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원만하지 않았다
원만하지 않으므로 그 결핍이 아름다웠다
모진 세월이 아니었다면
그 저문 골짜기 찾아들 수 없었다
몇 번이나 맹세하건대
다만 진실에서 시작하여
진실에서 끝나는 일이었다
그의 역정은
냉전시대의 우상을 거부하는 동안
그는 감방 이불에다
어머니의 빈소를 마련하고
구매품 사과와 건빵 차려놓고
관식 받아 차려놓고
불효자는 웁니다
이렇게 세상 떠난 어머니 시신도 만져보지 못한 채
감방에서 울었다 소리죽여
- 시집『만인보』(창작과비평사,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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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12월 5일은 넬슨 만델라의 6주기이자 현대사의 증인이라 할 리영희 선생이 타계한지 9년째 되는 날이다. 통일과 민주주의, 인권을 주장하면 빨갱이로 매도되었던 시절에 자신의 생각을 한 치의 주저 없이 글로써 진실과 정의를 알리려했던 선생이었다. 오늘날 ‘종북’이나 ‘좌빨’이란 공공연한 수식도 ‘우상’의 편에 선 사람들이 선생에게 덧씌우기 시작하면서 유래되었다고 생각한다. 작가 이병주는 러시아 사상가 베르자예프의 말을 인용하면서 “세상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영향 아래 인생을 사는 사람과 그와 무관하게 사는 사람으로 나뉠 수 있다”고 했다. 그렇듯 세상은 리영희에 빚진 사람과 그와 무관하게 사는 사람들로 구분될 수 있다.
리영희 선생은 한양대학교 신방과 장룡(張龍) 교수가 정년퇴임하면서 그의 추천으로 1972년 조교수가 되었다. 신문사에 있을 때 이 학교에 출강한 것이 인연이 되었겠지만 학벌이나 학연에 따른 줄 세우기가 만연한 대학 풍토에서 박사학위도 없고 언론인으로서의 평론 활동 말고는 별다른 경력과 연고가 없는 ‘전직 기자’가 대학교수로 발탁된 것은 파격이 아닐 수 없다. 선생으로서는 장룡 교수와의 인연이 홍복이고, 두 번씩 해고를 당하면서 겪었던 생활고에서도 당장 벗어날 수 있었다. 오히려 언론사의 갇힌 영역을 벗어남으로써 보다 넓고 자유로운 공간에서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이 우리들과 소중한 인연을 맺게 한 고리였던 셈이다.
나도 ‘사상의 아버지’란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으나 한때 ‘사상의 은사’였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물론 나뿐 아니라 양심이 있고 양식을 가진 모든 젊은이들에게 그는 행동하는 지식인의 귀감이었다. 좌절과 고난으로 점철된 1970년대, 냉전의 우상을 타파하고 시대를 통찰하는 지성인으로서 리영희 선생은 당시 실의에 빠진 청년학생들에게 영롱한 진주와 같은 존재였다. 우리시대 수많은 젊은이와 지식인들에게 사상적 은혜를 베풀고 떠난 선생의 글을 책으로 처음 접한 건 <전환시대의 논리>지만, 그보다 <偶像과 理性>이 더 가슴을 파고들었다. “내가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눠져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지금까지도 그렇고 영원히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라고 설파한 첫머리는 영원히 간직해야할 말씀으로 몇 번씩 꼭꼭 접어 안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주머니 밑창이 타개지고 말씀들은 야금야금 새나갔다. 선생께서도 훗날 책의 개정판을 내면서 “우리사회에서 하루속히, 읽힐 필요가 없는 '구문'이거나 '넋두리'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고 밝혔다.
그러나 선생의 바람과 내 망각에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 망각의 소이인 일상의 고단함에 굴복한 무뎌진 감각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겠으나, 선생의 소망이 온전히 실현되지 못 한데는 우리들 자신의 정신적인 나태도 얼마간 까닭이 있으리라. 수많은 항쟁과 민주적 혁명의 세월을 통과하면서 선생의 가르침대로 양심을 가동했건만, 이성은 단단하지 않았고 논증은 철저하지 못했다.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고 용기마저 부족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보수정권들이 대저 그러했지만 진보정권이라고 자유롭진 않다. 저거들 입맛에 맞는 권력에 복무하면서 이권과 특혜를 누리는 언론인, 곡학아세하며 영달을 도모하는 교수들로 여전히 넘쳐나는 세상이다.
또 검찰 권력은 어떠한가. 진실로 선생이 바라는 바대로 ‘우상’이 판치지 못하는 세상을 소망하건만, 오랜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낯 두꺼운 권력의 유령들에 의해 국정이 망가져가는 어이없는 세상에 머물러 있다. 더구나 존경받는 원로들은 점점 사라져 헛헛하기만 하다. 하지만 정의와 진리가 보편타당해진 세상에서 선생의 저서들이 극복되는 날은 반드시 오리라 믿는다. 한 시대를 진동시킨 사상의 풍운아 리영희 선생과 도타운 교분을 가졌던 고은 시인은 선생의 타계 뒤 “뼈 마디마디로 진실의 자식이고자 한 사람”이라는 추모시를 트윗에 올렸다. 그리고 “불의가 정의로 판치는 것을 못 견디는 사람”이라며 선생의 행동하는 지성을 증언했다.
한편으론 “옥방에서/ 레미제라블 읽으며/ 훌쩍훌쩍 울었던 사람/ 죄수복 입고/ 형무소 1평 반짜리 독방에 어머니 빈소 차리고 울던 사람”이라고 그의 따뜻하고 섬세한 감성을 전했다. 그리고 “환장하게 좋은 사람/ 맛있는 사람/ 속으로 멋있는 사람/ 아름다운 사람/ 리영희 선생! 형! 형!” 흐느끼며 추모시를 끝맺었다.
권순진(2019. 12.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