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보성지명을 한자로 쓰면 보배 보'寶'에 재'城'을 쓴다. 무엇이 보배로우냐 하면 흔히 다음 세가지를 일컫는다. 의향(義鄕), 예향(藝鄕), 다향(茶鄕)이 그것이다. 의향은 향일 투쟁사와 맥을 같이한다. 구한말 무너져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독립협회를 결성하여 활발한 구국활동을 펼친 서재필 박사를 위시하여 대종교를 창시한 나철 선생이 태어난 땅이며, 백범 선생께서 일인 장교 쓰치다를 처단한 후 피신했던 땅이며, 안규홍 .임창모 선생이 마지막까지 의병활동을 했던 고장이다.
그리고 예향의 맥으로 국창 박유전 선생이 판소리 계면조를 창제한 땅이며 훗날 정응민선생이 보성소리를 완성한 땅이기도 하다. 한편, 다향으로 말하면 우리나라 녹차공급기지로서 전국소비량의 60%를 차지하는 대단위 차밭이 장관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한데, 이러한 고을이 한때는 폄하되어 회자된 적이 있었다. 그때가 언제냐 하면 일제시대인데, '보성사람 앉은 데는 풀도 나지 않는다'는 악의적인 말이 퍼진 것이다. 이것은 좀 해명이 필요하다. 왜 그런 말이 생겨났느냐 하면 보성은 일제시대 세금징수실적이 가장 저조한 고장이었다. 그만큼 반골기질이 강하여 저항을 많이 했던 것이다. 그 바람에 담당 세리(稅吏)들은 번번이 좌천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영광스러운 악평(?)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고향을 생각할 적마다 나는 잊을 수 없는 분이 있다. 아니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내말에 공감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분이 누구냐 하면 초창기부터 보성중학교 교장을 역임하신 안태시(安泰時)선생님이다. 선생님은 한곳에서 십 수년간 교장선생님으로 봉직하면서 면학분위기 조성과 충효정신을 널리 진작시켰다. 그 바람에 인접 군에서까지 학생들이 몰려들고 해마다 많은 숫자가 대도시 명문학교에 합격하여 진학 하였다.
당시 보면, 선생님의 교육방침은 독특한 데가 있었다. 우열반을 운영했는데, 반 명칭도 다른 학교와는 달리 조(組)라고 하고 숫자대신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효(孝)하고 붙였다. 이는 소위 맹자(孟子)가 말한 사덕(四德)에다 효제충신(孝悌忠信)에서 두 자를 따온 것이었다. 이것만 보아도 학력신장뿐 아니라 인성교육에서도 얼마나 공맹(孔孟)사상에 입각한 철저한 교육을 시켰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런 교장선생님이 조회 때 훈화하시는 걸 보면 독특한 자세를 취하셨다. 오른손을 아랫배에 대고 말씀을 하셨는데, 들리는 말로는 맹장염을 앓고 계셔서 그런 거라 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비교적 간단한 수술로 고칠 수 있을 텐 데도 굳이 그러하지 않는 건 부모님이 물러주신 육신에 칼을 댈 수가 없다하여 견디고 계신 것이었다. 그야말로 공자 님이 말씀하신 대로'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하니 불감훼상(不敢毁傷)이 효지시야(孝之始也)'라는 말을 그대로 실천하신 것이었다.
선생님은 수업을 감독하시다가 교사가 없는 교실이 보이면 들어오셔서 특강하시기를 즐겨하셨다. 한번은 자습시간에 우리 반 교실에 들어오셨다. 들어와 충효이야기를 하시며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셨다.
"아비가 다른 사람에게 봉변을 당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되겠느냐"
학생들은 느닷없는 질문에 선뜻 대답을 못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아비가 곤경에 처하도록 만든 것은 자식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 마땅히 상대하여 분을 풀어 드려야 하느니라"
그 말을 듣던 우리는 모두 의아해질 뿐이었다. 그런데 훗날에 우연히 논어의 말씀을 접하니 그런 실례가 있지 않는가.
논어 자로 편의 이야기다. 섭공이라는 귀족이 공자 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고장에 정직한 사람이 있는데, 그 아비가 양을 훔친 것을 아들이 그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그러자 공자님은 "우리고장의 정직한 사람은 그와 다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숨기며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숨기나니, 정직은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보니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나는 수개월 전, 읍내에 볼일이 있어 들은 김에 교정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학교는 산전벽해라는 할 만큼 변해있었다. 그런 가운데 눈에 띄는 한 조형물이 보였다. 그것은 바로 안태시 교장선생님의 흉상과 공적비였다. 나는 40여 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온화한 모습을 대하니 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났다. 그런 중에서도 뇌리를 스치는 것은 늘 강조하신 "효도하라, 그리고 면학에 힘써라"는 말씀이 쟁쟁하게 귓전을 때리는 것이었다. (2006)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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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날 보성중학교가 명문이 된데는 크신스승님의 공덕이 있었음을 잘 배웠습니다.요즈음 보성정신에 관하여 쪼금 생각하고 있었는데 3보에 대해서도...감사합니다.
선배님, 강건하시지요?! 교육현장에서 아이들 가르치고 있는 교사로서 많은 반성과 많은 생각을 해봅니다. 고운 글 잘 읽고 갑니다. 10월 26일(목요일) 늦은 7시30분 순천에서 뵐 수 있기를 희망해봅니다! 낮과 밤의 기온차가 큽니다. 강건하십시오! 꾸벅
보성에 가서 주먹자랑하지 말라는 얘기, 3성 3평 얘기 등은 우리 보성을 폄하하고자,,, 강직한 고을사람들을 폄하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어거지로 만들어낸 야~그가 아닌지 의문이 갑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훌륭한 스승님이 계시어 훌륭한 선배님이 배출되신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