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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묵상글 (8/21. 22:20, 04:50, 05:28. )
1) 저는 아래 몇 분의 글만 공유합니다.
1차 공유하는 묵상글: 고인현, 호명환 신부님.
2차 공유할 묵상글: 05-06시이후, 04:50 현재, 05:28 현재
< 김찬선 신부님: 04:50 추가. 호명환 신부님: 05:28 추가.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04:50 추가>
# 어부베드로님의 묵상글 1편 추가 (8/21 22:20)
2) 정회원님 중 다른 묵상글을 공유하실 분은 오늘 묵상글을 이 뜨락에 게재하여 주시고
지난 묵상글은 “5-1. 소금(나눔) 뜨락 1”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3) 이 묵상글 뜨락은 8월 15일 이후에도 당분간 현재와 같이 운영하며
전체 공지 "H. 260707" 2-1의 가-1), 나)를 실행할 계획입니다.
가-1) 프란치스칸 공동체나 개인 또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존중하는 분으로서 이 카페를 인계받아 운영할 의사가 있으신 분과 협의를 시작하고, 이 공간의 인계, 인수는 합의가 되는 대로 즉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위 사항이 이루어지지 아니할 때는 11월 대림시기부터는 실질적으로 운영을 중단하고, 카페의 여러 자료를 활용하실 분을 감안 당분간 존속시키고, 적당한 때(2027년 상반기 또는 그 이후) 폐쇄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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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주님의 영광이 주님의 집으로 들어갔다.>(에제43,1-7ㄷ)
천사가 1 나를 대문으로, 동쪽으로 난 대문으로 데리고 나갔다.
2 그런데 보라, 이스라엘 하느님의 영광이 동쪽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 소리는 큰 물이 밀려오는 소리 같았고, 땅은 그분의 영광으로 빛났다.
3 그 모습은 내가 본 환시, 곧 그분께서 이 도성을 파멸시키러 오실 때에 내가 본 환시와 같았고, 또 그 모습은 내가 크바르 강 가에서 본 환시와 같았다. 그래서 나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4 그러자 주님의 영광이 동쪽으로 난 문을 지나 주님의 집으로 들어갔다.
5 그때 영이 나를 들어 올려 안뜰로 데리고 가셨는데, 주님의 집이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
6 그 사람이 내 곁에 서 있는데, 주님의 집에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렸다.
7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사람의 아들아, 이곳은 내 어좌의 자리, 내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영원히 살 곳이다.”
복음<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1-12)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 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또는, 마리아모후기념일 독서(이사 9,1-6)와 복음(루카 1,26-38)을 봉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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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1,26-38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고유 복음)
‘모후’를 기리는 오늘,
교회가 펼쳐 주는 복음은 뜻밖에도
‘왕관을 쓰는 장면’이 아니라
‘주님 탄생을 예고받는 장면’입니다.
바로 여기에 마리아 모후 되심의 ‘뿌리’가 있습니다.
천사는 이렇게 전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께 다윗의 왕좌를 주시어,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곧 마리아께서 잉태하실 그 아드님이
‘영원한 임금’이시라는 것입니다.
성 암브로시오가 일깨우듯,
마리아께서 ‘모후’이신 까닭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분은 ‘영원하신 임금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드님이 왕이시기에, 그 어머니가 모후이십니다.
그런데 이 ‘여왕’은 어떻게 그 자리에 이르렀습니까?
왕관을 향해 손을 뻗어서가 아닙니다.
도리어 가장 낮은 한마디로 이르렀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여왕’의 자리가 ‘여종’의 응답에서 솟아난 것입니다.
마리아의 다스림은 군림이 아니라 섬김이고,
그분의 왕관은 ‘낮춤의 열매’입니다.
마니피캇이 노래한 그대로,
‘비천한 이를 들어 높이신’ 하느님의 일하심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모후 되심은
우리에게서 멀어지심이 아닙니다.
다윗 왕조에서 임금의 어머니가
백성을 위해 임금께 청을 올렸듯이,
마리아께서는 임금이신 아드님 곁에서
우리를 위해 ‘어머니로서 비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실수록,
그분은 우리를 위해 더 가까이 비십니다.
평화·인내의 관점에서 보면
마리아의 ‘예’는 한순간의 감격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칼이 마음을 꿰뚫는 십자가 아래까지
이어진 ‘인내의 예’였습니다.
끝까지 견딘 그 섬김의 ‘예’가
마침내 ‘평화의 모후’의 관으로 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높아지려’ 손을 뻗는가, ‘낮추어’ 섬기는가?
나의 ‘예’는 한순간인가, 끝까지 이어지는 인내인가?
나는 다스림을 ‘군림’이 아니라 ‘섬김’으로 여기는가?
나는 모후이신 어머니께 나를(그리고 모든 생명을) 의탁하는가?
주님,
마리아처럼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하고 낮추게 하소서.
그 ‘예’를 끝까지 이어 가는 인내를 주시고,
평화의 모후이신 어머니의 전구로 저희를 지켜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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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선한 문제(좋은 골칫거리)에 동참하기!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선한 문제(좋은 골칫거리)"와 거룩한 무질서는 다 더 나은 것을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히브리 예언자들
선한 문제에 동참하기!
2026년 8월 21일 금요일
리처드 로어 신부는 예언자들의 길에서 불의(不義)를 흔들어 깨뜨리는 초대를 발견합니다:
예언자들은 현상 유지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때, 제가 "거룩한 무질서(holy disorder)"라고 부르는 것을 권합니다. 이는 공동체의 근본적인 조건과 관계가 흔들리는 상황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의해 정복당하거나 원수들에게 박해받았을 때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혼란은 긍정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고, 부정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성장하여 현재의 제한된 이해를 넘어설 수도 있고, 혹은 사랑과 신뢰의 부족으로 인해 퇴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사회는 율법주의와 형식주의로 되돌아가 결국 붕괴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으로부터 새로운 질서, 곧 제가 "재질서(reorder)"라 부르는 것이 태어납니다. 이 새로운 질서 안에서 인간 관계는 더 높은 차원에서 작동할 수 있으며, 더 상상력이 풍부하고, 덜 이분법적이며, 보통은 처음의 질서나 반작용적 혼란보다 폭력성이 줄어듭니다.
거룩한 무질서(holy disorder)를 받아들이고 만들어내는 과정은 분명히 존 루이스 하원의원이 말한 "선한 문제(혹은 좋은 골칫거리: good trouble)"와 같은 것입니다. 그는 인종 정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시민 불복종이라는 "좋고 필요한 문제"를 가리켰지만, 그의 철학은 예언자들을 생각할 때에도 똑같이 강력합니다.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의로운 소란과 거룩한 혼란은 더 나은 것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습니다—곧 더 큰 정의, 더 많은 자비, 하느님과의 더 깊은 친밀함으로 특징지어지는 전혀 새로운 의식입니다.
물론 그 과정은 결코 직선적이지 않고,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새로운 "재질서(reorder)"는 곧 새로운 "질서"가 되고, 우리는 새로운 현상 유지를 우상화하지 않기 위해 예언자가 필요합니다. 개인적 자기중심주의보다 더 위험하고 더 흔한 것은 집단적 자기중심주의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내부에서 유기적으로 솟아나는 긍정적 변화의 메커니즘을 필요로 해왔습니다.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왜 비판적 사고는 언제나 우리 종교 체계 밖에서 나와야 했으며, 내부에서는 거의 허용되지 않았는가? 이것이야말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종교를 개혁하려 하면서도, 기업이나 화폐 제도, 지주, 그리고 국가들이 사용하는 동일한 폭력과 의지의 코드로 접근해 왔습니다. 그 결과, 종종 교계 지도자들의 자아와 사적 욕망이 교회의 권력 구조를 지배하게 되었던 겁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악을 축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악을 개별적인 "나쁜 사람들"에게서만 찾아내 공격하려 하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의 문화 속에 세대를 거쳐 이어져 내려오는 집단적 거짓을 드러내고 고발하는 데 실패합니다. 교만, 기만, 권력, 전쟁, 탐욕과 같은 것들이 바로 그러한 거짓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왜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 신성 로마 제국, 러시아, 프랑스, 스페인, 영국, 미국과 같은 제국들을 거의 개혁하거나 진화시키지 못했는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교는 그 모든 제국과 편안히 동침했습니다. 우리를 갉아먹은 악은 거의 악이라 불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제적 집단"은 의례적 요구와 정결 규범을 강요하는 데 몰두했기 때문입니다—예수님과 예언자들은 그러한 것들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언자적 분석을 잃어버리면, 대부분의 악은 부인되거나, 위장되거나, 종교와 법 자체의 규칙과 의례 속에 숨겨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어떻게 해서 진리가 이분법적 세계에서 제대로 "식별"되는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순수함과 정체성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진리가 제대로 식별되어야 하는 겁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리처드 신부님은 우리가 누구이든, 어디서 왔든 모두 같은 방식으로 숨을 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매일의 묵상 안에서 깊은 호흡에 집중하는 시간을 많이 보냈습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야훼’라는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느님의 존재 자체에 마음을 집중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성경에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주님의 현존을 찾고 있으며, 제 마음은 참으로 하느님께서 계심을 알려주고 있다고 느낍니다.
—David S.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The Tears of Things: Prophetic Wisdom for an Age of Outrage (Convergent Books, 2025), xvi–xvii.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Valentin Walter, untitled (detail), 2019,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흐르는 물이 바위를 끊임없이 깎아내듯, 아모스 예언자가 외친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는 부름이 메아리칩니다. 또한 이사야 예언자가 약속한, 어떤 장애물도 넘어서는 평화의 은총이 함께 울려 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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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8.22 03:37
- 보이기 위해 일하는 사람의 불행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그들이란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입니다.
그들을 저로 바꾸면 김찬선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이에게 보이기 위한 거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아닐까요?
제가 바리사이하고는 다른가요? 조금이라도?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고,
곧 저의 모든 행위는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저는 위선뿐 아니라 독선의 잘못도 저지르는 자이지요.
좋게 이해하면 제가 그만큼 선을 좋아한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악보다 선을 좋아하고,
악한 사람보다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며,
선 포기자 곧 선을 포기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선을 포기하고 막 살겠다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들은 선이라는 것을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심지어 선을 증오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어제 복음에서 봤듯이 주인이 하느님 나라 잔치에
초대하려고 보낸 심부름꾼들을 죽이고 아들까지 죽이지요.
그러므로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고 하는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하기보다는
가련한 사람 또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함이 좋을 것입니다.
왜 가련하고 왜 불행합니까?
첫째는 그가 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하고 좌우되기 때문이고,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도 이런 사람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둘째는 그가 자기 진실과 직면하지 않고 거짓 자기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고,
그럼으로써 회개할 기회를 놓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에게 무엇보다 큰 문제는
사람들 앞에 있음으로 하느님 앞에 있지 않게 되는 것이고,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하려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사는 사람의 문제를 봤지만
사실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되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래서 일생을 이 문제와 씨름하였지만 아직도
오늘 주님께서 꾸짖으신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와 저는 다를 바가 없고,
그래서 오늘 복음만 읽으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지는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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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2026.08.22. 05:09
받은 은총을 불려 나가는 삶을 살기 위해...
마태오 복음 23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군중들의 시선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로 향하게 하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행태를 지적하시며, 그들의 위선과 잘못된 행실을 엄중히 꾸짖으십니다.
이 장은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주님의 도성 예루살렘을 향해 흘리신 "애통한 탄식"으로 마무리됩니다.
특히 이 장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일곱 번이나 언급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일곱은 충만과 완전함을 상징하는 수입니다.
따라서 이 장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잘못된 삶의 방식을 향한 전면적인 비판과 단죄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토록 단호하고 거침없이 그들을 꾸짖으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루카 5,32)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예수님께서 왜 그리하셨는지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종교가 왜곡되고 남용되는 모습을 보시며 아픔을 깊이 느끼셨습니다. 아버지의 아드님으로서, 하느님의 진리와 거룩함이 사람들의 이익과 욕심에 의해 짓밟히는 것을 보시는 것은 참으로 아픈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강한 꾸짖음은 마음이 완고한 이들을 회개로 이끌기 위한 것이었으며, 교만하고 오만한 자들에게만 향한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죄인들에게는 결코 그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단호한 말씀은 한 가지로 요약됩니다. 곧, 하느님의 영광과 백성에게 베푸실 자비를 가로막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는 태도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3)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 겉으로는 친절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교만을 버리지 못해 겸손히 봉사하지 못하는 경우
- 남을 돕자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낮추어 손을 내밀기가 어려운 경우
- 공동체의 평화와 가정의 행복을 원하면서도, 자기 고집을 내려놓지 못해 다른 이의 의견을 듣지 못하는 경우 등등...
그래서 우리는,
- 다른 이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 일하고자 하는 지향을 늘 잃지 않아야 합니다.
- 또한 남들에게서 호감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역설을 우리 삶으로 진솔하게 표현하며 살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 방식은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당부하시는 말씀에 들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언젠가도 한 번 언급해 드렸습니다만, 초대 교회의 익명의 그리스도인 저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잘못된 평신도는 바로잡기 쉽다. 그러나 성직자가 악하다면 바로잡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이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목소리처럼 들립니다. 이 익명의 저자가 겨냥한 사람들은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들이었지만, 그 의미를 본다면 실제로는 모든 시대의 성직자들에게까지 확장될 수 있는 지적입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사제의 자리가 사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제가 사제의 자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장소가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장소를 거룩하게 하는 겁니다. 모든 사제가 거룩한 것은 아니지만, 모든 거룩한 이는 사제입니다."
오리게네스(Origen, 185–254)는 그 의미를 분명히 합니다. 존경받고 앞자리에 앉으며 인사받는 것을 즐기는 마음은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도 발견됩니다. 그것은 식사 자리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안의 앞자리를 차지할 때도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이 말씀을 모든 사람이, 특히 부제와 사제와 주교들이 들었으면 합니다."
초대 교회, 특히 박해 시대였던 그 당시에도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면 지금의 우리 상황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이러한 사실을 알고는 있으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자신을 낮추고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이 자기에게서 드러나게 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 살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수 있습니다. 매번 우리가 이 중대한 사실을 의식하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에고의 갈망을 실현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루카 복음을 통해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방심하고 살다 보면,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우리는 전혀 의식하지 않으면서 잘못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이 우리에게 경고요 자명종처럼 들리는 이유는 우리가 궁극에 가서 받을 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이 얼마나 큰지를 자각하라는 예수님의 당부에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저처럼 사제요 수도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더 깊이 의식하고 성찰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내'가 더 많이 받았는데도 덜 받았다고 불평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결국 받은 것마저 감사하지 못한 채 그 받은 것을 많게 하여 다시 주님께 돌려드리는 데 실패하게 될 것 아니겠습니까?! 마태오 복음 25장에 나오는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처럼 말입니다.
사실 한 탈렌트는 6,000 데나리온이니 그 자체로 엄청난 액수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가 받은 그 많은 것을 감사하기보다는 이런 불평을 터뜨립니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마태 25,24).
그러나 '내'가 만일 받은 은총을 더 깊이 의식하고 살아가고자 한다면 아직도 주님께서 '나'에게 은총을 키워나갈 기회를 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고, 또 그것을 실제로 불려 나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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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3918
2026.08.22 02:04
포르치운쿨라 다시 세상 속으로 다섯 번째 이야기
사랑은 상대의 속도에 맞추어 걷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가에서 외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기 위하여 걸음을 멈추셨고, 제자들의 이해가 더딜 때에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세상 속의 작은 형제는 목적지에 먼저 도착하는 사람보다 아무도 뒤에 남지 않도록 함께 걷는 사람입니다. 효율을 위하여 약한 이를 버리지 않고, 한 사람의 회복을 위하여 자신의 속도를 늦출 줄 압니다.
함께 도착하지 못하는 성공은 형제적 성공이 아닙니다. 우리의 공동체가 세상 속으로 나아갈 때에도 가장 약한 형제의 속도를 고려해야 합니다. 많은 일을 계획하면서 병든 이와 늙은 이, 젊고 경험이 부족한 이의 목소리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사명을 이유로 공동체의 형제성을 희생한다면 세상에 전할 복음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형제성은 사명을 위한 준비 단계가 아니라 사명 자체입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말을 듣기 전에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봅니다. 우리가 형제라고 부르면서 경쟁하고 배제하며 상처를 덮는다면 아무리 아름다운 복음을 전해도 설득력을 잃습니다.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 공동체의 관계가 복음의 첫 번째 선포입니다. 서로의 다름을 품고, 약한 이를 기다리며, 갈등 속에서도 대화와 용서를 포기하지 않는 모습 자체가 분열된 세상에 보내는 희망의 표지입니다. 세상은 완벽한 공동체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며, 상처 입은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다시 관계를 세우려는 정직한 공동체를 필요로 합니다.
교회의 거룩함은 흠이 없다는 주장에 있지 않습니다. 잘못을 숨기지 않고 진실 앞에 서며, 피해 입은 사람의 존엄을 회복하고, 구조를 변화시키는 회심에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완벽함보다 정직함을 통하여 복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세상의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의 의문, 신앙을 떠난 이들의 상처, 교회에 실망한 사람들의 비판을 방어적으로 막지 않고 경청해야 합니다.
그들의 질문 안에는 우리를 회심으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비판을 적대라고 여기기보다 우리가 보지 못한 들보를 보여 주는 거울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은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방어적인 침묵 속에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정직한 만남과 대화 안에서 더 깊어집니다. 우리가 모든 답을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는 겸손은 신앙의 약함이 아니라 하느님의 신비 앞에 서는 참된 가난입니다.
세상 속의 프란치스칸은 확신을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라 희망의 이유를 온유하게 나누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으로 복음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고, 상대가 자유롭게 질문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기다립니다. 사랑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듯 우리도 상대방의 양심과 여정을 존중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조종하거나 두려움을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존재가 초대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보며 “저들이 살아가는 기쁨과 평화는 어디에서 오는가”라고 묻게 하고, 그때 겸손히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말보다 앞선 삶, 주장보다 깊은 관계, 논쟁보다 따뜻한 환대가 복음을 전합니다. 다시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길은 찬미의 길이기도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세상의 고통을 깊이 보았지만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습니다. 병과 실패와 죽음의 가까움 속에서도 태양과 물과 불과 땅을 통하여 하느님을 찬미했습니다.
찬미는 고통을 부정하는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어둠 속에서도 선의 흔적을 발견하고, 모든 것이 무너진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하느님의 현존을 믿는 행위입니다. 세상 속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우리는 문제만 보게 됩니다. 사람의 이기심과 제도의 모순, 공동체의 갈등과 피조물의 파괴를 바라보며 마음이 냉소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선한 노력조차 소용없다고 느끼고,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을 수 있습니다. 그때 찬미는 우리의 눈을 다시 맑게 합니다. 악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악이 전부가 아님을 기억하게 하고, 작은 선을 발견하며 감사하게 합니다.
한 아이의 웃음, 병든 이를 돌보는 손, 낯선 이를 위하여 문을 여는 사람, 전쟁 중에도 빵을 나누는 이들, 상처받은 땅에 나무를 심는 작은 공동체, 오랜 미움 끝에 건네는 화해의 말 속에서 하느님의 선하심은 여전히 세상을 붙들고 있습니다. 찬미는 현실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안에 숨어 있는 은총을 발견하는 관상입니다. 감사할 것을 잃지 않는 사람은 절망에 완전히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그는 작은 선을 보고 그것이 자라도록 자신을 내어줄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선교는 찬미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세상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보았기에 그는 사람과 피조물에게 형제로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세상을 악하고 버려진 곳으로만 보았다면 그 안으로 기쁘게 들어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을 정죄의 눈으로만 바라보지 않아야 합니다. 인간의 죄와 불의를 분명히 보면서도 모든 사람 안에 하느님의 형상이 남아 있고, 모든 피조물 안에 창조주의 선성이 숨 쉬며, 역사의 깊은 곳에서 성령께서 새로움을 준비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다시 세상으로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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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치운쿨라 1. 다시 처음으로 ( 2026.08.02 )
http://www.ofmkorea.org/ofmkfb/583130
포르치운 쿨라 2. 다시 복음으로 ( 2026.08.03 )
http://www.ofmkorea.org/ofmkfb/583181
포르치운쿨라 3. 관계 속에 흐르는 선의 강물처럼 ( 2026.08.04 )
http://www.ofmkorea.org/ofmkfb/583256
포르치운쿨라 4. 다시 형제성으로 첫 번째 이야기 ( 2026.08.07 )
http://www.ofmkorea.org/ofmkfb/583330
포르치운쿨라 다시 형제성으로 두 번째 이야기 ( 2026.08.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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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치운쿨라 다시 형제성으로 세 번째 이야기 ( 2026.08.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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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치운쿨라 다시 형제성으로 네 번째 이야기 ( 2026.08.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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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치운쿨라 다시 형제성으로 다섯 번째 이야기 ( 2026.08.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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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치운쿨라 다시 형제성으로 여섯 번째 이야기 마지막 ( 2026.08.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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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치운쿨라 다시 세상 속으로 첫 번째 이야기 ( 2026. 08.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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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치운쿨라 다시 세상 속으로 두 번째 이야기 ( 2026. 08.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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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치운쿨라 다시 세상 속으로 세 번째 이야기 ( 2026. 08.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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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치운쿨라 다시 세상 속으로 네 번째 이야기 ( 2026. 08.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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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베드로 묵상방
진정한 사랑은 상대가 내 몸처럼 여길 수 있어야 가능합니다. (260821.20:11)
오늘 복음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이 세상 종교나 도덕을 떠나 수많은 철학자 위인들이 남긴 수많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다 끌어모아도 사랑이라는 걸 설명하기가 좀처럼 힘들 때도 많을 것입니다. 남녀 간의 사랑, 인류애로서 나누는 아름다운 사랑, 엄마와 아들, 아빠와 딸 기타 등등 수많은 관계에서 벌어지는 사랑 그런 많은 사랑을 말할 때 가장 하나로 어떻게 표현하면 딱 들어맞는 표현이 있을까요? 사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랑의 2중 계명의 본질에서도 벗어나지 않을 표현이 있습니다. 사실 가장 정확한 표현은 예수님이 39절에서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습니다.
사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 둘을 언급하셨지만 이 둘은 차등이 나는 순서가 정해진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원어에서 표현하는 서수의 개념도 우리가 표현하는 서수의 개념과 다를 뿐만 아니라 원어까지 아니어도 국어적인 표현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39절에 둘째도 이와 같다고 했습니다. 명제로 봐서는 둘은 등식이 동일하다고 성립이 안 되지만 수학적인 표현을 사용해서 한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의미론적으로 그 말씀이 내포하는 의미는 동일한 의미입니다. 다만 그 사랑이 하느님을 향해서 할 때랑 이웃을 향할 때랑 표현의 방식이 좀 다를 뿐이지 사랑의 본질은 동일합니다.
여기서 복음에서는 이웃이라는 표현으로 나오지만 이때 이웃의 개념은 단순히 국어적인 의미에서 이웃의 의미로 보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다 아실 겁니다. 이때 이웃은 물리적인 거리로 표현된 이웃이 아닙니다. 만약 정말 국어사전에 냐오는 그 의미로의 이웃만을 의미한다면 이건 완전 이상한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의 범위가 한정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실제 이웃이라고 표현했지만 여기서 이웃은 좀 더 폭넓게 봐야 할 것입니다. 선한사마리아의 비유에 나오는 예수님의 질문에 있는 그 이웃과는 좀 문맥상 다릅니다. 그럼 과연 어떤 대상이 이웃이 될까요? 이 이웃은 사실 종교랑 국적, 인종 그 어떤 제약 조건도 없는 사람이 다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가톨릭 신자가 됐든 불교 신자가 됐든 그 어떤 것도 초월해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나와 같은 존재처럼 여겨지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럴 때는 그냥 상대를 위해 배려하는 것 정도 수준의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타인을 그렇게 사랑하려면 두 존재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로 여겨져야 그게 가능할까요? 단순히 그냥 느낌이나 감정이 좋아서 하는 정도의 수준으로는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수준으로는 한다고 해도 일시적이거나 오랜 시간 항구적으로는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변하지 않는 항구적인 사랑이 되려면 그 조건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상대를 나와 같은 존재로 동일시할 만큼 여겨져야 가능한 일입니다. 바로 형제 사랑도 이래야 하는데 이런 형제 사랑을 한다는 건 솔직히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것입니다. 완전 불가능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가능한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럼 과연 어떤 사람이 그런 불가능에 가까운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바로 그런 사랑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라야 가능할 것입니다. 이때 희생은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희생이어야 됩니다. 이때 이 대상이 조건적인 의미가 될 때는 이미 그게 형식적으로는 표면적으로는 희생처럼 보일 뿐이지 그건 진정한 의미에서 희생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해서 하는 희생에는 그 어떤 조건도 없어야 하지만 계산이 들어가면 그건 거래이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조건적인 사랑이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대개 보면 타인으로부터 받는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원하지만 자기가 베풀어야 하는 사랑에는 조건을 달려고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이 본성을 깨지 않으면 서로가 서로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한쪽만 희생한다고 해서 그게 될까요? 이론적으로는 가능한데 현실에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게 가능하려면 거의 성인 수준을 초월해야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십자가 성 요한이 하느님께 한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대에게 만약 어떤 희생을 했다고 해도 그게 희생이었다고 생각을 하는 것조차도 하지 않을 정도의 마음이 되어야 바로 그게 진정으로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대가 나의 희생을 알아줬으면 하는 내심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그건 상대를 향해 보여주기 위한 사랑이라고 말하기엔 좀 그렇지만 그런 것조차도 뛰어넘는 사랑 정도가 되어야지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 그 둘 사이의 관계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 사랑할 때 하는 희생은 내가 좀 더 몸을 아끼지 않고 타인을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게 많이 있는 경우에도 할 수 있는 여력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 희생은 신앙으로 교육으로도 될 수도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인내와 연습'입니다. 인내는 기본이겠지만 희생도 선천적으로 착한 사람이 더 많이 하고 악하다고 해서 못한다기보다는 그게 잘 안 되는 것은 어려워서 안 되는 것도 있지만 힘들어도 연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연습을 하면서 내가 이만큼 사랑을 했으니 당신도 이만큼 해야지 하는 그런 생각이 들면 그때도 그런 생각을 앞으로는 하지 않아야겠다고 또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연습을 하고 또 연습을 하다 보면 나중에는 몸이 그냥 자연반사적으로 계산을 하지 않는 몸으로 변화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노력을 해도 상대가 내 몸처럼은 좀처럼은 잘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노력을 하게 되면 이건 분명할 겁니다. 그런 정도의 수준의 사랑을 한다면 사람의 수준에서는 그보다 더 아름다운 사랑은 할 수 없을 사랑을 한다고 말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입으로만 하는 형식적인 사랑도 못할 때도 많습니다. 속으로는 미워하면서 겉으로는 미워하지 않는 것처럼 표정을 해야 할 때도 살다 보면 많을 때도 있을 겁니다. 이런 수준은 당연히 벗어나야 할뿐만 아니라 조금전에 말씀드린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가장 큰 계명을 지키는 것이 될 것입니다. 복음에는 이어서 이에 대한 결과는 설명이 없습니다. 굳이 결과가 없다고 해도 분명한 사실은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 우편에 있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큰 계명을 지킨 사람이라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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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슬로우 묵상] 하느님의 영광이 머무는 자리 _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을 준비하며..( 굿뉴스 게시판 서하. 260821)
"사람의 아들아, 이곳은 내 어좌의 자리, 내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영원히 살 곳이다"
에제키엘 43.7
하느님의 영광이 머무는 자리
에제키엘이 본 환시 속 성전은 그 무엇도 하지 않습니다. 제사도, 찬양도, 몸짓도 없습니다. 다만 동쪽을 향해 열려 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영광이 동쪽에서 오고 있었다"(에제 43,2)
그 영광이 들어올 수 있었던 건 성전이 무언가를 이루어서가 아니라, 텅 비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을 모실 자격을 '무엇을 함'에서 찾습니다.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봉사하고, 더 많이 증명해야 그분이 오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에제키엘의 성전은 정반대를 말합니다. 영광은 채워짐이 아니라 비워짐 속으로 들어옵니다.
성모님, 존재로 응답하신 분
성모님은 이 빈 성전의 살아있는 모습입니다. 천사 앞에서 그분이 하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한 문장,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루카 1,38)뿐입니다.
이 말은 성취의 언어가 아니라 수용의 언어입니다. 성모님은 자신을 증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열어드렸습니다. 에제키엘이 본 환시가 돌로 된 성전에서 이루어진 예언이었다면, 마리아 안에서 그것은 살로 이루어졌습니다.
높은 자리를 사랑한 사람들의 존재를 잃은 행위
복음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것이다... 잔치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한다"(마태 23,5-6).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는 무언가를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보이기 위해' 했습니다. 기도의 술, 옷단, 칭호 — 이 모든 것은 존재의 결핍을 행위로 메우려는 몸짓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확신하지 못할 때, 사람은 자리와 이름으로 자신을 세우려 합니다.
여기서 근본적인 대비가 선명해집니다. 성모님은 '있음' 자체로 하느님을 모셨고, 바리사이는 '보여짐'으로 자기 자신을 모셨습니다. 한쪽은 비워서 채워졌고, 한쪽은 채우려다 텅 비었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사람, 다시 마리아에게로
복음은 이렇게 끝맺습니다.
"너희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어야 한다...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12). 이 문장은 성모님의 마니피캇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분께서는 비천한 당신 종의 처지를 굽어보셨습니다"(루카 1,48).
낮아짐은 패배가 아니라 통로입니다. 자기를 비운 자리에만 영광이 머뭅니다. 에제키엘의 성전이, 그리고 마리아의 몸이 그것을 증언합니다.
복음을 묵상하며 나에게 묻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무엇을 '해서' 인정받으려 하는가, 아니면 그분이 머무실 자리로 그저 '있으려' 하는가. 그리고 복되신 동정 마리아처럼 그저 열려 있는 존재가 되어보려 합니다. 증명하지 않아도, 채우지 않아도, 그 자리에 이미 영광이 머물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