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광(睟光)이 서너 살 때 어려서 아는 게 없었지만, 국조(國朝)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훑어보고서 박사공의 성명을 알고는 속으로 흠모하였다. 조금 자라서는 곧 박사공의 손자인 효성씨(孝成氏)와 벗이 되었는데, 정려(旌閭)가 빛나는 그 댁 문을 지날 때마다 우러르며 엄숙히 경모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박사공이 작고한 지 이제 118년이 되었는데 효성씨가 또 공의 묘갈명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그가 먼 조상을 추모하는 데 독실함이 이와 같으니, 그 역시 효성스럽다 이를 만하다. 수광이 오랜 세교(世交)를 입은 만큼 어찌 감히 문사에 능하지 못하다고 사양하겠는가.
삼가 살펴보건대, 공은 휘는 주신(舟臣)이고 자는 제옹(濟翁)이며 명망 있는 진주 정씨(晉州鄭氏)로,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공대공(恭戴公) 휘 척(陟)의 손자이자 승정원 좌부승지로 이조 참판에 추증된 휘 성근(誠謹)의 아들이다. 모친 문화 유씨(文化柳氏)는 공조 정랑 휘 효장(孝章)의 따님이다.
공은 성화(成化) 임진년(1472, 성종3)에 태어났다. 성균관 생원으로서 홍치(弘治) 신유년(1501, 연산군7)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에 선발되어 들어가 박사로 승진하였다. 갑자년(1504)에 참판공이 포악한 화(禍)를 만나 졸하자, 공은 가슴을 치고 울부짖으며 끊임없이 곡하였고, 물 한 모금 입에 넣지 않은 것이 엿새가 되자 치아가 모두 빠지고 손가락이 다 덜렁거려 목숨을 잃게 되었으니, 나이가 겨우 33세였다.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비는 충절에 죽고 아들은 효성에 죽으니, 그 죽음이 또한 영광스럽다.” 하니,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가슴 아파하였다. 광주(廣州) 치소(治所) 서쪽 갑좌경향(甲坐庚向) 언덕에 안장하니, 선영(先塋)에 쓴 것이다. 공이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공의 언론(言論)이나 지향(志向)은 시대가 멀어 자세히 알 수가 없고, 그저 가승(家乘)에서 한두 가지를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공은 대범하고 중후하며 풍모가 아름다워 사람들이 향그런 난초와 고결한 옥에 비유하였으며, 심지어 서로들 “그릇되고 편벽된 마음이 속에 싹트는 순간 제옹을 한번 생각하기만 하면 흠칫하여 사그라든다.”라고 하였으니, 사람들의 경모(敬慕)를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당시 참판공이 강직함과 과감한 직언으로 폐주(廢主 연산군(燕山君))를 거슬려 쌓인 노여움이 터지기 전이었는데, 공이 한번은 참판공에게 사사로이 여쭙기를 “주상께서 황란(荒亂)하여 화가 장차 닥칠 텐데 어찌 속히 떠나지 않으십니까?” 하자, 참판공이 “내가 선조(先朝)의 은혜를 받은 것이 두터우니 의당 목숨을 바쳐야 할 것이요, 이런 지경에 이르러서는 떠날 만한 의리가 없다.”라고 답하였으니, 참판공은 본디 목숨을 바칠 작정을 한 것이지만 공의 선견지명과 탁월한 식견 또한 아무나 따라잡을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아, 공이 한번 목숨을 바침으로써 강상(綱常)을 부지하여 우주에 게시해서 찬란하게 빛나 백대(百代) 후에 자식 된 이들이 모두가 본받아 흥기하는 바가 있게 되었으니, 국가의 풍교(風敎)에 관계되는 비중이 클 것이다. 이 또한 위대하지 않은가!
공의 초취(初娶) 단양 우씨(丹陽禹氏)는 칠원 현감(漆原縣監) 배창(拜昌)의 따님이고, 계취(繼娶) 장수 황씨(長水黃氏)는 이조 참판 사효(事孝)의 따님이다. 후사가 없어 황씨가 공의 아우 판관(判官) 매신(梅臣)의 아들인 참봉 원린(元麟)을 데려다 후사로 삼았다.
참봉이 아들 하나를 낳으니 바로 효성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서 호군(護軍)이 되었다. 호군이 아들을 낳으니, 장남은 문과에 합격한 백창(百昌)으로 전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이고, 차남은 진사인 백형(百亨)이다. 딸은 사인(士人) 김이경(金以鏡)에게 출가하였다.
백창은 1남 1녀를 낳았고, 백형은 1녀를 낳았고, 이경은 2남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정씨는 공대공 이후로 청백(淸白)함으로 현달한 지위에 올랐고, 충성과 효성을 자손들에게 가르쳐 참판공 이하 호군군에 이르는 4대(代) 동안 충효로 정려된 분이 여섯이다. 전후 행적이 모두 도첩(圖牒)에 실려 있어 세상의 아녀자와 어린아이들이 익히 보고 입으로 읊지 않는 이가 없으니, 전에 없던 일이다.
이제 봉교 형제 또한 모두 문학과 행실로 그 가업을 이어가고 있으니, 이 이후로 선조를 잘 본받아 누가 되지 않도록 하여 그 아름다운 발자취를 이어갈 수 있는 자손들이 또 장차 천만세가 지나도록 끊이지 않을 것이니, 경모할 만하도다.
이에 재배(再拜)하고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실의하여 짓밟힌 삶이었지만 / 維罔罔以轢
뒤에 와 혁혁하게 펴졌도다 / 維赫赫以舒
따질 수 없는 것은 명이지만 / 其不可訟者命
속일 수 없는 것은 이치로다 / 而其不可誣者理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