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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신라,가야토론방 '삼국통일'은 없다.
지수신 추천 0 조회 662 09.12.25 10:05 댓글 29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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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12.25 10:09

    첫댓글 이부분은 확실히 문제가 있습니다. 왜 삼국통일이라고 하는건지.... 남북국시대가 맞다고 봅니다.

  • 09.12.25 10:16

    요즘 문득 든 생각인데, 발해가 존재함에도 신라가 '통일' 을 자처할 수 있었던 것은 비스마르크 당시 독일의 상황에 준해 생각해 볼 수 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독일민족의 통일의 목표는 '신성로마제국'의 영역이었고, 그것은 대략 훗날의 1차대전 이전의 독일제국(제2제국)과 현재의 오스트리아 및 체코 정도를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오스트리아를 포함하는 완전한 통일과 오스트리아를 배제하는 현실적 통일안 중에서 후자가 채택되어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통일독일제국' 을 선포하게 되고 독일제국은 자신이 '통일국가' 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는 독일민족의 범주에서 오스트리아를 배제한다는 말이나 다름없는

  • 09.12.26 21:59

    것이었지요. (재미있게도 독일제국의 독일 영역에 오스트리아와 체코를 합병하여 '신성로마제국의 회복' 을 달성한 것은 히틀러였습니다. 그 때문에 다른 지역도 아니고 오스트리아와 체코의 합병을 강조하고 - 사실 이건 베르사유조약 제80조 위반입니다만 - 또 영, 프도 이를 슬쩍 묵인한 것이지요. 덕분에 2차대전 직전의 독일은 '대독일' 을 달성하게 됩니다.)
    신라 역시 이와 같이 발해를 '통일의 범주에서 배제' 하는 인식을 형성하였던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듭니다. 그리 인식하는 것이 신라의 '빠른 체제안정화' 에 도움도 될 뿐더러 현실적으로 발해를 병합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은 상황이었으니 말이지요.

  • 09.12.26 15:12

    문제는 그렇게 볼경우 비스마르크의 제한적 통일이나 신라의 제한적 통일이나
    모두 정치적인 통일이 되는걸 인정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말그대로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체코 통일?을 폴란드와는 달리 영프가 우물쭈물 넘긴 이유가 게르만의 진정한 통일이라고 생각할정도로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면 비스마르크의 통일은 문제가 있는 통일이 아닌지...... 지수진님 말씀대로 왠지 통일이라 부르기엔 좀 미지근한...느낌이 듭니다^^;;;

  • 09.12.27 00:10

    통일론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부분이 없지 않군요

  • 09.12.25 10:43

    삼국통일이라 할 수있는 것은 고구려왕조를 포섭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수도 평양일대를 점령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반도통일이 대동강 원산만일대까지 된다면 북한의 수도 평양을 수복하였고 영토라든지 인구는 부차적인 요소입니다 6.25전쟁에서 서울탈환 수복의 개념만 보아도 한 나라의 수도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며 그 상징성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발해가 한국사라면 요금청의 역사를 주장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입니다 왜 말갈인들의 역사를 도둑질 하는지 모르겠군요 정작 말갈인들은 한민족에서 파내버리면서 말이지요

  • 09.12.25 10:42

    발해의 역사를 한국사로 인정받고 싶으시고 남북국이라 명하고 싶으시면 말갈인부터 한민족에 포섭하시기 바랍니다^^

  • 09.12.25 10:50

    신라가 평양일대 점령했다는 기록은 어디서 볼 수 있는지요? 그리고 일단은 발해인 스스로가 부여와 고려를 계승을 했음을 자처하고 발해의 왕이 스스로를 고려왕이라고 불렀는데, 이러한 그들의 의식구조를 왜 배제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발해는 분명 고려의 연장선으로 봐야 합니다. 말갈인들의 대부분은 진즉에 고려에 포섭되었습니다. 건국자인 대조영은 말갈계 고려인으로 고려에서 장수를 지냈던 분명 고려인이지요.

  • 09.12.25 11:04

    대신라의 북측 경계선이 대동강 원산만일대이고 후고구려의 삼국통일이후 왕건이 평양을 중시했다는 것 이런 것으로 미루어 평양지역이 너무 파괴가 심하여 신라가 버린 것인지...옛날에 오늘날 처럼 국경선 자르듯이 선을 그어 놓은 것은 아니니깐요 발해와 평양과 관련된 기록을 알수가 있을까요? 발해인들의 그런 인식을 이해한다면 왜 거란 금나라 이정기가 세운나라에 대해서는 다른 태도를 취하는 지요?? 대조영이 고려인이라면 왜 말갈인이라는 정체성은 왜 나타나는 것인지요? 고구려영역내에 말갈계고구려인과 말갈인들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 09.12.25 11:13

    평양일대는 발해와 신라의 중간지대로서 딱히 '누구 땅' 이라 말하기 애매한 지역이었으리라 봅니다. 당시 국경이 면적 개념이었다고 생각해 본다면, 특히 충돌이 나기 쉬운 한반도 서쪽 지역에서 대동강 바로 북안에 위치한 평양은 중간지대로 남아 있었을 것 같습니다.

  • 09.12.25 11:18

    신라가 평양일대를 버린 것이 아니라 735년대에 이르러서야 신라는 대동강 이남의 권리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습니다. 평양을 차지한 적이 있어야 평양을 버릴 기회가 있든 말든 하지요. 이정기의 제, 요, 금 등이 발해처럼 대놓고 고려 계승을 자처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조영이 고려 정부에서 장수로 지낸 이상 고려인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앨리스킴이 한국계이더라도 그녀는 어디까지나 미국인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정체성이 남아 있는 이유는 대조영의 선대가 속말계라서 그런 것 같군요. 사실 이것도 어디까지나 당측이 남긴 것으로 발해인 스스로가 우리는 말갈계라고 자처한 근거는 없습니다.

  • 09.12.25 11:17

    고려가 순수 고려인과 말갈계 고려인들을 차별했다고 볼만한 사료는 아직까진 없는 것으로 압니다. 또한 속말말갈인들도 옛 부여인들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리고 건국자의 출신 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 스스로의 계승의식입니다. 저는 발해인들이 고려를 계승했음과 군주들이 고려국왕이라고 자처한 이상 발해 스스로의 의식구조를 부정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발해 내에 말갈의 비중이 생각 보다 큰 것도 아니고요.

  • 09.12.27 00:13

    당대 사서에서 고구려 왕조를 포섭했다는 인식이 뭐가 있는지요? 평양 지대는 국사 교과서 지도로 봐도 통일 신라 시대 영역으로 보기는 힘듭니다만.....? 이미 그 시기, 다 황폐화된 평양에 고구려 왕조의 흡수를 의미하는 무엇이 남았길래, 평양을 먹기만 하면 고구려 왕조를 포섭하고 통일이라 불러줄 수 있다는 겁니까? 그럼 임진왜란 때 한양 넘어까지 진격했던 일본 역시 조선 왕조를 (잠시나마) 포섭했다고 해야 맞는 걸까요?

  • 09.12.25 22:03

    미주가효님의 의견이 눈에 띠는군요. 당시 북쪽에서 발해가 등장했다고 해서 신라가 통일론을 철회하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제한적 통일론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렇게 본다면 어느 정도 절충이 되겠군요. // 그런데 통일이 기본적으로 과거 하나에서 깨진 세력들만의 통합을 통일이라 볼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지수신님께서 예로 드신 춘추전국시대만 하더라도, 사실 전통적인 중화란 위(衛), 노, 송, 제, 진(晉) 정도였고 진(秦), 초, 오, 월, 연 등은 이민족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도 교류를 통해서 점차 동질의식을 갖게 되었고, 이에 따라 진(秦)나라가 통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 작성자 09.12.29 22:07

    그 '이민족 취급'이란게 중원 국가들의 시각에서 그렇다는 것일 뿐입니다. '주 왕실을 받드는 제후'라는 동질성은 이미 깔려있던 상태니까요. 역사상에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정복한 사례는 많은데, 그중 어떤 것은 '통일'이라 하고 어떤 것은 그렇게 부르지 않는 것은 -이전에 본래 하나였는가-의 동질성 문제 외에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 09.12.29 22:19

    망해가던 서주를 도와 세워진 진(秦)이나 본래 종실 성인 오, 연나라야 주왕실을 받드는 제후로 볼 수 있겠지만, 초나라 같은 경우는 그렇게 보기가 어렵습니다. 본래부터 자체적으로 왕을 칭했던 나라인데다가 주나라와는 완전 별개였지요. 그럼에도 화하족이 나중에 진한대에 팽창되어 한족이 된 것입니다. 통일이라는 용어에 그러한 전제가 뒷받침되어야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통합과 비슷한 정도의 용어로 생각합니다.

  • 09.12.25 22:04

    그런 점에서 5세기 이래 고구려, 백제, 신라 간에 삼한 의식이 생겨나고 삼한일통이란 말이 나타났다(물론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는 것도 쉽게 부정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09.12.27 00:21

    삼한일통과 삼한 의식이 과연 5세기 이래 한반도 전역의 각지에 퍼졌던 인식이었는지부터 숙고하고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무엇을 통해 알 수 있을까요? 물론 본문에서 말한 ethnic group 개념을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만, 삼한일통의 의미를 현대적인 강한 민족 연대의 관념으로 보느냐, 아니면 다분히 정복과 지배에 대해 내세우고자 했던 지배 인사들만의 정치적 슬로건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는 굉장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만약 발해를 등한시한 제한적 통일론이라 한다면, 발해는 우리 역사에서 빼야 되는 걸까요? 우리 역사는 무엇을 기준으로 이어나가고 계승시켜야 하는 걸까요?

  • 09.12.27 00:22

    요컨대, 8~10세기 때는 발해를 제외한 제한적 통일론에 손을 들어 줬다가, 다시 이후 시대엔 발해도 우리 역사에 포함시키자는 이중적인 잣대는 역사 계승의식에 크나큰 모순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죠... 본문에서는 그런 점에서 양자택일의 대안을 제시한 것일 듯 하구요....

  • 09.12.28 18:00

    신라측에서 제한적 통일론으로 여겼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한적 통일론이 제기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하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미주가효님의 말씀대로 19세기 후반에는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통일인 小독일주의를 제창했었지만, 20세기 전반으로 가면 히틀러가 같은 게르만족이라는 이유로 오스트리아를 합병했었고 영국, 프랑스가 이를 승인한 일도 있었습니다(이후는 아시다시피 전쟁을 일으켰기에 다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만). 즉 신라측에서 그렇게 여겼든 어쨌든, 지금의 우리가 발해를 제외시킬 이유는 없습니다. 그 제한적 통일론이란 말이 이중적 잣대가 될 까닭이 없지요.

  • 09.12.28 18:06

    그리고 부여장님의 말씀을 보면, 다분히 민족을 정치적 문제와 분리시켜 보시려는 경향이 강한 것 같군요. 그런데 민족이란 것 자체가 이미 정치성을 띠고 있는 것이고, 정치적으로 계속 변천하는 것입니다. 만약 고려, 조선시대에 지속적인 통합 의식이 형성되지 않았다면 舊 백제 지역이나 신라 지역 사람들이 동질의식을 느낄 수가 있었겠습니까? // 일단 삼한일통이란 말은 7세기 이후에 나타났다고 명시해 놓았는데, 잘못 보신 것 같군요. 그리고 삼한의식은 적어도 5세기 이후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인들 자체적으로도 스스로 마한과 결부시키는 인식도 나타났고, 삼국 간의 동질의식이 5세기 고구려 천하의 형성 무렵부터

  • 09.12.28 18:09

    발전합니다. 그리고 삼한이란 말 자체도 [일본서기] 속의 기사들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으로 기억하는데(즉 신라인들이 일방적으로 만든 의식은 아니라는 증거가 되겠지요), 이건 저도 다시 확인을 해봐야겠습니다. 물론 이 삼한이 고구려까지 포함하는 명칭인지에 대한 서언왕님의 의문 제기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볼 여지가 있겠습니다만...

  • 09.12.25 23:00

    그런데 문무왕의 삼한일통의식과 최치원 시기의 삼한일통의식은 다르지 않을까요? 최치원은 마한은 고구려, 진한은 신라 변한을 백제라 했지만, 문무왕 시기에는 마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 변한은 가야라 인식했던 것 같습니다. 문무왕이 설인귀에 보낸 서신에 의하면 춘추와 당태종이 맹약을 맺을 때 패수를 경계로 패수 이남은 신라가 갖는다고 하였죠. 고구려의 땅은 배제한, 백제의 땅만 신라가 갖는다입니다. 실제로 신라가 당과 싸운 이유가 당이 신라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백제의 땅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했기 때문이죠

  • 09.12.25 23:01

    그렇기에 7세기 당대 신라인의 삼한일통 의식에는 고구려가 배제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 09.12.26 04:26

    여기서 말하는 패수는 지금의 대동강을 이야기하는 것인가요?

  • 09.12.26 01:37

    삼국간 근대적 개념의 민족관은 없었다 하더라도 삼국간 언어와 문화의 동질성에 근거한 준민족관은 분명 존재했습니다. 중국사서에 '해동삼국'이라는 표현은 중국인들의 독특한 관념이 아니라 삼국인들의 생각이 사서에 반영된 결과로 보여집니다. 고조선 유민을 자임했던 신라가 고조선의 고토에서 세워진 고구려와 그 별종으로 기록된 백제를 신라와는 전혀 다른 이민족으로까지 여길리가 없습니다. 최치원의 삼한론에서도 이것은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삼국통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거니와 신라와 발해 간에도 서로를 전혀 동떨어진 이적시 관념만 지배했다고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 09.12.27 14:47

    당나라에서 김유신에게 내려진 평양군개국공의 직함과 식읍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그로 인해 그의 손자 윤중과 윤문이 발해 공격시 김유신 손자를 지목하여 발해공격을 요청한 부분 (평양진수)..후에 윤중,사인등이 평양의 지세를 살피며 감찰한 것과 윤중의 손자 김암이 주로 그쪽 북방지역의 수장이 되어 관리하는 등 김유신에게 내려진 평양식읍의 영지관리와 관련을 완전히 무시할 수가 있는 것인지?..전혀 검토가 없다는 점이지요..물론 단순무식하게 그건 명예직이다라고 해버리는 경우는 아예 토론대상에서 제외이지요!

  • 09.12.27 14:53

    그리고 통일이라는 것이 반드시 한가지가 여러개로 나누어졌다가 다시 재통합되는 것이 통일이라는 논리는 뭐에요?...서로 다른 것들이 하나로 뭉쳐져 하나가 되면 그것이 통일이고, 대단위로 몇개씩으로 합쳐지면 그것 통합이잖아요.

  • 14.04.28 09:02

    잘 읽었습니다. 스크랩이 안되어서 주소만 펌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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