것이고,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왕의 신들을 섬기도 않고 왕이 세운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제가 잘못 듣지 않았다면 ‘왕의 신들’ 그리고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 절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금신상에 절하는 것은 곧 우상에게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서로 합의하지 않았고, 고민도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명백하고 단순한 대답을 합니다.
“우리는 절대 절하지 않습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은 위험합니다.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자들은 넘어질 것이며,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했습니다. 자신들의 목숨까지도. 누군가 저에게 ‘당신은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하나님을 따를 수 있느냐?’라고 묻는다면 감히 ‘그렇다’라고 말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우리를 향한 세상의 질문에 답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제 자신을 보며 한 없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주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