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보다 한국이 나은 이유 한 가지
두어 달 전에 미국으로 발령 난 사위와 딸, 네 돌 지난 외손녀 불러 송별 저녁을 하면서, 막내딸 사랑하는 모든 친정아버지들처럼, 의젓한 사위가 자랑스러운 세상의 장인들처럼 이것저것 당부하다가 막판에 “야, 너네 거기서 일하다가 눌러앉을 방법 찾아봐. 여기 다시 돌아올 생각 말고 말이야”라고 꾹꾹 눌러 놓았던 말을 해버렸습니다.
술김에 하는 말이 아닌 걸 보여주려고 계속했습니다. “물론 한국 사람에게는 한국이 제일 좋지. 예전과는 다르지. 나 젊을 때, 미국에는 젖과 꿀만 흐르는 줄 알고 다들 가고 싶어 했지.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더 잘 사는 측면이 많아졌잖아? 너네도 알겠지만 우리를 부러워하는 미국 사람이 늘어난 것도 사실이고. 그래도 난 니네들 미국 살 수 있으면 살았으면 좋겠어.”
나는 무릎에 앉은 손녀를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습니다. “얘 때문이야. 난 말이야, 얘 생각하면 니네들 거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 왜냐면, 지금 상황으로 보면 우리나라 갈수록 좌우갈등 더 심해지고, 빈부격차 더 벌어져. 내 말 알아듣겠지? 지금 이 개 같고 지랄맞은 진영 대립은 심해지면 심해졌지 절대 안 잦아든다고. 신분과 자산 세습은 더 굳어져서 계층이동이 불가능해질 거야.”
내 말이 좀 거칠어지자 딸이 “아빠, 그만해”라고 나섰습니다. 그래도 금방 안 그치고 몇 마디 더 했습니다. “돌아가는 꼬라지 보면 지금도 숨이 콱콱 막히는데 갈수록 더 심해질 거야. 애를 평생 이런 데서 키울 거야? 애는 더 좋은 세상 살게 해야 하지 않겠어? 한국이 많이 좋아졌다고 해도 아직은 미국보다 부족한 게 많을걸? 그러니 오지 말고 거기서 살아라. 얘한테 더 나은 기회를 주는 거로 생각해. 너네들도 더 자유롭고 풍요롭게 살 수 있겠지.”
그리고 며칠 뒤 애들은 떠났는데요, 미국이 여기보다 애 키우고, 꿈 키우기 좋을 거라는 제 생각, 얼마 전부터 바뀌고 있습니다. 미국의 좌우 진영 대립이 한국보다 훨씬 심하고 고착됐으며, 어쩌면 '개선'의 가능성도 한국이 높다고 믿게 됐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은 벤 샤피로라는, 1984년생으로 내 딸과 동갑인 미국의 젊은 글쟁이가 쓴 ‘권위주의적 순간’이라는 책 때문에 시작됐습니다. 열일곱 살 때부터 미국 여러 매체에 정치 칼럼을 써온 샤피로는 이 책에 ‘미국 좌파들은 어떻게 시스템을 완전히 장악해버렸을까’라는 부제를 붙였습니다. 부제가 말해주듯 이 책은 “미국 정치, 사법, 교육, 문화와 오락, 언론, 기업, 스포츠 등 모든 분야를 좌지우지하는 데 성공한” 좌파의 전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미국 좌파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존중한다고 내세우지만, 사실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있다”면서 이들에게 빼앗긴 자유와 민주주의를 찾아오는 방법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미국 좌파가 득세한 배경은 “자기네만 도덕적이라는 좌파의 주장이 일부 대중에게 먹혀들어 갔기 때문”이라면서 그 과정을 꼼꼼히 보여줍니다.
나만 도덕적이라는 주장! 우리나라 좌파만 그런 줄 알았는데, 미국도 마찬가지라는 걸 알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오매불망, 좌파의 주장을 받드는 사람을 ‘깨시민’이라고 하는 것 역시 여기나 거기나 마찬가지더군요. 이 책에서 알았는데 미국서는 깨시민을 ‘Woke’라고 한답니다. Woke는 Wake의 과거형이지요. Wake는 깨어난다라는 뜻이고요. 깨시민이 먼저 사용됐나, Woke가 먼저 사용됐나, 이 집단이 한국과 미국 어디서 먼저 발생했나 궁금해 하는 분 꽤 있을 것 같습니다.
샤피로는 미국 좌파가 도덕성을 내세워 미국 시스템을 장악해온 역사를 추적, 분석하면서 여러 연구 자료와 통계, 신문과 TV의 논평과 기사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 결과도 한국과 비슷합니다.
그중 하나만 말씀드린다면 “좌파는 우파가 존중하는 정중함, 예의, 친절을 교묘히 공격해 우파가 스스로 자기 입을 막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라는 겁니다. 생뚱맞은 비유입니다만, ‘버르장머리는 없는 아이에게 오냐오냐하다가 아비를 아비로 부르지 못하게 된 상황’이 벌어졌다는 거지요. 아래의 인용문이 이게 어떤 상황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좌파 세력은 지난 수십 년간 보수주의자들이 스스로의 입에 재갈을 물리도록 교묘히 환경을 조성해왔다. 이 모든 건 공손함을 요청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 요청은 곧 침묵을 요구하게 됐고, 침묵에 대한 요구는 좌파 철학에 대한 순응과 반복, 그리고 믿음을 강요하는 명령으로 이어져 왔다.”(월간조선 5월호 서평)
샤피로는 이런 상황을 ‘좌파가 재정상화에 성공한 것’이라고 정의했는데, 재정상화는 이런 것이라고 합니다. “4인 가족의 (귀여운) 막내딸이 앞으로 자기는 유기농 식품만 먹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모든 식단을 유기농으로 짜게 된다. 막내딸 하나의 고집으로 온 가족의 식단이 유기농이 된 것이다.” (‘재정상화’라는 개념은 ‘검은 백조’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나심 탈레브가 가장 먼저 썼습니다. 샤피로는 탈레브의 설명을 빌려 자기주장을 펼칩니다.)
그럴 분이 별로 없겠지만, 혹시라도 이런 말들이 무슨 뜻인지 모르시는 분은 월간조선의 서평을 마저 읽어보세요. “4·3명예회복운동의 전개 과정에 이를 대입해보자. 이 운동은 당초 억울한 희생자들을 신원해 달라는 탄원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이제 ‘4·3은 공산폭동’이라고 말하면 형사처벌을 당할 수도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이는 ‘강력한 동기를 가진 소수가 다수(주로 사회 정치적 이슈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를 위협해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온’ 결과이다.”
샤피로의 책에는 좌파가 미국 시스템을 장악한 사례가 이것 말고도 많이 나오는데,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책 속의 ‘미국’을 ‘한국’으로 ‘미국 좌파’를 ‘한국 좌파’로 바꿔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사나 한국에서 사나 숨이 막히는 건 마찬가지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숨통이 먼저 트이고 있는 곳은 한국이라는 생각이 굳어지고 있습니다.
한국 좌파가 그렇게도 내세워온 ‘도덕적 우월감’이 내부에서 무너지고 있으며, 그들이 저지른 부정과 부패가 하나하나씩, 종국에는 샅샅이 드러나 단죄될 날이 가까워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고름 짜내고 썩은 살 도려내면 좌파는 더 단단하고 건강해지지 않겠어요? 깨지고 때묻고 녹슨 '진보'라는 문패도 새롭게 달 수 있을 것이고.
이 과정이 다 마무리되면 한국은 보수와 진보 진영이 건전하고 당당한 경쟁을 펼치는 나라가 되리라고 기대되지 않나요? 그 결과 정말 미국보다 살기 좋은 나라가 되리라는 희망은요? 나요? 나는 딸과 그날 내 말에 별 대꾸 없이 싱글싱글 웃기만 하던 사위에게 “내가 그날 술이 많이 취했나 보다”라는 말로 넘어가야겠지요.
아, “재정상화에 성공한 소수가 다수를 위협해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 상황을 권위주의적 순간”이라고 정의한 샤피로는 “권위주의적 순간은 침묵하는 다수의 묵인을 먹고 자란다. 우리는 더 이상 침묵해선 안 된다”라고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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