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 권 제10 응신천황 25년
백제(百濟)의 직지왕(直支王. 전지왕)이 훙(薨)하였다. 그 아들 구이신(久爾辛)이 왕이 되었다. 왕은 나이 어렸었다. 목만치(木滿致)가 국정을 잡았다. 왕모와 간음하여 무례한 일이 많았따. 천황(天皇)이 듣고 불렀다(백제기에 말하였다. 목만치는 목라근자木羅斤資가 신라를 칠 때 그 나라의 부인을 얻어서 낳은 바다. 그 부의 공이 있으므로 임나任那일을 도맡아 보앗다. 우리나라에 오고 귀국에 왕래하였다. 제도를 천조에서 배우고, 우리나라의 정사를 집행하였다. 권세가 성하였따. 그런데 천조가 그 포악한 것을 듣고 불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비유왕조
비유왕(毗有王)은 구이신왕의 맏아들이다.<혹은 전지왕의 서자(庶子)라고도 하였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조
개로왕(蓋鹵王)<혹은 근개루(近蓋婁)라고도 하였다.>은 이름이 경사(慶司)이고 비유왕(毗有王)의 맏아들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주왕조
문주왕(文周王)<혹은 문주(汶洲)라고도 썼다.>은 개로왕(蓋鹵王)의 아들이다. 처음 비유왕(毘有王)이 죽고 개로가 왕위를 잇자 문주는 그를 보필하여 지위가 상좌평(上佐平)에 이르렀다.
- 일본서기 응신천황 25년조를 구이신 파트에서 ‘王年幼‘라고 나옵니다. 구이신왕이 나이가 어려서 목만치가 정권을 잡았다는 것은 최소 구이신이 15세 이하의 소년이라고 추정이 됩니다 (비슷한 기사가 일본서기 웅략천황 23년 4월에 나옵니다. 동성왕이 젊고 총명 즉 ’幼年聰明’ 이라고 나옵니다). 그렇다면 비유왕과 구이신왕의 관계는 부자 관계라기 보다는 형제 관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구이신이 왕위에 오른 나이를 15세라고 보면 죽었을 때는 대략 23세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유가 구이신의 동생이라면 나이는 10대라고 보입니다. 비유 역시 왕위에 올랐을 때는 그 나이가 10대 후반 정도라고 생각됩니다. 비유왕의 재위기간은 29년입니다. 그렇다면 비유왕은 30대 후반~40대 초반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비유왕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왕후를 얻어 개로왕을 낳았다하더라도 개로왕은 최소 20대 중후반입니다. 그리고 이 개로왕이 문주를 얻었다면 개로왕이 등극했을 때, 문주의 나이는 10대 정도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어린 나이에 개로왕을 보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 여기서 저는 비유왕을 구이신왕의 동생이라고 설정했습니다. 삼국사기에서는 전지왕의 서자라고만 나오니 비유왕이 구이신왕의 형이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구이신왕-비유왕의 관계는 동성왕-무녕왕과 비슷하다고 봅니다. 일본서기 웅략천황 23년 4월의 기록을 보면 동성왕이 곤지왕(昆支王)의 5인의 아들 중 제2 말다왕(末多王)이라고 했으니 두 번째 아들이라고 봅니다. 무녕왕은 동성왕의 아들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백제신찬이나 일본서기에서는 개로왕의 아들이라고 나오지만 제 생각에는 곤지의 첫째 아들이라고 봅니다. 나중에 무녕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개로왕의 아들이라고 조정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
첫댓글 전지왕이 아신왕이 죽은 후 왜국에서 귀국했을 때 부인인 팔수부인이 임신을 하고 있었고 그 해에 아이를 낳았으니 훗날의 구이신왕이라고 했습니다..여기서 우리는 구이신왕이 405년에 태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그리고 구이신왕이 죽을 때 겨우 23세이니 비유왕이 그의 아들일 수는 없습니다..삼국사기서도 혹은 서제다 라고 기록한 부분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건 저도 글에서 언급을 했습니다만 .. 인종대왕님 댓글을 보고 글에서 뭔가 실수한 부분이 있어서 다시 보게 ?네요;;
그리고 참고로 비유왕이 구이신왕의 맏아들로 기록된 이유는 삼국사기에서 자주 보이는 정변의 당사자의 눈속임입니다..뒤에 전지왕의 서자라고 하는데 알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얼버무리고 있습니다..또한 개로왕과 문주왕과 곤지는 한 형제이며 동성왕과 무녕왕은 모두 곤지의 아들이고 다만 이들은 이복형제입니다..무녕왕이 형이 됩니다..무녕왕이 형임에도 삼국사기서 무녕왕이 동성왕의 둘째아들이 된 이유는 동성왕은 정부인의 아들이고 무녕왕은 첩의 아들이기 때문이죠..개로왕의 동생 문주왕과 곤지가 그의 아들로 기록된 부분과 같이 기록시 혼동된 부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무녕왕이 개로왕의 아들이라는 일본서기의 기록은 무녕왕이 동성왕의 뒤를 이을 자격이 없었기에 우선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장치를 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분파의 시작인 개로왕의 아들이라고 덧붙인 것입니다..
무녕왕이 첩의 자식이라는 것은 근거는 무엇인지? 곤지의 두 아들인 사마와 모대 중에 모대가 먼저 왕위계승권자로 선택된 것은 사마가 굳이 첩의 자식이라고 보기보다는 모대보다 나이가 많은 사마가 국내사정에 밝음으로써 킹메이커들인 귀족들이 조종하기 어렵지만 모대는 나이가 어림으로써 비교적 조종하기 쉽기 때문에 왕위에 옹립시킨 것 같습니다만
무녕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에도 둘째아들로 기록한 것에 따른 추측입니다..따지고 보면 앞에 것들도 추측일 뿐 근거가 있다고 보기는 힘들죠..꼭 첩의 자식까지는 아니더라도 동성왕이 무녕왕보다 서열상 앞에 있었을 것입니다..물론 왕위에 오를 자격은 님이 말씀하신대로 나이가 어려 조종하기 쉽기 때문이었겠죠..물론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일본서기를 보면 모대가 곤지의 5인의 아들 중 제2 말다왕이라고 나와있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모대는 곤지의 두번째 아들이고 또한 백제신찬을 통해 보자면 동성왕이 무녕왕보다 왕위계승상 선두에 있다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왕위계승 1인자인 무녕왕 대신 2인자인 동성왕이 즉위함으로써 무녕왕은 왕위에 오를 때 이러한 것을 숙지하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스스로를 개로왕의 아들이라고 기록한 것이라고 봅니다.
근데 말은 이렇게 해도 정말 무녕왕이 동성왕의 아들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록상 확실하다 이런 것도 없고요..다만 기록을 따라 최대한 근접하게 가려고 노력하는 것일 뿐..동성왕이 즉위한 이유가 어려서 라고 추측하지만 479년에 동성왕이 즉위할 때 무녕왕도 겨우 18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무녕왕이 얼마나 뛰어나보여 당시에 꺼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본서기에 전하는 동성왕도 나이가 조금 어릴 뿐 나이에 비해 똑똑하다는 기록은 있는 것으로 압니다..나이가 기준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드네요..무녕왕과 동성왕은 나이차가 많아야 4~5세 차이였습니다..왕위계승에 걸림돌로 보이지는 않고요..
일본서기에서는 동성왕에 대해 유년총명이라고 간략하게 표기했습니다. 제 생각에 그것은 단순한 표현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녕왕과 동성왕의 나이차가 겨우 4~5세 밖에 나지 않는다는 근거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일본서기에서는 단순히 유년이라는 표현만을 썼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모대가 왕위에 올랐을 때 나이가 15세 이하라고 추정만 할뿐입니다. 모대의 나이가 확실히 나온 것도 아닙니다.
본문내용과는 관련없지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에 대해 보면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고, 장성하여서는 뛰어 났으며, 큰 지략이 있었다'라고 기술했고 태조왕에 대해서는 '왕은 나면서부터 눈을 떠서 볼 수 있었고 어려서도 [남보다] 뛰어났다.'라고 기술했습니다. 일본서기에서 동성왕에 대해 '유년총명'이라고 기술한 것은 실제로 동성왕이 어린데도 총명할 수도 있지만 단순한 기록상의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어차피 기록자체가 부족 혹은 없고 거의 추측해야만 합니다..근거를 말할 수도 없습니다..동성왕이 14세 정도라고 할 근거도 없지만 그보다 더 어리다고 할 근거 역시 없습니다..총명했다는 것도 실제 총명해서 그렇게 기록한 것인지 아닌데도 그저 기록한 것인지 진위여부는 알 수가 없습니다..동성왕이 그저 조종하기 쉬워서 즉위를 시켰는지 그래도 무녕왕보다 서열상 앞에 있으니 즉위시킨 것인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확실한 기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정도의 의견 정도는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분이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
그건 저도 숙지하고 있는 점이고 제 글에서도 그에 대한 언급을 짧게나마 했습니다. 저 역시 동성왕과 무녕왕은 부자관계이기 보다는 형제관계로 보고 있으며 또한 무녕왕을 개로왕의 아들로 설정한 것은 정통성확보차원에서 그런 거라고 생각됩니다.
제도를 배웠다는 해석은 이상합니다. 제(명령)을 받들어가 아닌가 합니다.
설득력있는 추정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