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신 굴원 (고우영 십팔사략 中)
중국에서는 단오가 되면 대나무통에 쌀을 담아 강에다 뿌리는 풍습이 있다고 합니다.
아까운 쌀을 물에 뿌리는 이 이상한 풍습은 왜 생겼을까요?
지난 편지에서 소진과 장의의 합종연횡을 얘기해드렸죠?
초강대국 진나라가 있고 제나라를 중심으로 한 나머지 나라들의 연합이 대립하고 있었는데,
그 남쪽에 있는 초나라가 일종의 캐스팅보트 역할을 했습니다.
초나라가 진나라로 붙으면 진나라가 군림하는 연횡책이 승리하게 되고,
초나라가 제나라쪽으로 붙으면 진나라대 나머지가 대립하는 합종책이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나라의 정치인들도 위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초강대국 진나라에 붙어야 한다 vs 제나라연합으로 붙어야 한다.
오늘의 주인공 굴원은 제나라연합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유는?
강대국에 붙으면 그 나라의 종이 되고, 연합과 손을 잡으면 당당한 독립국가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진나라 편에 붙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인들에게는 굴원이 눈엣가시였습니다.
학식과 인품이 훌륭해서 백성의 사랑을 받고 임금으로부터도 신임받는 굴원이었기에 더 미움이 심했죠.
그래서 진나라를 섬기는 정치인들은 온갖 모략과 모함으로 임금을 꾀어내서 결국 굴원을 파직시킵니다.
그리고 초나라는 진나라를 섬기는 정치인들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초강대국 진나라에 붙는다는 초나라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대단히 잘못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힘을 얻은 진나라가 자기에게 딸랑대는 초나라를 아주 우습게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초나라는 왕이 진나라에 볼모로 잡혀가서 객사하고,
결국은 진나라로부터 함락당해 선왕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국토가 짓밟히는 굴욕을 당하게 됩니다.
시골에 내려가서도 밤낮으로 나라걱정만 했던 굴원은 그 소식을 듣고 울면서
<애영 哀郢>이라는 시를 남깁니다. 후세에 길이 남아 이태백, 두보 등에게 큰 영향을 끼친 명시입니다.
멱수와 나수가 합쳐지는 멱라라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슬픔에 방황하던 굴원은
‘세상이 흐리면 함께 흐려지면 됩니다. 모두 취해있으면 대부님도 취하십시오.’라는 주위의 권유에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럴 바라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라고 대답하고
커다란 돌을 안고 스스로 물에 뛰어들어 죽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근처 어부들이 뛰쳐나와 굴원을 건지려 이리 뛰고 저리 뛰었으나
소용돌이 치는 물속이라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부들은 슬퍼하며 물고기들이 그의 살을 뜯어먹을까봐 집에서 쌀을 들고 나와
물에 뿌렸습니다. 그 쌀을 먹고 굴원의 시체는 건드리지 말라는 마음에서였죠.
굴원이 물에 빠져 죽던 그 날이 음력 5월 5일이었고,
그때부터 대나무통에 쌀을 넣어 물에 뿌리며 굴원의 넋을 달래는 풍습이 생겼습니다.
용 모양의 배를 타고 시합을 하는 풍습도 굴원의 혼을 건지자는 그런 취지에서 시작된 것이라 합니다.
(출처:장미와 찔레)
첫댓글 고전에서 많은 교훈을~~ **^^
아하... 새로운 상식을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