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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 년을 두고 먹는 것
이제 새해다.
새해는 동지가 지나면서 시작된다.
그 다음날부터 매일 2분여씩 해가 길어지니 진정 새해다.
절기는 이제 마지막으로 대한(大寒)을 남기고 곧 입춘(立春)이 된다.
입춘은 새 한해 새 절기의 시작이니 그럼 입춘부터 진정 새해인가?
아니다. 그 24절기는 그냥 한 달을 두 쪽으로 나뉘었을 뿐, 진정 새해는 동지 다음 날 부터가 정답이다. 이래서 태양력(太陽歷)이다.
소위 사주팔자를, 한해의 신수를 봐준다는 명리학 에서도 한해의 시작을 동지로 본다.
이제 한해의 시작이 열렸다.
봄은 나물의 계절이다. 제일 먼저 시작되는 나물이 눈개승마이다. 눈을 헤치고 나왔다고 눈 개승마인가?
아니다. 누운 듯이 삐뚜름히 자란다고 ‘누운’ 곧 ‘눈’이 붙었고, 약제로 쓰이는 승마(升麻 Cimicifugae Rhizoma)와
비슷하나 승마가 아니기에 개승마라 하여 눈개승마가 되었다. 자라는 모습 때문에 삐둘배기, 삐둑바리로도 불린다.
5월 초가 되면 소백산 나물꾼들에게도 인기품이나, 모르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뿌리가 토사를 움켜쥐는 힘이 일반 풀의 50배는 된다고 하여 사방(砂防)공사에 인기 식물이 되었다.(강원도 인제) 성장 속도가 아주 빨라서 수확 적기를 놓치면 바로 억세져서 먹지를 못한다.
다섯 평이나 열 평 정도의 텃밭이 있으면 이 눈개승마를 몇 포기만 심어도 금방 번식하고, 가을에는 베어주고 봄에는 나물을 즐기고 여름이면 작고 흰 꽃이 피어나니 두루 두루 좋은 식물이다.
이를 데쳐서 깨소금, 간장 등으로 무쳐먹기도 하고 특히 말려서 묵나물로 만들면 일년 사시를 먹을 수 있다.
고사리와 두릅과 인삼맛이 다 난다하여 근자에 인기가 좋은 나물이다.
다음으로는 개두릅이 난다. 4월 중순이 되면 강릉 지방을 중심으로 엄청난 양이 난다. 이곳 사람은 일반 두릅 보다는 개두릅을 즐겨먹는다. 개두릅은 엄나무(혹은 음나무)의 새순으로, 가시가 많으나 간혹 가시가 없는 것도 있다. 가시는 연해서 아무 거슬림이 없다. 약간 쌉싸한 맛이 아주 유혹적이다. 상대적으로 맛이 싱거운 참두릅에 비할 바가 아니다. 역시 무침으로 많이 먹으나, 묵나물로 두고 먹어도 좋다. 약간의 물기가 있는 채로 얼려놓으면 해동(解凍)을 해도 그 맛이다.
다음으로 소개하고자 하는 나물은 양배추 움순이다.
초가을에 양배추를 수확하고 나면, 양배추를 따낸 자리에 다시 새순이 돋는다. 서리 내리기 직전에 이를 따서 데쳐서 먹는다. 비료나 농약을 칠 리가 만무하므로 청정채소이다. 양배추 보다 얇고 달아서 파란 움돋이가 참 맛있고 인기가 있다. 역시 약간의 물기가 있는 상태로 냉동 보관한다. 겨울에도 먹을 수 있는 푸른 잎 채소다.
다음엔 역시 고사리!
우리 모친은 평생 산나물이 좋아서 구십이 다 되도록 소백산의 높고 낮은 곳으로 나물을 따고 뜯기를 좋아하셨는데, 무엇 보다 고사리를 최고로 쳤다.
백이 숙제(伯夷 叔齊)의 고사(古事)에도 등장하는 고사리는, 지금으로부터 2억 5천만 년 전부터 지구에 등장한 양치식물이다. 탄광에서 심부탄(深部炭)을 캐다보면 운이 좋으면 고사리 화석을 볼 수가 있다. 굵기가 나무기둥만하다. 실제로 호주 불루마운틴에 가보면 전봇대 만한 고사리를 볼 수가 있다. 호주 고사리가 진화를 멈춘 채 살아있는 것은 아마도 대륙과 따로 떨어져서 진화의 과정이 달랐기 때문이리라.
소에게 꼴을 뜯기다 보면 고사리 또는 고사리와 비슷한 양치식물을 만나게 되는데 소는 이를 절대 먹지를 않고 피한다. 이는 소가 고사리의 섬유질을 소화시킬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고사리를 먹을 수 있는 것은 순전히 ‘불’ 덕분이다.
불을 사용하는 인간은 불로 익힘으로써 고사리의 섬유를 녹일 수 있었다. 위대한 발견이다.
고사리는 반드시 충분히 데쳐서 무쳐 먹거나, 주로 말려서 묵나물로 먹는다. 제사상에도 빠지지 않으며, 각종 고기와도 참 잘 어울리는 나물이다. 질긴 중국산은 下品이며, 통통하고 연한 강원도 정선산이 최고품이며 제주산도 먹을만하다. 전국 각지의 산야에 재배 또는 자생하나, 특히 산불이 난 산에서 제일 먼저 살아나오는 것이 고사리다.
이상으로 묵나물 얘기는 마친다. 이는 저장 식품이니, 주로 겨울이나 명절 때 때때로 먹는 나물이다. 제철 채소, 이를테면 남해안의 시금치(섬초)나 봄동, 미나리 등은 그때 그때 주문해서 먹으면 된다.
이제는 생선 이야기다.
나는 육류에 대한 편견은 없으나 일부러 찾아서 먹는 경우는 많지 않다. 돼지 목살 소금구이나 앞다릿살, 소고기의 특수 부위를 안주로 먹기는 하지만 한달에 몇 번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일 년 내내 거의 하루도 생선 반찬은 빠지는 법이 없으니, 그것은 바로 갈치와 조기다!
갈치는 여름부터 초겨울 까지 목포 여수 제주에 걸쳐서 나는 생선이다. 안강망이나 자망으로도 잡히나 낚시로 잡히는 것을 최고로 친다. 산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제주 은갈치 보다는 목포와 흑산도에 걸쳐서 잡히는 먹갈치가 가장 맛있다. 풀치(안강망으로 잡은 어린 갈치)급은 논할 가치가 없고, 4지(四指;손가락 네 개를 펼쳐놓았을 때의 넓이)는 되어야 먹을 만하다.
이를 한짝(18~20마리정도)을 사서 거두절미(去頭切尾)하고 은비늘은 제거하고 네토막으로 내고 소금간(반드시 왕소금 간수 뺀 것-잔소금은 짜서 안됨)을 하여 냉동보관한다.
비리지 않고 부드럽고 고소한 것이 두고두고 먹어도 제 맛이다.
다음으로는 조기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생선이다.
조기는 조기(助氣)라 하여 밥도둑으로, 입맛을 돋우어 밥을 잘 먹게 하여 기운을 도와준다는 생선이다.
과거에는 연평바다를 비롯한 서해안이 주산지였으나, 60년대부터는 산란지가 점차 남하하여 지금은 목포, 흑산도, 추자도, 제주도 일대가 주산지이다.
나의 유일한 이모 한분이 지금도 인천에 계신데, 6,7십년대에는 김장철이 되면 생조기 한 드럼을 동인천 역에서 풍기로 보내시곤 했다. 이 생조기를 통째로, 아니면 두어 토막으로 잘라서 양념과 함께 배추에 버물려 넣고 이를 땅에 묻어서 보관하면 그 시원한 맛은 어디에도 비할 바가 못되었다. 또 나의 할아버지는 평안 개천 출신이라, 어린 시절부터 굴비(조기를 염장해서 반건조한 것)를 즐겨드셨든가, 조기 반찬은 빠지지 않으셨고, 제사상에는 반드시 몇 마리의 굴비찜이 올랐다. 강원도 지방에서는 제사상에 문어가 빠지지 않고, 경상도 지방에서는 상어(床魚;제사상에 오른다 하여 床을 붙임) 돔배기를 쓰듯, 우리 제사상에는 조기가 필수였다.
이렇게 오랫동안 내 입에 익어온 조기는 내 밥상에 필수품이 된 지 오래다. 여름철을 제외한 일년 내내 구할 수 있는 생선이지만, 역시 가을이 되어야 맛있다.
전라도 영광이 굴비의 주산지이지만, 그곳에서는 씨알 좋은 굴비는 구하기 힘들고 굴비의 사촌격인 부새가 흔하다.
부새의 맛은 굴비에 절대 비할 바가 못 되나, 보리굴비란 이름으로 잘도 팔린다. 백양사 휴게소를 가면 아예 보리굴비 정식이라 해서 팔고, 광주와 인근 맛집에서도 부새를 보리굴비라 해서 구워 파는데, 늘 문전성시다. 물론 나는 먹지 않는다. 먹어본 적은 있지만 내장 냄새가 너무 강해서 싫다.
아무튼 요즈음 신문, 방송등에서 싼 조기 광고가 많이도 등장하는데, 이건 절대로 내 취향이 아니다. 그저 얼큰한 조기탕을 끓여서 한끼 먹는다면 모를까, 두고 먹을 만큼의 가치는 없는 잔챙이다.
조기의 기격은 1cm가 커질 때 마다 곱절로 뛴다.
기본 사이즈는 17,8cm이나 그런 것은 먹을 게 없다.
안강망으로 잡은 조기는 선별을 하지 않고 말통으로 되어서 파는데 이를 ‘바라 조기’라 한다. 값은 싸나 상처가 있고 뒤죽 박죽이라 젓갈용이나 김장용으로 이용한다. 또 선별하였으나 크기가 작은 것은 ‘7석’이라 부른다.
조기는 일 년 내내 두고 먹기에 최선의 생선으로 생각된다. 이를 장만 하는 방법을 소개한다.
2월 하순에서 3월 초가 되면 알배기 조기가 잡힌다. 좀 비싸고 귀하다.
이를 한 짝(약120마리 정도)사서 진한 소금물에 두 시간을 담근 다음, 비늘칼로 하나 하나 비늘을 쳐내고 씻어준다.
이는 상당히 고된 작업이므로 마누라에게는 특별 보너스를 꼭 주어야 한다.
이렇게 장만한 조기에 간수를 뺀 굵은 천일염을 적당히 쳐서 채반에 널어서 하루를 건조 시킨다. 이 과정에서 물이 빠지고 간이 배게 된다.
이를 다섯 마리씩 비닐팩에 넣어서 냉동 보관하였다가 먹는다. 먹을 때 해동된 조기를 그냥 구워도 싱싱하고 좋지만, 이를 하루 이틀 방치하면 발효가 되어서 약간의 냄새가 난다. 나는 이를 ‘썩은 조기’라 부르는데 싱싱한 것 보다 몇 곱은 더 좋아한다. 너무 많이 썩으면 구울 때 아파트에서는 민폐가 될 수도 있으니 주의하여야 한다.
이렇게 일년 내 저장하고 먹을 수 있는 나물과 생선을 정리해 보았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좀 큰 냉동고 두 개는 필요하며 소형도 한 개는 있으면 좋다.(냉장고가 아님)
나는 하나는 창고에 가져다놓고 대소 한 개씩은 집에 두고 쓴다. 물론 고등어나 병어등 제철 생선이나 채소는 그때 그때 구득하여 먹는다.
글을 마치려 하니 내가 무슨 걸신(乞神)이 들린 듯 생각할 지도 모르나, 오직 이것은 집에서도 가벼운 도락을 즐기자는 의도일 뿐 욕은 하지 말아주시게.
辛丑 大寒 前
豊江 散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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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고로 나는 집에서는 아침밥만 해결합니다. 그래서 생선도 그 정도면 일년치가 충분하지요.
점심은 직장에서 또는 외식으로 해결하고 저녁은 술과 안주로 때우지요. ^*^
참 잘먹고 잘사는 것 같아 보기가 좋아도
선배라는 이유로 후배님도 내글에 답글 안다는데 하고
건너뛰고 보니 마음이 편치만은 않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