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13 / 김한민
인류학자 마리아나 카왈 페헤이라는 수학교육자 출신으로 원주민들의 수 개념에 관심이 많았다. 하루는 아마존의 수야족과 낚시를 다녀오며 대화를 나눴다. “당신은 열 마리의 생선을 잡았고, 그중 셋을 동생에게 줄 거라고 했다. 그럼 총 몇 마리가 남는가?” 이 지극히 평범한 질문에 “열 셋”이라는,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잘못 알아들었나 싶어 재차 물어봤지만 답은 같았다. 설명인즉슨 “우리 수야족은 다른 사람에게 뭘 주면 줄어든다고 여기지 않는다. 형제에게 생선을 주면 항상 그만큼 돌려준다. 나에게 열 마리가 있고 그중 세 마리를 주면, 그도 나중에 (생선이 생길 때) 내게 나눠줄 것이다. 그러니까 10 빼기 3이 아니라, 10 더하기 3, 즉 열셋이다.” 다른 원주민들에게 물어봐도 13이라고 답했고, 이 결론을 설명하는 논리도 비슷했다.
나눔과 상부상조에 기초한 원주민 공동체의 작동 원리가 뺄셈을 덧셈으로 둔갑시킨 이 사례는, 가장 엄격하고 객관적 학문으로 통용되는 수학의 기초인 사칙연산에도 인간의 주관성이 스며듦을 보여준다. 결론이 하나밖에 없어야 할 것 같은 뻔한 계산도 사용자의 사고방식과 가치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셈법은 언뜻 낯설어 보이지만 근대화 이전에는 세계 곳곳에서 유사한 사고방식을 발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산술과 가치체계를 뒤섞는 일은, 멀리 갈 것 없이 현대 사회에도 흔히 일어난다. 그중 하나로 (앞선 사례와 정반대로) 분배 대신 성장에 기초한 셈법을 들 수 있다. 가령,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최근 “지구 온난화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수십억달러 이상의 손실이 발생한다”는 유의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는데, 이런 중요한 숫자가 정부·기업이 주요 목표를 설정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온갖 계산식들에 포함될까? 그렇지 않다. 성장률과 배당금 등 당장의 성과와 관련된 지표들 말고는 좀처럼 포함되는 법이 없고, 기껏해야 “외부효과” 따위로 분류돼 부차적인 정보로 취급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양적 경제 성장이 불가피하게 온실가스 배출로 이어져 미래 세대에게 부채가 된다면, 이런 성장은 플러스(+)일까, 마이너스(-)일까? 마이너스 성장이야말로 플러스가 아닐까?
같은 계산이라도 공동체적, 장기적 가치를 우선시해서 하는 세상은 얼마나 다를까 상상해 본다. 적게 가지고 많이 나누는 걸 부·번영과 등치시키는 세상 말이다. 이를테면, 내가 조금 적게 버는 것이 남에게 고용의 기회를 주고, 그것이 사회 전체로 봤을 때 이익이라는 것이 상식으로 통하는 사회라면 사람이 사람을 보는 눈빛이 달라질 것이다. 최소한 정규직-비정규직으로 갈라져 차별·대립하고, 연봉으로 비교하며 극한 경쟁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런 상상은 꿈같은 얘기로 들린다. 우리가 받아들인 체계와 교육이 다른 생각들을 말살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를 사회학자 보아벤투라 지소자 산투스는 “인식론적 학살”(epistemicide)이라 칭했다.
위 사례도 수야족의 공동체적 가치가 단단했던 80년대 초 수행했던 연구로, 40여년이 지난 지금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열에 아홉은 “7”이라고 답할 것이다. 나눔의 중요성을 말뿐인 교훈이 아니라 삶 속 계산에 실제로 적용해 지켜온 원주민의 “급진적” 사고는 이제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을 확률이 높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겐 인류학이 필요하다. 상아탑 속 분과학문을 넘어 고정관념을 깨주고 다른 사고의 가능성을 환기시키는 도구로서의 인류학. 다른 삶이 존재했음을 밝히고 알리고, 그에 감탄하는 “지혜학” 말이다. 지혜 역시, 누구에게 준다고 줄어드는 게 아니지 않은가.
김한민 작가·시셰퍼드 활동가
등록 2023-04-30 18:27 수정 2023-05-01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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