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904
■ 3부 일통 천하 (227)
제13권 천하는 하나 되고
제 25장 하나가 되는 천하 (3)
위왕(魏王) 가(假)는 그전에 미리 대량성 주변으로 해자와 도랑을 깊이 파놓았었다.
그러나 저수지에서 나온 물을 감당하기에는 애당초 그 크기가 너무 작았다.
해자(垓子)와 수로(水路)는 금세 물로 가득 차 넘쳐흘렀다.이윽고 물줄기는 대량성(大梁城)
안으로 흘러들기 시작했다.그래도 저수지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은 멈추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자 대량성(大梁城)은 완전히 침수되었다.성벽이 여기저기서 무너져 내렸다.
궁궐 높은 대(臺)에 올라가 이 광경을 본 위왕 가(假)는 더 이상 진군의 공격을 감당할 수
없음을 알았다."아아!"
탄식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주위로 진군(秦軍) 병사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끝내 위왕 가(假)는 투항했다.왕분(王賁)은 모든 것을 신속히 처리했다.
- 위왕(魏王)을 함양으로 압송하라!함거에 실려 끌려가는 위왕 가(假)는 끊임없이 눈물을 쏟았다.
울분과 상심이 지나쳤는지 함양에 당도하기 전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
이로써 한때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 뽐내며 천하 패자국을 꿈꾸었던 위(魏)나라도
영원히 역사 무대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돌아보면, 위나라의 조상은 필고(畢高)였다. 주왕실에서 갈라진 희씨(姬氏)의 한 계파였다.
필(畢) 땅을 얻어 필씨가 되었고, 그 후손 필만이 진(晉)나라 위(魏) 땅에 봉해지면서
위씨(魏氏)가 되었다.위씨로서 천하에 명성을 떨친 사람으로는 진문공을 도와 천하 패업을
이루게 한 위주(魏犨)를 꼽을 수 있다.
결초보은(結草報恩)의 고사성어를 낳은 위과(魏顆)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위주의 6대손 위환자(魏桓子) 대에 이르러 지백(知伯)을 멸하고 절정기를 이루었다.
위씨 왕국을 이룩한 것은 그 아들 위문후(魏文侯) 대에서 였다.
그는 전국시대 초기의 명군으로 다른 열강과 더불어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그러나 욱일승천의 진(秦)나라 기세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위문후 이래 7대를 내려오다가
마침내는 생존 경쟁에서 탈락하고 말았다.BC 225년(진왕 정 22년)의 일이었다.
사마천은 <사기(史記)>의 <위세가(魏世家)>를 쓰고 나서 다음과 같이 그 소감을 피력했다.
사가(史家)들은 말하고 있다.- 위(魏)나라가 멸망한 것은 신릉군을 등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당시 하늘의 뜻은 진(秦)나라에 있었기 때문에 진나라가 천하를 평정할 수 있었다.
위나라가 비록 현신(賢臣)의 보좌를 받았다 한들 어찌 패망하지 않았을 것인가.
이미 정해진 현실의 벽을 넘을 수는 없다는 사마천(司馬遷) 나름의 운명관이라고 해석해야 할까?
아니면 현신(賢臣)의 출현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이미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던
당시 망국들의 부패한 정치 행태에 대한 비꼼일까?이제 천하 통일까지는 4년이 남았다.
- 천하를 하나로!광기에 휩싸인 듯 이사와 위요는 지체없이 다음 계획을 행동으로 옮겼다.
- 초(楚)나라입니다.이때까지 망하지 않는 나라는 연(燕), 제(齊), 초(楚) 등 3개국 뿐이었다.
이 세나라 중 그래도 가장 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나라는 초나라였다.
진(秦)나라를 상대로 싸워 승리할 확률이 가장 높은 나라가 초(楚)나라라는 뜻이다.
이를테면 진나라로서는 실질적인 결승전의 국면에 임한 것이었다.'신중을 기해야 한다.'
진왕 정(政)도 초나라와의 전쟁이 중요함을 인식했다.
출병에 앞서 두 장수를 불러 승리에 대한 확률을 철저히 점검했다.
먼저 신예라 할 수 있는 젊은 장수 이신(李信)을 불러 물었다."초나라를 치려면 어느 정도의
군사가 필요하오?"이신이 대답했다."20만 명이면 충분히 초(楚)나라를 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은퇴한 백전노장 왕전(王翦)을 불러 물었다.
"장군이 초나라를 친다면 어느 정도의 병력이라야 가능하겠소?"왕전이 대답했다.
"신의 생각으로는 적어도 60만 명은 되어야 초(楚)나라를 무찌를 수 있습니다."
20만 명과 60만 명.너무나 차이가 나는 대답이었다.진왕 정(政)은 속으로 생각했다.
'왕전(王翦)도 이제 늙었구나. 초나라를 치는 데 어찌 60만 명이나 필요할 것인가?"
며칠 후 진왕 정(政)은 초나라 정벌군의 대장을 발표했다.- 이신(李信)은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나가 초(楚)나라를 멸하고 돌아오라!부장에는 몽씨의 유일한 생존자이자 전 명장 몽오의 아들
몽무(蒙武)를 임명했다.
905편에 계속
열국지 [列國誌] 905
■ 3부 일통 천하 (228)
제13권 천하는 하나 되고
제 25장 하나가 되는 천하 (4)
초(楚)나라 정벌군의 대장군이 된 이신(李信)은 사기충천했다.자신이 진(秦)나라 제일의 장수로
인정받질 않았는가.부장 몽무(蒙武)에게 지시했다."그대는 침구(寢邱) 땅으로 향하시오.
나는 평여(平輿) 땅을 치겠소.침구는 지금의 안휘성 임천현이요, 평여는 하남성 평여현 일대다.
두 장수는 내기라도 하듯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초나라 땅을 향해 진격했다.
이신(李信)은 진왕 정(政)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단숨에 평여(平與) 땅을 함락시키고 이어 초나라의 전 도성인 진현을 점령했다.
몽무(蒙武) 또한 이에 뒤질세라 침구 땅을 몰아붙인 후 성보(城父) 땅까지 진격해나갔다.
그러고는 사람을 보내 대장 이신(李信)에게 제안했다.
- 이 곳 성보(城父)에서 합세하여 함께 수춘성을 공략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때 초(楚)나라도 변화가 많았다.애초 초고열왕이 죽었을 때 이원(李園)의 교묘한 계략으로
춘신군의 아들이자 이원의 조카가 왕위에 올랐다.그가 초유왕(楚幽王)이다.
그런데 초유왕(楚幽王)은 재위 10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여섯 살의 나이에 왕이 되었으니 16세에 죽은 것이다. 자식이 있을 리 없었다.
이때는 이원(李園)도 죽고 없었다.초나라 신하들은 종친 중 한 사람인 공자 유(猶)를 왕위에 올렸다.
그가 초애왕(楚哀王)이다.그러나 초애왕은 두 달밖에 왕의 자리에 앉지 못했다.
초애왕의 서형(庶兄)인 공자 부추(負芻)가 쿠데타를 일으켜 초애왕을 죽이고 자기가 스스로
왕위에 오른 것이었다.그가 곧 초나라 마지막 왕인 초왕 부추다.
초왕 부추(負芻) 3년에 진나라 장수 이신(李信)과 몽무(蒙武)가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 평여(平與) 땅이 함락되었습니다.- 침구(寢邱) 땅이 점령되었습니다.
연이은 패전 소식에 초왕 부추(負芻)는 급히 신하들을 모아 대책을 의논했다.
당시 초나라 장수로서 항연(項燕)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훗날 초패왕이라 불리는 항우(項羽)는 바로 그 항연의 손자다.
항연(項燕)은 병법에 능했다. 초나라 최고의 명장이다. 그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신에게 군사 20만 명을 내주시면 신이 능히 진(秦)나라 공격을 저지하겠습니다."
의논할 것도 없이 초왕 부추(負芻)는 항연을 대장으로 삼아 군사 20만 명을 내주었다.
수춘을 떠난 항연(項燕)은 일단 서릉 일대에 영채를 내리고 부장 굴정(屈定)에게 지시했다.
"이신(李信)은 필시 성보의 몽무(蒙武)와 합세하기 위해 이 곳으로 달려올 것이다."
"그대는 노대산(魯臺山) 골짜기에 숨어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적을 섬멸하라.
나는 그들이 쫒겨 달아날 때 그들의 뒤를 칠 것이다."모든 준비를 마쳤을 때 과연 진군 대장
이신(李信)은항연의 군대를 섬멸하기 위해 서릉을 향해 진격해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초군 장수 굴정(屈定)은 이신의 군대를 덮쳤다.
놀란 이신(李信)이 군사를 뒤로 물려 대열을 재정돈할 때 또 한 떼의 군마가 쳐들어왔다.
초군 대장 항연(項燕)이 이끄는 초나라 주력군이었다.결국 이신(李信))은 대패하여
명액(冥阸) 땅까지 후퇴했다.그러나 초나라 명장 항연(項燕)이 이런 그들을 내버려둘 리 없었다.
사흘 밤낮을 추격하여 명액 땅을 맹공격했다.이신(李信)은 다시 후퇴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항연(項燕)은 진나라에게 빼앗겼던 평여까지 수복하고 진군(秦軍)을
완전히 초나라 땅에서 몰아냈다.이신(李信)은 패장이 되어 함양성으로 귀환했다.
군사의 반을 잃고 돌아온 이신을 보자 진왕 정(政)은 불같이 노했다.- 우리 진(秦)나라에
패장(敗將)은 있을 수 없다!그는 이신의 모든 봉읍을 거두어들이고 그의 관직을 삭탈했다.
진왕 정(政)은 비로소 깨달았다.'노장 왕전(王翦)의 말이 옳았다.'
906편에 계속