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너달에 한번 어쩌다 강릉에 딸아이들이 사는 집에 와서, 막걸리 술 상을 앞에 두고는 나는 이런 말을 한다.
"앞날을 위해 너무 애쓰지 말아라. 공부도 열심히 하지 말아라. 돈도 많이 벌지 말아라. 조금 벌어서 조금 써라. 가난하게 성실하게 살아라. 소박하게 살아라."
아이들이 키우면서 간섭을 한적이 없다. 공부하라는 소리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공부하기 싫으면 학교에 안가도 좋다는 소리는 했다. 아이들이 자라서는 더욱 그랬다. 그런데, 이제 사회에 나갈 아이들이 불안했다.
그래서, 막걸리에 취해 마음 속에 있던 소리를 하는 거였다.
내가 한 소리는 술이 취해 객기를 부린 것도 아니었다. 진정 내 마음속에 있었던, 딸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했던 소리였다.
세상에 어떤 부모가 자식들이 가난하게 살기를 원하겠는가. 내 삶의 철학이 이토록 소박한 삶을 원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자식들에게 강요하는 부모는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데도 나는 딸아이들에게 그것을 이야기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진정 이런 더러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현명하고 행복한 지름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가난하게 태어난 아이들로서는 더욱 그렇다.
살아계시면 내 아버지 나이가 되실 박현채라는 분이 계셨다. 국민학교 때 자본론을 읽은 천재에다가 중학교 때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신 분이다. 빨갱이 경력 때문에 서울대를 나오시고도 줄곧 보따리 선생 노릇을 하시면서 저술 활동에 힘쓰셨다.
지금의 자본주의 경제학은 숫자놀임이다. 실제의 경제활동과는 무관한 먹물들의 술주정이나 별반 다름 없다. 되먹지도 않는 온갖 공식을 들이대면서 멍청한 학생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세상을 어지럽힌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 탄생과정은 역사의 진화론에 어긋나는 거대한 음모였기 때문이다. 내가 맑스라는 휴머니스트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박현채 선생의 경제학은 맑스의 휴머니즘을 동경했지만 가장 현실적이고 특히 우리나라로서는 절대적이다.
80년대 그의 이론을 따랐던 많은 민주인사들이 자유주의 경제학으로 돌아섰다. 그 중 하나가 김대중이다.
김대중 이후, 우리나라는 자본주의 천국이 되고 말았다.
내가 딸아이들에게 이렇게 말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이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제 가난한 자는 부자가 될 확율이 없다. 아니, 가난하게 살도록 조건 되어 있다. 그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다가는 불행해진다. 이제, 진정한 자본주의 새대로 안착이 되었다.
박현채 선생의 민족 자급자족 경제론은, 농업이 중심이 바탕이 되고 대중들의 풀뿌리 경제학이다. 그것의 중심에는 자급자족이 있다. 그 자급자족이란 식량이 으뜸이다.
대우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이 자살을 했다. 그들은 갈 곳이 없는 것이다. 과거, 농촌 자급 공동체가 살아있을 때는 그들은 갈 곳이 있었다.
농업은, 산업으로서도 중요하지만, 사회적으로도 민주주의의 밑바탕으로서도 중요하다.
우리는, 농촌사회를 붕괴시키고 농민을 노동자로서 사회적 약자로서 도시의 빈민으로서 만들어 놓고 자본가들과 싸운다. 우리는 돌아 갈 곳이 없다. 삶의 막장에서 우리가 선택할 것은 85호 크레인이고 자살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선택해야 한다. 우리의 먹거리는 우리가 생산해야 한다. 우리의 삶을 자본가들에게 맡겨서는 안된다. 우리의 삶을 온통 상품화된 노동에 맡겨서도 안된다.
우리의 삶이 온전히 우리 것이 되기 위해서는 소박하고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을 이루는 길은 오로지 민족 국가 대중이 중심이 된 자급자족 경제 뿐이다.
이것이 박현채 선생의 말씀이다.
사실, 나는 820 토론회에서 딸아이에게 했던 똑 같은 말을 하고 싶었다. 아마, 토론을 해봐야 지금까지 내가 수도 없이 들었던 그런 말들이 나올 것임을 안다. 내 말은 현실을 모르는 시골 농부의 말로 치부될 것임을 안다.
그래도 나는, 내 말이 넋두리가 될지언정 살아 있는 한 떠들어댈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 행복한 삶은 모든 것을 충족한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은,원래 행복한 것이 아니다. 세상이 천국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세상이 괴로운 것이라고 깨닷는 순간 모든 것이 열린다.
우리는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