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 가난, 겸손”
“주님, 당신은 저를 살펴보시고 잘 아시나이다.
주님, 영원한 길로 저를 인도하소서.”(시편139;1.24ㄴ)
오늘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입니다. 흡사 10월을 대표하는 가난과 겸손의 성인처럼 느껴집니다. 성인 축일 때 마다 확인하는 생몰연대와 산 햇수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만 44세를 살았지만 영향력은 영원합니다. 기후위기를 겪고 있는 작금의 시대에 가장 각광받는, 종파를 초월하여 개신교는 물론 불자들에게도 가장 사랑받는 프란치스코 성인이요, 오늘 축일을 지내는 교황님도 프란치스코입니다.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시는 가장 현대적인 성인 프란치스코입니다. 성인을 떠올릴 때마다 생각나는 “산과 강”이라는, 성 베네딕도회 영성을 상징하는 제 좌우명 자작시입니다.
“밖으로는 산, 천년만년 임을 기다리는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임향해 흐르는 강”
정주의 산, 흐르는 강이 기막힌 보완관계를 이룹니다. 이래야 정주는 안주가 되지 않고 늘 새로울 수 있습니다. “산”이 상징하는 바 성 베네딕도라면, “강”이 상징하는 바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두 분은 경쟁 관계가 아닌 보완관계의 성인이요 영성임을 깨닫습니다. 밖으로는 성 베네딕도를, 안으로는 성 프란치스코를 산다면 정말 “Ever old, Ever new”(늘 옛스럽고 늘 새로운)” 최고의 영성이겠습니다.
성인의 감동적인 일화는 한둘이 아닙니다. 삶전체가 영원한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되는 한권의 살아 있는 복음서 같습니다. 오늘 본기도가 참 아름답게 성인의 삶을 잘 요약합니다.
“하느님,
복된 프란치스코를 가난과 겸손의 삶으로 이끄시어,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저희에게 보여주셨으니,
저희도 성자를 따라 복음의 길을 걸으며,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차 하느님과 하나되게 하소서.”
성 프란치스코가 성당의 정문 앞에서 바치던 기도입니다.
“그리스도님, 저는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당신의 모든 성당에서 당신을 경배하며 흠숭하나이다.”
예수님과 산상수훈의 “참행복”을 사랑했던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의 고백입니다.
“백년마다 한번 성 프란치스코가 태어난다면 세상의 구원은 보장될 것이다.”
성프란치스코는 시편 141장을 읊은후 선종했고 마지막 유언은 “내 형제 죽음이여, 어서 오라.”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영적지향과 동일하다 여겨지는 널리 회자되는 “평화의 기도”와 더불어,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요약하는 “오, 감미로워라” 시작되는 성가 “태양의 찬가” 역시 너무나 유명하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고백의 기도이자 시요 노래입니다. 이에다 몸과 맘이 하나된 춤까지 곁들이면 정말 멋지다 싶습니다.
시간되면 “평화의 기도”도 읽어보시고 “태양의 찬가” 노래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제 장례미사때 입당성가는 “태양의 찬가”를, 퇴장성가는 “평화의 기도”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성인은 1226년 선종하신 2년후 1228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된후, 1939년 시에나의 카타리나와 함께 이탈리아의 공동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고, 1980년에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생태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됩니다. 성인은 모든 동물들과 새들, 그리고 자연환경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오늘 루카 복음과 제1독서 욥기에서도 성 프란치스코 영성의 핵심 요소를 발견합니다. 바로 회개와 가난, 겸손입니다. 저는 감히 오늘 강론 제목대로 “세상을 구원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 회개-가난-겸손” 이라 주장하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은 숱한 기적에도 회개하지 않은 악한 세 도시를 향해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불행선언입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너 벳사이다야! 너 카파르나움아!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기적의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회개요, 눈만 열리면 모두가 회개의 표징들이자 성인들의 삶은 더욱 그러합니다. 한두번의 회개가 아니라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을 살아갔던 성인들이요 성 프란치스코는 더욱 그러합니다. 성인은 결정적 회개에로 이끈 성서는 마태복음 10장9절 말씀이었고 성인은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버리고 무소유의 삶을 살았습니다.
회개 은총의 열매가 바로 자발적 가난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나는 가난이라는 여인과 결혼했다” 고백할 정도로 가난을 사랑했습니다. 정말 가난을 사랑한다면 그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가난한 부자일 것입니다. 엊그제 주교들의 시노드 피정 개막 연설시 교황님의 한 대목도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자비의 거지들’로서 여기 있습니다.”
(We are here as beggars of God’s mercy)
우리가 하느님 자비의 거지들이라면 예수님은 거지 대장쯤 되지 않겠나 불경한(?) 생각도 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욥의 회개가 참으로 아름답게 묘사됩니다. 하느님의 폭포수같이 쏟아지는 물음에 말문이 막힌 욥은 회개와 더불어 침묵중에 진짜 가난과 겸손을 깊이 체험했음을 다음 고백이 입증합니다.
“저는 보잘 것 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한 번 말씀드렸으니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두 번 말씀드렸으니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몰라서 의심에 무수한 의문들을 남발하지 정말 하느님의 신비를 조금이라도 깨닫는다면 침묵할 것입니다. 정말 주님앞에 가난하고 겸손한 주님 자비의 거지들로 행복할 것입니다. 참으로 회개와 더불어 주님을 만날 때 참된 가난과 겸손이요 이런 자기를 아는 가난과 겸손이 참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미사전례중 주님의 성체를 모시기 위해 서있는 빈손의 대열은 얼마나 거룩한 아름다움의 복음적 장면인지요! 가톨릭 교회의 영성체가 아니곤 도대체 어느 종교에서 이런 체험이 가능하겠는지요? 회개한 하느님 자비의 거지들로서 가난과 순수, 겸손과 지혜의 절정의 아름다움을 체험하는 감동적 장면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은 또 하나의 거룩한 하느님의 거지가, 성 프란치스코가 되어 살게 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아멘.
첫댓글 아멘!~~~"가난과겸손"
묵상 하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