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사노의 두번째 일기 ]
어제 아침에 안 떠지는 눈을 어거지로 떴다.
낑낑대며 이불을 둘둘 말아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퉁퉁 부은 눈을 한참 동안 비벼댔다.
일어나자. 일어나자.
나를 꼭 닮은 아이 역시 거실 소파에서 남은 잠 기운을 잡고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고 있다.
아침이 참 힘들다. 하늘이 주신 게으름이란 선물을 받은 나는 더더욱 힘이 든다.
다른 날 같으면 부시시한 머리와 퉁퉁 부은 눈으로 아이 유치원 가는 길을 좇다 다시 이불 속으로 쏘옥 이지만, 오늘부터는 당분간 바이바
이다.
아침이 참 힘들 사람이 또 있다. 나만큼이나.
빈 속에 잠이 깨면 속이 울렁거린다. 그 울렁증이 좀 가시면 쓰라리다. 그리고 그 쓰라림이 좀 가시면 기운이 좀 빠진다.
공복을 즐기는 것도 잠시. 귤을 하나 까먹고 그 새콤달큰함이 가시기 전에 부시럭 부시럭 무언가를 또 밀어넣는다.
나는 먹는 걸 좋아한다.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먹는 거는 더 좋아한다.
내가 알기로 그도 그렇다.
먹는 걸 나만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만들어주고 또 그것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그가 참 행복해 하던 기억이 내게 있다.
어제 대학로에 갈 준비를 하다가 잠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무언가를 싸가지고 갔으면 했다. 기왕이면 따뜻하고 달달하며 매콤한 무언가를
.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나는 새삼 깨달았다. 그 기억의 의미를.
하루빨리 그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나 또한 그를 사랑하는 다른 이들과 함께 그 행복을 나누고싶다.
( 2003.11.26. susano )
[ 이야기 하나 - 믿고 또 믿는...... ]
1.혜화역 4번 출구.
기다림을 위한 작은 공원에는 나무가 많다.
거짓말이라고?
아니. 그곳에는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킨 커다란 선배 나무도 있고, 사람들의 작지만 뜨거운 마음을 지고 걸고 있는 새내기 소망나무도 있
고,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좀 더 밝게 할 사람 나무들도 많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그 나무들. 그곳에는 나무가 많다.
2.나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사람들, 그것도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말을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밝은 성격이라 강조하지만 그 일은 참 어렵다.
사람들에게 파병반대를 위한 서명을 해달라고 애써 쑥스러움을 감추며,
타고난 듯이 소리쳐보지만,무안하다.
감추려는 마음만큼 달아오르는 얼굴.
소리가 없는 곳에 서서 가느다란 목소리에 힘을 실어 외친다. 아름답다.
붉어진 얼굴로, 가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 소리를 만드는 그녀들. 그녀들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3.혜화역의 새내기 소망나무에 잎이 달리고 꽃이 핀다.
피던 꽃도, 곱게 물든 잎도 다 떨어지는 초겨울.
모진 바람을 이겨내고 사람들 마음을 거름 삼아 잎이 나고 꽃이 피는 그 나무. 우리의 소망나무.
'대학가게 해주세요, 좋은 남자친구 생기게 해주세요, 좋은 엄마 되게 해주세요, 발레리나 되게 해주세요.'
소망이 꽃이 되어, 잎이 되어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힘들것이다.
땅에 뿌리도 내리지 못하고 작은 화분에 갇혀 하루 종일 크고 작은 종이 조각을 달고 있으려면.
그러나, 나는 오늘도 믿는다. 그 마음이 기운되고 양식되어 평화를 위한 밑거름 되리라는 것을.
소망나무를 지키고 키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시간을 쪼개고 쪼개 할 수 있는 만큼의 일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스치듯 우연히 소망나무를 만나 마음에 씨앗을 심기도 한다.
종일을 굶어가며 사람들의 마음에 씨를 뿌리기도 하고
빠듯한 사회생활에 쪼이고 깨인 마음 스스로 다독이며 나무지기에게 웃음을 주는 사람도 있다.
소망나무를 가꾸다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모두 나와 다른 사람들. 다르지만 같은 사람들.
때로는 나무지기들이 안타까워 그리 힘든 일을 하지 말라는 사람도 있고
언제 열매를 맺을지 모르는 나무에 매달리지말고 그냥 편히 살라는 사람들도 있다.
힘이 빠질때도, 답답해 화가날 때도, 안타까워 슬플 때도 있다.
하지만 그 마음 나와 달라 뭐라 말 할 수는 없어도
한 켠에 자리잡고 있을 그 마음을 믿는다.
약하지만 모진 목숨이, 하늘의 뜻이 아닌 일에 사그라져 가는 것에 반대하는 그 선한 마음을.
나와 목소리는 달라도 그 마음 뿌리는 소망나무에 닿아있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아니지만.
그 언젠가는 꼭 닿을거라 믿고 또 믿는다.
[ 두번째 이야기 - 꽃보다 아름다운 것 ]
여기 한 어머니가 있습니다.
제가 한대 때리기보다는 그냥 한대 맞아버리고 마는.
남들 다 취직할 때 아이들에게 들려 줄 이야기를 가슴으로 울어가며 찾아다니는.
남들 다 불경기라며 제 사정에 빠져 헤메고 있을 때 먼 곳 아이들이 이유없이 죽어가는 걸 앉아서 볼 수 만은 없다며 살아 돌아올 수 없을
지도 모르는 그 먼 나라 전쟁터로 떠나버리는.
모진, 마음고생하고 빠짝 말라 돌아와서는 또 그 아이들 지키겠다고,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이라도 하겠다며 단식하여 뜻을 지키려
는.
어머니 속을 한없이 태우는 그런 아들을 가지고 있는, 한 어머니가 있습니다.
여기 한 아들이 있습니다.
유난히 큰, 송아지 눈망울을 한 비쩍 말라 보기만해도 가슴이 아픈 아들을 둔, 당신을 닮아 더 가슴아린.
남들 다 다른 사람과 같은 길을 가라며 등 떠밀 때 다른 길을 가는 아들을 말없이 지켜봐주는.
먼 나라로 뜻을 따라 간 아들을 걱정 안되냐며 괴롭히던 사람들 속에서도 아들을 끝까지 믿으며,
비록 겉으로는 의연하였어도 속으로 까맣게 가슴앓이를 했을.
속을 까맣게 태우고 나서야 돌아온 아들.
뜨신 밥, 당신 마음껏 먹여보지도 못했는데 또다시 뜻을 위해 단식을 하겠다는 아들.
그런 아들을 눈물 가득 담은 눈으로 웃으며 말없이 바라보며 애써 미소지으시는.
스스로를 태워 그 빛으로 그 아들이 기댈 언덕 만들어주는 어머니를 가진, 한 아들이 있습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것이 사람이랍니다.
아름다움이 뭔지,사람이 뭔지, 꽃이 뭔지
저는 이제까지 몰랐습니다.
아름다운 이 모자는 제게, 또 사람들에게
스스로의 삶으로 깨달음을 주고 있습니다.
혜화역에도,광화문에도,
산골 작은 기차역에도
시골 장터에도, 작은 바닷가에도
그리고 지금 우리 옆에서도 피어납니다.
11월 초겨울 끝자락
지천에 아름다운 사람 꽃이 피어납니다.
-2003년 11월 25일 파병을 반대합니다.
이루마의'인디고' (출처: 벅스뮤직)
첫댓글 가슴을 파고드는 한 줄기 햇살 같은 스사노의 글과 그림. 생각난다. 그날 스사노가 사진 찍으며 난테 이렇게 말한 거. "언니... 그늘져요. 좀 비켜주세요. " ...ㅠㅠ
불쌍한 마중물
감동입니다.. 저도 일 끝나면 한번 들려 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