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원(願)이 없으면 희망도 없다.
원(原)은 곧 희망(希望)이다.
그러므로 원이 없이 하루하루 연명하는 사람은 산송장과 다를 바 없다.
원이 있는 사람은 의식이 분명하여서 자기가 이 세상에 왜 살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살만한 가치를 설정하고 열심히 노력하고 기도도 한다.
그런데 이 원(願)에는 중생이 세우는 작은 원이 있는가 하면 불보살이 세우는 큰 원이 있다.
작은 원은 그 바라는 바가 단편적이고 근시안적(近視眼的)이며 자기 이익적이다.
큰 원은 종합적이고 입체적이며 전체 이익을 추구한다.
얼마 전 방생 및 야외 법회에서
본인들 스스로 원을 적은 축원 카드를 읽던 중 놀랄만한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백 퍼센트 모두가 다 가족 건강 및 가족의 소원을 잔뜩 적어두었지,
불국토 건설이나 사찰 발전 등의 원은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더욱이 그날 법회의 목적이 미물의 방생임에도 불구하고
그 미물의 해탈을 바라는 내용이 전혀 없어 기분이 씁쓸하였다.
관세음보살님을 외우고 기도하는 관음 행자는
천수경에서 나타나는 관세음보살님의 십원육향(十願六向)을 자기 원으로 삼아야 한다.
십원육향은 “일체법을 속히 알고자 원합니다”에서 시작하여
“축생을 향하면 그들이 큰 지혜를 얻게 하여지이다.”로 끝을 맺고 있다.
뒤쪽의 육향(六向)은 앞서 세운 십원(十願)의 구체적 실천 다짐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이 십원육향(十願六向)은 관세음보살님의 대자대비 원으로써,
우리 관음 기도자들이 다 함께 세워야 나 사는 이 현실이
가릉빈가 지저귀고 금 옥수 돌돌돌 흐르는 보타락가산 극락의 동산이 될 수 있다.
한편, 중생의 작은 원은 원초적 욕망 같은 것이라서
불교 수행의 일반적 가치 개념과는 상반되는 점이 없지 않다.
예를 들어 “우리 아이를 이번 대학 시험에 합격시켜 주십시오”하고 원을 세워 기도한다면
그 원이 성취는 되겠지만 보살의 기도로서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부처님! 이 자식 놈이 이 세상에 나서 인류와 사회를 위해 무엇인가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온정성을 기울이는 부모가 되고자 하옵니다.”하고 발원한다면
이에 앞서 언급했던 작은 원은 다 포함되면서 공동선의 완성도 같이 있게 된다.
이 같은 발원의 모양새는 스님들의 관음 축원문에도 잘 나타나 있다.
사시 맞이에 동참해 본 신도님들은 가족 개개의 축원 끝에
“연후원(然後願) 세세상행보살도(世世常行菩薩道) 구경원성살바야(究竟圓成薩婆若)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婆羅蜜)”이라고 읊조리는 스님 염불을 들었을 것이다.
“나의 모든 기도 생활이 세세생생 동안의 보살도로 연결되어서
끝내 부처님 세계로 이루어지이다”라는 내용인데
바로 이 발원문이 가장 전형적인 모델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불자로서의 뚜렷한 목적의식” 즉, 큰 원을 세워야 한다.
그 절에 오래 주석하는 주지 스님은 그 절의 부처님을 닮는다는 말이 있다.
관음 기도를 하는 불자는 관세음보살을 닮는다.
우리는 겉모양은 물론이요, 속모양도 닮아야 한다.
속마음이 관세음보살을 닮으려면 관세음보살의 큰 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모든 관음 기도 하는 자는 관세음보살의 십원육향(十願六向)을 자기의 원으로 삼기를 권 한다.
- 우학 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