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다.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이탈리아 북부 도미니크 수도원. 이곳에 있던 중세 최대의 도서관이 불에 탔다. 이를 지켜보던 윌리엄 수도사는 제자 아드소에게 말했다. 범인은 도서관에 은폐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이 세상에 공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연쇄살인을 저질렀다. 이책이 공개되면 자신이 믿고 절대진리라고 믿어왔던 가치들이 한 순간에 잿더미로 변해버리기 때문. 누구보다 엄숙하고 근엄한 중세 수도자였던 범인은 시학 2권에 나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웃음'을 은폐하려 동료들을 죽였다.
다른 가치와 타협을 찾지 못했던 중세의 진리를 몸으로 실현했던 범인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은 숨겨야만 하는 또 다른 진리다. 책을 몰래 본 사람은 그 내용이 새기도 전에 죽고 만다. 신의 이름으로 죄를 처단하겠다는 범인의 의지에 따라. 이제 윌리엄은 제자 아드소와 함께 범인을 밝혀냈지만 범인은 도서관에 불을 지르며 진리에 대한 자기 확신을 보여준다. 그와 함께 중세 철학과 학문, 지식의 집합처였던 도미니스 수도원의 도서관이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그렇게 어두웠던 중세는 막을 내렸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서양 중세 후기 진리들간 쟁투의 축약판이다. 아드소는 자신의 청년 시절 이야기를 노인이 된 지금 기억을 되짚으며 말한다. 당시의 그 거센 풍파를, 그 거칠었던 진리의 기억들을 장미에 비유하며.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이제 진리를 둘러싼 중세의 모든 갈등은 덧없는 이야기가 돼 버리고, 그와 함께 진리를 지키고자 목숨까지 내놓았던 진리의 순교자 또한 시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진리란 무엇인가. <장미의 이름>에서 이 질문은 무의미하다. 대신 누구의 진리인가, 누구를 위한 진리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진리는 늘 자신을 위해 죽어줄 사람을 필요로 하는 법. 결국 진리란 순교자들의 삶과 꿈을 건 전쟁의 전리품이며, 그런 의미에서 진리는 자신이 믿는 가치를 실현하는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때문에 가장 진리스러운 것일수록 독선과 오만에 빠지기 쉽다.
이쯤 되면 진리는 칼 포퍼가 말했던 `반증가능성'을 잃어버린다. 진리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간의 투쟁 대상이다.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자신에 대한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다. 권위주의의 제왕이다. 때로 사람들은 절대성에서 묻어나온 카리스마에 현혹되고 그 안에서 안락과 평온을 보장받곤 한다. 그래서다. 절대 진리를 믿는 자를 경계하라. 원칙과 소신이 지나치면 독선과 독단이 된다. 저들에게 자신의 진리를 믿지 않는 자는 그저 타도해야 할 `악'의 대상일 뿐이다. 특히 그 진리란 것이 이제 남은 거라곤 지난날의 이름뿐인, 시대에 뒤떨어진 담론일수록 더욱 위험하다.
조중동의 담론, 반대로 조중동을 바라보는 담론 또한 대개 이런 편견에 빠져들기 십상이다. 신문이든 방송이든 모든 미디어는 게이트키핑이라는 과정을 거친다. 모든 팩트를 담담하게 있는 그대로 그려낼 수 있는 기자는 세상에 없다. 인터넷으로 24시간 카메라 생중계를 하더라도 이는 그날 시위 현장에 있던 모든 팩트를 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렌즈에 잡힌 사실의 단편 조각만 보여줄 뿐이다.
그탓에 같은 사건을 두고도 소위 조중동과 경향 한겨레는 마치 정반대 일의 벌어진 것인양 다르게 보도한다. 한쪽에서 시민들이 물대포에 맞아 쓰러지고 있었다면 또 다른 한쪽에선 시위대가 의경을 때리고 있다. 결국 자신이 믿는 가치와 진리가 어느 편에 있는 것이냐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이 달라지고 진실이 뒤바뀐다.
그렇다면 언론이 늘 주장하는 객관성이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실재하는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판단의 문제다. 그 어디에도 있는 사실 그대로를 하나도 가감없이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만 사실의 단편적인 조각들을 하나씩 모으다 보면 어느새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지게 마련이다. 그 조각들이 많을수록 판단은 객관적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래서다. 조중동이 하는 말은 늘 거짓말일까. 경향과 한겨레가 하는 말은 늘 진실일까. 적어도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이 조중동을 보고 나머지 절반이 경향과 한겨레를 본다고 했을 때 이들 중 한 편은 거짓과 허구 속에 살아간다고 볼 수 있을까.
기자들은 세상 모든 첨예한 이슈에 있다 보니 가끔씩 스스로가 시민운동가인지, 또는 정치인인지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러나 기자라면 적어도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열린 자세를 잊어선 안된다. 기자를 준비하는 이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어느 한편의 얘기만 옳다고 보거나 그 반대편의 말은 모두 거짓이라는 독단은 버려야 한다.
세상을 보는 자신의 프레임이 누구는 한겨레에 가까울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구는 조선에 가까울 수 있다. 그러나 기자가 되겠다고 맘 먹은 이상, 어느 한편을 진리처럼, 또 어느 한편을 거짓처럼 여겨선 곤란하다. 팩트의 조각을 맞춰 큰 그림을 그리는 태도는 기자라면 누구나 몸에 배 있기 마련이어서다. 물론 일부 예외는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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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에이... 조중동은 말바꾸는 게 문제잖아요. 엊그제 한 말이랑 오늘 한 말이 그저 자기들 입맛 따라 달라질 수 있다면 그건 윗글의 내용과는 다른 문제 아닐까요.
조중동이 제대로 된 보수이고 신념있는 언론집단이라면 위의 글에 공감하겠으나...아쉽게도 그들은 또 다른 '일부 예외'에 해당되는 것 같네요...
저도 어린시절 한겨레가 무조건 '선'이고 '진실'인줄 알았습니다. 당연 조중동은 '악'이고.. 뭐 언론사가 자신들의 세계관으로 사안을 본다는 건 모르고.. 매체비평 수업을 수강을 통해 모든 언론, 미디어를 심지어 제가 가장 가고 싶어하는 언론사마저 비판적으로 보는 눈을 기르게 됐습니다. ... 글이 정말 와 닿습니다. 열린마음~~ 이건 기자뿐만 아니라 모두가 지녀야 하는 거 같네요
좋은 글 잘 봤습니다. 퍼가요^^
장미의 이름하니까 그 제자 아드조가 생각나네요~ 좋은 글 잘 봤습니다. ^ ^
간만에 제대로 공감가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