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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1.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묵상글 (8/20. 21:00, 05:05, 05:35, 08:50. )
1) 저는 아래 몇 분의 글만 공유합니다.
1차 공유하는 묵상글: 고인현, 호명환 신부님.
2차 공유할 묵상글: 05-06시이후. 05:05 현재, 05:35 현재, 08:50 현재
< 김찬선신부님: 05:05 추가. 호명환 신부님: 05:35 추가.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08:50 추가. >
# 어부베드로님의 묵상글 1편 추가 (8/20. 21:00.)
서하 님의 슬로우 묵상 1편 추가 (굿뉴스게시판, 8/20. 존재의 선물, 사랑의 숨결. 08:50 추가)
2) 정회원님 중 다른 묵상글을 공유하실 분은 오늘 묵상글은 이 뜨락에 게재하여 주시고
지난 묵상글은 “5-1. 소금(나눔) 뜨락 1”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3) 이 묵상글 뜨락은 8월 15일 이후에도 당분간 현재와 같이 운영하며
전체 공지 "H. 260707" 2-1의 가-1), 나)를 실행할 계획입니다.
가-1) 프란치스칸 공동체나 개인 또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존중하는 분으로서 이 카페를 인계받아 운영할 의사가 있으신 분과 협의를 시작하고, 이 공간의 인계, 인수는 합의가 되는 대로 즉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위 사항이 이루어지지 아니할 때는 11월 대림시기부터는 실질적으로 운영을 중단하고, 카페의 여러 자료를 활용하실 분을 감안 당분간 존속시키고, 적당한 때(2027년 상반기 또는 그 이후) 폐쇄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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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너희 마른 뼈들아, 너희를 무덤에서 끌어내겠다.>(에제37,1-14)
1 주님의 손이 나에게 내리셨다. 그분께서 주님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나가시어, 넓은 계곡 한가운데에 내려놓으셨다. 그곳은 뼈로 가득 차 있었다.
2 그분께서는 나를 그 뼈들 사이로 두루 돌아다니게 하셨다. 그 넓은 계곡 바닥에는 뼈가 대단히 많았는데, 그것들은 바싹 말라 있었다.
3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내가 “주 하느님, 당신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4 그분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뼈들에게 예언하여라.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 마른 뼈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5 주 하느님이 뼈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에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
6 너희에게 힘줄을 놓고 살이 오르게 하며 너희를 살갗으로 씌운 다음, 너희에게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게 하겠다.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7 그래서 나는 분부받은 대로 예언하였다. 그런데 내가 예언할 때, 무슨 소리가 나고 진동이 일더니, 뼈들이, 뼈와 뼈가 서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8 내가 바라보고 있으니,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올라오며 그 위로 살갗이 덮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숨은 아직 없었다.
9 그분께서 다시 나에게 말씀하셨다. “숨에게 예언하여라. 사람의 아들아, 예언하여라. 숨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 숨아, 사방에서 와 이 학살된 이들 위로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10 그분께서 분부하신 대로 내가 예언하니, 숨이 그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들이 살아나서 제 발로 일어서는데, 엄청나게 큰 군대였다.
11 그때에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은 온 이스라엘 집안이다. 그들은 ‘우리 뼈들은 마르고 우리 희망은 사라졌으니, 우리는 끝났다.’고 말한다.
12 그러므로 예언하여라. 그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그리고 내 백성아,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
13 내 백성아, 내가 이렇게 너희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너희를 끌어 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14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그제야 너희는,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이다.’”
복음<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22,34-40)
34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35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또는,비오10세기념일 독서(1테살 2,2ㄴ-8)와 복음(요한 21,15-17)을 봉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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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1.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22,34-40
율법 교사는 ‘가장 큰 계명 하나’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둘’을 주십니다.
하느님을 온 존재로 사랑하는 것(첫째),
그리고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둘째).
이 둘은 떼어 놓을 수 없는 ‘한 쌍’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온 율법과 예언서’ ― 곧 성경 전체 ―가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고 하십니다.
수많은 계명이 결국 ‘사랑’이라는 한 뿌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복음을 짧지만 깊은 한마디로 요약했습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네가 원하는 것을 하라.”
사랑이 뿌리에 바로 서 있으면,
그 위에서 자라는 모든 행동도 바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또 〈고백록〉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 사랑이 곧 나의 무게이니,
나는 그 사랑에 이끌려 어디로든 가게 된다.”
마치 돌이 무게에 이끌려 떨어지고,
불꽃이 가벼움에 이끌려 솟아오르듯,
사람은 ‘가장 사랑하는 것’ 쪽으로 이끌려 갑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의 물음은 결국 이것입니다.
‘내 사랑의 무게는 어디로 기울어 있는가?’
하느님을 가장 사랑하면 그 사랑이 나를 그분께로 이끌고,
헛된 것을 더 사랑하면 그것이 나를 끌어내립니다.
두 사랑(하느님과 이웃)은 또한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1요한 4,20).
오늘 기리는 성 비오 10세 교황이
바로 이 ‘사랑의 중심’으로 모든 것을 모으려 한 분입니다.
그의 표어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는,
흩어진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한 중심에 다시 모으려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하느님 사랑’의 원천인 성체를
어린이에게까지 활짝 열어 주었고,
‘이웃 사랑’으로 가난한 이들을 평생 품었습니다.
평화·인내의 관점에서 보면
평화는 ‘사랑의 무게’가 바로 설 때 옵니다.
그리고 그 두 사랑을 날마다 회복하는 것은
한 번에 되지 않는 ‘인내의 길’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의 ‘사랑의 무게’는 어디로 기울어 있는가?
나는 하느님을 ‘온 존재로’ 사랑하는가?
나는 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을 떼어 놓지 않는가?
나는 흩어진 삶을 ‘사랑’이라는 중심에 다시 모으는가?
주님,
제 사랑의 무게가 당신께로 기울게 하소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나로 잇게 하시고,
흩어진 모든 것을 당신 사랑 안에서 새롭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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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1.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2026.08.20. 17:53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불의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정의를 실천하고, 선을 사랑하며, 하느님과 더불어 겸손히 걸어가십시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히브리 예언자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불의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2026년 8월 20일 목요일
나훔 워드-레브(Nahum Ward-Lev) 랍비는 성서 예언자들의 핵심 주제들에 대해 성찰합니다:
예언자들의 활동 시기, 즉 기원전 약 740년에서 520년 사이의 시대는 사회적 위기가 극심하고 정치적 불안정이 가득했던 때였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과 유다, 두 나라가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다 사회의 지도층은 평범한 노동자들의 빈곤을 사회의 당연한 조건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이러한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치 하느님의 눈으로 상황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말씀을 지니고 선포했습니다. 경제적 불의와 가난한 이들의 억압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주님께서 혐오하시는 죄악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날로 심화되는 불평등은 예언자들의 시각에서 볼 때, 공동체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위기였습니다….
창조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에 대한 주님의 열정에 이끌려, 예언자들은 권력자들과 특권층을 향해 맞섰습니다. 그들은 이들의 탐욕과 무감각을 꾸짖었습니다. 기록 예언자들 가운데 첫 번째인 아모스는 그들의 죄악을 가차 없이 단죄하였습니다:
이사야와 미카는 아모스와 동시대의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아모스가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과 대사제를 그 나라의 부와 지역적 지배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 꾸짖었다면, 이사야와 미카는 남왕국 유다의 권세가 최고조에 이른 시기에 교만한 지도층을 단죄하였습니다.
각 예언자가 저마다 고유한 방식으로 말씀을 전했지만, 그들 모두는 분열된 세상 속에서 정의를 향한 하느님의 염려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아모스, 이사야, 미카, 그리고 호세아는 성경에 그 말씀들이 보존된 열다섯 예언자들 가운데 네 사람에 불과합니다. 이들 예언자는 모두 탁월한 영적 통찰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듯, 가난한 이들의 고통에 꾸준히 마음을 기울였고, 깊고 구조적인 불의가 결국 불가피하게 재앙을 불러올 것임을 내다보았습니다. 동시에, 성령의 영감에 들어 올려진 그들은 자기 시대의 깨어짐을 넘어서는 도덕적 상상력을 지녔습니다. 그래서 위기와 재앙이 눈앞에 닥친 상황 속에서도, 모든 피조물이 함께 번영하는 포용적 경제·사회 질서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모든 예언자와 예언자적 전통에 내재된 세 가지 덕목은 이렇습니다. 곧, 창조 세계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염려를 체험하는 것, 억압을 드러내어 꾸짖는 용기, 그리고 깨어진 현실을 넘어 새로운 미래를 그려내는 도덕적 상상력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리처드 신부님은 우리가 누구이든, 어디서 왔든 모두 같은 방식으로 숨을 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매일의 묵상 안에서 깊은 호흡에 집중하는 시간을 많이 보냈습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야훼’라는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느님의 존재 자체에 마음을 집중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성경에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주님의 현존을 찾고 있으며, 제 마음은 참으로 하느님께서 계심을 알려주고 있다고 느낍니다.
—David S.
References
Brian D. McLaren, We Make the Road by Walking: A Year-long Quest for Spiritual Formation, Reorientation, and Activation (Jericho Books, 2014), 64–66.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Valentin Walter, untitled (detail), 2019,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흐르는 물이 바위를 끊임없이 깎아내듯, 아모스 예언자가 외친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는 부름이 메아리칩니다. 또한 이사야 예언자가 약속한, 어떤 장애물도 넘어서는 평화의 은총이 함께 울려 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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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1.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8.21 05:01
- 사랑의 샘은 없어도 저장고는 있는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사랑이 첫째가는 계명 곧 제일 중요한 계명이라는 것에
머리로는 이의가 있는 분이 여러분 가운데 없을 것이고,
그래서 여러분 모두 사랑하려고 무진 애를 쓰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저는 생각하고,
그래서 오늘은 이에 대해서 좀 길게 나누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가 지었다고 얘기되는 평화의 기도에서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를 사람들이 좋아하고 그리하려고 애쓰는데
저는 오늘 사랑하는 것보다 사랑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사랑을 잘 받아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샘이 나에게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의 샘은 없고 사랑의 저장고는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사랑의 샘이 없다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내 사랑이 있는 줄 알고 헛심 쓰다 지치거나
사랑하고서는 보답적인 사랑을 요구하게 되고,
사랑의 보답이 없을 때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제넘게 사랑하려고 하지 말고,
겸손하게 사랑 없음을 인정할 뿐 아니라
겸손하게 사랑을 잘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겸손하게 사랑을 잘 받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이웃의 작은 사랑도 감지덕지하는 것이고,
마치 쌀 한 톨도 허투루 흘려버리지 않는 것처럼
그 사랑을 소중히 여겨 작은 사랑도 큰 사랑으로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반대의 경우를 보면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애인의 작은 사랑은 큰 사랑으로 받아들이면서
엄마의 큰 사랑은 당연한 것 또는 하찮은 것으로 여겨
자기가 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은 엄마의 사랑보다 훨씬 큰 사랑이지요.
사실 사랑은 큰 사랑일수록 느끼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는 것마다 다 사랑이기 때문인데 뒤집으면 작은 사랑은 드문 사랑이 되겠지요.
어쨌거나 사랑을 잘 받는 사람은
작은 사랑도 큰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며
큰 사랑이든 작은 사랑이든 흘려버리지 않는 사람이며
그리하여 사랑의 샘은 없어도 저장고가 큰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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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1.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2026.08.21. 05:30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 자신처럼 사랑해 주십니다!~~~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해마다 주(州) 박람회에서 최고의 '상'을 받는 훌륭한 옥수수를 재배했습니다. 어느 해, 어느 신문사의 기자가 그를 인터뷰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농부는 자기 밭에서 수확하는 가장 좋은 씨앗을 이웃 농부들과 나누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자는 의아해하며 물었습니다. "당신도 대회에 출전하는데, 어떻게 최고의 씨앗을 이웃에게 나눠줄 수 있습니까?"
농부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기자님, 인생의 중요한 진리를 모르십니까? 바람은 옥수수의 꽃가루를 이웃 밭으로 옮깁니다. 만약 이웃이 질 낮은 옥수수를 재배하면, 제 옥수수도 점점 품질이 떨어지게 됩니다. 제가 좋은 옥수수를 얻으려면, 이웃도 좋은 옥수수를 재배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는 사실 옥수수 농사를 지으면서 "인생에서 가장 좋은 것을 얻으려면, 나에게 있어 가장 좋은 것을 이웃과 나누어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 깨달음은 복음의 진리와 맥을 같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언지를 묻는 율법 교사에게 이렇게 답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태 22,37-39).
요한 서간 저자가 강조하여 말하듯이, 사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유다교의 스승들은 이미 율법 가운데 가장 큰 두 계명을 뽑아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새롭게 시작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첫째는 구약에서 가장 익숙한 구절, 신명기 6장 4절부터 5절까지의 말씀 "쉐마…", 즉 "이스라엘아, 들어라. …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였고, 둘째는 레위기 19장 18절의 말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을 인용하실 때는 물론 정확히 인용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신 자신으로부터 말씀하실 때는 "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 15:12)고 하셨습니다. 그 차이는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통해 우리 서로에 대한 사랑을 살아내라는 말씀인데, 사실 이 사랑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피부에 깊이 와닿지 않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사랑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께서 주신 이 계명이 우리 삶에서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시는 사랑입니다. 이것을 "쉐마"와 연결시켜 본다면 우리가 하느님께 드려야 할 사랑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 계시다는 역설적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은 "당신 마음을 다하고 당신 목숨을 다하고 당신 힘을 다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온전히 드러내 주셨고, 또 지금도 성체성사를 통해 계속해서 드러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힘을 다해 '나'를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다!
위 농부의 이야기처럼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가장 좋은 것인 사랑(당신 생명)을 내어 주심으로써 가장 좋은 사랑(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얻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시는 우리의 구원이요 완성의 의미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의 힘이요, 하느님 생명의 힘인 것입니다!
가장 좋은 내어 주시면서 가장 좋은 것을 늘 얻으시는 사랑 말입니다!
이런 논리로 볼 때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 자신처럼 사랑해 주시는 것이고요!!
그러므로 '내'가 정말로 하느님에게서 이런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 존재 자체가 자연스럽게 그 사랑을 살아내도록 우리에게 박차를 가해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하느님의 생명이요 하느님 그 자체이므로 우리 존재 안에서 당연히 사랑의 힘을 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미사 성제를 통해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시는 주님과 그 사랑을 받아 모십니다. 주님을 받아 모시면서 이것이 이론이나 생각 혹은 개념으로 받아 모시지 않고 그 사랑의 생명력을 온전히 받아 모시고자 한다면 우리 안에서 그 사랑이 분명히 힘을 낼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전에도 한 번 나누어 드렸던 틱낫한 스님의 성체성사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나누겠습니다. 이는 [형제인 예수와 부처]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우리)에게 주시는 빵은 진짜 빵이고, 여러분이 그 참된 빵을 먹으면 여러분은 참 생명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고정관념 때문에 이 참된 빵을 먹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빵이라는 말과 빵의 개념을 먹으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우리가 성체성사를 거행할 때도 우리는 여전히 개념과 생각을 먹는 것입니다. '벗들이여, 이는 내 살이고, 이는 내 피이니 받아먹고 마시시오.' 여러분을 일깨우기 위한 말 중에 이처럼 과감한 언어가 있을까요? 예수님이 이보다 더 적절하고 훌륭하게 말씀하실 수 있었을까요? 여러분은 생각과 개념을 먹어왔는데, 저는 여러분이 참으로 살도록 참된 빵을 먹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현재의 순간으로 돌아온다면 온전히 살아있는 모습이 되어 이것이 참된 빵이며 이 빵 조각이 우주 전체의 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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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1.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3895
2026.08.21 08:36
마른 뼈가 살아나는 이야기와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 8월 21일 독서와 복음 묵상
마른 뼈가 살아나는 이야기와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
에제키엘 37장의 ‘마른 뼈’가 살아나는 이야기는 뼈들이 스스로 살아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생명은 언제나 밖에서, 위에서, 관계를 통하여 불어옵니다. 마른 뼈는 단순히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자기 힘으로 자신을 회복시킬 수 없는 인간의 자리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곳이 하느님의 창조가 다시 시작되는 자리가 됩니다. 창세기의 첫 인간에게 숨을 불어넣으셨던 그 숨결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겨지는 골짜기에서 다시 불어옵니다. 성경의 하느님은 폐허를 피해 다른 곳에서 시작하시는 분이 아니라, 바로 폐허 한가운데에서 새 창조를 시작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묵상을 프란치스칸적으로 읽으면 더욱 깊어집니다. 프란치스코가 말한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을 지니는 것”은 결국 내 힘으로 살아내려는 삶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숨이 나를 통하여 숨 쉬도록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강해져서 다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해진 나의 빈자리로 그분의 숨이 들어와 나를 다시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숨은 한 사람만 살리지 않습니다. 흩어졌던 뼈들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몸을 이루듯, 관계를 회복시키는 숨입니다. 하느님의 영이 임하는 곳에서는 ‘나만 살아나는 기적’이 아니라, 흩어진 우리가 다시 서로의 형제와 자매가 되는 기적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이 글의 중심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내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내가 강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가난해진 나의 자리에서 하느님께서 다시 숨 쉬기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숨결이 마침내 우리 안에서만 머물지 않고 다른 이에게 흘러갈 때, 우리는 생기를 받은 사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누군가의 메마른 골짜기에 하느님의 숨결이 지나가도록 자신을 내어드리는 도구적 존재가 됩니다. 어쩌면 이것이 “기도하는 사람”을 넘어 “기도가 된 사람”의 모습일 것입니다.
에제키엘 37장의 마른 뼈의 이야기와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에 비추어 보면, 두 계명은 단순히 우리가 지켜야 할 윤리적 명령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을 받아 그 생명을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하나의 생명의 순환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첫째 계명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라고 하시고, 둘째 계명을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고 하십니다(마태 22,37-39). 그리고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고 하십니다(마르 12,31).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두 사랑을 따로 떼어놓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로 향하는 사랑과 이웃에게로 향하는 사랑은 하나의 숨결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숨을 들이마시는 사랑, 숨을 내쉬는 사랑, 에제키엘의 골짜기에 흩어진 마른 뼈들은 스스로 살아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살아야 한다”고 명령해도 뼈는 스스로 생명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바람이 불어와야 하고, 창조 때의 숨이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첫째 계명은 생명의 숨을 받아들이는 사랑입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는 말씀은 내 힘을 짜내어 하느님께 사랑을 증명하라는 명령이라기보다, 먼저 나를 사랑하시고 나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는 하느님께 마음을 열라는 초대입니다. 내가 사랑의 근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사랑하셨기에 우리가 사랑할 수 있다는 진실입니다.
그렇다면 둘째 계명은 받은 숨을 다시 내어놓는 사랑입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느님에게서 받은 생명이 나에게서 멈추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용서받았기에 용서하고, 받아들여졌기에 받아들이며, 기다림을 받았기에 기다려 주고, 자비를 입었기에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 사이에는 하나의 거룩한 호흡이 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숨을 받아들이는 것이 첫째 계명이라면, 그 숨을 형제에게 내어주는 것이 둘째 계명입니다. 들이쉬기만 하고 내쉬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듯이, 하느님 사랑만을 말하면서 이웃에게 그 사랑이 흘러가지 않는다면 신앙은 숨을 잃습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사랑에서 생명을 공급받지 않은 채 자신의 힘만으로 이웃을 사랑하려 한다면 언젠가는 지치고 메말라 버립니다.
마른 뼈가 ‘한 몸’이 되는 기적
에제키엘의 환상에서 더욱 의미 깊은 것은 마른 뼈 하나하나가 따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뼈와 뼈가 서로 맞붙고”, 힘줄과 살이 생기며, 마침내 하나의 큰 공동체가 일어섭니다. 이것이 둘째 계명의 아름다움입니다. 성령께서는 단순히 ‘나를 살리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다시 연결하시는 분’입니다. 내가 살아나는 것만으로는 하느님의 구원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나와 너 사이에 끊어진 관계가 다시 이어지고, 내가 외면했던 사람이 다시 형제가 되며, 판단했던 사람을 다시 바라보고, 상처를 주고받아 멀어진 사람들이 조금씩 서로에게 다가설 때 마른 뼈들이 맞붙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둘째 계명의 “이웃을 사랑하여라”는 말씀은 단순히 착하게 살라는 도덕적 요청이 아닙니다. “네가 받은 나의 숨을 그 사람에게도 흘려보내라.” 라는 하느님의 초대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프란치스칸 영성의 가난이 중요해집니다. 내가 사랑의 주인이 되려고 하면 사랑마저 소유하게 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해 주었다”, “내가 용서했다”, “내가 희생했다”는 의식이 커지면서 사랑 속에 자아가 다시 들어섭니다. 그러나 내적 가난은 고백입니다. “이 사랑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나 역시 받은 사람입니다.” 내가 용서할 수 있었다면 먼저 용서받았기 때문이고, 누군가를 품을 수 있었다면 내가 먼저 품어졌기 때문이며, 누군가에게 생명의 숨이 되어줄 수 있었다면 먼저 하느님께서 마른 뼈와 같았던 나에게 숨을 불어넣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은 사랑의 소유자가 아니라 사랑의 도구요 통로가 됩니다. 하느님 → 나 → 형제 → 다시 공동체로 흐르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도구적 존재’의 의미도 선명해집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생명이 나를 지나 그 사람에게 흘러가도록 허용하는 것, 이것이 도구적 존재의 사랑입니다.
결국 에제키엘의 마른 뼈와 두 계명은 하나의 영적 여정으로 이어집니다. 마른 뼈였던 내가 하느님의 숨을 받아 살아나는 것이 첫째 계명의 은총이고, 내가 받은 그 숨을 이웃에게 내어주어 함께 살아나는 것이 둘째 계명의 완성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와 너 사이에 하느님의 숨이 자유롭게 오갈 때, 흩어진 뼈들은 다시 하나의 몸이 되고 우리는 서로에게 생명의 자리가 됩니다.
“주님, 당신의 숨을 깊이 받아들이게 하시고, 제가 만나는 모든 이에게 그 숨을 다시 내어놓게 하소서. 제가 사랑의 주인이 아니라 당신 사랑이 지나가는 길이 되게 하시고, 마른 뼈와 같은 우리 관계들 사이로 당신의 영이 불어와 나만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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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치운쿨라 1. 다시 처음으로 ( 2026.08.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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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베드로 묵상방
복음묵상 : 혼인잔치에서 선택된 사람은 왜 선택됐는가? (260820.11:33)
오늘 복음은 흔히 잘 아는 혼인잔치의 비유입니다. 아들의 혼인잔치를 통해서 천국을 비유로 설명한 내용입니다. 잔치라는 건 경사 같은 일이 있을 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가톨릭 인준 영어 성경 세 권과 주석을 일일이 꼼꼼하게 챙겼습니다. 개신교와 가톨릭 주해서도 참고했지만 이건 여기서 생략하겠습니다. 오랫동안 이 복음은 유튜브나 강론을 통해서 들은 내용이 아마 주를 이룰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일반적인 주해의 범위 안에서 새로운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사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어쩔 수 없이 그러면 복음이나 묵상하자고 해서 밤새 묵상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새벽에 오늘 복음에 대해 다른 가톨릭 버전 영어 성경을 참조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걸 참조한 묵상입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혼인예복에 있습니다. 혼인예복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강론을 통해서 많이 들어보셨겁니다. 좀 더 생각해봤습니다. 여기서 임금이 아들의 혼인잔치에 처음 초대를 한 후에 잘 응하지 않자 그 상황에 대해 종들에게 한 말을 잘 묵상해봤으면 합니다. 8절에 보면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히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이렇게 해서 초대를 거절한 사람도 있지만 이 문맥을 보면 초대를 했더니 초대에 응했던 사람도 있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근데 그 사람들이 마땅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사실 문맥상 보면 이 구절은 혼인예복을 입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급한 후에 이 내용이 왔다면 좀 더 자연스러운 게 되는데 왜 먼저 언급을 하셨을까를 엄청 고민했습니다. 6절과 같은 내용의 역사적인 배경도 편의상 생략하겠습니다.
여기서 '마땅하다'라는 표현은 '응당, 당연하다'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영어성경과 국어사전 둘 다 비교를 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마땅하다'의 의미는 '어울린다'의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한국 성경만 봐서는 솔직히 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영어를 참고하면 이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잔치에 초대가 돼 오긴 왔는데 그들은 혼인잔치에 있어야 할 손님으로서의 자격이 맞지 않다는 그런 의미를 일차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왕은 잔치라는 건 좋은 경사이기 때문에 하객이 많이 있는 게 좋은 일이 될 겁니다. 처음엔 기득권 세력을 초대해 기회를 줬지만 그 기회의 공이 많은 사람들에게 넘어간 것입니다. 기득권이 배제된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모두에게 문호가 열렸다는 걸 암시할 것입니다.
문맥상 '아무나'라고 한 표현을 보면서 정말 '아무나'라는 뜻은 아닙니다. 신분이나 계층에 조건이 없는 그런 상태의 '아무나'인 것이죠. 그러니 모든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래야 공의로우신 하느님의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아들 결혼식이라고 해도 하객이 없다고 해서 어중이떠중이까지 들여보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잔치의 의미가 무색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임금은 아무튼 초대받은 사람들을 살펴볼 필요은 있었을 겁니다. 꼭 그래서 그랬다고는 볼 수 없지만 사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복을 입은 사람이 공교롭게도 한 명입니다.
왜 마태오 복음사가는 굳이 한 명으로 설정을 했을까 하는 것도 흥미를 끌어내는 대목입니다. 아마도 좀 더 강한 의미를 주기 위해서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그냥 혼인 예복을 좀 안 입었다고 그것도 경사로운 아들 혼인잔치에서 그런 저주 같은 표현까지 하면서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하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좀 어려운 내용인 것처럼 보이지만, 역으로 발상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오히려 반전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상에도 계시록이라든지 이런 걸 보면 옷이 상징하는 게 무엇인지 계시록 외에도 나오지만 단순히 옷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를 넘어서 본질적인 의미가 무엇인지가 더 중요합니다.
이건 성경적인 배경을 좀 이해를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입고 온 예복은 그들이 직접 집에서 입고 오는 옷이었다면 상황은 다를 것입니다. 요즘처럼 말입니다. 예식이 있으면 집에 있는 정장이라든지 그에 맞는 옷을 입고 가는 그런 상황이 아닌 것입니다. 그당시에는 왕실에서 이미 그런 잔치가 있으면 구비를 해 놓고 그 옷을 입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야 상황이 맞는 것입니다. 아무나 거리에 가서 초대를 했는데 그런 상황에서 옷까지 구비를 해오지 않고 왔다고 그렇게 한다면 그게 초대의 의미가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을 해보면 이때 왕이 그런 사람들을 저주 아닌 저주 같은 말을 한 이유가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사실적인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 복음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세상적인 표현을 하자면 하늘나라 혼인잔치이지만 잔치에 참석할 땐 그에 합당한 법도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법도는 예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왕실에서 주면 입으면 되는 것이죠. 문제는 그런 예법조차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상징하는 복음적인 의미가 바로 순종이 될 것입니다. 그 이면에는 옷의 본질을 봐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옷을 교체하는 것처럼 환복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 옷은 천상 잔치에는 그에 맞는 옷을 입어야 되는데 그냥 세상 옷을 입은 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 옷은 단순히 옷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는 자기가 살아온 삶 그 자체로 들어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석이나 주해를 보면 옷은 회개의 의미라고도 나오기도 합니다. 단순히 그런 의미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맞는 의미이지만 교부들의 생각을 보면 좀 더 포괄적으로 나옵니다. 그런 것까지 포함하면 이런 식으로 오늘 복음을 이해하면 좀 더 괜찮을 듯하기도 합니다.
결국은 변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옷이라는 것으로 비유를 했지만 단순히 환복을 한 그 자체의 의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삶대로 순종하지 않는 삶, 다시 말해 바로 초대에 왔긴 왔지만 예복을 입지 않은 상태를 말하겠죠. 바로 그게 달리 표현하면 하느님의 말씀이라든지 이런 것을 무시하는 태도를 말한다고 해도 무리는 안 될 것입니다. 바로 이건 신앙과도 직결되는 것입니다. 신앙도 결국은 변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변화가 없는 신앙은 결국은 초대를 받았지만 이때 초대는 넓게 해석하면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불림을 받았지만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 하느님 나라에 입성할 수 있게 선택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복음 말미에 불림을 받은 이는 많지만 선택된 이는 적다고 했습니다. 이건 전적으로 선택권자의 문제가 아닙니다.
결과적으로는 오늘 복음에서 혼인잔치의 잔치는 하늘나라에서 있을 잔치일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신앙에 변화가 없다면 바로 혼인예복을 입는 걸 거절한 사람과 동일한 것입니다. 결국은 변화가 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변화가 되지 않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 나라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사는 사람과 같다는 걸 오늘 복음은 다시 한 번 더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주고 있는 듯합니다.
++++++++
댓글 1. Mark Choi, 2026.12:09
찬미예수님! 강만연님을 위해 기도 드립니다. 묵상 잘 읽었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저는 문득 ‘회심(回心)’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회심은 결국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것, 그리고 잘못된 삶의 방향을 바로잡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혼인예복도 결국 겉으로 입는 옷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해 돌아선 변화된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묵상해 봅니다.
좋은 묵상 감사합니다.
+++++++++
댓글 2. 어부베드로 2026.14:26
찬미예수님! Mark Choi님을 위해 기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묵상이니 정답을 염두에 두고 하긴
했습니다. 오류도 있을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가려서 받아들이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신부님이 아니라서 잘못이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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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 님의 슬로우 묵상 1편 추가 (굿뉴스게시판, 8/20. 존재의 선물, 사랑의 숨결. ----- 08:50 추가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9&id=2136229&menu=4770
너 숨아, 사방에서 와 이 학살된 이들 위로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에제키엘 37.9
존재의 선물, 사랑의 숨결
마른 뼈들에게 부족한 것은 착한 행실이 아니었습니다. 숨 자체가 없었습니다. 하느님이 그 안에 불어넣으신 것은 규칙이 아니라 생명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다시 숨 쉬는 사람입니다.
은총은 밖에서 오는 장식이 아닙니다
생기가 뼈 속으로 들어갈 때, 그것은 낯선 것이 억지로 끼워지는 게 아니라 뼈가 원래 있어야 할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도 그렇습니다. 우리 밖에서 덧붙는 장식이 아니라, 우리가 본래 되어야 할 나 자신을 되찾는 일입니다. 그래서 "넣어 주십시오"라는 청은 부족함의 고백이면서 동시에 나 자신에 대한 가장 정직한 인식입니다.
살아난 존재는 사랑으로 숨을 쉽니다
생기를 받은 뼈들이 일어나 섰듯, 살아난 사람은 사랑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사랑하라 하십니다. 이는 그저 감정을 짜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살아난 존재라면 자연스럽게 사랑으로 숨 쉬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해야 할 일이기 전에,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나 하나를 넘어, 우리 모두의 부활입니다
에제키엘의 환시는 한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온 집안"을 향한 약속이었습니다. 마음이 살아나는 일은 공동체 전체가 함께 회복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조와 제도를 고치기 전에, 먼저 내 마음이 살아나야 합니다. 살아나지 않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꾸려 하면, 또 다른 완고함을 만들 뿐입니다.
비오 10세 교황님은 존재의 새로움을 살았습니다
오늘 기억하는 성 비오 10세 교황의 사목 표어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 새롭게"였습니다. 그는 많은 개혁을 이끌었지만, 그 뿌리는 언제나 성체성사와 기도, 곧 그리스도와의 살아 있는 만남이었습니다. 그분은 알고 있었습니다. 존재가 먼저 채워져야 그 넘침이 세상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주님, 제 안의 마른 뼈들에게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 주십시오.
그 숨으로 살아난 이 마음이,
사랑 아니고서는
다른 것을 할 수 없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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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가톨릭라디오 :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할 길, (굿뉴스 게시판, 이재현. 260821. 05:00)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7&id=2136237&menu=4770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장 큰 계명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신앙이 멀리 있는 말이 아니라, 가까운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사람들은 중요한 것을 하나로 묶어 묻고 싶어 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율법 교사가 가장 큰 계명을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따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보여 주십니다. 이 말씀은 거창한 일을 먼저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집에서 가족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 직장에서 동료를 대하는 눈길, 마음이 불편한 이웃을 바라보는 태도 안에서 사랑이 드러납니다. 오늘 하루를 살면서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곁에 있는 사람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오늘 나의 말과 선택 안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돌아봅니다.
< 위 댓글에 이어>
방송을 듣기 전, 가정과 일터의 평범한 대화 속에서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가리고 있는 습관은 없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라디오에서는 마태 22,34-40의 흐름을 따라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조금 더 천천히 묵상합니다.
오늘 아침 라디오 묵상 듣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