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를 상상해 그린 그림. 이백의 글에는 인생의 짧고 덧없음을 표현한 내용이 들어있다.
“歲歲年年人不同(세세년년인부동)”이라는 말이 있다. 옛 시구에서 먼저 나온 뒤 후대의 중국 시단에서 즐겨 썼던 말이다. 풀자면 “해마다 사람은 모두 다르다”는 뜻이다. 앞 구절에는 “해마다 피는 꽃은 서로 비슷해도(年年歲歲花相似)”라는 말이 등장한다. 세월이 흘러도 경물(景物)은 변함이 없지만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는 사람의 모습은 나날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라는 우리 옛 시조가 떠올려지는 대목이다. 그렇게 시간은 꾸준히 지나가고, 사람의 인생은 덧없이 흘러간다. 2014년의 시작을 알린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밑, 즉 세모(歲暮)에 이르렀다.
해를 가리키는 한자어는 年(년), 歲(세), 載(재), 祀(사) 등이 있다. 年(년)은 농작물 수확을 가리키는 글자로 처음 등장했다. 따라서 한자 단어 중 유년(有年)은 풍년, 대유년(大有年)은 대풍(大豊)을 가리킨다. 가을걷이, 즉 농작물 수확으로 1년이 지나감을 기억하면서 지금의 ‘해’라는 뜻을 얻었다.
歲(세)는 원래 太歲(태세), 즉 태양계 행성의 하나인 목성(木星)을 가리켰다.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주기가 11.86년이다. 지구에서 볼 때 매 해마다 특정한 구역에서 머물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목성의 위치를 견줘 해를 따졌다고 한다.
載(재)는 물건 등을 ‘싣다’의 뜻이다. 정확하게 어떤 이유인지는 추정키 어렵지만, 이 글자 또한 ‘해’라는 뜻을 얻었다. 천년에 한 번 맞을까 말까하는 기회를 이야기할 때 ‘千載一遇(천재일우)’라고 적는 경우다. 祀(사) 역시 원래는 ‘해’의 뜻이었으나, 나중에 왕조 차원이나 개인 가정에서 벌이는 ‘제사’의 뜻이 매우 강해져 지금은 쓰지 않는 편이다.
역대 중국의 최고 시인이라고 하는 이백(李白)은 이런 말을 남겼다. “무릇 하늘과 땅이라는 존재는 만물이 거치는 여관이요, 시간이라는 것은 영겁을 스쳐가는 나그네(夫天地者萬物之逆旅, 光陰者百代之過客)”라고 말이다. 제법 운치가 있어 보인다.
장자(莊子)가 인생을 바라보는 눈길도 다르지 않다. 그는 “하늘과 땅에서 살아가는 인생이란 마치 좁은 문틈으로 하얀 말이 지나가는(白駒過隙) 모습을 보는 듯하다”고 했다. 조그맣게 벌어진 문틈으로 하얀 말이 지나가는 속도야 그야말로 순식간(瞬息間)이다. 눈 감았다 뜨고(瞬), 들숨 날숨 한 번 들었다 나가는(息) 사이(間) 말이다.
매우 낭만적이었던 시인 이백(李白)은 “그러니 옛 사람이 촛불 켜들고 밤새 노닐었던 일은 다 이유가 있음이라”며 실컷 놀기를 권유한다. 촛불 켜들고 밤새 노니는 일은 한자로 秉燭夜遊(병촉야유)다. 전깃불로 밤이 대낮처럼 밝은 현대사회라 치더라도 그렇게 마구 밤길을 떠도는 일은 삼가는 게 좋다.
주저앉았다가도 훌훌 털고 일어나 길을 가는 게 인생이다. 휙~스쳐간다고는 하지만 인생은 등에 큰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일이다. 한자로 적으면 負重致遠(부중치원)이다. 짧은 인생, 시간 탓만 하고 있기에는 어딘가 허전하기 짝이 없다.
올해 세밑도 마찬가지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은 세제(歲除)라고 적는다. 여기서 除(제)는 ‘가다’ ‘바뀌다’의 뜻이다. 해가 바뀌는 마지막 날에 적합한 표현이다. 그 날 밤은 그래서 除夕(제석), 除夜(제야)라고 적는다. 밤새 뜬 눈으로 조심스레 해의 바뀜을 맞이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중국에서는 守歲(수세)라고 부른다. 조용하면서도 차분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자.
(황 양춘소아이연경 대괴가아이문장) 하물며 화창한 봄날이 아름다운 경치로 나를 부르고 조물주가 나에게 문장을 빌려줬음에랴
會桃李之芳園 序天倫之樂事
(회도리지방원 서천륜지락사) 복사꽃 오얏꽃 아름다운 동산에 모여 형제들끼리 즐거운 일들을 말하는데
群季俊秀 皆爲惠連 吾人詠歌 獨慙康樂
(군계준수 개위혜련 오인영가 독참강락) 여러 아우들준수하기가 모두 사혜련과 같은데 내가 읊는 노래만 강락후에 부끄러울 뿐이네.
幽賞 未已 古談 轉淸
(유상 미이 고담 전청) 그윽한 감상은 아직 끝나지 않고 옛 이야기는 갈수록 맑아지는데
開瓊筵以坐花 飛羽觴而醉月
(개경련이좌화 비우상이취월) 꽃으로 옥 자리 대신 깔고 술잔 날려 달을 취하게 하네
不有佳作 何伸雅懷
(불유가작 하신아회) 아름다운 작품이 없으면 어찌 고아한 회포를 펴리오
如詩不成 罰依金谷酒數
(여시불성 벌의금곡주수) 만약 시를 이루지 못한다면 금곡(金谷)의 술잔 수만큼 벌주를 내리리라.
<이백; 701년-762년>
인간(人間)의 삶이란 시작도 알 수 없고 끝도 알 수 없는 시간(時間)의 x축과 무한대로 확장하는 공간(空間)의 y축이 교차한 어딘가에 찍히는 한 점에 불과하다. ‘시간’이라는 말 또한 끝없이 이어지는 시(時)를 토막 낸 것에 불과하거니와, ‘공간’ 역시 허공(虛空)의 특정부분을 나눈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이라는 말 자체도 “사람은 사람 사이에서 사람다운 삶을 산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태어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 존재인 사람은 ‘간(間)’에서만 존재의 의미를 찾을 있는 바, 고대 중국인들이 시간-공간-인간의 삼간(三間)을 중시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고, ‘삼간’에서의 유한(有限)을 얼마나 유용하고 의미 있게 만드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고 믿었다. ‘시공(時空)’를 초월한다는 말도 그래서 생겨났다.
이백 초상 스케치
사람에게 있어서 ‘시간’은 출생과 사망 사이, ‘공간’은 그가 위치한 곳의 하늘과 땅 사이, ‘인간’은 그가 그의 시공에 머무르는 동안 만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이백(李白) 또한 그 삼간(三間)을 꽤나 의식했던 듯하다.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도 그런 의식의 표출로 보인다. ‘춘야연도리원서’는 이백이 복사꽃과 오얏꽃 만발한 봄날의 정원에서 형제와 친족들이 모여 시회(詩會)를 여는 것을 기념하여 지은 글, ‘천지’를 만물이 묵어가는 여관에 비유하고 ‘세월’은 그 여관에 묵어가는 나그네에 지나지 않는다는 통찰이 너무 기발하여 감탄을 금할 수 없거니와, 밤에 촛불을 들고서라도 짧은 인생의 의미를 실컷 찾아보자는 너스레 깨달음이 너무 진지하여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미려한 문장도 일품이지만 시재(詩才)가 뛰어나 강락후(康樂候)에 봉해졌던 남송(南宋) 시인 사혜련(謝惠連)이나 진(晋)의 거부 석숭(石崇)의 금곡원(金谷園) 고사를 천의무봉(天衣無縫)으로 차용하여 흥취를 고조시키는 이백의 글 솜씨에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는 말이 절로 떠올려진다.
‘춘야연도리원서’를 감상할 때 많은 사람들이 ‘開瓊筵以坐花 飛羽觴而醉月(개경련이좌화 비우상이취월)’을 “옥자리 깔고 꽃 마주하고 앉아 술잔 날려 달빛에 취하다”라고 해석하지만 그건 시적(詩的) 감흥(感興)을 무시한 풀이라는 눈 흘김을 받아 마땅하다. 그 구절 해석의 열쇠는 앞 구절의 ‘이(以)’와 뒷 구절의 ‘이(而)’, ‘以’는 ‘-로서’라는 의미이므로 ‘開瓊筵以坐花(개경련이좌화)’는 진짜 옥으로 만든 자리를 깔았다는 게 아니라 ‘사람이 깔고 앉을 수 있을 만큼 키 작은 꽃’ 즉 ‘좌화(坐花)’를 ‘옥자리’ 삼아 깔았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게 옳고, ‘飛羽觴而醉月(비우상이취월)’은 비(飛)와 취(醉)가 동사로 쓰이고 그 사이에 ‘그리고’라는 의미의 접속사 ‘而’를 끼워 넣은 것이므로 “깃털 모양의 술잔[羽觴]을 날려 달을 취하게 하다”라고 해석하는 게 맞다. 시적 감흥을 모르는 사람들은 “달을 취하게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입을 삐죽거리겠지만 “그렇다면 술잔을 날리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고 되물으면 뒤통수 긁적거릴 것임을 믿어마지 않는다.
‘罰依金谷酒數’도 씹으면 씹을수록 인생의 참맛이 우러나오는 명구(名句)다. 진(晉)나라 때 형주자사를 지내면서 장사꾼들과 결탁하여 큰 부자가 됐다는 석숭(石崇)은 낙양 서쪽 골짜기에 금곡원(金谷園)을 지어놓고 호화로운 시회(詩會)을 베풀면서 시를 짓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벌로 세 말의 술을 마시게 하였다는 일화로 유명한 인물, 그는 지금도 중국서 복(福)-녹(祿)-수(壽)의 삼선(三仙) 가운데 녹(祿)을 상징하고 있지만, 당대의 실력자 사마륜을 제거하려다 실패한 후 애첩(愛妾) 녹주(綠珠)와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전해지는데, 녹주의 미색을 탐하다가 거절당했던 사마륜의 측근 손수(孫秀)가 앙심을 품고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도 한다. 인생무상, 생전에 1백여명의 처첩과 8백여명의 하인을 거느리면서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렸던 석숭이지만 죽은 후엔 ‘금곡원의 벌주’만 인구에 회자되고 있지 않느냐는 이백의 은근한 경고(?)에 누군들 시를 제대로 짓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떠도는 인생 꿈과 같으니 기쁨이라고 해봤자 얼마나 되겠느냐고? ‘춘야연도리원서’를 한 번 읽으면 봄날의 흥청망청 야유회 정경이 떠오르지만 두 번 읽으면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공간-인간에서 최선을 다해 아름다운 삶의 의미를 찾아보라는 충고가 또렷하게 감지된다.
이백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를 상상해 그린 그림. 이백의 글에는 인생의 짧고 덧없음을 표현한 내용이 들어있다.
“歲歲年年人不同(세세년년인부동)”이라는 말이 있다. 옛 시구에서 먼저 나온 뒤 후대의 중국 시단에서 즐겨 썼던 말이다. 풀자면 “해마다 사람은 모두 다르다”는 뜻이다. 앞 구절에는 “해마다 피는 꽃은 서로 비슷해도(年年歲歲花相似)”라는 말이 등장한다. 세월이 흘러도 경물(景物)은 변함이 없지만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는 사람의 모습은 나날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라는 우리 옛 시조가 떠올려지는 대목이다. 그렇게 시간은 꾸준히 지나가고, 사람의 인생은 덧없이 흘러간다. 2014년의 시작을 알린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밑, 즉 세모(歲暮)에 이르렀다.
해를 가리키는 한자어는 年(년), 歲(세), 載(재), 祀(사) 등이 있다. 年(년)은 농작물 수확을 가리키는 글자로 처음 등장했다. 따라서 한자 단어 중 유년(有年)은 풍년, 대유년(大有年)은 대풍(大豊)을 가리킨다. 가을걷이, 즉 농작물 수확으로 1년이 지나감을 기억하면서 지금의 ‘해’라는 뜻을 얻었다.
歲(세)는 원래 太歲(태세), 즉 태양계 행성의 하나인 목성(木星)을 가리켰다.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주기가 11.86년이다. 지구에서 볼 때 매 해마다 특정한 구역에서 머물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목성의 위치를 견줘 해를 따졌다고 한다.
載(재)는 물건 등을 ‘싣다’의 뜻이다. 정확하게 어떤 이유인지는 추정키 어렵지만, 이 글자 또한 ‘해’라는 뜻을 얻었다. 천년에 한 번 맞을까 말까하는 기회를 이야기할 때 ‘千載一遇(천재일우)’라고 적는 경우다. 祀(사) 역시 원래는 ‘해’의 뜻이었으나, 나중에 왕조 차원이나 개인 가정에서 벌이는 ‘제사’의 뜻이 매우 강해져 지금은 쓰지 않는 편이다.
역대 중국의 최고 시인이라고 하는 이백(李白)은 이런 말을 남겼다. “무릇 하늘과 땅이라는 존재는 만물이 거치는 여관이요, 시간이라는 것은 영겁을 스쳐가는 나그네(夫天地者萬物之逆旅, 光陰者百代之過客)”라고 말이다. 제법 운치가 있어 보인다.
장자(莊子)가 인생을 바라보는 눈길도 다르지 않다. 그는 “하늘과 땅에서 살아가는 인생이란 마치 좁은 문틈으로 하얀 말이 지나가는(白駒過隙) 모습을 보는 듯하다”고 했다. 조그맣게 벌어진 문틈으로 하얀 말이 지나가는 속도야 그야말로 순식간(瞬息間)이다. 눈 감았다 뜨고(瞬), 들숨 날숨 한 번 들었다 나가는(息) 사이(間) 말이다.
매우 낭만적이었던 시인 이백(李白)은 “그러니 옛 사람이 촛불 켜들고 밤새 노닐었던 일은 다 이유가 있음이라”며 실컷 놀기를 권유한다. 촛불 켜들고 밤새 노니는 일은 한자로 秉燭夜遊(병촉야유)다. 전깃불로 밤이 대낮처럼 밝은 현대사회라 치더라도 그렇게 마구 밤길을 떠도는 일은 삼가는 게 좋다.
주저앉았다가도 훌훌 털고 일어나 길을 가는 게 인생이다. 휙~스쳐간다고는 하지만 인생은 등에 큰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일이다. 한자로 적으면 負重致遠(부중치원)이다. 짧은 인생, 시간 탓만 하고 있기에는 어딘가 허전하기 짝이 없다.
올해 세밑도 마찬가지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은 세제(歲除)라고 적는다. 여기서 除(제)는 ‘가다’ ‘바뀌다’의 뜻이다. 해가 바뀌는 마지막 날에 적합한 표현이다. 그 날 밤은 그래서 除夕(제석), 除夜(제야)라고 적는다. 밤새 뜬 눈으로 조심스레 해의 바뀜을 맞이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중국에서는 守歲(수세)라고 부른다. 조용하면서도 차분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자.
(황 양춘소아이연경 대괴가아이문장) 하물며 화창한 봄날이 아름다운 경치로 나를 부르고 조물주가 나에게 문장을 빌려줬음에랴
會桃李之芳園 序天倫之樂事
(회도리지방원 서천륜지락사) 복사꽃 오얏꽃 아름다운 동산에 모여 형제들끼리 즐거운 일들을 말하는데
群季俊秀 皆爲惠連 吾人詠歌 獨慙康樂
(군계준수 개위혜련 오인영가 독참강락) 여러 아우들준수하기가 모두 사혜련과 같은데 내가 읊는 노래만 강락후에 부끄러울 뿐이네.
幽賞 未已 古談 轉淸
(유상 미이 고담 전청) 그윽한 감상은 아직 끝나지 않고 옛 이야기는 갈수록 맑아지는데
開瓊筵以坐花 飛羽觴而醉月
(개경련이좌화 비우상이취월) 꽃으로 옥 자리 대신 깔고 술잔 날려 달을 취하게 하네
不有佳作 何伸雅懷
(불유가작 하신아회) 아름다운 작품이 없으면 어찌 고아한 회포를 펴리오
如詩不成 罰依金谷酒數
(여시불성 벌의금곡주수) 만약 시를 이루지 못한다면 금곡(金谷)의 술잔 수만큼 벌주를 내리리라.
<이백; 701년-762년>
인간(人間)의 삶이란 시작도 알 수 없고 끝도 알 수 없는 시간(時間)의 x축과 무한대로 확장하는 공간(空間)의 y축이 교차한 어딘가에 찍히는 한 점에 불과하다. ‘시간’이라는 말 또한 끝없이 이어지는 시(時)를 토막 낸 것에 불과하거니와, ‘공간’ 역시 허공(虛空)의 특정부분을 나눈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이라는 말 자체도 “사람은 사람 사이에서 사람다운 삶을 산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태어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 존재인 사람은 ‘간(間)’에서만 존재의 의미를 찾을 있는 바, 고대 중국인들이 시간-공간-인간의 삼간(三間)을 중시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고, ‘삼간’에서의 유한(有限)을 얼마나 유용하고 의미 있게 만드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고 믿었다. ‘시공(時空)’를 초월한다는 말도 그래서 생겨났다.
이백 초상 스케치
사람에게 있어서 ‘시간’은 출생과 사망 사이, ‘공간’은 그가 위치한 곳의 하늘과 땅 사이, ‘인간’은 그가 그의 시공에 머무르는 동안 만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이백(李白) 또한 그 삼간(三間)을 꽤나 의식했던 듯하다.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도 그런 의식의 표출로 보인다. ‘춘야연도리원서’는 이백이 복사꽃과 오얏꽃 만발한 봄날의 정원에서 형제와 친족들이 모여 시회(詩會)를 여는 것을 기념하여 지은 글, ‘천지’를 만물이 묵어가는 여관에 비유하고 ‘세월’은 그 여관에 묵어가는 나그네에 지나지 않는다는 통찰이 너무 기발하여 감탄을 금할 수 없거니와, 밤에 촛불을 들고서라도 짧은 인생의 의미를 실컷 찾아보자는 너스레 깨달음이 너무 진지하여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미려한 문장도 일품이지만 시재(詩才)가 뛰어나 강락후(康樂候)에 봉해졌던 남송(南宋) 시인 사혜련(謝惠連)이나 진(晋)의 거부 석숭(石崇)의 금곡원(金谷園) 고사를 천의무봉(天衣無縫)으로 차용하여 흥취를 고조시키는 이백의 글 솜씨에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는 말이 절로 떠올려진다.
‘춘야연도리원서’를 감상할 때 많은 사람들이 ‘開瓊筵以坐花 飛羽觴而醉月(개경련이좌화 비우상이취월)’을 “옥자리 깔고 꽃 마주하고 앉아 술잔 날려 달빛에 취하다”라고 해석하지만 그건 시적(詩的) 감흥(感興)을 무시한 풀이라는 눈 흘김을 받아 마땅하다. 그 구절 해석의 열쇠는 앞 구절의 ‘이(以)’와 뒷 구절의 ‘이(而)’, ‘以’는 ‘-로서’라는 의미이므로 ‘開瓊筵以坐花(개경련이좌화)’는 진짜 옥으로 만든 자리를 깔았다는 게 아니라 ‘사람이 깔고 앉을 수 있을 만큼 키 작은 꽃’ 즉 ‘좌화(坐花)’를 ‘옥자리’ 삼아 깔았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게 옳고, ‘飛羽觴而醉月(비우상이취월)’은 비(飛)와 취(醉)가 동사로 쓰이고 그 사이에 ‘그리고’라는 의미의 접속사 ‘而’를 끼워 넣은 것이므로 “깃털 모양의 술잔[羽觴]을 날려 달을 취하게 하다”라고 해석하는 게 맞다. 시적 감흥을 모르는 사람들은 “달을 취하게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입을 삐죽거리겠지만 “그렇다면 술잔을 날리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고 되물으면 뒤통수 긁적거릴 것임을 믿어마지 않는다.
‘罰依金谷酒數’도 씹으면 씹을수록 인생의 참맛이 우러나오는 명구(名句)다. 진(晉)나라 때 형주자사를 지내면서 장사꾼들과 결탁하여 큰 부자가 됐다는 석숭(石崇)은 낙양 서쪽 골짜기에 금곡원(金谷園)을 지어놓고 호화로운 시회(詩會)을 베풀면서 시를 짓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벌로 세 말의 술을 마시게 하였다는 일화로 유명한 인물, 그는 지금도 중국서 복(福)-녹(祿)-수(壽)의 삼선(三仙) 가운데 녹(祿)을 상징하고 있지만, 당대의 실력자 사마륜을 제거하려다 실패한 후 애첩(愛妾) 녹주(綠珠)와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전해지는데, 녹주의 미색을 탐하다가 거절당했던 사마륜의 측근 손수(孫秀)가 앙심을 품고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도 한다. 인생무상, 생전에 1백여명의 처첩과 8백여명의 하인을 거느리면서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렸던 석숭이지만 죽은 후엔 ‘금곡원의 벌주’만 인구에 회자되고 있지 않느냐는 이백의 은근한 경고(?)에 누군들 시를 제대로 짓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떠도는 인생 꿈과 같으니 기쁨이라고 해봤자 얼마나 되겠느냐고? ‘춘야연도리원서’를 한 번 읽으면 봄날의 흥청망청 야유회 정경이 떠오르지만 두 번 읽으면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공간-인간에서 최선을 다해 아름다운 삶의 의미를 찾아보라는 충고가 또렷하게 감지된다.
첫댓글 잘 읽고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잘 배웠습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어제 가입한 새내기입니다.
좋은글을 자세히 풀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천히 읽으면서 늘 배우겠습니다.^^
蓋將自其變者而觀之, 天地曾不能以一瞬(아마 변한다는 관점으로부터 사물을 보게 되면 천지간의 모든
만물이 한순간도 변하지 않음이 없다.: 우주만상을 동적인 개념으로 보면 어느 것 하나 가만히 있는 것이 없고,
불변의 개념으로 보면 천지만물은 하나다.) 蘇軾의 前赤壁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