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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 별세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 겸 전 명예
회장이 2001년 3월 21일 오후 10시
서울중앙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86세였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전 명예회장의
자서전 제목이기도 한 이 구절은 그의
인생관을 잘 축약한 것이다.
정주영씨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한국
현대사의 주요 고비마다 큰 족적을 남긴
시대의 거목이었다.
창조적 도전의식, 불굴의 개척정신,
강인한 추진력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산업항공사,
현대조선소 신화, 포니엑셀 신화 등을
통해 개발도상국이었던 한국을 신흥공업국
대열에 올려 놓는 데 일조했고,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주역 중 한 사람이었다.
‘전후복구사업→공업입국→중화학공업화
→첨단산업화’로 이어지는 우리 경제사의
주요 물줄기를 민간부문에서 이끌어 온
주역이었다.
말년에 그가 심혈을 기울인 것은 대북
사업이었다.1989년 민간기업인으로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한 그는 이후 머지않아
통일이 이뤄질 것이라는 신념을 피력해
왔다
첫 방북 9년 만인 1998년 6월 16일
그는 판문점 ‘소떼몰이’ 방북으로 세계인
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평생 동안
새벽 일찍 일어나는 것은 그날 할 일이
즐거워서 기대와 흥분으로 마음이 설레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던 그도 세월을
이기지는 못했다.
기력이 쇠해 자식간 경영권 분쟁인 ‘왕자
의 난’(2000년 3월)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고, 2000년 8월 이후에는 병원에서
요양생활을 해야 할 정도로 기력이 뚝
떨어졌다
▶2011년신정아 자서전 출간
▶2011년국정원, 인도네시아 특사단 숙소 잠입사건
▶2007년미즈메디병원 배아줄기세포 연구 중단 선언
▶2007년이라크서 독가스 테러
▶2003년19세 임동혁군,
‘세계 피아니스트 100인’에 초청
피아니스트 임동혁.
▶2003년‘이라크 침략 규탄,
한국군 파병반대’ 교수 800인 선언
▶2002년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방한(-23일)
고이즈미 일본 총리와 김대중 대통령이 22일
서울 상암 월드컵경기장을 방문, 대형 축구공에
서명하고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초청으로 21일 공식 방한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는 22일 오전 청와대에서 1시간 25분간의 단독·확대 정상회담을 갖고 공동 기자회견을 했다.
양국 정상은 월드컵 개·폐회식의 교차 참석, 자유무역지대(FTA) 체결을 위한 산·학·관(産·學·官) 공동 위원회 설립, 역사 교과서를 포함한 7개 현안의 합의 실천, 한·일 정책 대화 촉진 등 한·일 관계의 지속적 발전에 중요한 요소들에 대해 합의했다.
김 대통령은 회견에서 고이즈미 총리를 수차례 “친구” 라고 언급하며 친근감을 표시했고, 고이즈미 총리도 ‘사실은 소설보다 기이하다’ 는 일본 속담을 인용, “김 대통령의 생애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역사에 남을 대통령 각하라고 생각한다” 고 말했다.
김 대통령은 일본의 대중문화에 대한 개방 용의를 묻는 질문에 대해 “문화는 원칙적으로 개방돼야 하며 문화쇄국주의는 누구에게도 도움되지 않는다” 면서 “우리도 이 문제와 병행해 문화개방에 대해 필요한 과감한 조치를 앞으로 취해나갈 것” 이라고 말했다.
김 대통령은 일·북 관계에 대해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결국 대화가 열려 정상화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인권문제도 대화를 통해 해결되기 바란다” 고 말했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는 “일본인 납치문제라는 어려운 문제도 안고 있다” “일본의 입장을 분명하게 북한에 전달함과 동시에 수교협상과 관련해서는 끈기를 갖고 임할 생각” 이라고 말했다.
두 정상은 이어 이날 오후 양국의 유니폼을 입은 어린이와 청소년 등 100여명의 관계자들로부터 박수를 받는 가운데 상암 월드컵경기장을 함께 방문, 문동후(文東厚) 월드컵 조직위원회 사무총장으로부터 준비현황을 보고받았다.
두 정상은 또 월드컵 공인구인 모형 피버노바에 함께 ‘김대중’ ‘소천순일랑’ 이라고 사인한 뒤 상대국 정상의 이름이 적힌 유니폼을 아동들로부터 전달받아 서로 교환했다.
▶2001년정주영현대 명예회장별세
▶2001년한덕수 재일 조총련 의장 사망
▶1999년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씨 별세
▶1998년서방선진7개국(G7)
한국에 10억달러 지원합의 발표
▶ 1998년 소련 최초의 최고 수석 발레리나 울라노바 사망
울라노바 [Ulanova, Galina Sergeevna, 1910.1.10~1998.3.21]
가장 위대한 러시아 출신 발레리나 가운데 한사람인 갈리나 울라노바가 21일 오전 11시(현지시간) 모스크바 중앙병원에서 오랜 지병끝에 사망했다고 이타르타스 통신이 보도했다. 향년 88세.
울라노바는 지난 28년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유명한 키로프 발레단에 입단한 후 44년 모스크바 볼쇼이 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로 발돋움했으며 60년 현직에서 은퇴하고 볼쇼이 발레단에서 교습가로 활약했다.
그는 2번이나 사회주의 노동영웅으로 선정되어 레닌 훈장을 받았고 백조의 호수, 지젤, 신데렐라, 잠자는 숲속의 미녀, 로미오와 줄리엣 등과 같은 고전 발레에서 보여준 탁월한 춤 솜씨로 스탈린 상을 4번이나 수상했다.
▶1995년영국-아일랜드, 북아일랜드 평화안 공식승인
▶1994년제44회 베를린영화제서 `화엄경` 특별상 수상
▶1992년김기훈, 사상 처음으로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 획득
▶1992년한국-아르메니아 국교 수립
▶1984년소련의 소설가 숄로호프 사망 - 1965년 노벨문학상 수상
▶1982년이념서적 35년만에 시판허용
▶1979년영국, 이집트, 이스라엘 3국대표
78년 11월이래 중단된 평화조약협상 재개
▶1978년동일방직 인천 공장의 `똥물 투척` 사건
▶1973년이스라엘 전투기,
리비아 여객기 격추 1백여명 사망
▶1972년남북적십자회담 첫 실무회담 개최
▶1968년북악스카이웨이-인왕스카이웨이 착공
▶1965년말콤X 피살
▶1964년필리핀 여객기 민다나오섬에 추락 31명 사망
▶1963년중앙정보부장에 김재춘 발령
▶1961년혁신계, 유엔보장하의
중립화통일추진운동으로 500만 서명운동 전개
▶1958년이집트와 시리아가 합병해
아랍연합공화국 수립, 초대 대통령에 나세르 취임
▶ 1958년 오늘,
영국의 영화배우 게리 올드먼(Gary Old man) 잉글랜드 런던,뉴크로스 에서 출생~ 1982년에 그는 스크린 데뷔를 하였고, 《레옹》, 《제5원소》, 《한니발》, 《해리포터》 시리즈외에도
《배트맨 비긴즈》, 《다크나이트》,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등에출연하였다.
그는 국제적 명성을 가진 동시에, 자신만의 고전적인
연기 스타일을 가진 배우이다.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통해, 2012년 미국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에서 첫 지명되었다. 영화《다키스트 아워》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골든 글로브상 드라마 영화부문 남우주연상, 영국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57년농림부 청사 전소
▶1954년반공포로 76명 인도 도착
▶ 1954년 3월 21일.
대한민국 표준시, UTC+8:30으로 변경하다.
대한민국 최초의 표준시의 기준이 된
앙부일구 [조선일보]
대한민국의 표준시의 역사는 세종대왕 시기로 올라간다. 세종대왕이 앙부일구를 만들어 서울 혜정교와 종묘앞에 설치를 했는데 한양의 경도가 127도 이므로 당시 표준시는 UTC+08:28이다.
UTC는 세계협정시간으로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점으로 동경으로 +로, 서경으로 -로 시간이 변경된다. UTC+08:28은 세계협정시간보다 8:28 빠르다는 의미이다.
대한민국 포준시의 변경 추이 [한국경제]
오늘날 말하는 현대적인 표준시를 최초로 시행한 시기는 1908년 대한제국 시기로서 동경 127도 30분을 기점으로 UTC+08:30을 최초의 한국 표준시로 시행한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인 1912년 조선총독부가 일본과 시간을 동일하게 한반도의 표준시를 UTC+09:00로 변경하였다.
이후 해방이 된 이승만 정권때 한국전쟁 이후인 1954년 3월 21일에 대한민국 표준시를 일제강점기 전인 UTC+08:30으로 표준시를 재변경 하였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 다시 일본과 동일하게 현재의 UTC+09:00 시간을 표준시로 책정한 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52년북대서양조약 국방위원회
NATO군 창설계획 승인
▶1946년군정청, 일본은행권 동결
▶1944년한글학자 한징 사망
▶1943년소설가 현진건 사망
▶1941년총독부, 조선청년단 조직
▶1938년헤일 망원경(1948)을 개발한
미국의 천문학자 헤일 사망
▶1936년단재 신채호 옥사
▶1930년런던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해군 군축회의 개최
▶1925년조선일보, 색채인쇄윤전기 설치
▶1925년조선일보 최초의 러시아특파원으로 김준연 파견
▶1918년서당에 관한 규칙 제정
▶1916년독일-프랑스 베르됭 전투 발발
▶1911년미일통상항해조약 조인
▶1902년경부철도청부회사 설립
▶1884년프랑스, 노동조합법 공포
▶1829년스페인에 대지진, 6천여명 사망
▶1806년멕시코의 대통령(1861-72 재임) 후아레스 출생
▶1804년나폴레옹 법전 공포
세계 각국 민법의 뿌리가 된 ‘프랑스 민법전’(Code Civil des Francais)이 1804년 오늘, 공포됐다. 3편 2281조로 구성된 이 법전은 인격의 평등, 소유권의 절대성, 계약자유의 원칙, 과실 책임주의 등 근대 시민법의 기본원리를 처음으로 담았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이후 각국이 민법을 제정할 때 이 ‘모법 답안’을 참고했다.
나폴레옹 1세는 1807년 민법전 이름을 ‘나폴레옹 법전’(Code Napoleon)으로 개칭했다. 제정된 뒤 200년이나 되었지만 여전히 프랑스 민법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다. 물론 그사이 약간의 수정과 판례법을 통한 보충이 있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으로 수립된 공화정을 폐지하고 황제가 되었지만 혁명정신만은 이어갈 필요가 있었다. 그는 법제화를 통해 혁명의 원리를 정착시켜 나갔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전쟁의 고통뿐 아니라 법전이 담고 있는 개인주의적 원칙까지 전파했다. 법은 국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약속이라는 인식이 자리잡게 했다.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군과 싸우면서도 이를 본뜬 법을 만들었을 정도였다.
대혁명 이전의 프랑스의 법체계는 뒤죽박죽이었다.남부에서는 로마법이 계승되고 있었고 북부에서는 게르만식 봉건제도에 바탕한 관습법이 유지되고 있었다. 결혼과 가족생활은 로마 가톨릭의 교회법에 따랐다. 왕의 칙령과 법원 판례가 뒤섞여 법률가도 고개를 내져었을 정도였다.
대혁명이 성공하면서 각기 다른 법을 통일하려는 시도가 구체화되었지만 유야무야되었고, 나폴레옹이 나서서 완결지었다. 쉽고 간결한 정리로 소설가 스탕달이 문장 연습을 위해 매일 읽었다고 한다. 남성 위주여서 ‘여성의 예속을 신성화시킨 기념비’라는 지적도 있다.
▶1762년프랑스의 천문학자 라카유 사망
▶1685년독일 작곡가 요한 세바스찬 바흐 출생
요한 세바스찬 바흐.
▶1543년코페르니쿠스, 지동설 발표
코페르니쿠스.
기차를 타고 창 밖을 바라보면서 출발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옆에 서 있던 다른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마치 자신이 탄 기차가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움직이고 있는 것이 지구인지 아니면 천구인지의 문제와 같다. 훌륭한 새로운 학설이 나와도 기존 학설을 뒤엎고 난 후의 종교적인 보복이 두려워 발표를 꺼리던 16세기,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1543년 3월 21일 기존의 ‘천동설’ 을 뒤엎고 ‘지동설’ 을 발표했다.
그는 1543년 출판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에서 태양중심설을 제창했다. 지동설은 ‘태양중심설’ 이라고도 하며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이론이다.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으로부터 가까운 순으로 수성·금성·지구·화성·목성·토성 등의 행성들이 배열되어 있으며, 각 행성들은 일정한 속도를 가지고 태양주위를 원운동한다고 생각하고 지동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당시의 지식인들, 특히 교회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그 후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이용하여 금성의 위상 변화, 태양의 흑점, 목성의 위성 등을 발견했고, 케플러는 행성운동에 관련된 세 가지 법칙을 발견하여 지동설을 확립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그리고, 뉴턴이 행성 운동에 관한 힘의 정체를 밝힘으로서 지동설은 완전히 자리잡게 됐다.
https://youtu.be/9atumCJ-9tY
출처 네이버지식백과,솦트리종려나무,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