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facebook.com/share/p/19jmyxSeiC/
그는 표현의 자유의 순교자인가 — 이병태가 남기고 간 다섯 문장
ㅡㅡㅡㅡㅡㅡㅡ
사퇴하던 날 아침, 이병태 규제합리화위원회 부위원장은 페이스북에 '신념을 지키는 비용'이라는 글을 올렸다. 토머스 모어를 인용한 글이었다. "명예와 신의가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세상 모든 사람이 명예로워질 것이다." 모어가 이익 대신 명예를 택한 사람이었고, 결국 반역죄로 처형됐다는 말도 덧붙였다.
글은 곧 지워졌고, 계정은 한동안 비공개가 됐다. 그리고 저녁, 청와대가 사퇴를 권고한 지 두 시간 만에 그는 물러났다. 입장문에는 "부당한 정치적 공세에 밀려 사임한다"고 썼다.
자신을 모어의 자리에, 그러니까 신념 때문에 박해받은 사람의 자리에 위치시키고 퇴장한 것이다.
정말 그런가. 그가 사퇴 직전까지 남긴 말들을 다시 읽어봤다.
.
그가 남긴 다섯 문장
사퇴 전 JTBC와의 통화, 그리고 그간의 SNS 게시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게 뭐 그렇게 심각한 일이냐."
"남이 거북해할 거를 우리가 어떻게 다 알아. 그러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얘기가 뭐가 남아요?"
"표현의 자유는 99%가 반대하는 1%의 주장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의 KKK 같은 집단들도 표현의 자유가 기본권이기 때문에 표현할 자유가 있다."
"표현을 못 하게 하면 그다음부터는 폭력화한다. 위험한 생각이 어디 있는지 아는 게 사회적으로 훨씬 안전하다."
적고 나니, 기가 막히다. 판이 도는 사이 슬쩍 패를 바꿔치는 야바위에 가깝다. 어느 대목에서 카드가 바뀌는지, 한 장씩 짚어보자.
.
"미국에선 KKK도 보호받는다?"
반은 맞는 말이다. 미국에서 KKK 단원이 백인우월주의를 떠든다고 감옥에 가지는 않는다.
문제는 나머지 반이다. 1997년 뉴욕의 한 경찰관은 인종차별 전단을 시민단체에 우편으로 보냈다가 해고됐다. 2019년 필라델피아에서는 경찰관들이 SNS에 올린 인종차별 글이 드러나 무더기로 해고됐다. 이들 모두 표현의 자유를 들어 소송을 냈지만 법원은 받아주지 않았다. 시민의 신뢰를 밑천으로 일하는 공직자가 혐오 발언을 표현의 자유로 둘러댈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미국 판례는 오히려 직급이 높을수록 말에 더 무거운 책임을 지운다.
그러니까 표현의 자유는 '감옥에 가지 않을 자유'이지 '공직을 유지할 권리'가 아니다. KKK 단원은 처벌받지 않는다. 그러나 KKK 발언을 한 경찰관은 해고된다. 이 두 문장은 모순이 아니다. 둘 다 미국식 표현의 자유다.
이병태는 총리급 공직자였다. 그가 예로 든 바로 그 나라의 기준을 갖다 대면, 그는 '엄중 경고' 정도가 아니라 진작에 해임감이었다. 자기를 변호하려고 꺼낸 사례가 하필 자기 사퇴의 근거였던 셈이다.
.
"그게 그렇게 심각한 일이냐?"
이 말을 듣고 되묻고 싶었던 것은 하나다. 심각한지 아닌지, 그걸 누가 정하는가.
광주는 1980년 5월 계엄군의 학살을 겪었고, 그 뒤로 40년간 두 번째 폭력을 겪었다. '폭동'이라는 딱지, 북한군 개입설, 유공자 비하. 이 부인과 조롱이 하도 집요하게 되풀이돼서 2021년에는 5·18 왜곡을 처벌하는 법까지 만들어야 했다. 학살의 기억을 법으로 지키는 일을 가볍게 시작하는 민주주의는 없다. 그만큼 몰렸다는 뜻이다.
그러니 "5·18이 성역이 됐다"는 말은 사실관계부터 틀렸다. 성역이었던 것은 5·18이 아니라, 40년 동안 처벌받지 않고 되풀이돼온 5·18 조롱 쪽이었다. 이제야 그 성역이 무너지고 있을 뿐이다.
"남이 거북해할 거를 어떻게 다 아느냐"는 항변도 이 사건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배재고 선수들의 구호는 광주 팀을 앞에 두고, 5·18 폄훼 파문을 일으킨 바로 그 기업을 불러내는 것이었다. 경계가 흐릿해서 실수로 넘은 게 아니다. 어디가 아픈 곳인지 알았기 때문에 조롱이 된 것이다. 그리고 몰랐다면 사과하고 배우면 될 일을, 어른이 나서서 "그게 뭐 심각하냐"고 두둔하는 순간, 그것은 아이들의 미숙함이 아니라 어른의 신념이 된다.
.
"말을 막으면 폭력이 된다?"
역사가 이미 답을 내놓은 질문이다.
나치는 말이 막혀서 폭력으로 간 게 아니다. 바이마르공화국의 표현의 자유를 한껏 누리면서, 연설과 신문과 집회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집권했다. 르완다의 학살은 총보다 라디오가 먼저 시작했다. 이웃을 '바퀴벌레'라고 부르는 방송을 내버려둔 사회에서, 칼은 그다음에 왔다.
독일이 지금 홀로코스트 부정을 처벌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몰라서가 아니다. 그 자유가 어떻게 악용되는지, 값을 누구보다 비싸게 치러봤기 때문이다.
"위험한 생각이 어디 있는지 아는 게 안전하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린다. 다만 그 '안전'은 혐오의 표적이 되어본 적 없는 사람의 안전이다. 조롱이 공공연해질수록 안전해지는 쪽과 위험해지는 쪽은 따로 있다.
.
그는 토머스 모어인가
그래서, 그는 토머스 모어인가.
모어는 왕의 권력 앞에서 양심을 굽히지 않았고 그 값으로 목숨을 내놨다. 이병태는 5·18 조롱을 두둔했고 그 값으로 자리를 내놨다. 처형과 사퇴 권고 사이의 이 아득한 거리가, 순교 서사의 허풍을 말해준다.
이런 수법이 처음도 아니다. 그는 "서울 한복판에서 김일성 만세를 외쳐도 허용돼야 한다"고 했다. '김일성 만세'는 본래 국가보안법 시절 실제로 그 말을 입에 올렸다가 끌려갔던 시민, 42년 만에야 재심에서 무죄를 받은 피해자의 역사에서 나온 말이다. 국가폭력에 짓밟힌 사람들의 자리에서 벼려진 논변이다.
그는 이 말을 가져다가 국가폭력 희생자들을 조롱하는 자들의 방패로 썼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권력에 목숨을 빼앗긴 양심수의 옷을 빌려 입고 퇴장했다. 피해자의 언어를 빌려다가 피해자를 조롱할 자유를 지키는 것. 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
.
사퇴로 끝나지 않은 것
청와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청와대가 밝힌 사퇴 권고의 이유는 끝까지 "국정 기조에 부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였다. 그 글의 무엇이 잘못인지, 5·18 조롱을 두둔하는 일이 왜 공직자에게 허용될 수 없는지에 대한 판단은 이번에도 없었다. 발언의 내용이 아니라 기조와의 불화가 문제였다면, 이 사퇴는 혐오에 대한 단죄가 아니라 리스크의 손절이다.
돌이켜보면 이병태는 임명 때부터 "친일은 당연", "세월호는 천박함의 상징" 같은 발언 전력으로 반발을 샀던 사람이다. 그때 그를 통과시킨 것은 사과문 한 장이었다. 사과문이 있는지만 확인하고 생각이 바뀌었는지는 묻지 않는 인사. 그 원리는 사람 하나를 손절한 오늘도 멀쩡히 남아 있다. 그리고 이병태는 '부당한 정치적 공세'라는 박해 서사를 챙겨 퇴장했다. 다음 무대에 설 밑천을 얻은 것이다.
표현의 자유는 소중하다. 소중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써야 한다. 그것은 약한 자가 국가에 맞설 때 드는 방패이지, 권력의 자리에 앉은 사람이 학살의 기억을 조롱하는 면허가 아니다. 이번 사태가 우리에게 남긴 공부가 있다면, 방패를 면허로 바꿔치기하는 그 손을 알아보는 눈일 것이다.
ㅡㅡㅡ
강성현(성공회대 평화월딩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