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뜻깊은 ’개천절’입니다.
서기전 2333년으로서, 통상 단기에서
한 해를 뺀 수로 횟수를 계산하는데,
단기 4355년인 올해 서기 2022년은
제4354주년 개천절이 됩니다.
단기연도를 기억해 내기가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하여 오늘은 ‘개천절’에 대하여 살펴
보고자 합니다.
개천절 [開天節]
‘개천절’은 우리 민족의 시조인 국조 단군이 B.C. 2333년
(戊辰年 무진년), 즉 단군기원 원년 음력 10월 3일에 최초의
민족국가인 단군조선을 건국했음을 기리는 뜻으로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 공포하여 이날을
개천절로 하고 국경일로 제정 공포하였으며 공휴일입니다.
개천절은 삼일절, 광복절, 제헌절, 한글날과 함께 우리나라
5대 국경일 중 하나이며 개천절은 민족사의 출발을 경축
하는 기념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천절은 본래 한민족의 건국 신화인 단군신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개천절 ‘개천(開天)’의 본래의 뜻을 엄밀히 따질
때 단군조선의 건국 일을 뜻한다기보다는,
이보다 124년 전 천신인 환인(桓因)의 뜻을 받아 환웅
(桓雄)이 처음으로 하늘을 열고 태백산(백두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어 홍익인간(弘益人間-널리
인간을 이롭게 함)· 이화세계(理化世界-이치로써 세상을
다스림)의 대업을 시작한 날인 상원 갑자년(上元 甲子年:
B.C.2457년) 음력 10월 3일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개천절은 민족국가의 건국을 경축하는 국가적 경축
일인 동시에, 문화민족으로서의 새로운 탄생을 경축하며
하늘에 감사하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적 명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날을 기리는 제천의식(祭天儀式)은 먼 옛날부터 전해 내려
왔으니, 부여의 영고(迎鼓), 예맥(濊貊)의 무천(舞天), 마한
(馬韓)과 변한(弁韓)의 계음(契飮), 고구려의 동맹(東盟),
백제의 교천(郊天), 신라와 고려의 팔관회(八關會) 등의 행사
는 물론이요,
마니산의 제천단(祭天壇), 구월산(九月山)의 삼성사(三省祠),
평양의 숭령전(崇靈殿) 등에서 행하여진 제천행사(祭天行事)
에서 좋은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특히 우리 민족은 음력 10월을 상달(상월-上月)이라
불러, 한 해 농사를 추수하고 햇곡식으로 제상을 차려 감사
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제천행사를 하게 되는 10월을 가장
귀하게 여겼고, 3일의, 3의 숫자를 길 수(吉數)로 여겨 왔
다는 사실은 개천절의 본래의 뜻을 더욱 분명히 한다고
하겠습니다.
‘개천절’이라 이름 짓고 시작한 것은 대종교(大倧敎)에서
비롯합니다. 즉, 1909. 1. 15. 서울에서 나철(羅喆: 弘巖
大宗師, 홍암대종사)을 중심으로 대종교가 다시 교문을
열게되자, 개천절을 경축일로 제정하고 해마다 행사를
거행하였습니다.
1919년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임시정부
는 그해 음력 10월 3일에 국무원 주최로 건국 기원절
(建國紀元節)이라는 이름의 기념행사를 치렀습니다.
그리하여 일제강점기를 통하여, 개천절 행사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그 후 임시정부는 음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정하고 중국으로 망명한 대종교와 합동으로
기념하고 경축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행사는 이후 교민들이 거주하는 곳마다 퍼져 나갔
습니다,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이를 계승하여
‘개천절’을 공휴일로 정하였습니다.
개천절은 원래 음력 10월 3일이므로 대한민국 수립 후까지
도 음력으로 지켜왔는데, 1949년에 문교부가 위촉한 ‘개천절
음· 양력 환용(換用) 심의회’의 심의 결과 음· 양력 환산할
수 없다는 이유와 ‘10월 3일’이라는 기록이 소중하다는
의견에 따라, 1949년 10월 1일에 공포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의거, 음력 10월 3일을 양력 10월 3일로 바꾸어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대종교에서 행하던 경하식(慶賀式)은 국가적 행사
에 맞추어 양력 10월 3일에 거행하고, 전통적인 제천의식의
경우만은 전통적인 선례에 따라 음력 10월 3일 오전 6시에
행하고 있습니다.
이날은 정부를 비롯하여 일반 관공서와 공공단체에서 거행
되는 경하식(慶賀式)과 달리, 실제로 여러 단군숭모 단체
(檀君崇慕團體)들이 주체가 되어 마니산의 제천단(祭天壇),
태백산(太白山)의 단군전(檀君殿), 그리고 사직단(社稷壇)의
백악전(白岳殿) 등에서 경건한 제천의식을 올리고 있습니다.
특기할 사항은 북한에서도 개천절을 기념일로 지정하여 기념
행사를 개최한다는 것입니다. 북한은 단군을 민족사의 기점
으로 보고 기념하는 일을 부르주아적 유산이라 하여 외면해
왔으나, 1993년에 단군릉에서 5.000여 년 전의 단군 유골을
발굴하였다는 학술 보고를 내놓은 후,
우리 민족이 단군의 자손으로 실증되었다는 주장과 함께
남북한과 해외의 동포들이 단군 자손으로서의 민족 정체성
과 자긍심에 토대하여 단결하자는 주장을 내놓고 있습니다.
단군왕검을 신화적으로 접근해 보면, 단군왕검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세운 시조입니다. 단군의 탄생과
고조선 건국에 관한 문제를 논급할 때 일차적으로 인용하는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이며 ‘삼국유사’ 권 1 ‘고조선조’
에 인용된 ‘고기(古記)’에 보면,
“단군 신화에, 옛날 환인의 서자(庶子: 장남이 아닌 차남
이하의 아들) 환웅이 자주 세상에 내려가 인간 세상을
구하고자 하므로 아버지가 환웅의 뜻을 헤아려 천부인
(天符印-청동검·청동거울·청동방울) 3개를 주어 세상에
내려가 사람을 다스리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즉 환웅이 무리 3,000을 거느리고 태백산(太白山) 꼭대기의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려와 그곳을 ‘신시(神市)’라 이르니
그가 곧 ‘환웅 천왕(桓雄天王)’입니다. 그는 풍백(風伯)·우사
(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穀)·명(命)·병(病)·형(刑)·
선(善)·악(惡) 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
을 다스렸습니다.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 살면서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환웅은 이들에게 신령스러
운 쑥 한 줌과 마늘 20쪽을 주면서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된다고 일렀습니다.
곰과 범이 이것을 먹어가며 근신하였는데 3·7일(21일) 만에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이를 참아내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뒤 환웅은 곰이 여자의 몸으로 변한 웅녀(熊女)와 혼인
하여 아이를 낳으니 그가 곧 단군왕검(檀君王儉)입니다.
단군은 기원전 2333년 아사달(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고조선을
세웠습니다. 평양을 도읍지로 하여 고조선을 건국할 때까지
고조선 종족의 중심지였던 곳이 신시(神市)로 짐작이 됩니다.
원래 신화는 역사적인 사실, 바로 그 자체는 아니더라도,
그 속에 내재된 역사성을 중시해야 하며, 어떤 맥락에서든
신화의 의미는 풀려야 합니다. 그러나 단군의 개국 신화를
그대로 왕조사인 것처럼 해석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어쨌든, 단군신화는 우리 민족이 수난을 당하고 위기에 처할
때마다 민족이 단합하는 구심체 구실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의미와 가치를 유지할 것입니다.
※參考文獻
①韓國民族文化大百科事典
②韓國歲時風俗事典
③斗山百科事典
-2022.10.03.(月) 金福鉉 카톡 房-
[110930, 修正 221002 ‘雪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