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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일 [연중 제17간 목요일]
마태오 13,47-53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 구분법
오늘 복음에서 심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비유 말씀으로 어부가 물고기를 거두어들여 어떤 종류는 거두어들이고 어떤 종류는 버린다고 하십니다.
내가 어떤 물고기일까를 알아보기 위해 일반적으로 어떤 물고기들이 거두어들여지고
어떤 물고기들이 버려지는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우선 버려지는 물고기들의 특징을 봅시다. 그것들은 맹독성이 있거나 가시가 많거나 잡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사람이 손쉽게 먹기 어려운 이런 물고기들은 사실 다른 물고기들에게도 천적이 없습니다.
사람이 먹기 어려우면 다른 물고기들도 먹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복어를 볼 수 있습니다.
복어는 지금 양식을 해서 독성이 없이 잘 먹기는 하지만, 예전에 복어가 그물에 들어왔다면 어떨까요? 처음엔 분명 버려졌을 것입니다.
복어는 물이나 공기를 삼켜 몸을 부풀려 몸을 더 크게 만들고 삼키기 어렵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부풀어 오를 때 직립 되는 가시를 가지고 있어 추가적인 방어층을 형성합니다. 무엇보다 많은 복어의 조직에는 강력한 신경독인 테트로도톡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독소는 잠재적인 포식자에게 치명적일 수 있어 복어를 먹으려는 시도를 방해합니다.
라이온피쉬는 생긴 것은 멋있지만, 지느러미에 길고 독이 있는 가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가시는 잠재적인 포식자에게 독을 주입하여 극심한 통증, 마비, 심지어 사망까지 초래할 수
있습니다.
밝은 색상과 뚜렷한 패턴은 다른 동물에게 독이 있다는 경고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쓰는 라이온피쉬는 그것들을 걸러내고 식용을 하기에는 노력에 비해 얻는 것이 적어서 일반 어부들에겐 버려지기에 십상입니다.
스톤피쉬는 독과 위장술로 거의 공격을 받지 않으며 만약 밟거나 만질 경우 인간에게도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독이 있는 가시가 심각한 부상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어와 같이 특별한 조리법으로 요리하는 어렵고 복잡한 과정을 거치더라도 먹기를 원하지 않는 이상 인간에게는 쓸모없는 물고기입니다.
전기뱀장어를 볼까요? 전기 뱀장어는 강력한 전기 충격을 일으킬 수 있는 특수한 전기 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기뱀장어가 발생시키는 전기 충격은 잠재적인 포식자를 기절시키거나 죽일 수 있어 효과적인 억제 수단이 됩니다.
다른 물고기들에게 해를 끼치는 전기뱀장어는
사람에게도 그럴 수 있어 식용으로 잡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상어는 어떻습니까? 가장 강한 물고기이기에 천적이 없습니다.
즉, 상어는 먹이 사슬의 최상위에 있습니다. 그들의 강력한 사냥 능력과 자연 포식자의 부족으로 인해 그들은 서식지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이 상어의 지느러미를 먹기 위해 상어를 포식하기는 하지만, 생존을 위해 상어를 잡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다른 물고기들에게 먹혀 영양분을 줄 수 없는 독성이 강하고 다른 것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위험한 가시들이 있는 물고기는 인간에게도 이롭지 못하기에 버려지게 됩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만약 물고기가 인간이라면 다른 이들에게 먹혀 자신을 희생할 수 없는 사람은 하느님도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밥이 될 줄 아는 존재가 됨을 배우는 과정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해나가야 할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탈리아 복치아니코에서 출생한 성 카밀루스는 어렸을 때 부모를 여의고 성장해서는 군인으로서 터키인들을 대항한 베네치아를 위하여 전투에 참가하였고, 도박에 빠졌으며, 1574년경에는 무일푼의 신세가 되어 나폴리 거리를 방황하였습니다.
그는 몸이 건장하고 성미가 급한 사람이라 하는 일마다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몸에 독기를 품고 가시를 세우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가 1575년 우연히 신부님의 설교를 듣고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서, 일생 그를 괴롭힌 다릿병과 신세만 한탄할 게 아니라 자신도 이웃을 위해 아픔을 감수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좋은 물고기 탄생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이기는 방법의 하나로 다른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온 힘을 쏟았으며, 로마의 산 자코모 병원에 자원으로 봉사하다가 성 필립보 네리의 권고를 받아들여 1584년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병자들을 위한 봉사 수도회를 창설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죽는 날까지
자신보다 더 아픈 이를 돌보다 하느님께 갔습니다.
이웃을 위해 아파질 줄 아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좋은 물고기의 조건입니다.
물론 먹히는 것은 아픔입니다. 어차피 독과 가시를 품고 사는 것도 아픔입니다.
그것보다 이웃을 위해 아파질 줄 아는 것을 배운 이는 좋은 물고기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당신이 그러한 삶을 사셨듯이 밥이 되어주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도 좋아하실 것임을 아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밥이 되어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길은 먼저 이웃에게 밥이 되어주어 이웃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태석 신부님의 삶은 현대 한국 가톨릭 신앙인들에게 그 모범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1일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우리의 하느님은 두려운 분이 절대 아닙니다!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의 어린 시절은 요즘으로 치면 ‘엄친아’였습니다.
그는 요즘도 큰 도시이지만 그때 당시에는 규모면에서 세계적인 대도시였던 나폴리의 한 귀족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머리까지 비상해서 16세 나이에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젊고 유능한 불패(不敗)의 변호사로서 세간에 이름을 날리며 탄탄대로를 걷던 그였는데, 한번은 자신이 맡은 한 사건이 사소한 실수로 패소하는 쓰라림을 체험합니다.
승승장구하던 그가 세상의 쓴맛을 본 후 허망해하고 있던 차 그에게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 ‘이제부터 세상을 떠나 나를 따라오라.’
그는 아버지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세속 변호사의 길을 접고 주님의 변호사로 탈바꿈합니다.
1726년 서른 살의 나이에 사제로 서품된 알폰소는 우연히 나폴리의 뒷골목,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의 참담한 현실을 목격하고는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당시 통계에 따르면 나폴리 인구 100명당 1명이 사제 신분을 지니고 있어 사제 과잉 현상이 있었답니다.
수많은 사제들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대도시의 뒷골목을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제들이 안락한 대도시에서 부자들과 어울리는 동안 그는 도시의 변방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법학이면 법학, 신학이면 신학, 학문에 있어서 큰 성취를 이룬 그였지만 그의 가르침은 항상 단순하고 명료했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끝에 서 있던 사람들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강론은 단순했으나 기도생활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에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의 저술은 깊은 신앙의 핵심을 담고 있었지만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말로 썼습니다.
알폰소는 당시 교회 전반을 좌지우지하던 얀세니즘과 반성직주의에 맞서 자비하신 하느님의 크신 은총을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결코 두려운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찾아갈 때 마다 언제나 환대하시고 무조건 용서하사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두려워하기보다는 안심하십시오.
고해소에 들어가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안에 한없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대리자가 앉아계십니다.”
당시 많은 사제들이 신자들의 고해성사를 들은 후 죄질이 안 좋다고 여겨지면 사죄경을 낭독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그러나 알폰소는 고해소 안에서 항상 너그럽고 관대했습니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다정다감한 고해사제 알폰소를 통해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온 몸으로 느꼈습니다.
그는 극단적 경건주의로 인해 훼손된 고해성사의 원래 가치를 복원시켰습니다.
1950년 교황 비오 12세는 그를 고해사제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합니다.
알폰소의 자취가 남아있는 성화들을 보면 성인의 고개가 똑바로 서있지 않고 약간 삐딱합니다.
대체 왜 그런가 알아봤더니 그분의 한 평생은 참으로 혹독했더군요.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71세 되던 해 당시로서는 불치병인 류머티즘에 걸려 목이 심하게 굽어버렸습니다.
후에 각도가 조금 완화가 되기는 했지만 그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굽은 목 때문에 턱이 가슴을 눌러 항상 상처가 남아있었습니다.
그렇게 그의 한 평생은 다양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끊이지 않았던 힘겨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수도회 설립자로서 이런 저런 고민꺼리가 많았던 그는 만성 두통에 시달렸는데, 그럼에도 집필을 계속했습니다.
얼마나 두통이 심했으면 왼손으로는 차가운 대리석 조각으로 두통부위를 마사지하며 오른 손으로 글을 쓸 정도였습니다.
대성인이자 교회박사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알폰소도 우리가 겪는 이상의 고통과 시련을
겪으셨다는 것, 수시로 와 닿는 깊은 상처에 속수무책이었다는 것 그 자체로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고통이 너무 클 때는 만사 제쳐놓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때만을 기다렸습니다.
시련이 크면 클수록 더욱 성모님께 매달리면서 그분의 도움을 청했습니다.
탁월한 성모 신심의 소유자였던 그에게 성모님께서도 많은 중재와 도움을 베푸셨습니다.
성모님의 전구로 그는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장수했습니다.
그는 자주 성모님과 깊이 통교하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성모님을 사랑한 성인들’, 생활성서)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강론>
(2024. 8. 1. 목)(마태 13,47-53)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종말’은 지금 진행 중입니다.>
“또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13,47-50).”
1)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4,19).
사람을 낚는다는 말이 나쁜 뜻으로 사용될 때가 많은데, 예수님의 말씀에서는 ‘구원’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물’은 죽음과 멸망을 상징하고, 사람을 물 밖으로 끌어내는 것은 ‘구원’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그물의 비유’에서, 그물을 바다에 던지는 것은 선교활동을 상징합니다.
‘온갖 종류의 고기’ 라는 말은, 좋은 뜻으로 생각하면 교회 공동체 구성원의 ‘다양성’을 나타내는 말이고, 다른 뜻으로 생각하면 교회 안에 의인들과 죄인들이 섞여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표현만 보면, 그물을 아무렇게나 던져서 닥치는 대로 고기를 잡는 것으로, 즉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지 않고 아무나 다 교회에 받아들이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닙니다.
처음에 복음을 선포할 때에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선포하지만, 아무에게나 세례를 주는 것은 아니고, 복음 선포에 응답하는 사람, 즉 신앙생활에 대한 각오와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만 세례를 줍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예비신자 교리 교육을 충분히 한 다음에 신중하게 세례성사를 집전합니다.
그렇다면, 그물 속의 고기들은, 즉 신앙인들은
처음에는 다 좋은 신앙인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서 좋은 신앙인으로 심판대에 서고, 어떤 이는 중간에 변절하거나 타락해서 나쁜 신앙인으로 심판대에 섭니다.
2) 종말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이미’ 시작되었고, 아직도 진행 중인 일이고, 마지막 날이 되면 완성된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지금 우리는 종말의 시대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라고 표현했습니다(마태 3,10).>
그런데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모르니까 ‘지금’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명백하게 죄가 드러난 사람들만 하는 일이 아니라, 구원받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일입니다.
<비유에서 말하는 ‘의인들’은 ‘회개한 사람들’이고,
‘악한 자들’은 ‘회개하기를 끝까지 거부한 자들’입니다.>
3)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고 지금 진행 중이라면,
최후의 심판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데,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우리는 심판을 향해서 나아가는 중이다.”입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인생이 심판을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일 뿐이라면, 너무 힘들지 않은가? 신앙생활의 기쁨은 어디에 있는가?” 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말하는 ‘심판’은 꼭 처벌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구원을 하기 위한 심판도 포함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앞에서 말한 ‘심판을 향해서 나아가는 중’이라는 말은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중’이라고 바꿀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끊임없이 회개하면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죄 속에서 살면서도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멸망을 향해서 나아가는 중입니다.
<따라서 심판의 결과는 각자 자신이 선택하는 셈입니다.
심판관이신 하느님(예수님)께서 구원이나 멸망을
‘선고’하시기 전에, 각 개인이 스스로 구원과 멸망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울며 이를 가는” 상황도 지금 이루어지는가?
인간 세상에는 죄 속에서 살면서도 정말로 마음 편하게 잘 지내는 악인들이 많지 않은가?
양심이 마비되어서 죄의식도 죄책감도 없이 살고 있는 자들이 많다는 것은 분명한 현실인데, 그러나 그들도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되면 예외 없이 후회와 절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마지막 순간이 되기 전이라도 지옥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겉으로만 안 그런 척 할 뿐입니다.
4) 지금 신앙생활을 하면서 구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신앙인들은, 세례자 요한의 다음 경고를 새겨들어야 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 3,7ㄴ-8.10-12).”
자기 자신이 ‘쭉정이’인 줄 모르고 ‘알곡’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회개를 ‘남의 일’로만 생각할 때가 많은데, 바로 그 착각과 자만심은 대단히 위험한 함정이 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