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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번민
단 4:1-9
1 느부갓네살 왕은 천하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언어를 말하는 자들에게 조서를 내리노라 원하노니 너희에게 큰 평강이 있을지어다
2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놀라운 일을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 하노라
3 참으로 크도다 그의 이적이여, 참으로 능하도다 그의 놀라운 일이여,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4 나 느부갓네살이 내 집에 편히 있으며 내 궁에서 평강할 때에
5 한 꿈을 꾸고 그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였으니 곧 내 침상에서 생각하는 것과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으로 말미암아 번민하였었노라
6 이러므로 내가 명령을 내려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들을 내 앞으로 불러다가 그 꿈의 해석을 내게 알게 하라 하였더라
7 그 때에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가 들어왔으므로 내가 그 꿈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나 그들이 그 해석을 내게 알려 주지 못하였느니라
8 그 후에 다니엘이 내 앞에 들어왔으니 그는 내 신의 이름을 따라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자요 그의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자라 내가 그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되
9 박수장 벨드사살아 네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은즉 어떤 은밀한 것이라도 네게는 어려울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아노니 내 꿈에 본 환상의 해석을 내게 말하라
단 4:1-9 / [느부갓네살이 꾼 두번째 꿈] 느부갓네살왕은 제국의 백성들, 즉 인종과 쓰는 말이 다른 각 민족에게 다음과 같은 어명을 내렸다. 천하에 살고 있는 그대들에게 평안이 있길 비노라. 2) 한없이 높으신 참 하나님이 내게 놀라운 일과 이적을 베푸셨으니 나 이제 이 사실을 그대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알리노라. 3) 참으로 크도다. 그 놀라운 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이신 그 일. 참으로 엄청나다. 그분이 베푸신 이적. 하나님은 영영 임금이시라. 언제나 언제까지나 다스리실지라. 4) 나 느부갓네살은 지금까지 이 궁전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아왔다. 온갖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며 살아온 것이다. 5) 그런데 어느 날 밤 나는 잠자리에서 무서운 꿈을 꾸었다. 어찌나 그 꿈이 뒤숭숭한지 나는 마음이 몹시 심란하여 6) 바벨론에 있는 현인들이란 현인은 모두 불러모아 그 꿈을 해몽해 내라고 일렀다. 7) 나는 내 앞에 모여든 점쟁이, 마술사, 요술쟁이, 점성가들에게 꿈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내 꿈이야기를 듣고도 해몽해 내지 못하였다. 8) 그러던 중 다니엘이라는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났다. 이 사람은 내가 섬기는 신의 이름을 따라 벨드사살이라고도 불린다. 이 사람은 거룩한 하나님의 숨결이 휘감고 있는 사람인지라 내가 꾼 꿈이야기를 그에게도 들려주었다.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9) `벨드사살아, 그대는 바벨론의 현인들을 모두 맡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그대에게는 거룩한 하나님의 숨결이 휘감고 있는 줄을 내가 알고 있으니 내가 꾼 그 꿈속에 담겨 있는 비밀스런 일도 모두 알아낼 수 있을 줄 아노라. 내가 꿈속에서 본 신비한 환상을 말해 줄 터이니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무엇을 상징하는지 내게 말하도록 하여라.
느부갓네살 왕이 한 꿈을 꾸고 번민에 빠져 다니엘에게 해석을 요구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조서(1-3) 느부갓네살 왕이 백성에게 보낸 조서를 보면, 우리는 절대군주의 엄중한 조서가 아니라 마치 시편의 찬양시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왕은 자신의 모든 백성들에게 큰 평강을 기원합니다(1). 그는 하나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고 소개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일을 즐거이 알리고자 합니다(2). 그리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나라와 통치가 영원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3). 그는 주변의 모든 나라들을 정복한 권력자입니다. 도대체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기에 마치 시편 저자처럼 하나님을 찬양할까요? 우리는 여기서 권력자를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참된 권세를 볼 수 있습니다.
왕의 번민(4-5) “편히 있으며...평강할 때에”(4)는 당시 느부갓네살 왕이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고 도시 건설을 마친 후임을 암시합니다. 당시 그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꿈꾸던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꿈으로 그의 평안이 번민으로 바뀝니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그 평안은 거짓된 것입니다.
다니엘의 등장(6-9) 왕이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들을 불러 꿈을 말하고 해석을 요구합니다. 이 꿈은 2장의 꿈보다 해석하기 쉽습니다. 2장의 꿈은 왕이 잊었지만 이 꿈은 왕이 기억하였습니다. 그러나 지혜자들은 왕에게 해석을 말하지 못합니다. 해석을 못했을 수도 있지만 불길한 해석을 할 경우 왕의 분노를 염려했을 수도 있습니다. 다음에 다니엘이 들어오자 왕은 그를 신뢰합니다. 다니엘은 이보다 더 난해한 꿈을 해석해 준 적이 있습니다(단 2장). 그런데도 왕이 다니엘을 벨드사살(바벨론 신의 이름을 따른 이름)이라 칭한 것은 바벨론의 신들이 다른 나라의 신들보다 더 강하다고 믿었다는 반증입니다. 하지만 번민에 빠진 왕은 다니엘의 영성을 인정합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참된 지혜 외에는 그의 번민을 해결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적용: 당신이 누리는 번영과 성공에는 두려움과 번민이 없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될 때 우리 영혼은 고통을 겪습니다. 자신이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 앞에 망연자실해지며 분노와 좌절, 절망에 몸과 마음은 상처로 만신창이가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고 난 자리에는 그 사람만의 향기가 남습니다. 꽃은 져도 그 사랑스럽던 향기는 대기 중에,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 감돌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언제까지나 내 가슴속에 향기로 남아 함께 할 것입니다. (김윤탁, '꽃은 져도 향기를 남긴다' 중)
< 설 교 >
느부갓네살 왕이 꾼 두 번째 꿈과 그 해석
다니엘 4:1-37 / 정병진 목사
오늘 말씀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놀랍고도 감명깊은 역사의 대기록이다. 사실 다니엘서 4장은 느부갓네살왕의 신앙고백록이요 회개고백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찌 이방인이 성경기록자가 될 수 있겠는가? 당신은 우선 거대한 바벨론 도성과 인공 산으로 조성된 공중정원을 유유히 거닐고 있는 느부갓네살왕이 보이는가? 세상 역사는 그가 정복했던 고대근동지역과 그가 세운 건축물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성경은 그가 어떻게 회개하여 하나님 신앙을 갖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끝까지 이 말씀을 들어보면 당신도 아마 눈씨울을 적시고야 말 것이다.
1. 들어가며
느부갓네살왕은 또 한 번을 꿈을 꾼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난 번과는 달리 자신의 개인신상에 관한 꿈이었다. 왕은 여러 바벨론 술사들을 불러내 꿈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 꿈을 해석해달라고 한다. 하지만 어느누구도 꿈을 해석하는 일에 선뜻 나서지 못한다. 그것은 왕의 폐위에 관한 해석이 아니랄 수가 없는 꿈이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다니엘이 등장했을 때, 왕은 또다시 자신이 꾸었던 꿈을 그에게 들려주고 신들의 영이 있는 다니엘은 얼마든지 그 꿈에 관한 해석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요청했다. 이때 과연 다니엘은 이 꿈 해석을 어떻게 했을까? 이 세상에 충신과 간신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느부갓네살왕은 다신론자였는가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였는가? 과연 하나님의 징계가 누구에게 임하며, 징계의 기간은 어떻게 결정되며, 징계가 철회되기 위해서는 대체 무엇이 필요한가? 오늘은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왕이 꾸었던 두번째 꿈과 그 해석에 얽힌 놀라운 영적인 비밀을 풀어보고자 한다.
2. 느부갓네살왕은 왜 역사적으로 아직 발굴되지 않은 조서를 내려야 했는가?
우리는 단4:1~3의 말씀을 통해, 느부갓네살왕이 천하에 거주하는 바벨론의 백성들에게 하나의 조서를 내렸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아쉽게도 아직 이러한 역사적인 사료가 성경 이외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것을 거꾸로 본다면, 대제국 바벨론의 최고통치자가 자기의 종교를 마르둑 신으로부터 여호와 하나님으로 바꾸었다는 것을 좋아할 갈대아술사들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실제 사실이었다. 그것은 이제 중년이 되어버린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의 신앙고백선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언어와 민족이 다른 백성들을 향해 이렇게 선언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여호와)께서 내게 행하신 표징들과 이적들을 내가 알리는 것은 기쁨이다. 참으로 크도다 그의 표적들이여, 참으로 능하도다 그의 놀라운 일이여, 그분의 왕국은 영원한 왕국이요, 그분의 통치는 대대로 이를 것이다(단4:1~3)" 그렇다면, 갈대아의 대제국을 건설했던 느부갓네살왕은 왜 자신이 섬기던 주신 마르둑신을 버리고 여호와하나님을 최고의 신으로 받들겠다고 선언한 것인가?
3. 왕은 언제 어디서 어떤 꿈을 꾸었는가?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은 2가지로 유명하다. 첫째 그는 전쟁용사였으며 전쟁광이었다. 그는 고대 근동의 모든 나라들을 하나씩 하나씩 정복해 들어갔으니 적어도 20~30년동안 주변의 나라들을 모두 다 정복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가장 큰 대적은 앗수르였고 애굽이었다. 그는 또 주변의 나라들 중에서 남유다를 정복했으니,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남유다를 넘겨주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언약백성도 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둘째, 그는 건축광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후대에 길이 남기고자 거대한 바벨론도시를 건설했으며(헤로도투스에 의하면 느부갓네살왕이 죽은 후 100년뒤 그 도시를 방문했는데도, 그 웅장함에 압도되었다고 한다), 또한 향수병에 걸려 외로워하는, 자신의 사랑의 아내이자 메대제국의 공주였던 아미티스(Amytis)를 위하여 거대한 작은 산을 만들었는데, 외부에서 그것을 바라볼 때에 공중에 붕 떠 있는 것 같다하여, "공중정원"이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정원을 건축했기 때문이다(이 건축물은 세계 제7대 불가사이에 속한다). 그러므로 세상 역사에서는 그를 위대한 전쟁용사이자 위대한 건축가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가 건축한 도시나 공중정원을 단 한 문장도 채 안 되게 짧게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단4:29). 성경은 다만 그가 어떻게 되어서 마르둑신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자가 되었는지를 소상하게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자신이 직접 말이다. 여러분이 혹시 다니엘서를 읽을 때에 발견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다니엘서의 총12장의 말씀들 가운데, 이방제국의 왕이었던 느부갓네살이 직접 기술한 성경책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것은 바로 다니엘 4장의 말씀이다. 다니엘 4장은 다니엘이 쓴 책이 아니다. 느부갓네살의 신앙고백록을 다니엘이 채록한 것 뿐이다. 그러니까 다니엘 4장은 "나 느부갓네살은..."이라고 계속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느부갓네살왕의 신앙고백이 성경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4.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왕의 두 번째 꿈을 어떻게 해석해주었는가?
느부갓네살왕은 이제 왜 자기의 나라에 그러한 조서를 내렸는지에 관하여 소상히 밝힌다. 그러므로 다니엘서 4장의 말씀은 느부갓네살왕의 신앙고백록인 셈이다. 그가 자신의 신앙을 바꾸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그가 두번째로 꾸었던 꿈 때문이었다. 그가 얼마나 많은 꿈을 꾸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성경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그가 일생일대에 2번의 결정적인 꿈을 꾸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첫번째 꿈은 다니엘서 2장에 나오는 거대한 "신상"에 관한 꿈이다. 머리는 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넓쩍다리는 동(청동)이요, 두 종아리는 철이요, 발과 발가락은 진흙과 철이었던 거대한 신상의 꿈을 꾸었고 그것을 다니엘이 해석해줌으로, 다니엘은 일약 갈대아술사들의 우두머리가 된다. 그리고 두번째 꿈이 바로 다니엘서 4장에 나오는 "큰 나무에 관한 꿈"이다. 그런데 이번에 꾸었던 꿈은 직접 자신이 갈대아의 술사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그것을 해석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그것을 해석해줄 술사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존재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 꿈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그 꿈은 바벨론왕이 폐위되어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내용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꿈 이야기를 듣고도 바벨론이 술사들은 그 해석을 해 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박수장이었던 다니엘이 그 해결사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 꿈 이야기를 듣지 못했던 다니엘은 다시 왕으로부터 자신이 꾸었던 꿈이야기를 듣는다. 그러자 다니엘은 입을 다물지 못한다. 그것은 느부갓네살왕이 최고의 왕이 되고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겠지만, 어느날 하늘에서 내려온 순찰자(천사를 지칭함)에 의해 나무 밑동이가 잘져나간 채 7년을 보내야 할 것이라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왕은 놀라지 말고 어떤 말을 해도 괜찮으니 그 꿈에 대해 해석해주기를 부탁한다.
그런데 그때 다니엘의 말을 들어보자. 그가 얼마나 느부갓네살왕을 아끼고 존경하고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다. "내 주여, 그 꿈은 왕을 미워하는 자에게 응하며, 그 해석은 왕의 대적들에게 응하기를 원하나이다(단4:19b)"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들이 세상의 왕을 바라보는 자세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엿볼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 사실 세상나라의 왕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기름부어 세운 종들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일반은총의 특별한 대상자인 것이다. 아무나 세상나라의 왕이 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무정부상태보다는 그나마 폭군이라도 왕이 있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 있다. 그 정도로 왕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나라의 질서와 권선징악을 위해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비록 이방제국의 신하였지만 왕을 그처럼 아끼고 사랑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은 신하들 중에 결코 간신으로 살지 않았다. 비록 왕을 위해 나쁜 예언은 왕에게 이루어지기를 않기를 바랬지만, 왕이 잘못하고 있는 것에 관하여는 분명하게 말을 할 줄 아는 충신이었던 것이다. 그는 왕의 꾼 꿈을 해석한 다음 3가지를 왕에게 충고하듯이 말씀드린다(단4:27).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왕에게 첫째, "내가 충성으로 조언하는 것을 받아주소서"라고 말했다. 그렇다. 훌륭한 지도자는 직언하는 신하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둘째, "공의를 행함으로 당신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이 말은 무슨 뜻인가? 그가 그동안 공의롭지 못한 행동을 일삼아왔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그것이 그에게 죄가 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공의를 실천하여 그동안 지었던 죄를 씻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직언한 것이다. 셋째, "가난한 자들을 긍휼히 여김으로 당신의 죄악을 씻어내소서" 이것은 그가 얼마나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을 착취했는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사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한 뒤에 잡아온 포로민들을 바벨론도시의 건설과 공중정원 토목공사에 투입하여 고된 노동에 시달리게 한 것이다. 그리고 합당한 임금도 주지 않고 부려먹은 것 같다. 그러니 이제라도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돌볼 줄 아는 왕이 되기를 다니엘이 간절히 청원한 것이다. 그런데 사실 누가 이러한 직언을 할 수 있겠는가? 왕의 말이 바로 법이었던 시절에, 만약 잘못 말했다가는 그날로 자신의 관직을 박탈당하거나 죽임을 당할 수 있었기 대문이다. 하지만 다니엘은 왕에게 그렇게 말했다. 왜 그렇게 말했을까? 그것은 그 꿈의 해석대로 왕이 폐위되는 것을 다니엘은 진실로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이 그때부터라도 충성된 신하의 말을 듣고, 공의롭게 행하고, 힘없고 불쌍한 자를 돌보아줌으로서, 이전에 잘못했던 과오를 씻어버리기를 소원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왕은 과연 다니엘의 충언을 듣고 그대로 실천했을까?
5.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받고도 1년이나 회개하지 않았던 느부갓네살왕의 삶은 어떻게 변했는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왕은 다니엘의 진심어린 충언을 받아들였지만 다니엘의 청원한대로 실천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는 공중정원에서 바벨론도성을 바라보면서 누가 과연 자신을 권좌에서 몰아낼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과 자신이 이루어놓은 업적을 믿었다. 당시 세상 모든 나라가 다 자기의 손아귀에 들어왔으며 매년 공물을 바치고 있지 아니한가! 그리고 자신이 수십년에 걸쳐 건설한 바벨론의 위용은, 그저 보고만 있어도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대단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자신이 건설한 거대한 "공중정원"은 관계시설을 이용한 당대 최고의 거대 위락 시설로서(그것은 실제로 작은 산처럼 컸었기 때문이다) 놀랍기 그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니엘로부터 꿈해석을 들은 뒤 1년이 지나도록 다니엘의 충언을 실천에 옮기지 않았다. 그리고 1년 뒤에 그는 결론적으로 자기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더냐?(단4:30)" 그러자 그 순간에 하늘에서부터 큰 음성이 들려왔다.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단4:31)" 그리고 그는 그 즉시 바닥에 꺼꾸려졌다. 그리고는 정신착란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제 자신을 짐승으로 여긴 채 동물울음소리를 내면서 들로 나가서 살아야 했다. 그것은 그가 꾸었던 꿈처럼, 일곱 때 곧 7년동안을 그렇게 들판에서 짐승처럼 풀을 뜯어먹고 사는 것이 시작이었다. 그러니 아침에는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고 그의 머리털은 독수리의 깃털처럼 변했으며, 그의 손톱은 새의 발톱같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여기서 심판을 선고하시는 하나님의 꾸지람과 더불어 그래도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크신 지를 엿볼 수 있다. 사실 다니엘의 꿈 해석은 사실 즉시 실행에 옮겨졌어야 했다. 즉시 그가 정신이상자가 되어 야수처럼 변했어야 했지만, 하나님은 그에 대한 심판을 잠시 유보하셨다. 이제나 회개할까 저제나 회개할까를 기다리신 것이다. 하지만 1년이 다 되도록 그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도시와 공중정원을 보면서 자신을 믿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징계를 내리셨다. 하늘에서 거대한 음성이 들려옴과 동시에 그는 반미치광이가 되게 하셨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그에게 작정한 징계의 시간을 보내게 하셨다. 우리가 알 것은 하나님께서 징계를 내리기 전까지 하나님을 정말 오래 참으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 번 징계를 내리시면 그 징계를 거둬들이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남유다에게 그랬다.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선택한 도성마저 하나님은 기꺼이 파괴도록 내어버리셨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위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왕을 주님은 하루 아침에 동물처럼 변하게 만들어 미치광이처럼 살도록 한 것이다.
6. 일련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했던 느부갓네살왕의 최종적인 신앙의 목표는 무엇이었는가?
그런데 그때에 비로소 느부갓네살왕은 정신을 차리게 된다. 높은 권좌에 올라 부러울 것이 없이 살았던 자기자신이 어떻게 되어서 광인이 되어 들판에 버려졌는지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그가 다니엘을 통하여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음을 깨닫게 되고 회개하게 된다(단4:34). 이제는 자신이 제국을 통치하는 왕이 아니라 오직 그러한 권세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세상 나라가 통치된다는 것을 고백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도 그의 정신이 돌아오게 하신다. 그리하여 다시 왕의 자리에 복직하게 만들어주신다. 그러자 그는 즉시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감사를 올렸으며, 그분을 찬양했고 그분에게 경배를 드리게 된다(단4:34~35). 그리고는 즉시 자신이 지난 삶을 신앙고백적으로 글을 다음 그것을 바벨론 전국에 있는 백성들에게 조서로 내렸던 것이다. 세상 제국은 자기 느부갓네살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는 것을 말이다(단4:35). 그리고 얼마나 자신이 교만히 행했는지를 진심으로 고백하여 겸손히 사죄를 드린다(단4:37). 여기까지가 바벨론 느부갓네살왕의 이야기다. 이것으로 느부갓네살왕의 이야기는 끝난다. 아마도 그가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이러한 신앙고백은 그가 하나님의 백성이 될만한 수준에 이르렀지 않았나 생각한다.
7. 나오며
느부갓네살왕은 정말 뚝심있는 제왕이었다. 그리고 위대한 건축가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죽인 여러 민족들과 노예들도 자기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을 학대하고 그들을 토목공사에 매진하게 한 것에 대해 한 번도 거리낀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거대한 제국을 만들었고 거대한 도시를 건설했으며, 공중정원까지도 만들어서 사랑하는 아내에게 바칠 수가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나라를 허락하실 때, 왕이 자신의 권력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라고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번영을 구가하라고 준 것은 결코 아니다. 느부갓네살왕도 자신이 미치광이가 되어 7년동안 야수로 살지 못했더라면, 아마도 그러한 것을 결코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오직 힘과 권력을 가진 자의 소유라고 생각했을 뿐, 그것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니엘에 계속 붙어 있었다. 다니엘은 그를 위해 한평생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부와 권력에 빠져버린 느부갓네살왕을 하나님께서 만지신 것이다. 그러자 그는 겸손해졌고 인간나라의 진짜 통치자가 누군지를 알아보게 된 것이다. 그렇다.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만나기 전까지는 자기자신이 누군지를 모를 수 있다. 오직 자기의 지혜와 힘과 능력으로 오늘의 자신을 일구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고난과 징계는 이처럼 자신을 뒤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겸손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자랑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러한 것을 경험하지 못했어도 듣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른지...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
단 1:9 / 이승선 목사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다니엘서 1장입니다. 다니엘서 1장 9절 말씀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인도하사 내시들의 통치자에게 호의와 친절한 사랑을 받게 하시니라.
저는 오늘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오늘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다니엘은 유다 왕 여호야김의 통치 제3년에,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포로가 되었던, 첫 번째 포로들의 무리 가운데 속해있었습니다. 그의 삶은 너무나 비참하고 힘겨운 상황을 맞이하였지만, 지금 우리가 함께 읽은 다니엘서 1장 9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인도하고 계셨으며, 그와 함께 계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믿고 따르는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이시며, 또한 우리의 인도자이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과거에 다니엘을 인도하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과 함께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시고,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아버지의 허락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삶을 보고 계시며, 악한 자나 선한 자 할 것 없이 모두의 발걸음을 선하게 인도하고 계십니다.
우리 잠시 로마서 2장 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혹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함을 알지 못한 채 네가 그분의 선하심과 관대하심과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네,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마땅한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한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선하게 인도하고 계십니다. 아직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도록, 그리고 이미 주님의 은혜를 알고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은 그분의 자녀들에게는 날마다 매순간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올 수 있도록 선하심과 관대하심과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 가운데 모두를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발걸음을 선하게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에서 특별히 오늘의 본문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 누구누구를 인도하셨다”라고 하는 표현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발걸음을 선하게 인도하신다는 일반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인도하실 때에, 그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믿음으로 주님만 바라보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잘 따라갔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나아갈 길과 미래의 일들과 진로를 선하게 인도해 주시기를 원하고, 또 그렇게 기도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대로 따라가기보다, 내가 계획하고 원하고 기대하는 방식대로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원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라고 기도하면서도, 사실은 내가 인도하는 대로 잘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셨고,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렇게 따라오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따라오라는 부르심은 인도하시겠다는 강한 의지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주님을 따라간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함께 다니엘서 1장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사람이었던 다니엘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해서 시간의 순서대로, 다니엘서, 에스더, 에스라, 느헤미야의 말씀들을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오늘 이 시간을 주관하시고, 친히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생생하게 말씀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 다니엘의 포로됨
이제 우리 함께 다니엘서 1장 1,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 유다 왕 여호야김의 통치 제삼년에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곳을 에워쌌더니
2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집의 기구 중 일부를 그의 손에 넘겨주시매 그가 그것들을 시날 땅에 있는 자기 신의 집에 가져가서 그 기구들을 자기 신의 보물 창고에 들여 놓았더라.
1절에 등장하고 있는 유다 왕 여호야김은 이집트 왕 파라오를 섬기다가, 그 뒤에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을 3년간 섬겼고, 그 뒤에 배반하였던 왕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느부갓네살 왕은 예루살렘을 침공하게 되었고, 유다의 첫 번째 포로들이 바빌론으로 강제 이송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3-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3 왕이 자기 내시들의 우두머리 아스부나스에게 말하여 그가 이스라엘 자손과 왕의 씨와 통치자들 중에서 몇 사람
4 곧 흠이 없으며 잘생기고 모든 지혜에 능숙하며 지식을 두루 갖추고 과학을 이해하여 왕의 궁궐에 설 만한 능력을 갖춘 아이들을 데려오게 하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들의 학문과 말을 가르치게 하니라.
5 또 왕이 지정하여 그들에게 왕의 음식과 왕이 마신 포도주에서 날마다 필요한 양식을 주어 이렇게 삼 년 동안 그들을 양육하였으니 이것은 삼 년이 끝난 뒤에 그들이 왕 앞에 서게 하려 함이었더라.
느부갓네살 왕은 자기 내시들의 우두머리 아스부나스를 세워, 포로로 잡아온 이스라엘 자손들 중에서 쓸 만한 사람들을 선별하여 바빌론의 신하들로 교육하도록 하였습니다. 바빌론의 침공을 받았던 여러 민족들에서 이렇게 아이들을 선별하여,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들의 학문과 말을 가르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교육 기간은 총 3년이었고, 3년 뒤에 느부갓네살 왕 앞에 서서 심사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왕의 음식과 왕이 마신 포도주가 공급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을 포로로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왕 앞에 설 신하로서 극진한 대우를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바빌론 제국은 모든 반란과 복수의 위협을 제거하고, 그들이 정복한 모든 민족들을 하나의 왕국으로 연합하기를 원했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6,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6 이제 이들 가운데는 유다 자손에 속한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는데
7 내시들의 통치자가 그들에게 이름을 주었더라. 그가 다니엘에게는 벨드사살이라는 이름을 주고 하나냐에게는 사드락, 미사엘에게는 메삭, 아사랴에게는 아벳느고라는 이름을 주었더라.
이제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의 주인공인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 민족들로부터 선별되어 모인 갈대아 학교에 유대인 학생 4명이 포함되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였습니다. 내시들의 통치자 아스부나스는 가장 먼저 그들의 이름을 바빌론식으로 바꾸었습니다. 이처럼 바빌론 제국은 그들의 이름 속에 들어있는 그들의 민족성과 신앙심을 말살하고, 바빌론의 신인 벨, 마루둑, 아쿠, 느고와 같은 신들의 이름과 신앙과 사상과 철학을 주입하고자 하였습니다.
다니엘의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라는 의미인데, 그의 이름을 벨드사살, 즉 “벨이 그의 생명을 보호한다.”라는 의미의 이름으로 바꾸었습니다.
또한 하나냐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라는 의미인데, 이 이름을 사드락, 즉 “마루둑의 명령”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습니다.
미사엘은 “누가 하나님과 같으랴?”라는 의미인데, 이 이름을 메삭, 즉 “누가 아쿠와 같으랴?”라는 의미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아사랴는 “여호와가 도우셨다”라는 의미인데, 이것을 “느고의 종”이라는 의미의 아벳느고로 바꾸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상황은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그들은 전쟁포로였습니다. 그들은 4절에 나온 것처럼 아직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부모님은 전쟁 속에서 돌아가셨거나, 포로가 되셨을 것이고, 생사여부와 상관없이, 더 이상 부모님을 만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혹시 상황이 너무나 좋아서 부모님이 살아계시고, 어쩌다 한두 번 면회하듯이 부모님을 만날 수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행복한 가정생활은 더 이상 없었을 것입니다. 더 이상 그들을 품어주고 보살펴줄 부모님이 없었고, 가족과 완전히 이별해야만 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바빌론 왕국의 내시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신분이 주어졌습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3년이라는 시간이 주어졌고, 그 뒤에 느부갓네살 왕 앞에 서서 심사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혹여나 뒤쳐져서 바빌론 왕국에 그다지 쓸모가 없는 사람으로 드러나게 된다면, 폐기처분되어 죽을지도 모르고,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는 너무나 불안하고 두려운 상황에 처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늘 우리가 처음 읽었던 다니엘서 1장 9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인도하고 계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과 친구들을 떠나지도 버리지도 아니하셨고, 여전히 그들과 함께 계셨으며, 그들을 선하게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만을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나에게 고난과 시련이 올 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구나.”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낙담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장 눈앞의 일들만을 보고, 짧은 인생에서의 일들만을 생각하지만,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관점에서 우리를 선하게, 공평하게 인도하고 계시며,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의 삶을 주관하고 계셨고, 선한 길로 그를 이끌어가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비록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과 친구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계셨으며, 가장 선한 길로 그들을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원한다면, 지금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이 상황이 나에게 가장 선한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비록 고난일지라도, 고통과 아픔과 시련일지라도,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상황이 잘 풀릴 때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기쁘게 찬양할 수 있지만, 사실 그러한 감사는 믿음이 없어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올 때,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은 오직 믿음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오직 믿음으로 전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기 원합니다.
** 다니엘의 작정
이제 우리 함께 다니엘서 1장 8,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8 그러나 다니엘은 왕이 정해 준 음식이나 왕이 마신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겠다고 마음속에 작정하였으므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려고 내시들의 통치자에게 요청하니
9 이제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인도하사 내시들의 통치자에게 호의와 친절한 사랑을 받게 하시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다니엘의 마음속에 있었던 결정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느부갓네살 왕이 지정한 음식과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겠다는 믿음의 작정이었습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에 대한 기준을 주셨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을 하는 짐승을 정결한 짐승으로써 먹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바빌론 왕국에서 돼지고기 삼겹살을 구워주었다면, 다니엘은 그것이 부정한 음식이므로 먹어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저를 신약시대에 한국 땅에서 태어나게 하시고, 너무나 맛있는 삼겹살을 먹을 수 있게 해주신 것을 참으로 감사합니다.
다니엘이 거부했던 음식은 율법에서 분류한 부정한 고기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우상 신들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음식들이었을 것입니다. 율법에서는 또한 우상들에게 바친 음식을 먹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그러한 음식을 거부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에서, 음식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온 우주에 신은 오직 한 하나님 외에 없으므로,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물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어떠한 의미도 부여할 수 없기에, 오직 감사함으로 먹을 수가 있다고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사도 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그 일로 인하여 형제자매들이 실족하게 된다면, 세상이 서 있는 한 고기를 먹지 아니하겠다고 단호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도 분명한 진리의 말씀과 함께 뜨거운 형제 사랑이 있기를 원합니다.
다시 다니엘의 시대로 돌아와 보시면, 구약시대 다니엘의 입장에서는 우상들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왕이 정해주는 음식과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마음속으로 작정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이 다니엘의 이러한 마음과 결정이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웠을까요? 다니엘은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아이였습니다. 우리교회의 모든 자녀들이 이렇게 하나님보시기에 참으로 예쁘고 기쁘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자라나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다니엘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참으로 좋았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달랐을 것입니다. 다니엘의 이러한 결정을 아마 다른 아이들이 들었다면 별나다고 비난하고 경멸하였을지도 모릅니다. “내시 주제에 음식을 가려? 그것도 최고급 대우로 왕의 음식을 주신 것인데 감사하고 먹으면 될 것이지. 우리도 따로 섬기던 신들이 다 있어. 자기들만 신앙이 있나? 뭘 그렇게 광신도같이 심하게 믿는 거야?”
하지만 여기에서 다니엘은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다른 누가 어떻게 보든지, 어떻게 생각하든지, 어떻게 말하든지 오직 주님만 기쁘시게 하기를 원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기만을 원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따르길 원했습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은 오직 첫째로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만을 구하였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자기 생명을 살려주신 분이 느부갓네살 왕이 아니라,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것을 분명히 알고 믿었습니다. 자기 길을 인도하시는 분이 어떠한 권세를 잡은 사람이 아니라, 오직 권능의 주님이심을 분명히 믿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품위 있고 질서 있게 자기를 다스리는 내시들의 통치자에게 요청하였습니다. 그는 반항하듯이 단식투쟁을 한 것이 아니었고, 분노하면서 음식을 엎어버리지도 않았습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고민만 하면서 가만히 있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긍휼을 구하는 태도로 내시들의 통치자에게 담대하면서도 겸손하게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다니엘의 믿음과 작정에 하나님께서 선하심으로 응답하시고, 그의 길을 친절하게 이끌어 주셨습니다. 바로 9절 말씀처럼, 내시들의 통치자 아스부나스가 다니엘에게 호의를 베풀고, 또한 친절한 사랑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는 채찍을 들고, 고함을 치며, 다니엘을 때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니엘에게 큰 고통을 주거나 감옥에 가둘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친절하신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아스부나스의 눈에 다니엘이 사랑스러워보였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길들이 주를 기쁘게 하면 그분께서 그의 원수들까지도 그와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바로 이 잠언 16장 7절의 말씀처럼, 다니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였을 때, 그가 믿음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내시들의 통치자의 마음을 움직이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잘 받고자 한다면, 첫째로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고,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르기로 마음에 작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수가 있습니다.
지금 포로가 되어 모든 것이 불안한 이 와중에 음식 메뉴가 그렇게 중요한가를 따져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자기가 처한 상황 속에서, 자기가 순종하고 따를 수 있는 작은 것 한 가지에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게 다니엘이 믿음의 한 걸음을 걸었을 때, 하나님께서 바로 그 순종에서부터 다니엘을 한 걸음 더 인도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학생들이 인생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원하고, 진로를 인도받기 원한다면, 자기 귀를 세상 음악으로 더럽히지 아니하기로 마음속에 작정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 눈을 세상의 더러운 영상들로 더럽히지 아니하기로 마음에 작정해야 할 것이고, 마음과 생각을 온갖 아이돌 우상들로 더럽히지 아니하기로 마음에 작정해야 할 것입니다.
어른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돈으로, 쾌락으로, 술로, 명예로, 성공으로, 음행으로, 더럽히지 아니하기로, 마음속에 작정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작정하는 것이 없고, 결단하는 것이 없고, 버리는 것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선하게 인도하고 계시지만, 우리가 따라가지 않는다면, 그 인도하심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쉽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믿음의 한 걸음을 내딛고 전진하기를 원합니다.
** 시험의 시간
이제 우리 함께 다니엘서 1장 1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내시들의 통치자가 다니엘에게 이르되, 내가 내 주 왕을 두려워하노라. 왕이 너희의 먹을 것과 너희의 마실 것을 지정하셨거늘 너희 얼굴이 너희 부류에 속한 아이들보다 못한 것을 그분께서 보아야 할 까닭이 무엇이냐? 그렇게 되면 너희가 왕을 위해 내 머리를 위태롭게 하리로다, 하니라.
내시들의 통치자 아스부나스가 다니엘을 얼마나 이뻐했는지, 그에게 자기 사정을 자상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무엇을 먹고 마실지는 사실 내게 큰 상관이 없지만, 왕이 보실 때 건강해야만 한다고 설명해 주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 함께 11-1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1 그때에 다니엘이 멜살 곧 내시들의 통치자가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를 감독하게 하려고 세운 자에게 이르되,
12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사 그들이 우리에게 콩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뒤에
13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이 정해 준 음식을 먹는 아이들의 얼굴을 관찰하게 하시고 당신이 보는 대로 당신의 종들에게 행하소서, 하매
14 이에 그가 이 일에서 그들의 말에 동의하여 열흘 동안 그들을 시험하더라.
이제 다니엘은 내시들의 통치자 아스부나스의 친절한 설명에 대해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고, 다만 11절 말씀처럼, 아스부나스가 자기들의 감독관으로 임명한 멜살에게 시험의 기간을 요청하였습니다. 앞으로 열흘 동안 바빌론 왕이 지정해준 고기와 포도주 대신 콩과 물을 먹게 한 뒤에 다른 아이들과 비교 관찰을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보시고 처분해주시면 그대로 따르겠다고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길에는 시험의 기간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과 부르심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지고, 한 마음, 한 뜻으로 모여지기까지 시간과 과정이 필요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에게는 인내와 지속적인 순종, 그리고 결과를 주님께 맡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제 우리 함께 15,16절을 보시겠습니다.
15 열흘이 끝났을 때에 그들의 얼굴이 왕이 정해 준 음식을 먹은 모든 아이들보다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기름지게 보이니라.
16 이에 멜살이 그들에게 정해 준 음식과 그들이 마실 포도주를 거두어가고 그들에게 콩을 주니라.
하나님께서는 다니엘과 친구들의 믿음을 기뻐하셨고, 그들에게 건강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은 멜살의 시험을 무사히 잘 통과할 수가 있었고, 믿음도 지킬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의 길을 선하게 인도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의 결단과 순종을 통하여, 새로운 길을 여시고, 새로운 역사를 보여주시며,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이러한 주님을 우리도 순종하고 따라가며 전진하기를 원합니다.
** 열 배나 뛰어남
이제 우리 함께 17-2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7 이 네 아이들로 말하건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식을 주시고 모든 학문과 지혜에서 능숙함을 주셨으며 또 다니엘은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
18 그가 그들을 데리고 들어와야 한다고 왕이 말한 날들이 이제 끝나니 그때에 내시들의 통치자가 그들을 데리고 느부갓네살 앞으로 들어오니라.
19 왕이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 모두 가운데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같은 자를 찾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을 왕 앞에 서게 하니라.
20 왕이 지혜와 명철에 대한 모든 문제에 관하여 그들에게 묻는 가운데 그들이 자기의 온 영토 안의 모든 마술사와 별을 살피는 자보다 열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다니엘과 친구들에게 지식을 주셨습니다. 모든 학문과 지혜에서 능숙함을 주셨습니다. 또한 감추어진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게 해주셨습니다. 3년이 지난 뒤에 그들이 왕 앞에 섰을 때, 그들은 함께 교육을 받은 갈대아 학교의 동료들뿐만 아니라, 온 바빌론 땅에서 현역으로 일하고 있는 모든 현자들보다 열 배나 나은 자들로 드러나고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니엘과 친구들이 배우고 공부했던 주제가 무엇이었는가를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배운 것은 4절에 언급되었던 것처럼, 갈대아 사람들의 학문과 말이었습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은 별을 살피는 점성술을 배웠고, 마술을 배웠고, 점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벨과 마루둑과 아쿠와 느고신에게 기도하는 기도문을 외웠으며, 그들에게 제사지내는 방식을 배웠고, 온갖 바빌론 이교도의 과학과 학문과 철학과 사상을 배웠습니다. 그들이 갈대아 학교에서 배운 것들 중에 성경적인 것은 아마 단 한 가지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모든 학생들보다, 그리고 이미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모든 지혜자보다 열 배나 나은 자들로 드러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신기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니엘과 친구들이 그러한 모든 것을 잘 배울 수 있도록, 지식을 주시고 모든 학문과 지혜에서 능숙함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그들은 바빌론 왕국에서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되었고, 바빌론 왕과 백성들에 대해 보다 더 자세히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느부갓네살 왕에게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경배해야 한다는 참 믿음을 전달해 줄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아들 에빌므로닥 왕이 유다 왕 여고니야를 감옥에서 꺼내며 친절히 대해 줄 때에도, 함께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리오 왕이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경배하라는 칙령을 내릴 때에도, 그 옆에 서 있을 수가 있었습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은 그 어떤 명예나 출세를 바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상황 가운데 최선을 다해 순종하며, 모든 일에 신실하게 임하였을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다니엘과 친구들에게 모든 비젼과 꿈을 깨달아 알게 하셨고, 그들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시고, 그들의 길을 열어 인도해 주셨던 것입니다.
** 정리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라는 제목으로 다니엘서 1장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선하게 인도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사람은 많지가 않습니다.
다니엘은 비록 전쟁 포로였고, 비참한 상황 가운데 놓여있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떠나지도 버리지도 아니하시고, 함께 계시며 인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모든 일이 잘 풀리고 기쁘고 즐거울 때에만이 아니라, 정말 믿음이 필요한 순간인, 고난과 시련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 여전히 나를 붙들고 계시며, 인도하고 계심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은 느부갓네살 왕이 정해주는 음식과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기로 마음속에 작정하였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결정과 순종이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하게 인도해 주셨음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 우리도, 우리의 눈과 귀와 입과 손과 발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더럽히지 아니하기로 작정하며, 주님만을 기쁘시게 하기 원합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생각나게 해주시는 어떠한 물건이나, 습관이나,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을 주님 앞에서 해결하겠다고 마음속에 작정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순종의 한 걸음을 걸을 때, 하나님께서도 한 걸음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그것이 비록 갈대아의 학문이었고, 이교도에 속한 교육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공부하면서 모두보다 열 배나 나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과정을 주관하고 계셨고, 인도하고 계셨으며, 그들의 인생을 향한 큰 뜻과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자 한다면, 나의 삶속에 하나님께서 주신 비젼과 꿈을 깨달아 알기를 원한다면, 현재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일들에 최선을 다해 순종하기 원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시는 살아계신 선한 목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99세에 여전히 아들이 없었던 아브라함을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의 노예로 팔려간 요셉, 감옥에 갇힌 요셉과 여전히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홍해 바다 앞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계셨고, 거대한 여리고 성 앞에서 여호수아를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모압과 암몬 족속의 대군 앞에서 여호사밧과 함께 계셨으며, 극심한 고난 중에서 욥이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할 때에도 그를 붙들고 계셨으며, 바빌론의 포로로 잡혀온 다니엘과 친구들을 여전히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고통과 시련이 올 때,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는 이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여전히 우리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아니하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선하게 인도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붙들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 가운데 오직 첫째로 주님만을 구하기로 마음에 작정할 수 있기를 원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모든 일들에 최선을 다하며 순종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우리를 선하게 인도하시는 좋으신 주님을 믿음으로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꿈과 두려움
단 4:1-7
세상은 자기에게 도움이 안되는 것은 가차없이 거부하고 버리면서 살아갑니다. 자기에게 도움이 될만한 것을 붙드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심지어 종교까지도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수많은 종교들이 그 본질을 잃어버리고 변질되어 내려온 것도 사실입니다. 한 예로 얼마전 T.V에서 2002년 월드컵 유치를 위해서 범종교인 기원식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결국 모든 종교가 한국이라는 나라가 월드컵을 유치하는데 도움을 주자는 종교로 전락되어 버린 것입니다.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교회에서 많이 행해지고 있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에서도 나라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름을 앞세우고 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한국이라는 나라를 발전시키는데 이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신자들은 자신의 개인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뭔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알게 모르게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고,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이것은 극히 정상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세상적인 시각을 공격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을 사는데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무거운 짐을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짐을 지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교회에서는 세상을 사는데 도움이 되고, 모든 일이 잘 되어 가는 쪽으로만 가르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은 혼란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의 세친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느부갓네살이 알게 된 하나님은 자기를 믿는자를 풀무에서도 죽지 않게 건지시는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은 세친구의 하나님을 높이게 됩니다. 2절을 보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 하노라"고 말합니다. 즉 느부갓네살은 풀무에서도 타죽지 않은 세사람을 보고 하나님의 이적에 대해서 반한 것입니다. 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도 그런 하나님의 능력과 기사를 입은 자가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크도다 그 이적이여, 능하도다 그 기사여,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 권병은 대대에 이르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능하신 기사와 이적이 함께 하는 나라는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강한 힘으로 영원히 존재하는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느부갓네살의 하나님께 대한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예수 믿는다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마음 아니겠습니까? 목사가 심방해서 이 가정에 하나님이 함께 해달라고 기도하는 그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느부갓네살과 같은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느부갓네살이 두려워하고 번민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 이유는 꿈 때문입니다. 그 꿈을 애굽의 박사들, 박수, 술객, 점쟁이들이 해석하려고 하지만 해석하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하면 시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꿈은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알리시기 위해서 주신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아야 하는데도 바벨론의 박사들은 세상적인 시각으로 꿈을 해석하려고 합니다. 때문에 해석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꿈을 통해서 느부갓네살에게 네가 바라는 미래는 잘못됐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꿈에 대한 것은 다음 시간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꿈을 통한 느부갓네살의 두려움과 번민입니다. 무엇 때문에 두려움과 번민이 왔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왕이 바라고 꿈꾸고 있던 미래를 하나님은 꿈을 통해서 부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믿음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는 전혀 다릅니다. 신자가 믿음으로 세상을 살 때 세상은 그 신자를 거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살아가는 방식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교회들은 믿음으로 살면 세상에서 잘된다는 괴변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물론 그 믿음도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믿음은 현실과 충돌되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는 믿음과 현실이라는 두 세계를 두고 어느 한쪽으로 가야하는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믿음은 현실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 이 아니라 오히려 충돌되고 서로 융화할 수 없는 관계임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교회가 믿음은 세상에서 사는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가르쳤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 안에서 혼란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열심히 했는데도 세상의 일이 안될 때 이들은 기독교를 의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도움이 안되는 예수는 필요 없다 하면서 교회를 떠나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입니다.
믿음과 현실이 왜 서로 충돌하는 것입니까? 말씀드린 대로 사고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는 꿈을 자기들의 이해와 사고로서만 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꿈을 통해서 이 세상은 장차 무너질 것이고 오직 하나님 나라만이 영원할 것임을 나타내십니다. 세상의 것은 헛되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스스로를 헛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은 손에 쥐고 있을수록 힘이 되고 세상의 것만이 자신을 다른 사람들 앞에 나타내는 도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결코 세상을 헛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꿈으로, 자신의 목적으로, 자신의 소망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현실과 충돌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은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세상을 사는데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직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가는 데만 꼭 있어야 할 분이십니다. 느부갓네살과 같은 마음으로 주님께 나오지 마시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만을 진심으로 원하면서 세상에서의 잠시 잠간의 고난도 괴로움도 이겨 가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